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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잔
― 원응서 (元應瑞) 형에게
황 순 원
원과 나 사이는 뭐니 뭐니 해도 술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둘이 술자리를 같이해 온 역사란 꽤 줄기차게 길다. 1940년 여름부터니까 만 33년이 넘는다. 곤 우리 둘이 사귀어 온 세월이기도 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내가 평양 경창리에서 칠성 문 밖 기림리 모래터로 이사 가서다. 우리 둘이 다 아는 어떤 사람이 새에 끼어 인사를 했는데, 그때 둘이는 이미 애 아버지가 돼 있었다.
서로의 집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단둘이 만나는 도수가 늘게 되고, 만나서는 대개 술을 마셨다. 둘이 다 소주를 좋아했다. 「술」이란 제목의 수필에서 원은, ‘내 경우로는 배갈은 도수도 지나치게 세고 냄새가 향기롭지 못한 데 반해서 막걸리는 너무 순하고 배가 부르고 (좀 건방진 소리 같지만) 좀처럼 취기가 돌지 않으나 그 술은 그 술대로 좋은 데가 있을 것이고 정종이나 위스키도 그것 나름으로 그렇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수수로 만든 순수한 소주가 지닌 맛과 향기의 맵다랄까 달다랄까 미처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짜릿하고 유니크한 데가 좋다’라고 하고 나서 우리나라 경제 상황과 기후, 전통으로 보아 우리의 국주, 즉 나라 술은 소주로 정해야 마땅하다는 걸 제언하고 있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원과 나는 처음 만나서부터 특별한 예외를 제하고는 이 소주로 일관해 왔던 것이다. 주량도 비슷했다. 둘이는 해방 전 암담한 시기에 술을 마셔 가면서 세상 돼가는 형세며 문학 얘기로 쌓여지는 불평불만을 잠시나마 삭이곤 했다.
때로는 우리 집에서 술상을 가운데 놓고 내 작품을 낭독하는 일도 있었다. 원고가 난잡해서 내가 직접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원은 그때마다 열심히 들어주곤 했다. 이를테면 원은 그 당시 발표할 길 없었던 내 작품의 유일한 독자(실은 청자)요 이해자가 돼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 햇빛을 볼지 모르는 내 작품 제작에 자극을 주었던 사람이다.
시국이 점점 긴박해지면서 시중에서 술을 구하기 힘들게 된 운데서도 우리는 가끔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그것은 원의 부친이 광산을 경영하고 있어서 집에 술이 늘 떨어지지 않은 덕분이었다. 한번은 소주 두 되에다 네 홉들이 한 병을 갖고 원과 나 외에 한 사람이 낀 셋이서 보통강 건너의 공동묘지로 가서 자리 잡은 참에 병 바닥을 내면서 주위를 꺼릴 것 없이 시국에 대한 울분을 마구 쏟아 놓았다. 적이 마음이 후련해진 우리는 주인 모르는 무덤 사이에 누워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너무나 무심하게 맑고 깨끗한 별빛이었다. 원인가 난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자 같이들 울어버리고 말았다.
드디어 일제 말기의 징용이다 뭐다 하여 배겨 날 수가 없어 원은 부친이 경영하는 광산으로, 나는 시골 고향으로 소개를 나가 둘이는 부득이 얼마 동안 헤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해방이 되자 둘이는 평양에 있는 같은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어 거의 저녁마다 술타령이었고, 그 후 원은 그냥 평양에, 나는 서울에, 서로 떨어져 있다가 동란 때 부산 피난지에서 다시 만나서는 또 매일 저녁 통음을 했다.
원은 전시 하에 생긴 조그만 신문사의 편집을 맡아 보고, 나는 피난 온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어 저녁에 만나 밖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도 으레 미진한 생각이 들어 낙동강 소주 한 되를 사들고 원의 하숙방으로 가 술을 계속하곤 했다. 내가 잡아 준 원의 하숙과 우리 가족이 세 들어 있는 어떤 집 다락방과의 거리가 2백 미터쯤밖에 상거돼(떨어져) 있지 않아 통금 사이렌이 불기 시작해야 나는 원의 방을 나와 내 다락방 쪽을 향해 마치 백 미터 육상 선수처럼 달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발을 헛디뎌 쓰러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해 고작 안주라고는 호콩과 오징어 쪼가리뿐이었건만 우리의 몸이 정말 용케 견뎌 주었던 것이다. 아마 그때의 우리에게 밀착돼 있던 커다란 비극의 응어리가 술의 독소마저도 얼씬하지 못하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원은 더구나 나와는 견줄 수 없는 깊은 마음의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가족과 함께 모여 살고 있었지만 원은 단신으로 남하했던 것이다. 그 아픔에 대해 원은 말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것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저 단 한 번 술자리에서 모성애에 대한 것이 화제에 올랐을 때 원은 자기 가족 이야기를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얘기했을 따름이었다. 모성이 갖고 있는 힘에 대면 부성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1·4 후퇴 시 월남할 때 부인이 해산한 몸이어서 함께 떠나올 수 없어 맨 위 열한 살배기 사내애만 데리고 떠나는데 집을 나와 막 큰길로 꺾일 참에 대문간에 배웅하고 섰던 애어머니가 애 이름을 부르며 ‘너는 나하고 같이 있자’ 하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버지인 자기에게는 일별의 눈길조차 주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되돌아서 어머니한테로 줄달음치더라는 것이다. 이런 가족을 남겨두고 온 원의 쓰리고 아린 심정을 어떤 말로 감히 위로할 수 있으랴. 나는 원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지금까지의 속도보다도 빨리 잔을 비우고는 그 잔을 원에게 건넨 후 어서 잔을 내고 내게 돌릴 것을 겨우 재촉했을 따름이다. 이러한 뜻에서 원은 나보다 술의 독기를 삭일 만한 요소를 훨씬 많이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환도하여 원이 새로 가정을 이루고 나서 전활 들여 놓고 내게 번호를 알려 줄 때, ‘0385야, 3·8선을 다섯 번 넘어갔다 왔단 말이야’ 한 일이 있다. 전화번호를 외우기 쉽게 하느라고 한 말일 게지만 어찌 그때까지 원의 마음이 다섯 번만 3·8선을 넘나들고 그 후엔들 어찌 다섯 번에 그쳤겠는가. 그렇다고 그것이 현재의 부인과 아들딸들에의 애정에 대한 배신은 아닌 것이다.
한때 원이 심한 노이로제에 걸린 것도, 그 원인이 부산 피난지에서 신문사를 그만두고 1·4 후퇴 때 같이 남하한 친구들과 함께 주간 『문학예술』을 간행하면서 혼자 번역물을 도맡아 하고, 환도 후에 월간으로 바뀌고 나서도 벅찬 업무량과 지나친 과로가 겹쳐서 생긴 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혼자 견뎌 내고 있는 착잡한 그의 아픔이 크게 빌미가 됐다고 여겨진다.
신고 끝에 노이로제에서 벗어난 후로, 원의 신경과민은 아주 표면화했다. 공기의 변동에 일일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특히 소음을 견디지 못해, 길가 상점 에서 흘러나오는 조잡스러운 레코드나 라디오 소리, 차도에서 들려오는 브레이크 밟는 소리에도 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는 걸 몇 번 목격했다. 그리고 전쟁이나 갱 영화의 광고 간판은 아예 쳐다보려 들지도 않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원의 낚시 취미는 무엇보다도 우선 번잡한 시가지를 벗어나 한동안이나마 신선한 자연 속에 묻혀 심신을 쉬어 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낚시의 즐거움」이라는 수필에서도 원은 말하고 있다.
봄은 봄대로 곡우를 전후해서 산란기를 맞아 신록과 더불어 겨우내 집 안에 갇혔던 울적을 향기로 씻을 수 있으니 즐겁고, 하지를 지난 무더운 여름은 여름대로 깊은 수심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강바람과 들바람을 쐬니 또 즐겁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은 푸른 하늘과 황금물결 치는 오곡의 벌판과 울긋불긋 곱게 물든 산야에서 샛바람을 맞는 마음도 즐겁지 않을 수 없다.
나는 8∼9년 전까지만 해도 꽤 여러 차례 원을 따라 몇몇 사람들과 함께 낚시를 다녀 보았지만, 원은 심신을 쉬기 위한 낚시여서 그런지 보통 낚시꾼들과는 좀 달랐다.
대개 목적지로 가논 버스 안에서는 서로 우스갯말을 하여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내다가 버스에서 내리면 상황은 급변해 버린다. 버스에서 낚시터까지 4∼5마장쯤 상거돼 있는 건 예사이고 때로는 10리를 실히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사람들은 낚시터에 다른 사람보다 한 발짝이 라도 먼저 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야단인 것이다. 메고 있는 낚시 구럭이 흔들거리지 않게끔 한 손으로 누르고는 남한테 뒤질세라 휭하니 발에 바람을 일으키며 달린다. 숫제 뜀박질 경주다. 그런데 원만은 평상시 보행 그대로다. 고기를 많이 낚는다는 데에만 관심이 쏠려 있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나는 원의 이런 태도에서 낚시꾼으로서의 격을 새삼 발견하곤 했다.
낚시터에 이르러서도 원은 별로 서두르지 않고 남들이 다 차지하고 남은 자리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몇 번 낚시질을 따라다녀도 영 초보자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 하는 내게 한 자리를 잡아준다. 그러고는 원 자신도 거기서 꽤 떨어진 곳에다 자리 잡는다.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라도 고기가 낚일 성싶으면 찌가 누구의 찐지 분간 안될 만큼 바짝 다가앉는 따위의 얌체 짓을 범하지 않는 한편, 남과 떨어져 앉음으로써 자기만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 인 것이다.
밑밥과 떡밥만 해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물고기의 후각, 시각, 미각을 자극할 만한 향료나 조미료를 섞는 조작을 하지만 원은 가게에서 파는 그대로 사용한다. 이것을 원은 자기의 연구심 부족탓이라고 웃어넘기지만, 작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 때문인 것이다.
점심때가 되면 원과 나는 한곳에 모여 도시락을 편다. 이런 때 나는 원에 대해 미안함을 금치 못한다. 나와 함께 오지 않았던들 원도 다른 사람들처럼 낚싯대에서 떠나지 않은 채 찌를 응시하면서 점심을 때워도 되지 않았을까 해서다. 그러나 원 편에서 먼저 아예 낚시를 밀쳐놓고 도시락 반찬을 안주 삼아 나와 소주잔을 주고받는다. 원이나 나나 원래 낮술을 절대 안 하다시피 하는 터이나 야외에 나와서는 그걸 깨는 것이다. 갖고 온 술을 다 마시고 나서야 밥을 먹는다.
점심 후 원과 나는 제각기 낚시 자리로 가지만 이때부터 나는 낚시질을 않는다. 실은 점심 전에도 착실하게 낚시질을 한 건 아니었다. 제법 고기들이 집 적 거려도 마찬가지다. 결국 내가 낚시질에 끌려 들어가지 못한 것은 인내심의 부족과 게으름과 무엇을 낚아낸다는 데에 도무지 흥미를 못 느끼는 성미 탓이 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원은 내게 낚시 취미를 붙여 주려고 낚시 도구 일습을 마련해 주었으니. 간 반짜리서부터 두 간, 두 간 반, 세 간짜리까지의 낚싯대와 거기 따른 낚시 주머니, 받침 대, 뜰채, 어릉, 접의자 등 하나도 빠짐없는 낚시 도구를 갖추어 주었던 것이다. 그렇건만 종내 나는 인내심을 기르지 못한 채, 게으름을 못 고치고, 천성을 돌리지 못해 원의 성의에 보답지 못하고 말았다. 아마 내가 원이 그처럼 바라던 일에 응하지 않은 것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 아닌가 한다.
점심 후엔 숫제 나는 낚싯대를 드리워 둔 대로 어디 그늘을 찾아 낮잠을 잔다. 한숨 늘어지게 자고 나서는 하는 일 없이 남들의 어획물이나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른 저녁때에 원은 고기를 많이 낚았건 적게 낚았건 낚시를 거둔다. 내가 지루해 할까 보아 그러는 것보다 원 자신이 그날의 낚시는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낚시질 갈 때는 여럿이 함께 가지만 돌아올 때는 원과 나만이 먼저 돌아오는 수가 적지 않았다.
원은 「낚시의 즐거움」 속에서, ‘어느 가난한 묵객은 시름이 있거나 무료할 땐 벼루에다 연적의 물을 부어 먹을 벅벅 갈아 거기에서 안겨 오는 향기로움으로 인생을 달랬다고 한다. 참으로 운치를 담은 경지라 하겠다. 낚싯대를 매만지는 심정도 이와 상통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낚싯대를 만지는 것은 반드시 앞으로 고기 수확에 더 큰 기대를 거는 데서가 아니라 생활의 번거로움을 잠시나마 잊고 묵연히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낚시터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마음가짐으로서도 원은 한두 번 아니게 낚시회에서 내로라는 누구누구를 제쳐 놓고 대어상이니 수량상이니 하는 것을 탄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얼마 뒤엔 이 낚시회라는 데도 참가하지 않게 됐다. 까닭인즉 낚시회에서 잘 아는 사람들의 좀 된 행동거지나 소갈머리가 보기에 민망스러워 안 됐더라는 것이다. 이미 상이 다 결정된 후에 헐레벌떡 달려와, 당신네들 시계가 어떻게 돼먹었기에 벌써 시상을 했느냐, 내 시계는 지금이 그 시각이 라고 우겨 예외로 특별상이라는 걸 타고야 만다든가, 붕어의 길이를 잴 때 이게 어디 여섯 치 두 푼이냐 세 푼이지 하고 아귀다툼을 한다든가, 수량상에 들기 위해 전차표(요즘의 버스 회수권보다 작은)만큼도 못한 잔퉁이가 반이나 되는 고기 바구니를 서슴지 않고 들이댄다든가 하는 데에 그만 질려 버렸다는 것이다.
낚시터에서 시내로 돌아와선 원과 나는 술집 에 들른다. 아까 낮에 마신 술의 해장으로 시작하여 본격적 인 음주로 발전해 버린다. 천천히 잔을 비우며 원은, 낚시질하고 돌아오다 마시는 술맛은 별미라고, 미소를 짓는다. 나는 별로 그런 걸 느끼지 못하면서도 낚시질이 원의 신경을 누그러뜨리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썩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잔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저런 몸을 하고서 어째 신경과민증을 일으킬까 하고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원의 체구는 듬직하게 건장하다. 175센티미터나 되는 키와 굵은 몸집에, 얼굴은 홍안 동자라는 별명대로 언제나 맑게 붉어 환했다. 대학 시절 농구 선수였다는 걸 넉넉히 연상시킬 만한 체격이었다.
원과 내가 알게 된 것은 이미 서로가 성인이 되고도 남은 나이였는데, 처음 만나서부터 내가 보아 온 그는, 자유를 희구하는 내면에서의 강한 열의와 옳게 사물을 판단하는 곧은 자세를 지닌 한편, 퍽이나 자상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부산 피난지에서 원은 나와 함께 그 많은 술을 마셔 가며, 민족 상잔의 비극을 도발한 자에 대한 비난, 월남 전후의 갖가지 고난, 어떻게든 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인 행위는 즉각 저지돼야 한다는 소신 등을 꽤나 열띤 심정이면서도 차분한 어조로 펴곤 했다.
이러한 원이 환도 후 노이로제를 앓고 나서 과민해진 신경을 가누기에 고심하고 있을 때 자신의 언동까지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일이 발생했다. 출판업을 시작하면서 수삼 차 수사 기관에 불려가 신원 조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북에서 원은 처음에는 교편을 잡고, 다음에는 통신사에서 영문 번역을 하다가 동란 때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마침내 가족을 남겨 둔 채 단신 남하한 것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고통 끝에 내린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원이 한두 번도 아니게 신원 조사를 받게 되면서 가뜩이나 과민해 있는 신경으로 견뎌 낼 수 없어 자신에 대한 폐쇄 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원은 내게, ‘허참, 가족을 놔두고 혼자 넘어온 게 안된 모양야, 허참’ 하고 어이없다는 듯 허참 소리를 연발하다가 자기 자신에 대한 말처럼, ‘사람이란 왜소해지려면 한없이 왜소해지게 마련이더군’ 했다. 고약한! 나는 더 할 말을 잃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좌중이 돌아가며 노래를 하게 되면, 나도 「황성 옛터」든 「두만강 푸른 물」을 되잖은 청으로나마 불러 치우건만, 원만은 무슨 노래건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남에게 자기의 노래하는 모양을 보이기 싫어서인 것이다. 어쩌다 한다는 것이 베토벤의 제9심포니의 한 소절을, ‘빰빠아바바 빰바빠아바 빰바빠아바 빠암빠바아’ 하고 양손으로 지휘하는 시늉까지 하는 것인데, 그 손놀림도 흥겨워서라기보다 이렇게밖에 감정 표출을 못하는 자신의 쑥스러움을 얼버무리는 동작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평상시 몸가짐에 헝클여짐이 없던 그라, 그리고 커다란 몸집이어서 허한 구석이 더 두드러지는 것이었다. 그만 나는 원의 처지가 새삼스러워져 측은함을 느끼곤 해야 했다.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된 직후 원의 반응은 또 사뭇 착잡했다. 월남한 사람들, 특히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이 부푼 기대에 들떠 있을 때, 원은 곤혹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산가족 찾기 운동의 원칙은 옳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기가 겪어야 할 일이 난감했던 모양이다. 가족과 헤어진 지도 어언 20여 년이 넘어 그 가족들이 여태 살아 있기나 한지, 살아 있다면 그들의 형편과 자기의 현재의 형편이 어떻게 융합을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데에 무진 고뇌와 불안을 느껴야 했으리라. ‘요즘 갑자기 머리가 더 하얘졌어’ 하고 내게 허한 웃음을 지어 보인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 어째 원만이 당해야 옳은 일일까 보냐. 나는 전에 원한테서 열한 살짜리 아들애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뭐라고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술잔만 연거푸 건네야 했다.
그 뒤로 현저히 원은 더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집의 가친이 별세했을 때 약력 읽는 걸 부탁했더니 그러마 하고는 영결식 직전에 가서 다른 사람한테 시키라는 것이었다. 이쪽에서 준비해 놓은 것을 읽기만 하면 될 것이나 그것조차 남 앞에 나서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둘은 기회만 있으면 만났다.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것이다. 만나서는 주로 내가 말하는 쪽이고 원은 듣는 편이었다. 원이 가타부타 의사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도 그는 내게 빙긋이 웃기만 하면 됐다. 굳이 밝히지 않더라도 자네만은 내 생각이 어떻다는 걸 알 거 아니냐는 웃음인 것이다. 혹은 술을 마시면서 전에 없이 원이 허황된 얘기를 할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낚시터에서 고기를 많이 낚으니까 곁의 사람이 무슨 미끼를 쓰기에 그렇게 잘 무느냐고 해 송충이를 사용한다고 했더니 뒷산에 가 송충이를 한 깡통 잡아다 미끼로 썼다는 둥, 누구는 자짜리 붕어를 끌어올려 손에 잡으려니까 와 닿는 손맛이 달라 봤더니 비늘이 모두 거꾸로 박혀 있어 기겁을 해 놓아주었다는 둥 어처구니없이 웃기는 얘길 지껄일 때는 내게 우울한 일이 있었던 날이다. 그걸 미리 알아채고 내 마음을 풀어 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삭여 갔으며 거기에서 피차 남모르는 용기를 얻곤 했는지 모른다.
원이 그런대로 자기의 의사 표시를 강하게 보여 준 것은 우리 말에 관해서가 아닌가 싶다.
얼마나 원이 우리말에 관심을 갖고 이를 아꼈는가는 그의 「그놈을 잡으려」라는 수필을 봐도 알 수 있다. 원은 젊어서부터 번역을 할 때 거기에 맞는 말을 찾기 위해 우리말 사전을 뒤적이다가 찾는 말 아닌 낯선 말이 눈에 띄면 노트에 적어 두곤 했는데 이렇게 해서 적어 둔 것이 두툼한 노트에 가득되었다. 무료할 때면 이 노트를 꺼내 가지고, ‘어허 이런 알뜰한 어휘도 있었던가, 저런 묘한 말도 있었던가’ 하고 혼자 감탄하곤 했다. 그러느라고 노트 겉장이 낡고 닳아 새것으로 씌우고 모지라진 데는 손질했다. 마치 화초를 가꾸듯 매만졌던 것이다. 이런 노트를 사변 때 다른 책들과 함께 잃어버렸다. 잃은 책들은 그때그때 사정이 닿는 대로 우선 급한 것부터 다시 사들일 수 있지만 노트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변으로부터 거의 20년(이 수필이 발표된 것은 1969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문득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그 노트다. 번역을 하다가 우리 말이 막힐 경우 더욱 그랬다.
겨울철 산림 속에 내린 눈이 쌓이고 쌓였다가 봄이 되어 낮에 볕을 받아 오후엔 건등이 녹아내리며 물이 돈다. 하지만 밤에 접어들어 다시 기온이 내려가 물이 돌던 눈의 건등은 얼음으로 변한다. 발로 밟으면 물 위의 살얼음처럼 바삭하고 껴져 내려간다. 영어로는 crust라고 한다. 이 눈 건등의 얼음진 것을 한 마디의 낱말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분명히 내 노트에는 적혀 있었다. 한 5∼6년 전 어떤 수기를 번역 하다가 이 crust가 나왔다. 아무리 생각을 해내려고 애를 쓰고 사전을 뒤적여 보았으나 허사였다. 할 수 없이 눈얼음이라고 번역했다. 말이면 다 말은 아니다. 이것은 얼토당토않은 궁여지책에서 나온 넋두리에 불과하다. 나는 얼마 전부터 하루에 단 1분씩이라도 우리말 큰사전을 샅샅이 잡아 나가기로 했다. 저 노트에 적었던 그놈을 찹기 위해서다. 그놈을 잡으려면 몇 해가 걸릴지 모르지만.
이 얼마나 무섭도록 우리말을 사랑한 증좌(참고가 될 만한 증거)며 무한한 애정의 발로인가.
어떤 자본 댈 사람이 나서 월간 문예지 『문학』을 발간했을 때 원이 온갖 심혈을 기울였던 것도 우리의 문학과 글에 대한 그의 집념의 표시였던 것이다.
언젠가는 어떤 영문학자가 번역한 글 가운데 landing을 ‘춤추는 장소’(아마 일본 사람이 이것을 오도리바[踊場]이라고 한 것을 그대로 옮긴 게 틀림없었다. 충계가 꺾이는 곳에서의 발놀림이 춤추는 듯하다 하여 일본 사람이 그렇게 가져다 붙인 것이리라)라고 한 것을 보고 원은 내게 그것에 합당한 우리말을 물어 왔다. 당장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뒤로 미루고는 나는 잊어버리고 말았었는데 며칠 후 원이 내게 전화를 걸어 ‘쉼다리’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는 게 아닌가. 잠깐 쉰다는 뜻에다 층층다리의 다리를 따다 만들어 봤다고 하면서.
원의 우리말에 대한 애정은 자기가 하고 싶은 번역이나 쓰고 싶은 글에 대해서만 부어지는 게 아니고 어떤 글을 다루거나 한결같았다. 원이 작고하기 한 1년 전부터 생활에 보탬이 될까 하여 일본역사 소설 번역을 해왔는데 그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옳게 번역을 하자니 하루 2백 자 원고지 10장도 나가지 않을 적도 있고, 잘 나가야 고작 20장 안팎이라구 했다.
만나면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 원래 약체인 나는 나대로 학교 나가는 것만으로도 고단증을 느껴 오는 터였다. 우리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생의 무게에 짓눌린 것이다. 자연 우리의 주량이 줄어 들어갔다. 2년 전만 해도 둘이 만나면 두 홉들이 소주 네댓 병은 보통 뉘곤 하던 것이 세 병으로, 두 병으로 내려가다가 나중에는 한 병을 나눠 먹고도, 오늘은 이만 하지, 할 때가 늘어 갔던 것이다. 처량하기 짝이 없었으나 뭐 반드시 양이 문제랴, 둘이 만나 속이 받아들이는 만큼 마셔 가며 즐기면 그만 아니냐. 이런 일도 원이 낚시터에서 쓰러지기 바로 전 일요일로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원과 나는 칼국수를 좋아했다. 우리 집에서 칼국수를 하게 되면 전화로 원을 오라고 하는 수가 적지 않았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은 와주었다. 그게 뭐 대단한 음식이어서 오라고 하는 게 아니고 원 쪽에서도 그걸 먹기 위해 버스로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길을 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만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날 저녁에도 우리 집에서 칼국수를 해 원이 와주었다. 원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의 맑게 붉던 빛도 많이 잃어져 있었다. 맡은 번역물이 며칠 안으로 끝나기는 한다고 했다. 출판사에서, 좀 설쳐도 좋으니 빨리 해오라는 독촉이 어찌나 심한지, 그런 일감은 다시 맡을 게 아니라는 말도 했다.
술은 닭고기 안주로 두 홉들이 소주병 하나를 둘이 마셨을 뿐이었다. 칼국수를 원은 전보다 적게 먹었다. 한 그릇 하고 더하곤 하던 것을 한 그릇도 겨워했다.
원의 맡은 일이 다음 주 내에 끝나는 대로 연락하여 시내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원은 다른 때보다 일찍 돌아갔다. 나는 다음에 만나면 안주 좋은 집으로 가 위로의 술을 나누리라 마음먹었다. 이 약속이 영원히 미결 상태로 남고 말 줄이야.
원의 하는 일이 끝났음 직한데 소식이 없어 내 편에서 전화를 걸고 싶었으나 참았다. 예정대로 일이 진척 되지 않는지도 모르는데 공연히 전화를 걸어 마음만 급하게 만들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뒤에 알고 보니 토요일에야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다음 날인 11월 4일 몇 사람과 같이 낚시질을 갔다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만 것이다.
앞뒤 얘기를 종합해 보니 토요일의 원의 거동이 암만해도 나를 피한 흔적 이 있었다. 원은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돌아오는 길에 다음 날 갈 낚시 비용의 자기 몫을 냈다 한다. 당일 내게 돼 있는 것을 미리 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낚시질을 가야 한다고 자기 자신을 묶어 놓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전부터 낚시질을 가 머리를 풀어야겠는데 일 때문에 못 간다는 말을 수차 했던 터라 이번만은 꼭 강행하겠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러고는 일단 집으로 돌
아왔다가 한 친구를 찾아가 늦저녁 때에야 돌아왔다. 그 친구는 술을 못했다. 그 친구의 말이, 특별한 용건이 있어 원이 왔던 건 아니라고 한다. 역시 나를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아무리 낚시 회비를 냈다 하더라도 내가 전화로 부르면 뿌리칠 수 없을 거고, 그래서 나와 만나면 술을 마시게 될 거고, 그러면 다음 날 낚시질을 못 가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인 것이다. 전에도 낚시질 가기로 한 전날 저녁 둘이 만나 조금만 마시고 그만둔다는 게 번번이 도를 넘겨 낚시질을 포기해 버리곤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원이 타계한 뒤 원의 부인이 내게 한 말 중에, 원은 저녁상을 받고 앉았다가도 내가 전화로 부르면 나가곤 해 뭐라고 좀 싫은 소리를 했더니, 당신 없이는 살아도 황 없이 못 살아, 했다던가. 표현이 헤프지 않은 그가 어쩌자고 내게 이토록 몹쓸 말을 남겼는지.
나는 광 속에서 낚시 도구를 찾아냈다. 원한테 받은 지 10년 넘어 되는 물건이다. 그동안 몇 번 이사를 하며 끌고 다녔지만 별 상한 데 없어 그대로 쓸 만했다.
하나하나 풀어 꺼내어 털고 닦고 했다. 원이 쓰러졌다는 낚시터를 찾아가 보려는 것이다.
나는 원이 마지막 낚시를 드리웠던 곳에 한번 가봐야 한다는 생각을 벌써부터 하고 있었고, 그동안 갈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작년 원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소위 낚시꾼들이 납회라고 해서 그해의 낚시를 접 는 시기이기도 했고 경황도 없었지만 올해 들어는 한창 여름철이 되도록 가자고 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던 걸 나는 미뤄 온 셈인데 그것은 단순히 나의 게으른 탓만은 아니었다.
원이 낚시터에서 쓰러진 날 밤, 나는 병원 응급실에서 코에다 산소 흡입기를 꽂은, 운명하기 몇 시간 전의 원의 기막힌 꼴을 내 눈으로 보았고, 관 위에 내 손으로 몇 삽의 흙을 뿌렸고, 그 뒤에 두세 번 무덤을 찾아가 보기까지 했는데도 나는 원의 죽음을 이미 확정지어진 과거의 사실로 인정 하고 싶지가 않았다.
원의 부인은 새벽에 원이 대문을 열고 나가면서 대문 잠그라고 한 말이 귀에 쟁쟁해 언제고 그 대문으로 원이 다시 들어설 것만 같다고도 하고, 뒤채 서재에서 원이 그대로 앉아 원고를 쓰고 있는 것만 같다고도 했다. 나는 전화벨 소리에 문득 저것이 원한테서 걸려 오는 거라면 하고 가슴을 울렁거리기도 하고, 어디서 전화를 걸다가 문득 내가 원의 전화번호 다이얼을 돌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손이 떨린 적도 있었다.
원의 마지막 낚시질은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최후의 자취다. 이를 내가 더 듬는다는 것은 모든 걸 과거의 사건으로 변질시켜 버리는 결과가 될 게 두려워 지금까지 미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있었던 일은 엄연히 있었던 일인 것을.
나는 낚시 구럭을 메고 시내 낚시 가게에 들러 줄과 바늘을 갈아 맨 후 떡밥과 지렁이를 사가지고 원이 마지막 낚시질을 했다는 송전 저수지를 찾아가기 위해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용인행을 탔다.
그날은 몹시 추웠다면서요? 내가 사공에게 말을 건넸다.
사공이, 네 굉장히 차가웠었죠, 한다.
서울서도 가을 날씨치고 엔간히 쌀쌀했으니 물가에서는 더했을 것이고, 더구나 아침 여덟 시경이니 꽤나 추웠을 것이다.
첫 낚시들을 던지고 나서, 같이 갔던 사람 둘이 으스스한 기분을 털기 위해 술 한 잔씩을 하기로 하고 원더러도 오라고 했으나 원은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음성이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두 잔씩인가를 들이켜고 나서 한 사람이 원한테로 걔 한 잔 하니까 몸이 풀린다고, 저리 가서 조금만 하라고 권했다. 이때 원은 파카 모자를 쓴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꼭 졸음에
겨운 사람 같았다. 얼굴을 들여다보니까 눈 감은 코끝에 콧물 방울이 매달려 있고 파카 앞자락에 젖은 얼룩이 져 있었다. 이날 아침 여섯 시 모이기로 한 처소에 원이 제일 먼저 와 있다가 나중 온 사람들에게, 세 시에 모이기로 해놓고 왜들 이제 오느냐고 장난말을 해, 동행들은 괜히 새벽 세 시에 일찍 잠이 깬 투정을 한다고 놀렸던 터라, 지금 잠 부족으로 잠깐 눈을 붙인 줄로만 여겨 졸리면 좀 눕는 게 어떠냐고 몸을 흔들었더니 반응이 달랐다. 뭐라고 웅얼거리는데 전혀 말소리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어디가 편찮으냐고 하니까 다시는 웅얼거리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 비로소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부축해 보트에 옮겨 태울 때는 발도 제대로 떼어 놓지 못했다. 또렷한 말을 했을 때에서 불과 6∼7분 됐을까 말까 한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얼마 타지도 않은 담배를 물에다 집어던졌다.
사공이 알려 주어 두 간 반짜리를 드니 피라미가 달려 나왔다. 그냥 놓아주면 또 낚시에 와 장난질을 할지 몰라 원이 하던 식대로 일단 따서 어롱에 넣는다.
원은 자기가 비대해지지 않으려는 데에는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혈압이 높다는 말을 한 적은 전혀 없었다. 요즘 1킬로 반이나 체중이 늘었다고 하기도 하고, 2킬로가 줄었다고 하기도 하고, 얼마 동안 주욱 같은 무게라고 하기도 하면서 체중에만은 신경을 썼다, 원이 돼지코기와 계란을 꺼리고 쇠고기도 기름기는 꼭꼭 빼고 먹고, 불고기 안주일 때는 안 피우던 담배를 조금씩 피우기도 하고, 그리고 오래전부터 아침 산책을 하는 것도 주로 체중 조절을 위해서 였던 것이다.
다시 두 간 반짜리에 소식이 있어 잡아 올렸더니 이번엔 서너 치 되는 구구리가 물려 나왔다. 사공이 길쭉길쭉한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는 웃음을 짓는다. 잡고기만 낚는 게 딱하다는 낯이다.
머리의 혈관이 파열되어 의식을 잃기 직전 원이 여기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다만 내게 숙제로 남는 건, 원 자신이 이곳을 자기의 죽음의 장소로 택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물론 의식하고서 그랬을 리는 없다. 의식 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작용에 의해 원은 죽음을 예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전날 나와 만나는 걸 피했던 것이다. 만나면 술을 마실 것이고, 처음에는 조금만 마신다는 게, 자네 일거리도 끝나고 했으니 오늘은 좀 듬세, 어쩌고 하면서 나는 자꾸 잔을 권했을 것이다. 두 홉들이 한 병으로 줄었던 양이 두 병, 세 병으로 는다. 아니다. 그동안 원은 원대로 나는 나대로 고달파 있던 차라 한 병만 놓고 시간이 걸린다. 별로 말도 주고받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피차, 자 힘을 내서 살아 봄세, 하는 말이 심중에서 오간다. 그러세, 그러세. 그러다가 별안간 원이 들었던 잔의 술을 엎지르면서 맥없이 잔을 떨어뜨린
다. 그런 다음 벌어질 상황. 그 상황 앞에서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지 않도록 하려고 원은 나를 피했던 것이다. 그러고서 평소 즐기던 낚시라 낚시터를 택했던 것이다.
사공이, 어서 낚시를 들어 올리지 않고 뭘 하느냐고 하여 보니 세 간짜리의 찌가 수면에 누워 있다. 낚싯대를 들어 올리려니까 끝대가 확 휘면서 줄이 핑 한다. 서서히 끌어올렸다. 희끄무레한 붕어의 자태가 물속으로 식별됐다 싶은 순간 낚싯대 잡은 손의 힘이 탁 빠져나가면서 낚시 끝의 물건이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사공이, 일곱 치는 잘 됐는데, 하고 서운해 한다.
그러나 나는 그 고기를 낚아 올리지 못한 것을 별반 아쉬워하지 않았다. 기왕 못 잡았으니 자위 하려는 심사에서가 아니다. 시초부터 나는 그랬다. 소풍 삼아 원과 같이 강이나 못이나 저수지를 갔을 따름, 낚고 못 낚고는 전연 관심 밖이었다. 애당초 나는 낚시꾼 될 자격을 못 갖고 태어난 셈이다.
더구나 이날은 원의 마지막 자취를 더듬는 김 에 원이 최후로 낚싯대를 드리웠던 자리에 앉아 나도 낚시를 한번 담가 보고자 했던 것뿐이다. 그러나 이것조차 한갓 감상에서 비롯된 것, 대체 이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나는 원이 의식을 잃고 옮겨진 병원으로부터 불과 백여 미터밖에 안 떨어진 곳에서 그날 낮 열한 시에 제자의 결혼 주례를 하고 있었고, 다음엔 오후 한 시에 사돈집 결혼식에 들렀다가 다음엔 친척집 애 백일잔치에 가 저녁에 돌아올 때는 그 병원 앞을 지나가기까지 하면서도 까마득히 몰랐던 내가 아닌가. 연락이 되지 않았으니 알지 못한 게 당연하다고 할는지 모르나, 어떤 자연스러운 이끌림에 의해 응당 그것을 감지했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창황히 낚싯대를 거두고 어롱을 털어 버리고는 사공을 재촉하여 나루터에 닿자 돈 얼마를 집어 준 뒤, 용인서 타고와 대기시켜 놓았던 택시에 올랐다. 작년 가을 원이 왔을 때는 길가 버드나무들의 낙엽이 구르고 있었을 길을, 지금은 짙푸르게 버드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길을, 원이 돌아올 때는 의식을 잃고 있었지만 나는 정신이 또렷하여, 그만큼 답답한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하며
돌아와야 했다.
마시는군,
음
두 홉들이 소주를 반 남아 비우고 나는 어지간히 누그러진 마음이 돼 있었다. 송전 저수지에서 돌아오는 참,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의 술집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이다.
낚시 구럭을 감추고 있을 건 없잖아.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며 발끝으로 낚시 구럭을 한번 건드려 보았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끔 낚시 구력을 의자 밑에 밀어 놓고 있었다. 낚시꾼도 아니면서 낚시꾼처럼 보이기가 계면쩍었던 것이다.
역시 자네 낚시질은 안 되겠더군. 모처럼 내가 보내 준 붕어도 못 낚으니 말이야.
미안하이. 근데 자넨 그날 낚실 던지고 나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하고 그 모양이 됐다면서? 모르는 소견에도 오늘은 낚시하기엔 괜찮은 날씨 같던데 그날은 어땠나? 일기 예보가 날씰 바로 맞추기나 했었나?
관상대야 언제나 그 꼴인걸.
그래도 요샌 꽤 맞추어.
반대로야 잘 맞추지. 당장 비가 죽죽 내리고 있는데도 라디오에선 관상대 발표라고 하면서 날이 맑겠다니 알쪼 아냐.
원은 관상대의 일기 예보를 유난히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아마 언젠가 관상대 일기 예보를 믿고 우비를 준비 하지 않고 낚시질을 갔다가 되게 혼난 일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원이 마지막 낚시를 간 날 일기 예부의 기온은 낮았었는지 틀렸었는지.
고갤 숙이고 마시는 버릇은 여전하군. 그 이마의 흉터가 인제 거의 몰라보게 됐는걸.
지난해, 그러니까 원이 세상을 떠난 해 정초에 나는 인당에서 오른쪽 눈썹 위로 큰 상처를 입었다. 저녁에 손님들이 와 술을 마시고 나서의 일이었는데, 대문 밖 계단 밑으로 굴러 계단 모서리에 이마를 찧은 것이었다. 손님을 배웅하러 나갔다가 그리 된 모양이나 연일 마신 술에 이날 밤 몹시 취해 있어서 전후 사정이 전혀 기억에 없었다. 병원으로 가 여섯 바늘인가를 꿰맸다. 원 세상 떠날 적까지만 해도 그 흉터 자국이 완연했었다.
근데 자넨 그때 왜 내 상처 입었단 말을 듣고 그렇게 웃어 댔지? 상처를 입은 다음다음 날 흰과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던 터라 못 나가게 된 것을 알릴 겸 사고를 말했더니 전화를 받던 원이 느닷없이 큰 소리로 웃어 제끼는 것이었다. 원에게서 과히 들어 보치 못한 큰 웃음소리였다. 사람이 다쳤다는데 그렇게 웃을 추 있어? 해도, 원은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않았던 이다.
자네가 웃은 까닭을 말하진 않았지만 난 알지. 자넨 허망감을 느꼈던 거야. 그전에는 그만두고, 부산 피 난지에서 강소주나 다름 없는 술을 그처럼 마시고도 야밤중에 백 미터 육상 선수처럼 무사히 달린 것은 그것대로, 그 후에도 아무리 술을 마시고도 단 한 번의 실수를 하지 않았던 친구가 이리 되다니 하는 말 못할 허망감이 그만 걷잡을 수 없이 그러한 커다란 웃음소리로 돼 나왔던 거지. 그 속엔 자네 자신에 대한 허망감도 그대로 곁들어 있었을걸세. 앞으로 또 내가 어떤 큰 상철 입을는지 모르지. 허지만 난 먹을 수 있는 날까지 술을 마실 거야. 근데 말이야, 자네 어쩌자고 나한테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이렇다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가 버렸지? 전에 내가 한 일에 대한 보복인가?
전에 나는 평양에서 서울로 피해 올 때 원에게 떠난다는 말을 않고 왔던 것이다. 부산 피난지에서 만나 원은 나더러 그렇게 감쪽같이 떠날 수 있느냐고 나무랐다. 환도 후에도 어떤 자리에선가 같은 말을 했다. 웬만한 일을 가지고는 두 번 되풀이해 말한 적이 없는 원이라, 그때 내 행위가 몹시 비위에 거슬리고 섭섭했던 게 분명했다. 이미 남북 왕래가 용납되지 않던 때여서 같은 직장에 있던 내가 서울로 간다는 걸 원이 미리 알고 있으면서 잠자코 있기란 힘들 거고, 또 가만있다가 나중 그게 드러나게 되어도 원의 신변에 좋지 않을 듯싶어 나는 나대로 생각해서 아무 말 않고 떠나왔노라는 설명 을 했건만.
대체 자넨 내 어떤 신변 보호를 위해 잠자코 떠난 거지? 어디 변명을 해봐.
나는 담배를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 잔을 들어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하긴 자네가 죽고 난 뒤 난 깨달은 게 있긴 해. 전에 내가 아무 말 않고 떠났다고 자네가 나무란 건, 그런 행위를 한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한 말은 아니라는 걸 말이야. 그보다는 떠나고 난 뒤 남은 쪽의 심정이 어떻다는 걸 모르느냐고 투정을 부린 거라고 말이야. 그렇더군. 이 세상에서의 사람과 사람의 사귐 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건 뒤에 남은 쪽이야. 하지만, 전에 내가 아무 말 없이 떠났었을 땐 우린 나중에 다시 만나지 않았나. 만나지 못했다 치더라도 피차 어디에 살아 있겠지 하는 희망만은 가질 수 있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래서 말일세, 난 병원에서 그냥 뇌출혈이 계속되고 있는 자네의 기막힌 꼴을 보고 복받치는 울음 속에서,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하는 소리를 수없이 주절거리면서도 맘속으로 빌었어. 잔인한 것 같지만 병신이 되더라도 살아 주기를, 반신불수가 되건 뭐가 되건 살아 있어 주기만 빌고 빌었던 거야.
나는 또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잔에다 술을 따르고 나니 병 밑에 술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그 마지막 잔은 날 주게.
원은 기벽이라고 할 만한 것을 하나 갖고 있었다. 술자리에서의 마지막 잔을 언제나 자기가 마시는 것이다. 마침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는 마지막 잔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가 남의 잔에 술을 붓다가 술이 모자라 잔이 차지 않더라도 조금 남겨서 몇 방울일망정 자기 잔에 쏟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술병을 잡고 있을 때도 마지막 잔은 병을 빼앗아다 자기 잔에 붓는 것이었다. 이 버릇은 한 1년 남짓 전부터 생긴 걸로 안다. 내가, 마지막 잔을 먹으면 뭐 어떻다는 속신이라도 있나? 하고 빈정댔더니 원은 그저, 모두들 마지막 잔을 싫어하니까, 했다. 내가 다시, 언제부터 또 다정불심이 됐노, 하고 이죽거렸더니 원은 씨익 웃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원이 타계한 뒤로 언제 어디서 술을 마시건 마지막 잔은 원을 위해 부어 주는 치기를 부려 왔다. 그런데 이날 내게 불현듯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원이 생전에 빠짐없이 마지막 잔을 마신 데에는 그의 의도가 작용돼 있었던 것이라고. 그것은 다름 아닌 운명할 때 고통 없이 죽게 해달라는 기원 같은 것이었을 거라고. 이처럼 원으로 하여금 죽을 때만이라도 고통 없이 해달라고 기원케 할 만큼 그동안 그를 둘러싸고 괴롭혀 온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잔을 달라니까.
나는 원을 괴롭혀 온 모든 것들에 대해 새삼 통분을 느끼며 병 밑의 술을 탁자 옆 허공에다 쏟아 부었다.
자, 받게!
그리고 덧붙였다.
앞으로도 내 마지막 잔은 자네에게 부어 줌세. 그리고 자넬 그토록 괴롭혀 온 모든 것들을 되새김세!
-끝-
2016년 11월 4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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