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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김정숙 |
건조주의보 / 김정숙
허공을 걷는다
눈 뜬채로 동면중인 겨울가지는
호흡법 새로이 익혀가는 중
꼿꼿한 자세로 앉아
하늘에 마우스 갖다 대고서
아직 젖어있는 것들 향해 하나씩
삭제버튼을 누른다
결빙을 방지하기 위한 처방임.
고온다습했던 여름 날
눅눅한 불쾌지수의 화려한 수치에도
불 켜진 창을 지키던 눈물샘에도
자음과 모음이,
때론 모음 홀로 톡톡 찍어내어
시를 쓰던 파도소리에도
화살표를 보낸다
사라지는 것들이 간혹 자리매김 해달라
아우성이다
하긴, 너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숨이 턱에 닿아 할딱인다
건조주의보 발령중,
화기엄금
얼지 않을 만큼만 물을 마신다
전화기가 울린다
발신자 표시란에
북서계절풍이 불어 올 때만
통화버튼을 누를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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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 / 김정숙
다시 가거라 물 속으로
바다 떠나 오면서 꿈꾸었을 초록빛 설렘들
봄날 움트고 싶었으리
서툰 뿌리 뭍에 단단히 내리고서
꽃 한 번 피워 보리라
태양 쏟아지는 채반 위에
그림자 닮은 몸으로 누워
멀어지는 갯내음 향해 기꺼이 손짓해 주었으리
이제는 눈부신 변신을 하겠다고
속살까지 스민 비릿한 흔적들
파도 날개에 실려 보내며
탈각의 영혼으로 다시 나겠다는 부푼 기다림
품고 너 잠들었으리
아! 어이할까
문득 잠 깬 하늘 아래 해는 저물었는데
횡주(橫走)하던 꿈이었나
마른 가슴에선 짠물만 허옇게 피어 올라
더욱 뼛속 깊이 스미는 파도여 바다여
변신에의 기대는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고
회한 삼키는 소리만 바스락 바스락
온 몸으로 모서리 세운다
너 이제 가거라
날 세울수록 더욱 부서지는 네 꿈도
해체되는 시간의 뜨거운 노래도
모두 품고 다시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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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통화 중입니다 / 김정숙
이만 총총.
문이 꽝 닫히는 소리에, 헉
바람의 숨결 머물다 간
전화기가 파르르 떨린다
남은 온기 붙들고 있는 달팽이관은
휘어진 메아리를 따라 빙글빙글 돌며
저녁을 불러 모은다
꼬리 감춘 언어들이
아직 파닥이는 손바닥으로
와락 파도가 밀려온다
도무지 부패할 줄 모르는 바다여,
네가 한 때
허리 긴 강줄기였음을 나는 알고 있다
심장 어귀에 귀 대고 들어 보면
이따금 삼엽충 화석이
마디마디 꿈틀거리며 돌아 눕는 소리가 난다
돌이 되어서 수억년을 사는 법
미리미리 익히려면
꽃술 비켜서서도 견딜 수 있는 연습을 하라고
무음(無音)의 텍스트는
아득한 언어로도 생생한 강의 들려준다
잘려나갔던 삼엽충의 다리 하나가
고생대의 사립문 열고
어둠 헤집으며 뚜벅뚜벅 걸어서 바다로 간다
뚜뚜뚜뚜…….
급박한 신호음, 낯선 페이지 펼쳐 보이며
'수화기 바로 놓아 주세요'
찬바람 몰고 온다
고개 드니
사방 연속무늬의 벽으로
등대 불빛이 황급히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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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에 급커브 구간입니다 /김정숙
밤이 함몰한다
애틋한 손 휘휘 저으며
세포분열한 몸체
서둘러 꿈을 찾아 나선다
꽁무니 빼고 있던 시선 하나
새벽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어둠을 흔들고있다
툭, 하늘에게 자리 내 주고
훌훌 날아갈 수 없을까
전방에 급커브 구간입니다
스피커에서 불쑥 나타나, 위기다
주의 운행하십시오
이 고개를 넘자면
몸을 곧추세우고는 안 된다고
길이 먼저 취해 비틀거린다
돌아 나온 행보도 만만치 않은데
급커브라니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굽은 길허리를 조심스레 더듬어
누운 채로 감겨오는 하소연에 귀 기울인다
울먹거리는 소리 윙윙,
눈 더욱 낮추어야 셀린디온 노래 들린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닫아걸었던 입을 열고
어둠 뒷편을 돌아서오던 메아리에
길이 연거푸 재채기 터뜨린다
내 목이 매캐하다 열병인가!
차 바퀴가 음표를 안아 휘감기며
눈물겹게 견디고 있는 품
길 폭에 취한다
드디어 이중창의 옷을 입은 동그라미
급커브 문지방 느리게 느리게 돌아서 나간다
백미러에 보이는 길
휘어진 뒷모습이 아침햇살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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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길을 지배한다 /김정숙
보문 가는 길에 차를 세우지 않았다
눈금 고장 난 속도계
어느 정도의 무게인지도 모르고
내려간다. 아니 추락한다
가을이 추락한다
나도 아달린과 아스피린을 바꿔치기하여볼까
종횡무진 바람이 길을 지배한다
햇빛은 그저 눈살 찌푸리는 일 없이
사선으로 뒤쫒고 있다
겨드랑이 간질거리며 잠이 온다
불면의 대가만은 아닌 듯 달려간다
사상(思想)이 추락하며 곁눈으로 즐기고 있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햇살은
그리운 내님이 되기도 하고
진리가 따라 돌아간다
뒷방 노인네가 되기도 하고
가끔은 계절에도 미운털 박힌다
낙엽들이 떼 지어 우르르 우르르
세상의 힘 있는 것을 향하여
더듬이가 발달할수록 더욱 빠르게 추락한다
오늘을 견딘다는 것이 뭐 그리 두려운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나른한 오후가 허리띠 풀어제끼고
속도 속으로 뛰어든다
끝내 추락하는 법을 모르는 바람이
바삐 움직인다
11월의 날개가 펄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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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장난 /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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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초록이여
너 이제 할 말 다 했는가
들녘 출렁이던 파도
불끈불끈 함성 지르며 솟아올라
가는 곳 어디든 그늘 만들어 줄 거라던
어설픈 교만은 하늘로 무한질주 했지
뒷짐 지고 바라보던 바람
기침소리 내며 서서히 발자국 떼어 놓는데
초록이여
너 이제 준비 되었는가
옷 훌훌 벗고서
수취불명으로 반환된 편지
품속에서 꺼내 다시 소리 내어 읽을
붉은 입술 준비 되었는가
처마 끝에 그렁그렁 맺힐 하늘 빛
모아서 사모곡 간절히 부를
아,
그 장단에 현란한 춤사위로 추락하며
정오 무렵 뜨거웠던 태양 향해
고개 돌려 빛 시위어갈
각오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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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 스케치
시퍼런 저 강물
이제는 건너야 한다.
갑자기 시간이 절름거리고
속도를 잃은 바짓가랑이 사이로
바람은 청맹과니가 되어
파닥인다.
지켜보던 여름밤이 눈 동그랗게 뜨고
백열등 흔들어 댄다.
은밀하게 자라고 있던
나무 한 그루 깨워
벽 뒤에 묶어둔 길 하나 던져준다.
영문모르는 채
한쪽 다리가 맥비(脈痹)된 나무
자꾸만 현기증 난다
잠자던 자리 돌아다보지만
날 밝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걸
이내 알아차린다.
백열등이 꺼진다.
넓어진 강물 소리
어둠 속으로 튀어 오르며
서둘러라 서둘러라
등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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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스케치 / 감상: 김현철
시인의 상상력과 독자의 상상력
독한 마음먹고 시인의 뒤를 밟아 본다.
감성의 다름이 얼마에 이를 것이지 두고 보자.
시를 읽고, 다시 읽고 암호를 풀 듯
인디아나 존스가 캄캄한 절벽에 첫발을 내딛듯이
전부를 맡기는 마음으로 읽자.
이별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따라가 보자.
<시퍼런 저 강물 이제는 건너야 한다>
가자, 떠나자. 이 땅의 관념과 철학과 종교가 나의 그것들과 다르니 가자.
나의 사랑의 둘레가 너희의 그것과 크기 다르고 두께도 다르니 가자.
결별의 눈물일랑 한갓 호사(豪奢)에 불과하니 그냥 가자.
시인에게 강이란 이 땅과 저 둔덕을 가르는 엄정한 이별의 실존.
강가에 서라. 이제 떠나는 자의 발아래 시퍼렇게 출렁거리는 강물을 보며 가늠하라.
이 결별 뒤에 이어올 “세상 다름”, “가치 다름”, “사랑 다름”에 자유로이 가슴을 열 수 있는가?
이 결별 다음에 지금껏 달콤히 익숙해 왔던 이제 곧 거짓이 될 사랑과 온전히 단절할 수 있는가?
저 강물 건너면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땅.
한번도 익숙해 본 적 없는 곳으로 저 쾅쾅 물살져 흐르는 시퍼런 강물을 홀로 건너려는가?
그대의 발을 씻어주던 아름다운 사랑을 두고
저기 시퍼렇게 살아 활활 타오르듯 솟아오르는 불꽃같은 강물을 헤어갈 것인가?
손이 저려 와서 차마 놓지 못했던 아이들은?
어젯밤 화로 옆에 두고 온 읽다만 시집은 또한 어떡하며
결별의 잔치는 충분히 치렀는가?
저 강을 함께 건너 줄 사랑은 갔는가?
<갑자기 시간이 절름거리고 속도를 잃은 바짓가랑이 사이로 바람은 청맹과니가 되어
파닥인다>
이 결별의 순간에 뉘라 담담히 걸어가나?
절름거리는 다리 사이로 시간도 강물 따라 흐르고
걸음은 느려져 갈 곳 모르니 바람만 바짓가랑이를 잡고 파닥거린다.
바람의 이름은 떠남.
늘 떠나는 바람과 늘 흐르는 강물은 동형배우(同形配偶).
언젠가 시인은 꿈인가 생시인가 강물 따라 흘러갔을 터.
그때 바람이 꺼이꺼이 따라가며 부르던 사랑 노래, 길의 노래, 바람의 노래를 기억하는가?
길 떠나는 자의 꿈은 “버림“,
길 끊어진 자리에서 다시 길을 세워 떠나는 자들의 꿈은 ”버림“
길은 늘 끊어지고 길은 늘 다시 만들어지는 것.
캄캄한 절벽 속으로 휘휘 손을 내저어 새로이 길을 끄집어 내고 그 길을 가는 자.
시인은 길을 깔아두는 자.
단절의 절망을 천만번 넘고 나면
길은 천지사방으로 널려 있어
비로소 외롭지 않고
이 황홀한 절망의 방정식.
시인은 그 비밀의 해(解)를 가슴에 품고 산다.
<여름밤이 눈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다가 백열등 흔들어 댄다 은밀하게 자라고 있던 나무 한 그루 깨워 벽 뒤에 묶어둔 길하나 던져준다>
시인은 외로울 때 자신을 잠재울 줄 안다.
시인은 열쇠를 가지고 산다.
막힌 것의 막히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시인은 열쇠를 가지고 산다.
막힌 것은 늘 막혀 있지 않음을 아는 죄로 열쇠를 가지고 산다.
시인의 열쇠, 업보(業報)처럼
누군가의 울음에 누군가의 분노와 절망에 반드시 열쇠를 대고
울음의 반대말과 분노와 절망의 반대말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울지 마라.
오늘 시인은 나무 한그루, 열쇠처럼 들고 서 있다.
백열등 흔들리는 여름밤 강가에 나무 한그루 들고, 구원(救援)의 나무 한그루 뿌리 채 뽑아 들고 서 있다.
캄캄한 벽 앞에서 길을 내던 비밀한 열쇠의 솜씨로 섰다.
열쇠의 비밀, 열쇠의 슬픔. 열쇠의 닫힘.
언제부턴가 열쇠의 가슴에 소복이 쌓여가는 것들.
무엇인가를 열어두면서 옹기에 금가듯 쌓여간 것들.
시인은 열어두는 통증을 기억한다.
절망한 시인과 더불어 강을 건널 나무.
세월의 주름 가득하게 덮고 사는 나무.
<영문모르는 채 한쪽 다리가 맥비(脈痹)된 나무 자꾸만 현기증 일어 잠자던 자리 돌아다 보지만 날 밝기 전에 길 떠나야 한다는 걸 이내 알아차린다>
맥비(脈痹)라,
베풀고 다시 베풀어도 돌아서면 다시 베풀며 살아온 세월
세월의 더께에 눌려
이제는 저 시퍼런 강물이 무서워지는 나이테를 두르고
어쩌랴, 가자!
그래 왔던 것.
저 “세상 다름”, “가치 다름”, “사랑 다름”을 찾아 아픈 결별의 강을 건너는 시인을 태우고 가자.
절절히 굶주린 자 태우고 가자.
<백열등이 꺼진다 넓어진 어둠 속으로 강물 소리 튀어 오르며 서둘러라 서둘러라 등 떠민다>
불이 꺼지고 이제 마칠 때가 되었다.
그대를 위해 징이라도 울리려나.
여름밤 하늘을 울려 퍼지면서 한 사람이 떠나는 것을 축복할꺼나.
더욱 넓어진 어둠 속으로 가자고 떠미는.
아, 그 시퍼런 강물이 튀어오르며 가자고 손 내미는......
그 대 등 에 떠 메 어 져 가 고 싶 은 곳.
희망도 많으면 무거운 법이라 했지만,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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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 확장 공사
마음 길 넓히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아침부터
굴착기의 큰 손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네가 한 번만 더 양보해라
멀쩡한 길 옆구리 푹푹 찔러 대려니
그의 속인들 편할 리 없지.
어디까지 파헤쳐야 할까.
길의 심장을 겨냥한 우직한 손
자꾸만 떨린다.
흙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시간들
물구나무선 채 반환점 찾아 나서는데
불쑥 나타난 쇠꼬챙이 하나
그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고 만다.
가장 뜨거웠던 순간에 동강나야했던 아이러니를
길의 가슴 찔러대며
하소연하고 싶었던 게야.
어긋난 지면(地面) 위로
무너진 꿈들이 벌러덩 널브러져 있다.
마음 밭 넓히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제 살 깎아 함께 뒹굴어야만
겨우 각진 모서리 하나 닳아 없어지는 것을.
마지막 방어벽마저 끝내
무너뜨리라고
종일 울부짖으며 무거운 손 계속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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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시경
속을 제대로 들여다 보려면
먼저 다 비워야 한단다
까짓거 갈증 하루쯤 참아 내기가
무에 그리 어려울 게 있겠는가
이 거북한 느낌의 실체를 향해
물음표 끝에다 카메라 하나
달아 보고 싶었다
목젖은 잠시 잠재워 둬야 한다
카메라 지나갈 때
설움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이라도 토해낸다면
참 낭패거든
예리한 네 촉수에 마법의 주문을 외 줄 테니
너 잠시 돌이 되거라
감정 앞세우면 제대로 읽어 낼 수 없음이야
대체 언젯적 사랑이 다 타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길 떠나지 않고 울부짖는지
내가 내 속을 알 수 없으니
무심한 시선 하나를 빌려다
대신 물어보고 싶었던 게지
임무를 마친 카메라는 전한다
"너무 뜨거운 온도가 문제였어"
건강을 위해서는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운 사랑은
해로우니
적당히 미지근한 사랑만 나누고 살라는
처방전 한 장
무표정한 얼굴로 전하며 눈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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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꽂이 강좌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아깝다고 무작정 다 꽂았다가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거든요
가장 간절한 사연 하나만 남기고는
모두 잘라 버리세요
1주지와 2주지 사이에는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터 주고
빈 공간에다
잘려 나간 꽃들의 노래를 흐르게 하세요
침묵을 삼켜야
좋은 시(詩)가 나오듯
꽃으로 피고 싶은 언어들 잠재워야만
비로소 여백의 미까지도
수반 위에 꽂을 수 있답니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물 흐르게 하세요
마지막으로
사라진 꽃들의 향기를 불러다가
날카로운 침봉 아래로
다시 한 번
뿌리 내리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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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전압 경고
삐삐삐...,
이 전화기는 곧 꺼질 겁니다.
그러니, 아직 못한 한 마디 있거든
어서 말하도록 하세요.
그대가
전화선에 실려보낸 말없음표는
'속도 무제한'의 이 시대에
미처 '말'이 되지 못했으니
반드시 소리내어 다시 말해야 합니다.
이제 곧
단절의 벽 속에
우리들의 언어를 가두어야 하는
암흑같은 밤이 오고 있습니다
시간은 끝없이 추락하여
혼돈의 바다에 이르고
우리는 결국
'on'으로 향하는 플러그를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삐삐삐
그러니, 서두르세요
입에서 맴돌다
삼켜버렸을 한마디 풀어서
마지막 경고음에
속히 걸어 주세요
~~~~~~~~~~~~~~~~~~~~~~~~~~~~~~~~~~~~~~~~~~~~~~~~~
* 파장 / 오일장에서
참 긴 하루였다
어둠은 이제
좌판 위에서
분주하게 퉁탕거리던 하루를
돌돌 말아 접고 있다
차례를 기다리던 저 고등어 떼들에겐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까
가슴 가르는 순간
와르르 쏟아내려 했던
그들의 뜨거운 언어를
내가 잠재울 수 있을까?
아직도 파닥이는 물결의 흔적
등줄기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가던 길 접고
다시 5일간 침묵하라는,
혹은
차라리 부패하는 법을 배우라는,
추상같은 어둠의 전갈을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전해야 할까?
새벽을 헤쳐온 1톤 트럭엔
무거운 한숨소리가 먼저 실리고
속절없이
번뜩이는 고등어떼가
어둠 속으로 열심히 유영하는데
어찌되었든
참 긴 하루였다.
~~~~~~~~~~~~~~~~~~~~~~~~~~~~~~~~~~~~~~~~~~~~~~~~
* 상처
참 다행이네요
이 부위는
주름이 지는 곳이라서
나이 들 수록 상처가 숨어 버리지요.
봉합을 마무리한 환부에
반창고를 붙이며
의사는 말한다
상처치료 전문가라는 반백의 그는
어쩌면 상처 날 부위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저물 녘, 피 철철 흐르는 이마를 감싸고
그를 찾아온
'사랑'이란 면역없는 이름의 병,
그 무모한 스토리의 에필로그를
미리 읽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환부에서 흐르는 피를
세월의 흔적 지나는 길목으로 안내하는
기막힌 재주라도 있단 말인가
저 익숙한 손놀림의
정확한 박자 속에는,
반백의 머리칼 아래로 흐르는
무심한 표정뒤에는,
얼마나 많은 상처가
주름인 양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까
~~~~~~~~~~~~~~~~~~~~~~~~~~~~~~~~~~~~~~~~~~~~
* 콩나물 기르기
내다 보고 싶었다
바깥 세상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처음엔 틈 사이로 눈만 빠끔히
내밀어 볼 참이었다
하지만
생각 대로 되질 않았다
촉촉이 젖어드는 재미를
알아버린 것이다
발돋움 해 보니
조금씩 넓어지는 시야엔
두런두런 세상사는 이야기들이
날 유혹했다
기지개 켤 때 마다 쭉쭉 늘어나는 다리는
이젠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 확 저질러 버렸다
머리에 끝까지 쓰고 있던
콩이라는 이름표를 벗겨 내고
발가벗은 나신으로 겁 없이 나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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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귀가
지게 위에 아버지가
산 하나를 업고 온다
눈부신 초록이
출렁 출렁 춤을 추고
개망초꽃 무리지어
까르르 까르르 웃어 댄다
이슬 헤치며 시작한
긴 하루가
풍성한 이야기 뭉치 되어
어깨 위에서 성큼 성큼 걸어 올 때
어느 새 붉어 진 저녁 놀
이별 아프다며 애절한 눈빛 보내 오지만
산 하나 지게 위에서
묵묵히 앞만 보고 걷고 있다
가뿐 숨
미소로 뱉아 가며
등줄기 흐르는 땀과 함께
쉼 없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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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낚시
"내 꿈의 현주소를 찾아라"
나는 지금
동해의 한 모퉁이 세워 앉아
지렁이 세마리에게
지령을 내린다
너는.
평생 꿈틀거림만으로 횡주하던 너는,
동강난 몸으로도
끝까지 절규하는 법을 배운 너는,
거뜬히 해 내리라 믿는다
출전 준비를 마친 미끼는
스타트 신호를 기다리며
몸 풀기를 하고서
등대처럼 몸 빙빙 돌려가며
바다를 살핀다
가장 치열한 접전 지점이 어디였더라?
포말로 사라졌던 옛 기억들 속에서
가까스로 지도 하나 복원해 보니
아무래도 저기 같다
물 빛과 하늘 빛이 맞닿아 있는
저 물결 아래일 것 같다
휘익!
드디어 수색 작전이 시작되고
나는
미궁으로 빠질지도 모를
시선 꽂아둔 채
내내 기다리기로 하며
엉덩이 더욱 넓혀서
다시 퍼질러 앉는다
~~~~~~~~~~~~~~~~~~~~~~~~~~~~~~~~~~~~
* 밤꽃의 노래
하얀 밤 지새우고도
다함 없는 꿈 살펴 몸 속에 싣느라고
바람결에 향기 내어 흔들리는 마음
어느 다음 날 내 앞에 헤쳐야 할
무성하게 돋아나는 가시밭길
그 운명의 강 힘겹게 건너야만
비로소 열매 되어 웃을 수 있기에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곤한 잠을 뿌려 놓고 싶은
밤새 회한으로 몸부림치고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무딘 가슴이 있기도 하는지
밤 깊어 그리움 깊어진
향기의 흔적을 본다
산 굽을 돌아 나오며
뒤틀린 가지에 잎새처럼 핀 꽃은
꽃잎을 떠난 영혼의 가시밭길인가
하얗게 흔들리는 무념의 꽃인가
마침내 붉은 열매 여물어
밤알로 나란히 익어 가는 가을날
단단하게 새긴 고요
저무는 산그늘 목에 두르고
찬란했던 아픔들이 굳어
영글어진 가슴은
꽃 속에 머문 붉은 꿈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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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항에서
가방에도
외로운 뒷모습이 있다는 걸
널 보내는 이 저녁
비로소
알았다
고리없는
짧은 사랑은
가방 속에서 설움되어
입 꾹 다문 채
출렁거리며
조금씩 멀어져 가고
어둠 짙어 오는
아득한 하늘아래
나
문득
미아가 된다
~~~~~~~~~~~~~~~~~~~~~~~~~~~~~
* 섬진강
구불 구불
네 가슴 빠져 나온
삶이
늘 그랬다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고
곧장 가리라
탈탈 털고 나선
길이었는데
원심력과 구심력이
상존하는 물결 안고는
널 결코 떠날 수 없었기에
굽이굽이
주변 맴도는 노래 되어
내내
너와 함께 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