다시 꺼내보는 명품시조 77,「보릿고개」외
신웅순(시인․평론가․중부대명예교수)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이영도의 「보릿고개」
사흘을 끓이지 않았어도 솥이야 행여 녹은 슬었겠는가. 보리누름은 해도 어이 이리 긴가.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본다.
보리누름은 보리가 누렇게 익는 철이다. 음력 4월 보리가 익기 직전의 춘궁기로 겨우내 묵은 곡식 다 먹어 초근목피로 연명한 넘기 어려운 시기이다.
누룽지라도 있는가 솥을 열어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감꽃을 주워 먹던 아이가 오죽 배가 고팠으면 빈 솥만 열어보았겠는가. 그 옛날 배고픈 어린 아이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시선이 참 따듯하다. 시인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 콘테스트에서의 최고상, 흑백 사진 한 장이다. 이 한 장으로 당시 보릿고개의 가슴 아픈 한 시절을 대변해주고 있다. 거기에는 시대와 함께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한 시대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흑백 사진 한 장, 이것이 시이다.
동백 아래 동백으로
합장하고 섰습니다
두 손에 모인 그리움에
빨간 불이 붙습니다
불현듯 툭 떨어집니다
가만 주워봅니다.
-박종대의 「동백아래」
동백 아래에서 동백을 보며 합장하고 서 있다. 두 손에 모인 그리움에 빨간 불이 붙는다. 불현듯 툭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을 줍는다.
동백에 합장했더니 동백에 불이 붙는다. 화자와 동백이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었다. 물아일체이다. 그러더니 툭 떨어진다. 선정에 들었는가. 무슨 주문이라도 외웠는가. 마술 같기도 하다. 화자는 불이 붙은 떨어진 동백을 줍는다. 아니다. 화두를 던졌다.
행간의 거리가 멀다. 멀어서 알 수 없고 설명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묘한 매력이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상상력은 이렇게도 무궁무진하다.
-다시 꺼내보는 명품시조 77,「보릿고개」외
첫댓글 지난 그 세월이 요즘 어린이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 올까 생각해 봅니다
잊혀가는 때를 생각하게 하는 시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애들에게 가끔 그런 얘기 하면 꼰대라고 합니다.
아예 입 닫고 삽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