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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신학대학교 대학원 2학년에 재학중인 박**입니다.
저는 대전****교회 사랑부(**장애인부서)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1962년에 **에서 태어났지만 추방되는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 **라는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곳에서 처녀 시절까지 보냈습니다.
학교 다니는 기간에는 늘 반 학생들의 학습을 담당하는 임원으로, 학교 예술선동대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생일과 년 중 국가 명절을 맞이하여 축하공연을 다니면서 김부자를 찬양하였습니다. 아가씨 시절에도 역시 탄광 예술선전대원으로, 직장의 선동원으로 활동하면서 김부자를 찬양하면서 열심히 생활하였습니다.
24살이 되던 해, 좋은 남편을 만나 시집을 와서 아들과 딸을 낳고 나름 밥술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북한의 어려운 삶 속에서는 저에게 있어서 남편은 마음의 기둥이었고, 마음의 의지였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제가 40살이 되던 해, 저의 가정에는 큰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건강하던 남편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구역병원 원장 선생님은 의뢰서를 떼주시면서 빨리 큰 병원에 가서 확진을 받아오라고 하였습니다.
평화롭던 우리 가정은 그때부터 비상이 걸렸습니다. 증명서를 떼고 도립병원으로 가려고 하니까 기차가 없었습니다. 남동생을 역전에 주둔시켜 수시로 차 시간을 알아봤지만 역 안내에서는 기차가 어디에 정착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7일 만에야 기차가 들어왔는데 어디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삽시간에 플랫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남편 회사 청년들이 철길에 있는 자갈을 손에 들고 위협하여 사람들을 제압하고 기차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기차에 오르고 보니 기차 안 역시 알곡 장사하는 사람들과 장사 짐으로 해서 발을 옮겨놓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승무 안전원을 찾아가서 뇌물을 주고 화장실을 차지하려 하였지만 화장실에도 사람들이 꽉 차 있었습니다.
경찰의 권한으로 사람들을 화장실에서 쫓아내고 한쪽에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함경북도 종성군(러시아 린접)의 12월 말 설 명절을 며칠 앞둔 때여서 화장실도 매우 추웠습니다. 화장실 바닥은 미처 빠지지 못해 얼어붙은 대변으로 작은 산이 형성되어 있었고, 소변이 얼어붙어서 강판을 이루고 있어 맑은 정신에는 숨쉬기도 어려웠지만 우리에게는 너무 감사한 자리였습니다.
남편이 통증을 호소할 때마다 자리가 협소하여 엉덩이에 놓아야 하는 모르핀 주사를 어깨에 주사하며 한국의 거리로 본다면 대전에서 서울을 가는 것과 같은 거리를 이틀 반이 걸려서야 도착하였습니다.
도립병원의 상황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초음파 기계가 있는 병원들마다 “정전이 되었다, 기계가 고장이 났다, 의사 선생님이 사회동원을 나가서” 초음파 한번 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힘들었습니다.
초음파 하기 위하여 5번째로 찾아간 것이 **병원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다리를 붙잡고 꼭 초음파를 해달라고 애걸하고 제일 비싼 담배를 뇌물로 드리고 초음파를 하였는데 “간암”을 “간경변”이라는 오진을 내렸습니다. 기계가 오래되어서 낡았고 병원에 들어오는 전기가 충분한 전압이 다 들어오지 못하여 오진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간암을 간경변 치료를 하게 되어 우리 남편은 끝내 회복되지 못하셨습니다.
너무나 한심한 철도 형편과 도립병원의 허술함을 보면서도 그래도 인민들의 행복을 위하여 밤낮으로 일하시는 장군님의 노고를 생각하며 마음에 위안을 받았던 생각이 납니다.
남편은 두 자식(13세의 아들과 9세의 딸)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우리 가정은 현재 북한과 중국과 남한으로 디아스포라 이산가족이 된 상태입니다.
비록 우리 가정은 찢어진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하시고 반드시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리게 하실 줄 믿음으로 믿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쭉 뻗은 도로를 타고 끝없이 달려가고 달려오는 수많은 차들을 볼때와 현대적인 의료 장비를 갖춘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오늘도 신속한 이동이 불가능하고 병원의 의료설비가 온전히 갖추어지지 못하여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사람들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보지 못하고 힘없이 죽어가고 있을 북한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픕니다.
이때부터 저의 불행한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남기고 간 자식들에게 아버지 없는 설움을 주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너무 일하여 손톱 자랄 새가 없었고 돈이 되는 일은 다 하였습니다. 술을 뽑고 두부를 만들고, 가축들을 키우고, 땔 나무를 해오고, 농사를 지으며 쉴새없이 일했지만, 옥수수밥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 없는 집이라는 낙인이 찍히자, 도둑들이 휘파람을 불며, 안심하고 울타리를 넘어 들어와 가축들과 물건을 훔쳐 갔습니다.
집을 지키고 있으면 밭의 곡식을 훔쳐 가고 밭을 지키고 있으면 집의 물건들과 가축들을 훔쳐 갔습니다. 혼자 살아온 10년 기간 제일 부러웠던 것은, 먹을 것이 없는 집들이지만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 가정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가을걷이할 때 남편들이 손 달구지를 씽씽 끌고 지나갈 때면 내 팔자를 한탄하며 퍼질러 앉아 먼저 간 남편을 원망하며 한바탕 울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살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요만큼이라도 살게 해준 나라에 고맙게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나라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군사동원부 지도원에게 뢰물을 바치고, 아들을 평양에 군대 보냈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군대 나간 아들에게서 아프다는 전보와 편지를 받고 아들의 면회를 위해 떠났습니다.
한국의 거리로 본다면 부산에서 강원도까지 갈 거리를 14일이라는 시간을 열차 안에서 보내면서 갖은 고생 끝에 아들의 부대를 찾아가던 도중 평양 도로를 지나가는 평양 방어사령부 군부대 대열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 개의 중대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저는 그 몰골들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군인들의 키는 총대 길이만큼 하였고 못 먹어 삐쭉 마른 얼굴과 작은 체구는 하나같이 고난의 행군 시기 영양실조에 걸린 동네 사람들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하전사들이 한결같은 모습은 옷이 사람을 입었는지 사람이 옷을 입었는지, 아버지 옷을 아들에게 입혀놓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20대 후반 군인들의 얼굴은 40세가 된 사람들처럼 늙어보였습니다. 하사관을 제외하고 군인들의 등에는 나무 단과 삽, 곡괭이, 물통들이 지워져 있었고 한 군인이 여러 자루의 총을 메고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본 대열은 나라의 안녕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군인의 모습은커녕, 분명한 패잔병의 모습이었고 농사군의 모습이였습니다.
우리 아들의 상태는 길에서 본 군인들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싹 마른 몸은 머리뿐이었습니다. 윗옷(런닝)은 벗고 있었는데 갈비뼈는 셀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무릎 아래는 모내기 동원에서 얻은 피부병을 치료하지 못하여, 상처가 곪아서 나오는, 피와 고름으로 범벅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래도 엄마를 보는 순간 반가워서 “충성”하면서 경례를 붙이며 웃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보는 순간 기가 막혀서 아들의 손을 확 내리우며 “그 꼴에 충성은 무슨 충성이냐” 나도 모르게 울분이 올라왔습니다.
우리 아들이 아프다, 엄마를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고 저에게 전보를 보내고 편지를 보낸 것은 아프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가져오는 돈을 바라고였습니다. 군부대 생활의 훈련과 모든 어려움은 참고 견딜 수 있는데 돈이 없어서 받는 이중적 차별은 견디기가 힘들었답니다.
평양 방어사령부는 90%의 군인들은 부모나 친족의 빽으로 온 군인들이였습니다. 우리 아들은 제일 힘없는 과부의 자식이다 보니 뇌물을 상납하지 못하여 중대에서 제기되는 모든 잡다한 일과, 근무는 교대하지 못하고 계속 자기에게 집중된다고 합니다.
아들을 통해 평양 방어사령부 군부대의 생활 형편을 들으며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고기와 기름은 먹어본지 아득하고 밑반찬은 매일 같이 배추절임, 오이 절임, 무 절임뿐 이랍니다. 탈피하지 않은 밀이나 보리, 옥수수밥이 소화를 시키지 못하여 알맹이 그대로 변으로 나와서 자기를 올려다본답니다.
그나마 여름에는 두어 번 고기를 먹는 행운이 있는데 더위에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여 썩어서 변한, 처치 곤란한 고기를 내려보내 준다는 것입니다. 이 고기를 옷을 빨 듯이 물에 여러 번 빨아서 국을 끓여 주는데 기름 한 방을 뜨지 않고 고기 맛은 안 나지만 그래도 고깃국이라는 생각으로 행복하답니다.
북한의 전역을 휩쓸었던 홍역이 부대에도 퍼졌는데 우리 아들은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찬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위가 헐었다고 합니다.
우리 아들은 지금도 군부대 복무기간에 얻은 위 궤양병으로 앓고 있습니다. 늘 따뜻한 쌀밥을 밥솥에서 퍼낼 때면 딱딱하게 굳은 옥수수밥을 먹고 고통스러운 배를 그러안고 있을 아들 생각이 나서 밥이 목에 걸립니다.
북조선 당규약에는 “조선인민군은 조선로동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며, 강성 대국건설의 제일 기수이다. 조선 혁명의 승리와 인민의 행복은 위력한 선군의 총대에 의하여 담보된다. 조선인민군대는 남조선에서 미제침략자들을 소멸하고 조국을 통일하여야 할 숭고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군 복무기간에 겪은 아픔은 우리 아들 한 사람만이 겪는 아픔과 고통이 아닙니다. 평양 방어사령부 군인들만이 아닌 선군정치를 받는 100만의 남녀 젊은이들이 오늘도 이보다 더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18세부터 29세까지 10년간의 청춘 시절을 깡그리 조국에 바치고 몸에 기름기는 쏙 뺀 허약 상태에서 제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더 가슴 아픈 것은 이런 기가 막힌 삶을 우리 부모들 세대가 묵묵히 살았고, 우리 세대도, 우리 자식들도 대를 이어 가면서 불평 한마디 없이 머리 숙이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때부터 내가 그토록 믿고 살아왔던 조국에 대하여, 당과 수령에 대한 배신감이 들면서 원한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군인들에게 도둑질은 필수입니다. 도둑질할 줄 모르는 군인은 우선 입당 문제가 막히고, 본인의 미래에 발전이 막히고, 군복무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군대 지휘관들이나 하사관들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민들의 도둑은 좀도둑이며, 큰 도둑은 군인들입니다.
군인들이 분대, 소대 단위로 출동하여 옥수수 밭을 습격하면 몇백 평의 밭이 몇 분 동안에 절단 납니다.
군인들도 살아남기 위하고, 입당하여 가족들에게 떳떳하게 돌아가기 위하여 치열한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는 주변 백성들은 하루도 발편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밀수하는 국경 경비대 군인들이 있었기에 많은 탈북민들이 안전하게 탈북하여 오늘날 디아스포라 탈북민이라는 셀 수 없는 숫자를 이루어 냈고, 복음통일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군대를 양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큰일을 이루어 내도록 군인들을 키워준 공화국의 품이 감사합니다.
북한에서 살았던 50년 기간에 겪었던 가지가지의 피눈물 나는 나의 삶을 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2009년 11월 북한 정부는 화폐교환을 비밀에 붙이고 있다가 사전에 광고도 없이 화폐교환을 진행하였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백성들이 아우성이 터졌습니다.
저는 아들이 제대되면 쓰려고, 그때 돈 100만 원을 꽁꽁 묶어 도둑 맞힐 것이 우려되어 김칫독 밑을 파고 묻어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껴두었던 돈이 하루아침에 휴지가 되어버렸고 백만 원이 10만 원이 되어 내 손에 돌아왔습니다.
우리 동네는 벌집을 들쑤셔 놓은 듯하였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당시 상황이 지금도 눈에 어려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백성들의 원한과 울분을 눈으로 보면서 속아서 노예처럼 살아온 나를 발견하게 되었고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사람들이 내놓고 정부를 비난하고 욕설을 퍼붓는데도 고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이상스럽지 않았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은 “우리 인민은 참 좋은 인민입니다.”라고 좋은 인민을 두고 있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말하였습니다. 양처럼 순한 인민들은 삼백만이 굶어 죽어도 반항 한번 안 하였고,
20만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면서도 항거 한번 못하였습니다.
수많은 북한의 여성들이 중국에서 성 노리개로 팔려 다녀도 시위 한번 일으키지 않았던 인민들이 참고 버티다 못해 수천수만 명이 부모 없는 고아가 되어 이번에는 먹을 것을 찾아, 자유를 찾아 뿔뿔이 흩어져 전 세계를 누비는 비극을 빚어냈습니다.
강냉이밥이라도 마음 편히 먹고 살게 해주고, 조금의 자유라도 허용하여 준다면, 소박한 소망이라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면, 어느 누가 두만강, 압록강에 자기의 목숨을 함부로 던질 사람이 있으며, 조상들의 뼈가 묻힌 고향과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을 쉽게 결심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타향살이가 좋아 보여서 선뜻 나설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질고 순진하기만 하던 백성들이 한 많은 가슴을 안고 도망자의 길, 탈북의 길을 선택하였고, 먹이 없는 누에들처럼, 자유를 찾아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앞뒤를 가리지 않은 채 두만강, 압록강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국적이 없고 보호자도 없는 또 다른 나그네의 슬픔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을 모른다는 이유와 국적이 없고, 중국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2배의 일을 하고도 월급은 다른 로동자의 3분의 2를 받으면서도 그 어디에다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던 가엾은 타향살이 삶을 살아야만 하였습니다.
저를 돈 주고 사간 중국인 가족들의 감시와 차별, 자유 없는, 설음은 배고픔보다도 더 참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탈북을 후회하였고, 나를 낳아준 부모님들을 끝없이 원망하며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서도 살 수가 없어서 또다시 남행하는 나의 마음은 남조선이 나를 어떻게 대해줄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마중 나온 분들의 포옹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봄날의 눈석이처럼 녹아내렸습니다.
저는 저의 이 고난 속에 나를 향하신 주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입국한 주일부터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원에서 교회에 대하여 맛을 조금 보았기 때문에 교회가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을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에 별 호감은 없었지만, 호기심으로 성경을 띄엄띄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가서를 보면서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 했고, 읽는 내가 부끄러울 정도인 추잡한 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읽으며 배신감이 느껴졌고, “교회라는 것이 썩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교회에대한 관심이 없어졌고, 물건이나 돈을 준다고 할 때에만 나갔습니다.
교회에 안 나가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헌금이었습니다. 주말마다 헌금을 내야 했고, 사람들은 강요를 안 하는데도 월말에는 어김없이 십일조를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번 돈을 왜 교회에 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고 그 돈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아가서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을 표현하였다는 것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여 주셨으며, 나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생겼고 십일조가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미리미리 준비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제일 어려웠던 가정생활에서 이혼을 결심했던 때에 내 마음을 울리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소그룹 모임에서 소 집사님은 ”우리는 다 같은 죄인이다. 누가 더 죄를 짓고 덜 죄를 지은 것이 없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인간에게 첫 은혜의 선물로서 가정을 주셨다.
아내는 남편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남편을 섬겨야 한다고, 믿음 있는 사람이 믿음이 적은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는 말씀이 나의 마음에 비수처럼 박히였고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한에서 가지고 와서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저의 성품을 없애 달라는 저의 기도에 4년 만에 응답하셨고 회개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갈멜산 기도원에서 지붕이 터져나가도록 주님을 목 놓아 찾으며 대한민국을 회복시켜 달라고, 한국교회를 깨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한국의 겉모습은 부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서 소용돌이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서 교회에 대한 나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2019년 6월 말 미국한인**교회(***목사님)의 주최로 탈북민을 섬기는 **동산 14기에서 주님은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성찬식에서 “네가 나의 살을 먹는다. 네가 나의 피를 마신다.”라는 음성이 들려왔을 때 꼬꾸라져서 회개하였고, 주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 것을 약속드렸습니다. 안식기도 시간에 천국 문 앞에서 천국에 통과하여 들어가길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천국에 들어간 흰옷 입은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찬송가를 부르며 즐겁게 춤추는 모습들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세족식에서 “나라의 왕이 너의 발을 씻기고 있다. 너의 주인이 너의 발을 씻기고 있다. 너의 선생님이 너의 발을 씻기고 있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음성이 들려올 때마다 오열을 터뜨렸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보기도 시간에는 하늘에 상달된 저의 기도문을 보여주셨고, 읽고 있는 성경책에 십자가를 올려놓아 보여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주의 길을 가라”는 음성이 들려왔고 방언을 주시였습니다. 이때부터 저의 입에서는 문득,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전도자가 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기도문을 써서 파송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동산을 기억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찢기신 살을 우리가 먹고 갑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를 우리가 먹고 갑니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먹고 갑니다.
주님의 은혜를 우리가 먹고 갑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줄 믿고
모든 염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
주님의 뜻과 지상 위임 명령을 땅끝까지 전할 주의 종들이 이제 사명을 가슴, 가슴에 안고, 세상으로 내려갑니다.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은혜동산을 기억하셔서 섬겨주신 모든 손길들 위에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탈북민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사명을 감당케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동산을 체험하고 돌아와서 저는 큰 충격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닷가의 모래같이 짓밟히기만 했던 나를, 주변 사람들도 저의 존재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나를,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꿈인지 생시인지, 이 엄청난 현실을 믿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을 만난 그날의 감격은 오늘도 생생하게 이 가슴 속에 살아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먹먹해 있는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읽게 하셨습니다.
꼼짝하지 않고 죽어라 말씀을 읽던 중 에스겔 3장 5절 말씀을 주시였습니다. 굴림체로 된 금문자의 넓적한 글들이 타자기에서 튀어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중국의 시골 남자들에게 인신매매로 팔려 와 온갖 감시와 멸시와 서러움을 당하면서도 집안을 건사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희생적으로 중국에 정착하고 있는 우리 탈북민 여성들을 품고 기도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평강공주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는 첫 사역으로 ****사역을 맡겨주셨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첫걸음이기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저에게 전도자 자격으로 파송하신다고 꿈에 보여주시면서 에스겔 40장 4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 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고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 지어다 하더라”
이 말씀을 받으면서 탈북의 그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과정들을 안전하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이 나의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생명 싸개로 나를 싸 앉으시어 여기로 데리고 왔으며 내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꿈에 가수 송대관이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 주님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아왔네. 금은보화 자녀들까지 주님 것을 내 것이라∼
이런 꿈을 왜 나에게 보여주시는지 주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가 찬양하는 분들의 손에 악보가 들려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깨달아졌습니다. 출력해 가지고 간 찬송가가 **** 사역을 할 때에 탈북자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는 것을 보면서 주님의 섭리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 권사님이 준비하여 보내준 사랑의 팔랑카를 들으며 울고 있는 평강공주들에게, 저는 “절대로 외로워하지 말자.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를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전 세계의 성도들과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믿음을 가지고 두고 온 가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 ** 사역을 준비하고 3박 4일 동안에, 오고 가는 길에 안전을 지켜주시고, 예배 순서까지도 섭리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면서, 치밀하시고 실수가 없으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살벌한 경계와 환경 속에서 우리 **들을 지켜주시고 **** 교회를 활발하게 운영하시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숨어서 예배를 드려야 하고, 찬송가도 마음껏 부를 수 없는,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도 마음껏 올려 드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며 눈물로 믿음을 고백하는 ****들을 보면서, 주님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또박또박 적어 보내는 기도 제목들을 가슴에 품고 돌아오면서 끝없이 저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 땅으로 불러 주셨는가?
****사역을 경험하게 하신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밀려드는 물음 앞에서 저는 북한의 부모, 자식, 형제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유도 모른 채, 사람을 태양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열심을 다해 죽도록 당에 충성하는 형제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고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는 사명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사역을 마치고 하늘 높이 이륙한 비행기에서 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일이 이렇게 바쁘시면 나를 젊었을 때 데려다가 체계적으로 공부를 시키실 것이지 왜 지금입니까?” 이때 구름 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이 때다.”
2020년, 학교를 졸업한지 40년이 넘은 저를 일반대학도 아닌 신학대학교에 갈 것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알았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코로나 19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시기로서 학력인정 확인이 불가능하였지만, 한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사천리로 대학 준비를 마치게 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모든 분들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신학대학교 신학과 면접장에서 교수님은 머리를 가로 저으시면서, “서류는 보았는데, 북한에서 왔고 너무 나이가 많아서 젊은 학생들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실 때
“선생님, 저는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믿음과 순종’ 두 가지만 가지고 왔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됐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이렇게 저는 성령님께서 제 입술에 올려주신 A+ 대답 덕에 ****대학교에 합격하였습니다.
60세가 되는 나에게 대학 생활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제일 어려운 것은 컴퓨터였습니다. 수업을 듣고 나서는 밤새워 타자 연습을 하였고, 타자를 쳐서 과제물을 제출하는데 온 밤이 걸렸습니다. 인터넷 찾는 연습, 이클라스에 들어가는 연습, 이메일을 이용하는 등 많은 연습을 하면서 컴퓨터를 익혀 나갔습니다.
첫 줌 수업을 하던 시간은 저의 인생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에피소드 시간이었습니다.
줌 수업이라는 개념조차도 모르던 저는 너무 긴장했던 탓에 아침에 일어나는 즉시 알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컴퓨터를 연결하였습니다. 남편이 옷을 입으라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나의 몰골을 내려다보고는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조카벌 되는 어린 학생들에게 알몸을 보여주었으니 이제 학교는 어떻게 가지?”라는 불안과 낙심에 빠져서 식은땀만 났습니다.
“저의 모습이 화상으로 어디까지 나갔습니까?”라고 묻는 저의 물음에 *** 교수님은 화면에는 나온 것은 없었는데 이상한 말은 계속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화면은 닫혀 있었고 음성만 열려 있었습니다.
나같이 무식한 사람들을 위해서 본인이 클릭해야만 화면이 열리게 설계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컴퓨터를 개발한 분에게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때 너무 혼쭐이 나서 지금도 컴퓨터에 마주 앉을 때면 옷 입은 상태부터 점검합니다.
학교를 입학하면서 제일 두려웠던 것이 헬라어와 히브리어, 성서 종합시험이었습니다.
헬라어를 배울 때 손목이 아플 정도로 쓰고 또 쓰고 외우며 어려운 시험을 A+라는 높은 점수로 받았습니다. 우리 헬라어 반에 출석하고 있던 14명의 학생들 중에서 기말고사에서 30점 만점을 맞은 학생이 두 명 있었는데 제가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시험지를 나눠주시면서 “집사님, 30점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라고 하시는 교수님의 칭찬에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브리어 첫 수업 시간에는 무슨 개가 풀 뜯어 먹는다는 소린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음절이란 무엇이며, 음절 나누기, 폐음절, 개음절 등 북한과 다른 개념들을 공부하고 나서야 이해할 수가 있었고, 죽도록 암송하여 A 점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서종합시험을 준비하면서 주님께 성서 시험만은 100점을 맞고 싶다고 기도하면서 악착같이 공부하여 단번에 합격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유다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갔다면, 저는 성서 종합시험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심하고 나갔던 것 같습니다.
저는 과제물을 하거나 책을 읽다가 막히면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찾아가 배우고 이해하고 지나갔습니다. 시험장에서 젊은 학생들과 똑같이 시험 문제들을 풀어 나갈 때면 긍지와 자부심으로 뿌듯하였고,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라는 감사가 흘러나왔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사회와 경제, 사람들에게 많은 불행과 재난을 가져다주었다고 하지만, 저에게는 4차 산업의 혜택을 누려보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런 혜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한 저를 오늘까지 인도하시면서 좌절하고 절망에 빠질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와주시겠다”고 신심을 안겨주셨고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대학준비과정과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1학년까지의 기간을 통하여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면서, 나같이 다 찌그러져 세상에서 별 볼 일 없는 60대인 저에게도 주님이 계획을 갖고 계심을 알게 되었고, 믿음으로 순종한 자만이 알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체험한 신비한 응답과,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시며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은, 오늘도 시련을 헤쳐 나가는 힘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 저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불러 고쳐 쓰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 성문 입구에 있던 네 사람, 성안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던 나병 환자들을 택하시어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할 일꾼으로 쓰셨던 것처럼, 탈북민들을 통하여 복음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가실 계획을 갖고 계심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도망자라는 정체성 때문에 기죽어 어깨도 펴지 못하고 살던 제가 당당하게 신분을 밝히고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대학까지 다니면서 이렇듯 밝게, 소망을 안고 살 수 있는 것은, 우리 탈북민들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시며 내세워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임을 이 시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강원도 **** 기도원에서 있었던 북한 신학생 수련회 기도 중에서, 혀가 꼬부라지면서 선교사로 서원하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선교지에 남편과 함께 나가게 해달라고 조건부를 붙여서 서원하였습니다. 지금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져 살고 있지만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서 꼭 우리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2022년 8월 2일부터 18일까지 ****의 후원과 많은 분들의 기도와 섬김으로 탈북민 신학생들이 ***와 미국의 여러 지역인 La와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달라스와 휴스턴에 대한 선교 행전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행전 가운데 임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여기에 다 쓸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탈북민 신학생들이 미국, 멕시코 선교를 알고 계셨고 **** 과정 중에 일어날 돌발 상황을 위하여 가장 안전하고 빠른 해결책까지도 예비하셨다는 것을 여러 번의 돌발 상황들을 체험하면서 깨닫게 되었스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9절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직 북한 영혼들의 구원과 복음통일만을 기도하고 있던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를 비롯한 세계의 수십억 영혼들을 상기시켜 주셨고, 그 영혼들을 볼 수 있는 눈과 그 영혼을 품고 기도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기에 특수하게 쓰임 받을 것이라는 높은 기대만을 가지고 있던 저의 마음속에, 선교사가 되기 전에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실 때, 저의 교만에 대하여 깨닫고 회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미국 달라스의 ** 선교센터를 방문하면서 선교에 대해 부족했던 저의 인식도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선교에 대한 저의 지식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나가서 영혼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만이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다를 뿐, 어떤 형식이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선교이며, 선교에는 크고 작은 일, 귀천이 없이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중한 선교의 일꾼이라는 것을 깨닫고 알게 되었습니다.
*** 목사님 한 분을 세우시어 세계의 영혼들에게 복음화를 선포하게 하시는 것을 보았고, *** 목사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역자들이 모여들게 하시고 선교의 동역자들이 다 되어 미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왜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는지를 현장에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탈북민 신학생들이 북한에서 살아왔던 자신들의 삶에 대하여 간증했을 뿐인데도, 북한선교에 대해 초심을 잃어가고 있던 목사님들과 교회들이 북한선교에 대한 비전들을 가지고 기도자로 일어서게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하나님의 크신 비전을 이루는데 우리 탈북민 신학생들이 쓰임 받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와 받아 누린 사랑을 느낄 때, 눈물이 왈칵 나왔습니다.
멕시코와 미국을 투어하면서, 한인교회들과 한인들이 매 지역들에(특히 라스베가스의 소돔과 고모라 같은 곳에도 주의 기도자들이 있었습니다.)바위처럼 꽉 박혀있는 것을 보면서, 그 어느 나라 민족들보다도 한국인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기도의 용사들로, 봉사자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국인의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와 라스베거이스, 달라스, 휴스턴의 가는 곳마다 ****의 기도의 동역자들을 만나보면서, 그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세계에 기도로써 씨를 뿌리고 있는 TMTC의 귀한 사역에 대하여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미국 La의 감림산 기도원에서 새벽 기도 중 멕시코에서 만나본 70세가 넘는 시니어 선교사님들을 되새겨 보여주시면서 그들의 바통을 누가 넘겨받는가 하는 마음속의 음성이 들려올 때, 다음 세대를 세우는 준비가 현 교회들에게 얼마나 급박하고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는가를 가슴 따갑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달라스의 YM 선교센터의 80~90세 고령의 선교사님들과 같은 기도의 용사들이 떡 버티고 서서 우리들에게 모본을 보여주고 계시니 우리 탈북 신학생들은 더 각성하고 힘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교여행 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충성되고 헌신 된 모습으로 자원봉사하는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장로님들, 권사님들. 운전기사님들의 모습을 눈으로 사진 찍어 가슴에 간직하고 왔습니다. 선교하거나 봉사하다가 힘들때면 꺼내보면서 힘을 얻을 것 같았습니다.
영육으로 죽어가는 북한을 생각하여 볼 때 통일된 내 고향에 복음으로 하나 되게 하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하는 우리를 일군으로 준비시켜야 하는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탈북민 신학생들의 어깨에 메여진 과제가 무겁고, 우리 탈북민 신학생들이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북한선교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생각되고 우리 탈북민들이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부담스럽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통일이 이루어 지면 북한의 경제를 일으키는데 많은 자금 투자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경제를 우려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비전을 실현해 나가는데 있어서 통일이 된 북한은 세계선교의 관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제야 신학을 배우는 63세의 대학생입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저에게는 믿음과 순종의 마음뿐입니다. 대학 생활과 사랑부교회 섬김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나를 사랑하시어 죽기까지 낮아지신 주님의 성품을 배우고 작은 자 앞에서 낮아지는 마음, 겸손한 자세, 사랑을 주는 마음, 인내와 온유와 절제 등 사역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배워나가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교에 대한 이 명령은 특정한 제자들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먼저 자신이 영적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선의 영적 무기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며, 기도로써 그분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마 11:15)과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 속에는, 오늘 우리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4,000명이라는 많은 탈북자들을 통일의 마중물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의 교회들 앞에는 이들을 하나님의 복음 통일의 군사로 잘 준비시켜야 할 과제가 놓여 있습니다. 복음통일을 위해서, 세계 각국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있는 탈북민들의 안전한 정착과, 통일의 용사들을 준비하는데, 최우선적인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오늘의 교회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간증을 마치면서 수십억 세계 영혼들의 구원자 되시며, 소망이 되시는 주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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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간증을 읽으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북한 동포들의 비참한 상태는 알고 있었지만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미국에서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우리 한국 백성들이 속히 남북 통일을 이루고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과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
"훌륭한 칼로스 사역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미국과 멕시코 등을 다 탐방을 하셨다니 참으로 기적을 체험하셨네요.
그렇게 늦은 나이에도 열심히 공부하시니 참 훌륭하십니다.
주님께서 크게 귀하게 쓰시려고 ...???
고난이 큰 은혜가 되어서 더욱 충성스런 사역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