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활동하는 역사카페에서 어린학생으로부터 질문이 들어와 님들에게 성균관대의 어느 모임사이트에서 퍼온 글을 올립니다.
진지하게 읽어보십시오.
요즘은 아름다운 관광지인 제주도 곳곳이 피로 물들게 한 사건입니다.
중문해수욕장, 정방폭포, 천지연폭포등 기타 유명한 명승지 곳곳이 억울한 민초들의 피로 물들게 한 사건이니깐요..........
4.3 사건 ?
이 글은 1998년 3월 28일 성균관대에서 개최된 '제주4·3 제 5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제민일보 김종민 기자의 '"4·3진실찾기 50년"의 일부이다.
4.3 이란
'4.3'이라는 숫자들의 조합은 제주도 무장대가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세력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무장대는 단독선거·단독정부의 반대와 조국의 자주통일, 극우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에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 동안 벌어진 사건의 전개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발발 원인도 5·10단선 반대라는 현안에서부터 경찰의 '3.1절 발포사건', '고문치사 사건' 등 다양하다.
4.3을 제대로 보려면 그 당시 남한사회의 보편적 모순구조와 한민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미군정의 실책, 그리고 제주도의 저항 역사와 사회·경제적 여건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한마디로 4.3은 미군정 아래에서 우리 민족이 안고 있던 모순이 집약적으로 표출된 사건이다.
그런데 4.3을 역사적 사건이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엄청난 인명이 희생됐다는 데 있다.
사건이 진행 중일 때 한 미군보고서(1949년 4월 1일자)는 "지난 해 동안 1만4천∼1만5천 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보안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는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때이긴 하지만 6년 6개월의 전개과정 중 단지 1년간의 집계라는 점에서 전체 희생자라 할 수 없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는 지난 1994년과 1995년에 '4.3피해신고 접수처'를 개설해 희생자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14,500여명의 희생자 명단을 발표했다.
그러나 제민일보 4.3취재반의 조사 결과, 가족이 몰살했거나 유족들의 피해의식 때문에 명단에 수록되지 못한 희생자도 많았다.
희생자 숫자에 대해선 구구한 설이 있지만 대략 3만명 안팎으로 모아진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9분의 1이다. 이 글은 그 중 군·경 토벌대에 의해 불법적으로 자행된 무차별 양민학살극에 초점을 맞추었다. 실제 군·경 토벌대에게 희생된 사망자 비율은 90%에 육박한다.
4.3 항쟁의 배경
1945년의 '8.15'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해방의 기쁨과 변혁의 열기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민중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라는 중앙과 지방 수준에서의 정부를 조직해 나갔는데 이 정부는 극소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양심적 민족주의자들까지도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는 정부였다.
한편 노동자들은 일제 자본가가 도망함으로써 그 가동이 중단된 공장 및 생산설비를 접수하여 자 주적으로 관리해 나갔으며, 농민들 또한 자신들의 피와 땀이 어린 소출을 무위도식하는 지주에게 강제로 빼앗겨야 하는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등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 나가고 있었다.
한반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한국 최대의 섬, 제주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제주도의 도민은 1945 년 9월 10일, 각 마을, 직장 단위에서 자주적으로 조직되고 있던 청년대, 보안대 및 관공서, 기업 체, 학교 등의 000관리위원회', 000복구위원회' 등을 모태로 제주도 건준을 건설하였고 이와 함께 각 읍, 면, 리 단위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나갔다.
제주도 건준을 승계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후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사실상의 정부'로서 상 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실시하고 도민의 생존권과 치안의 확보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도민의 적 극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9월 7일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한 미국은 민중이 그때까지 이룩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성취물을 부인하였다.
미국은 점령 초기에 일본인에게 사유재산권까지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려다 민중의 반발에 직면하 자, 일본인 재산에 대한 일체의 소유, 지배권이 미군정청에 귀속된다고 일방적으로 공포하였다.
이후 귀속 재산의 접수, 관리, 처리 과정은 식민지 시대에 기득권을 행사했던 민족반역자와 친미 적 인사에게 반민주적인 특혜를 통하여 집중되었고 이는 결국 미국 자본의 이익과 직결되었다.
한편 미국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등의 민중 정부를 약화, 제거하기 위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기구를 시급히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은 식민통치 기구의 존속과 식민통치 관리의 계속적인 직무수행을 명령하였고, 이 결과 식민지 시대 때의 친일관료들이 통치기구로 재기용되기 시작하였다.
정통성 없는 이러한 권력을 물리력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미군은 민중의 자발적인 치안조직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기존의 친일 경찰조직을 이용함과 동시에 일본군 출신을 주축으로 한 국방경 비대를 창설하였으며,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의 극우반공청년단체의 결성을 지원, 원조하였다.
한편 제주도의 경제 사정은 1946년 들어서 심각해지고 있었다. 대일교역의 불법화 및 도 승격, 그 리고 여기에 따른 통상형태의 붕괴와 북으로부터의 원료 공급의 두절에 의한 공업 및 농업 생산 고의 감소 등의 문제에 의해 제주도의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공업 분야는 패구 공 장 이외는 거의 조업이 중지되어 있었으며, 농업생산고 역시 주식인 보리 농사가 대흉작으로 그 수확량은 8, 15전과 비교할 때 1/3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 결과 도민들은 칡뿌리와 해산물, 톳과 보릿겨를 섞어 만든 이른바 '톳밥', 돼지사료인 전분찌꺼기 등으로 연명해 나가야 했다.
이러한 때 미군정의 곡물 수집 강행은 도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얻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미국은 도민들의 생활고가 이렇게 절박함에도 매판 자본가와 지주를 육성하고, 귀환자가 반입해 온 일본 상품 유통을 불법화함과 동시에, 자국 상품을 광범위하게 살포함으로써 남한 경제를 자 국 자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 정책에 대항하여 제주도의 제주농중, 오현중, 제주중 교양과정 학생들 천 수 백 명은 1947년 2월10일 읍내 관덕정에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양과자로부터 막자"는 슬로건을 내 걸고 양과자를 절대 배격하자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미군정 중대가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3, 4백 명의 학생들은 반미 구호를 외치면서 공항 활주로에 불을 붙이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결국 미군정 중대에 의해 시위는 통제되었지만, 이후에도 양과자 반대운동은 전도 학생들에게 급 속하게 파급되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 내의 제주읍을 비롯한 각 면에서는 연 인원 약 10만 명이 참가하여 조국 의 완전한 해방의 조속한 실현을 촉구하는 대규모의 3, 1독립운동 기념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 다.
제주읍의 경우, 오전 11시 경 북국민학교에 집결한 약 3만 명의 군중은 '3. I기념 투쟁 제주도위 원회'의 주최로 "3,I혁명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는" 것을 결의하고, 이어 오후 2시 경 학교와 마을별로 나누어 가두 시위에 돌입하면서 해산하기 시 작하였다.
오후 2시 50분 경, 관덕정 앞의 도민들이 거의 해산했을 때, 한 기마 경관의 말굽에 어린 소년이 채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마 경관이 아무런 응급조치없이 유유히 경찰서 쪽으로 나아가자 흥분 한 군중들이 투석을 시작했고 이어 총소리가 터졌다.
당시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총성 직전, 관덕정 광장에 시위대가 없었고 100∼150명의 관람 군중들 만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때 한 소년이 기마 경관의 발굽에 치이는 소동에 이어진 발 포는 위협사격의 수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등뒤에 총탄을 맞았으며, 또 한 관덕정 광장 복판에 쓰러진 사람도 없었다. 미군정 경찰은 명백하게 살인을 감행한 것이다. 6 명 피살, 8명 피상.
미군정의 학살에 대응하여 제주 도민은 "싸우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는 구호 아래 각 직장에 '31공동투쟁위원회' 및 시민 사이에 '3,1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3월 10일에는 '제주도 총파 업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제주도 전역에 걸쳐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이 총파업은 3월 18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총파업 인원 40,852명, 행정기관 23개, 중등학교 13개, 초등학교 92개, 통 신기관 8개, 교통기관 7개, 금융기관 8개, 실업단체, 공장, 회사 15개 등 전도의 각 기관이 참여하 였고 심지어 경찰관까지 동조하는 등 전 도민적 차원의 반미항쟁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14일 조병옥을 지휘관으로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 단 등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하여 파업을 분쇄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미군정은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의 간부와 직장별 주동자의 검거에 나서 약 2,500명을 무더기로 검거하고 고문한 다음 이 중 25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병옥 등은 '제주도는 주민의 90% 이상이 빨 갱이"라고 악의에 찬 선전을 계속하였고, 서북 청년단원에게는 "제주도는 작은 모스크바"라고 집 중적으로 교육되었다. 더불어 미군정은 도 군정 수뇌부를 모두 강성 인물로 교체하여 탄압의 고 삐를 바짝 죄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의 사회개혁으로 경제적 , 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하여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II월 30일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반공단체였다. 따라서 이들은 공산주의라면 생리적 거부감 에 치를 떨었고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 자는 무조건 공격하였다.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의 이러한 성향을 이용, '사상이 불손한 지역' 에 이 세력을 파견하여 민중들 을 공격하는 하수인으로 삼았다. 이들은 봉급 없는 경찰 보조 기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자신들 의 생활을 위하여 갈취와 약탈, 폭행을 무수히 진행하였다.
이들은 제주 도민의 애국심을 심사한 다면서 태극기와 이승만 초상화를 강매하였고, 이에 불응하면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가 하면, 죄 없는 남자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애인에게 접근하여 석방을 핑계로 강간하는 등의 행패를 자 행하였다. 이럼으로써 다른 식구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서청단원과의 정략 결혼에 응할 수 밖에 없는 처녀들도 있었다.
미국이 지휘하는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반공단체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전도에 걸 친 총파업은 마침내 3월 18일 종식되었다. 그러나 총파업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제주 도 민을 압살하기 위한 강경책이 날로 도를 더해가자 마침내 도민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위의 수단 을 강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도민들은 또한 극우파인 제주도지사 유해진의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는 선전 공세도 동 시에 진행해 나갔다. 이러한 선전 공세는 "미군 축출", "경찰 타도", 그리고 "우익 저주"를 요구하 는 전단의 살포를 통하여 더욱 가열되어 갔다.
이에 대하여 미군정은 8.15를 기하여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였다. 미군정은 '3, 1시위사건' 이래 각지에서 발생하였던 사건의 관련자를 예비 검속하고 사상이 조금이라도 의 심되는 자는 모두 검거, 투옥하였다.
이 결과 재개된 검거 열풍을 피하기 위하여 수십 명의 도민 지도자들이 방어적인 자위수단으로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한 것을 시발로 점차 많은 수의 도 민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하기에 이르렀고, 동시에 경찰, 군에의 피난 입대와 해외 도피도 빈발하게 되었다.
한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한반도 내 시행이 불가능해지자 미국은 마침내 남쪽만의 단독선 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이를 호도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한국문 제'를 UN에 이관했다.
이에 따라 내려진 UN감시하의 남, 북한 총선거의 실시' 라는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결국 미 국이 한반도의 북쪽을 제외한 지역에 강력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여 현상유지를 모색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회주의권의 동북아시아 지역으로의 확산을 적극 저지, 봉쇄하는 방향 으로 자신의 대한반도 전략을 수정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동시에 이후 한반도의 남쪽 지 역에서는 어떠한 변혁세력도 사실상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러한 대한반도 점령정책에 대한 남한 민중의 항의와 투쟁은 '2,7구국투쟁' 등을 통하여 점차 가열되어 갔다. 미국은 이에 특히 반미투쟁의 열기가 높고, 그 투쟁경험과 역량이 풍부한 제 주 도민에 대한 집중적인 공세를 계속하였다.
이 결과 1948년 초가 되면 제주도에서는 도민들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그것에 대한 제주 도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제주 4촵3 항쟁
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김 종 민(제민일보 4촵3취재반)
1948년 11월 13일 새벽 2시께, 제주도 중산간마을인 조천면 교래리(이하 당시의 지명임)를 포위한 토벌대는 집집마다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불기운에 놀란 주민들이 황급히 집밖으로 뛰어나오자 군인들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 나왔다. 드넓은 교래리 벌판에 총성과 비명이 뒤섞였고 불바다를 이룬 마을에선 하늘과 땅이 온통 붉었다. 1백여 가호가 오순도순 살아가던 설촌 7백년의 유서깊은 마을이 하룻밤새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날 '폭도'라고하여 학살된 희생자 중 파악된 신원은 다음과 같다. 김인생의 어머니(당시 70살) 김성진(65) 김성지(63) 김성지의 아내(60) 양재원(60) 양재원의 아내(60) 김만갑((57) 양관석(여, 50) 김채화(여, 45) 김채화의 아들(5) 부자생(44) 부영숙(여, 38) 부영숙의 아들(3) 신보배(여, 25) 양남선(여, 25) 양남선의 아들들(5, 3) 고계생(여, 18) 김영자(여, 15) 고옥심(여, 14) 김순재(여, 14) 김순생(10) 김문용(9) 등이다.
이건 토벌이 아니라 무자비한 살인극이었다. 시신들 대부분은 총에 맞은 채 불에 탔고, 열네살난 한 소녀의 시신에는 대검이 찔려 있었다. 주로 노약자들인 이들의 '죄'는 재빨리 도망치지 못한 것이었다. 그날 양복천 할머니(81세)는 어린 딸과 함께 총상을 입었고 아홉 살난 아들(김문용)을 잃었다. 양 할머니는 그날을 이렇게 증언했다.
"새벽에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자 젊은이들은 황급히 피했습니다. 난 어린 아들과 딸 때문에 그냥 집에 있었어요. '설마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이겠느냐'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집에 불을 붙이는 군인들 태도가 심상치 않았어요. 무조건 '살려줍서, 살려줍서'하며 빌었어요.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습니다.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 픽 쓰러지자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 하며 내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발을 쏘았습니다. '이 새끼는 아직 안죽었네!' 하며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아들은 가슴에 총을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군인들이 가버리자 나는 우선 총맞은 아들이 불에 타지 않도록 마당으로 끌어낸 후 딸을 살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딸이 울지 않았기 때문에 딸까지 총에 맞았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지요. 그런데 등에서 아기를 내리려는데 담요가 너덜너덜해요.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왼쪽 무릎을 부숴놓은 겁니다. 두 번째 생일날 불구자가 된 딸이 벌써 쉰두살입니다."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이 국민에게 저지른 일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는 50년 전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오히려 증언자들은 "총에 죽은 사람들은 고통이 짧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까지 말한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사건발발 40주년이 되던 1988년에 출범했다. 올해로 어느덧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자료를 모았고 국내외에서 채록한 증언자만 6,000명을 넘어선다. 그간의 신문 연재를 모아 {4촵3은 말한다}(전예원)라는 제목으로 다섯권의 책을 펴냈다. 신문 연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신문 연재든 책이든, 그리고 이 글의 내용 역시 오랜기간 여러 단계의 검증을 거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아무튼 어떻게 해서 이런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으며, 50년이란 세월이 흐르도록 철저히 은폐될 수 있었을까. 지난 1997년 초 부산의 독립영화단체인 하늬영상은 4촵3의 참혹상 사례 몇가지를 모아 '레드헌트'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레드헌트'는 지난해 인권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호평을 받았고 올해 베를린영화제에도 초청받았다. 그러나 서준식 씨(인권운동사랑방 대표)는 인권영화제 때 '이적표현물'인 이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1997년 11월 5일 구속됐다. 이 영화에 출연한 할머니·할아버지들의 증언은 처절한 것이지만 제주도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비교적 평범한 내용의 수난사일 뿐이다. 그런데도 공안당국은 이를 '이적표현물'로 규정했다. 왜 역대 정권은 이 사건을 암흑 속에 묻으려 애를 쓰고 있는가.
4.3사건-뒷 배경
이승만과 계엄령
초토화작전은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이 불법적으로 선포한 계엄령을 근거로 전개됐다. 무분별한 학살극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초토화작전 때는 전도에 걸쳐 동시에 집단학살극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
4.3의 전개과정에서 계엄령만큼 제주도민들 가슴 속에 깊이 새겨진 용어도 드물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의 4.3증언 속에는 반드시 "계엄령 시절이니까…" 또는 "계엄령 때문에…"라는 말이 나온다. 그들은 심지어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도 되는 제도' 쯤으로 계엄령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증언 말미엔 '시국 탓'이라 체념하며 애써 분을 삭인다. 실제로 토벌대는 총살극을 벌이며 "계엄령은 사람 죽이는게 계엄령"이라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그때의 충격이 워낙 커서 계엄령이 선포된 11월 중순께 4.3이 발발한 것으로 생각하는 할머니들도 많다.
아무튼 취재반은 계엄령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미궁에 빠졌다. 4.3취재에서 계엄령만큼 그 실체가 불분명한 것도 드물었다. 대부분의 4.3기록이 계엄령을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언제 선포됐다가 해제됐는지, 과연 계엄령이 선포됐던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우선 선포날짜가 제각각이다. 대부분의 국내서적은 10월 8일로 기록하고 있었다. 이 날짜는 출처불명인데 언젠가 한 번 쓰여진 후 그에 대한 검증없이 새끼치듯 재생산된 듯하다. 미군보고서는 11월 17일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고 기록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계엄선포는 무근지설'이라며 부인하는 기사를 썼다가 곧 11월 21일에 계엄령이 선포됐다고 보도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즉시 공고하고 국회에 통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조차 그 진위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는 것은 당시의 혼란상을 잘 설명해 준다.
그러던중 취재반은 총무처 산하 정부문서보존소를 통해 계엄령과 관련된 두 건의 '대통령령'을 입수했다. 대통령령 제31호는 다음과 같다.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제정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을 이에 공포한다.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단기 4281년 11월 17일
국무위원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李範奭) , 국무위원 내무부장관 윤치영(尹致暎)
국무위원 외무부장관 장택상(張澤相) , 국무위원 재무부장관 김도연(金度演) ,국무위원 법무부장관 이 인(李 仁)
국무위원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 , 국무위원 농림부장관 조봉암(曺奉岩)
국무위원 상공부장관 임영신(任永信) , 국무위원 사회부장관 전진한(錢鎭漢) ,국무위원 교통부장관 허 정(許 政)
국무위원 체신부장관 윤석구(尹錫龜) , 국무위원 이윤영(李允榮)
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合圍)지경으로 정하고 본령(本令)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주둔 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전원의 친필서명이 들어간 이 문서는 1948년 11월 17일자로 계엄을 선포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계엄 해제에 관한 문서는 '대통령령 제43호'로서 "제주도지구의 계엄은 단기 4281년 12월 31일로써 이를 해지한다."고 적혀 있다. 이로써 계엄선포 날짜는 오직 미군보고서만 정확한 것으로 판정났다.
그런데 과연 당시 선포된 계엄령이 합법적이며 정당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우선 제헌헌법 제64조는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뿐이다. 당시 계엄령에 대해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제헌헌법은 분명히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했는데, 계엄 선포일은 물론 계엄 해제일까지도 '계엄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 제정 공포됐다.
계엄령이 내려졌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게 없으니 계엄사령관인 송요찬 9연대장조차도 헷갈렸다. 당시 서귀포경찰서장 등 제주경찰 고위간부직을 역임했던 김호겸 씨(82)는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계엄령은 모호했습니다. 송요찬 연대장 조차도 계엄령이 뭔지 몰랐으니까요. 하루는 홍순봉 경찰청장과 함께 있는데 송요찬이 찾아왔어요. 송요찬은 홍순봉에게 '위에서 계엄령을 내리라고 하는데 어떡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계엄령이라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고 어떻게 하라는 지침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송요찬도 답답한 노릇이었지요. 반면에 홍순봉은 일제경찰로서 만주에서 근무할 때 조선인 중에서는 최고직책을 얻을 정도로 실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홍순봉이 계엄령이니, 포고령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대신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중산간이라고 해서 무조건 죽인다는 것은 계엄령이라고 해도 안되지요. 일제 때 만주에선 그런게 있긴 했습니다. 특정지역을 설정해 무조건 발포하는 것이지요"
이로써 취재반은 이승만대통령이 '불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1997년 4월 '불법 계엄령'이 기사화되자 즉각 법제처의 반론이 나왔다. 법제처의 반론인 즉, 일본 왕의 칙령에 의해 식민지 조선에서도 시행됐던 일제의 계엄법이 바로 '4.3계엄령'의 근거라는 것이다. 요컨대 제주4.3 때의 계엄령은 그 때까지 계속 효력이 있는 일제의 계엄법에 의해 선포된 것이므로 '법적 근거없이 선포됐다'는 보도는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그동안 벌어졌던 '불법 계엄령'을 둘러싼 {4.3은 말한다} 제5권(1998년 4월 간행)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여기서는 한가지만 지적코자 한다. 제헌헌법 전문(前文)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1919년 벌어진 3.1운동의 영향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에서 그 정통성을 '계승'하고, 해방 후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일제 식민지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계엄법을 4.3계엄령의 법적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참으로 궁색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덧붙이면, 이후에 제정된 계엄법이든 법제처가 근거로 삼는 일제의 계엄법이든 '자식이 사라졌다고 부모를 죽이라'거나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마구잡이로 죽이라'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제주4.3 때 도민들은 재판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채 '즉결처형'됐다.
미군의 역할
당초 제민일보 4.3취재반은 미군의 역할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활발히 벌어진 미군정 연구 성과는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었고 취재반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그러나 4.3과 관련해서는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증언자들에게 물어보면 '그 때 미군 구경도 못했는데 웬 미군 이야기냐'고 반문했다. 그런데 그즈음 국내에 소개된 미국학자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반란]이나 1988년 동시에 나온 두편의 석사학위 논문은 취재반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주한미군사령부의 이른바 [G-2 보고서]를 인용함으로써 미국측 자료에 대한 주위를 환기시켜 주었다.
취재반은 이들 미국 자료를 입수한 순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4.3과 관련된 국내 자료는 매우 단편적인 것 뿐이었는데 이들 미군보고서는 매일 매일의 제주상황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4.3취재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이들 보고서는 결국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인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점에 유의를 해야한다. 또한 여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는 사소한 내용까지 시시콜콜하게 보고되던 것이 정작 엄청난 양민학살이 벌어졌던 초토화작전 기간의 것은 거의 누락돼 있다. 이는 미국이 보고서의 비밀해제를 선별적으로 했거나 아니면 고의로 누락시켰을 것이라 추정된다. 4.3 뿐아니라 한국현대사 연구를 위해서도 반드시 찾아내야 할 자료들이다.
미군보고서에 푹 빠져 샅샅이 훑어가던 취재반은 깜짝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4.3의 결정적 고비마다 그 배후의 정점에 미군이 있었다는 의혹을 버릴 수 없었다. 1975년에 쓰여진 존 메릴의 [제주도반란]은 최초의 4.3논문이다. 그런데 존 메릴은 미국의 책임을 애써 외면했다. 취재반은 지난 1990년과 1992년 두차례 존 메릴과 인터뷰를 가진 바 있다. 존 메릴은 4.3이 미군정 시절에 발발한 데 대해서는 미군정의 실책을 인정했지만, 대량 인명희생을 가져온 초토화작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라는 점을 들어 미국의 책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당시 주한미군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를 고려할 때 존 메릴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미군정이 끝나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9일만인 1948년 8월 24일 이승만대통령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장군과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주한미군사령관은 대한민국 국방군을 계속하여 조직, 훈련, 무장할 것을 동의하며 대한민국 국방군(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및 비상지역에 주둔하는 국립경찰 파견대를 포함함)에 대한 전면적인 작전상의 통제를 행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여전히 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취재반이 각종 미군자료를 검토한 결과, 초토화작전 당시 제주도에는 최소한 임시군사고문단(PMAG), 방첩대(CIC), 그리고 미군 59중대가 있었다. 초토화작전이 벌어지기 직전인 1948년 10월 9일자 임시군사고문단은 이렇게 보고했다.
"현재의 모든 장비와 지원, 그리고 계획된 작전은 최소한의 미군 개입으로 적절한 지휘계통을 통해서 한국인에 의해 조종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5여단은 적절한 지원에 실패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따라 미군 고문관들이 한국인 채널을 통해 즉각적 수정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된다."
'즉각적 수정조치'를 촉구하는 이 보고서가 나온지 이틀만인 10월 11일 제주도에는 5여단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신설됐다. 토벌군 사령관이 연대장 급에서 여단장 급으로 격상한 것이다. 이어 10월 17일에는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점의 통행금지를 명하면서 이를 어길 때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할 것이라는 포고가 발포됐다. 이처럼 강경토벌작전은 미군 고문관의 통제 아래 이뤄졌다.
위의 임시군사고문단의 보고서 보다 하루 앞선 10월 8일 미 6사단은 '제주해안에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을 단 잠수함이 발견됐다'고 보고했다. 이 내용은 며칠 후 국내언론에 보도됐다. 그런데 보도에는 '붉은 바탕에 별 하나 그려진 깃발'이 어느덧 '인민공화국기'로 부풀려져 있었다. 제주도 사태를 북한과 연계시킨 것이다. 이는 즉각 강경토벌전의 중요한 명분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괴잠수함 출현설도 제주도경비사령부 신설을 촉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전에도 미군보고서는 여러차례 괴선박 출현을 보고했는데, 보고 시점은 언제나 제주도 작전이 강경으로 치닫는 고비였다. 즉 괴선박 출현설이 나온 직후인 1948년 8월 25일에도 제주비상경비사령부는 '최대의 토벌전이 있으리라'고 예고했다. 그리고 이런 강경조치를 취하게 된 배경을 네가지 들었는데 "제주도 근해에 괴선박이 출현한 것"을 그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그런데 미군은 4.3이 거의 마무리될 시점인 1949년 4월 1일에야 자신들의 정보를 스스로 부인했다.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병참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 한국해군정의 지속적인 순찰과 공중 정찰 및 해안마을에 대한 경찰의 빈틈없는 방어는 외부지원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이처럼 미군자료를 보면서 황당했던 경우는 한두번이 아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미군보고서에는 초토화작전 시기가 거의 누락돼 있는데 취재반은 그런 가운데 단 3건의 보고를 발견했다. 다음은 그중 하나이다.
"1949년 2월 20일 도두리에서 76명의 반도들이 민보단에 의해 죽창에 찔려 죽었다. 사망자들 중에는 5명의 여인과 중학생 정도 나이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포함돼 있었다. 국립경찰과 군기대(한국군 헌병)가 그 작전을 감독했다. <논평> 4명의 미군사고문단 일행이 도착했을 때 38명은 이미 처형돼 있었고, 38명의 처형은 우연히 목격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군이 학살극을 우연히 목격했다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초토화작전의 근거였던 계엄령 문제만 하더라도 그 날짜를 정확히 기록한 자료는 오직 미군보고서일 뿐이며 국내자료는 모두 틀리다. 그런데 미군도 '불법적인 계엄령'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같다. 미군은 제주도에 계엄령(martial law)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여러차례 스스로의 보고서에 기록했다. 그러던 미군은 유혈사태가 어느정도 일단락된 때에 이르러서야 "계엄령이 선포된 바가 없다."는 놀라운 내용의 보고서를 남겼다.
"2월 5일 김동성 한국 공보처장은 지난 1948년 11월 17일에 선포됐던 제주도 지역에 대한 비상사태는 한달 전에 해제됐지만 그 효력에 대한 공식적인 사전 언급은 없었다고 말했다. <논평> 비상사태(the state of emergency)는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 의해 계엄령(martial law)으로 불려져 왔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계엄령은 현 한국정부에 의해 선포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군의 초토화작전 방침은 4.3발발 초기에 이미 가닥을 잡고 있었다. 4.3발발 직후 제9연대장으로서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 제주도폭동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면서 이를 거절하는 자신에게 작전수행후 미국행 알선과 10만 달러의 돈을 주겠다며 유혹했다고 밝혔다.
김익렬 연대장 시절에 9연대 정보참모였던 이윤락 씨도 "CIC 소령이 김익렬 연대장과 자신에게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敵性) 지역으로 간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다. 미 CIC 장교가 그 해 5월 김익렬 연대장에게 제안했던 초토화작전이 5개월만에 실제상황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미군은 또 악명을 떨쳤던 서북청년단과 관련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를 지원하게 된 것은 몇몇 미군 장교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스스로의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다.
미군자료를 읽다보면 우롱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미군은 보고서에서 줄곧 희생자들을 대부분 반도(叛徒)라고 표현하며 마치 교전 중에 대단한 전과를 거둔 것처럼 기록했다. 그러던 미군은 4촵3이 다 끝난 시점인 49년 5월에 가서야 "반도의 대부분은 결백하다"고 기록했다.
"남한측 정보에 의하면,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제주도에서 보안군과 반도의 손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반도 1,075명 사망; 반도 3,509명 투옥; 반도 2,065명 자수; 반도로부터 자동소총 3정, M-1소총 23정, 카빈 26정, 일제 38식총 24정, 일제 44식총 4정, 일제 99식총 105정, 권총 8정을 노획했다. 작전중에 보안군 32명 사망; 17명 부상; 기관총 2정, M-1소총 4정, 카빈 8정을 반도에게 탈취당했다. COMMENT: 보안군은 섬 안쪽 산악지대의 모든 주민들을 자동적으로 반도로서 분류한다는 점을 고려할때, 이 보고서에 언급된 [반도](rebels) 중 다수는 명백히 결백하다."
이 보고가 나온 다음날인 1949년 5월 10일 제주도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무사히 치러졌다. 만 1년전인 '5·10선거' 때 도민들이 보이코트했던 두 개의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인 것이다. 이어 5월 15일에는 마무리 토벌을 주도했던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산됨으로써 사태의 전반부가 일단락됐다.
초토화작전의 배경
이제 논의의 초점은 '왜 이승만과 미군은 초토화작전을 감행했는가'라는 문제로 모아진다.
이를 밝히기 위해선 당시의 국내정치 상황, 그리고 미·소간 냉전이 심화되던 국제정치 상황을 아울러 살펴야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사에 대한 우리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는 미미하다.
현대사 중에서도 미군정 연구는 일부 이뤄져 왔지만 정부수립 이후 시기에 대한 연구성과는 극히 드물다. 그런 가운데 1996년에 출판된 서중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의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와 박명림(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강사)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취재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아무튼 초토화작전의 단서를 찾기 위해 대학살이 벌어진 1948년 11월 중순을 전후한 국내외 상황을 도표와 같이 일지로 정리했다. '왜 그 시기에 벌어졌나'라는 문제는 사건 성격을 파악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선 단편적인 일지 내용만으로 살펴본다면, '1948년 11월 중순'은 남북에 각각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한 통일운동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둘째,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돼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기반이 크게 위협을 받았고, 여수 14연대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국내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시기이다. 논란 끝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도 이 때였다.
셋째, 미·소간 냉전이 심화되면서 양군의 철수 문제를 둘러싼 많은 논쟁이 국내외에서 벌어지던 때였다. 남한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 일부가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런 국내외 상황들이 제주4촵3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급기야 초토화작전까지 벌어지게 됐는가.
47. 3. 12 '트루먼 독트린' 계기로 미소 냉전 시작
48. 8. 15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미군정 폐지
48. 8. 24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 체결. 이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계속 미군에 귀속
48. 8. 26 임시군사고문단(PMAG) 설치
48. 9. 9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48. 9. 15 김구 김규식, 유엔총회에 전한국 총선을 요구하는 서신. 주한미군 비밀리에 철수 시작함
48. 9. 19 소련, 연말까지 북한주둔군 철수할 것임을 발표
48. 9. 22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48. 10. 8 제주해안 잠수함 출현설 유포 ,이승만, 미군철수 연기요구
48. 10. 9 미 고문관, 제주작전에 미군의 효율적 개입을 촉구
48. 10. 11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48. 10. 13 외군철퇴 긴급동의안 제출
48. 10. 17 9연대장 포고령 발포
48. 10. 19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48. 11. 2 대구 6연대 반란사건
48. 11. 중순 초토화작전 개시. 중산간 방화와 무차별 학살극
48. 11. 12 미국 특사 무초, 남한 혼란을 이유로 미군철수 연기 요청
48. 11. 17 [비상사태] 선포
48. 11. 19 국회, 미군 계속주둔 요구 결의안 통과
48. 11. 20 국가보안법 국회 통과
48. 12. 12 유엔, 한국정부 승인하면서 미소양군 조속 철수 촉구
48. 12. 17 미 국무성, 미대통령에게 주한미군 철수 연기 요청
48. 12. 25 소련, 북한주둔 소련군 철수 완료했음을 발표
48. 12. 29 2연대 제주 주둔
49. 3. 2 제주도전투사령부 설치
49. 3. 23 주한미군철수, 6월말로 연기
49. 5. 10 국회의원 재선거 실시
49. 5. 15 제주도전투사령부 해산
49. 6. 6 반민특위 습격사건
49. 6. 21 국회프락치사건 발생
49. 6. 26 김구, 안두희에게 암살
49. 6. 30 주한미군 철수 완료(군사고문단 5백명 잔류)
이승만의 위기
우선 군통수권자로서 '불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하면서까지 초토화작전을 감행한 이승만을 중심으로 국내 정치상황을 살펴보자.
학계의 연구성과를 종합해 보면, 한동안 이승만의 처지는 '정치적 위기'로 집약해 표현할 수 있다. 위기는 정부수립 전부터 시작됐다.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놓고 지배세력 간에 이권다툼 성격의 갈등이 빚어진 것이었다. 이승만은 권력 분점을 위해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한민당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내각 발표 때 한민당이 철저히 소외되자 양자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이에 앞서 국회는 이승만의 첫 국무총리 지명자를 거부했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 앞에 닥친 문제는 산적했다. 반대세력을 물리쳐 정권을 안정시키는 일이 시급했고, 유엔으로부터 국가 승인을 받아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도 큰 과제였다. 이를 위해선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원조가 절실했다. 또한 정국의 핵심쟁점으로 떠오른 친일파문제, 통일문제도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러나 모든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국회 내에서도 이승만은 열세였다.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은 이승만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친일파를 처단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것은 시대적 과제였다. 그러나 친일파는 해방후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이미 경찰과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비호했다.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에게 친일파는 가장 큰 정치적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군정이 일제경찰을 옹호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러나 국회 본회의장에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라는 협박장이 살포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1948년 9월 1일 마침내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에 따라 '반민특위'가 구성됐다. 이승만으로서는 한민당과도 결별한 마당에 정치기반인 친일파를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생명과 관련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부수립 후 다시 분출한 통일논의도 이승만에겐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1948년 9월 15일 김구와 김규식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전한국 총선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10월 13일에는 소장파의원을 중심으로한 47명의 의원이 '외군철퇴 긴급동의안'을 제출했다. 또 9월 15일 미군 일부가 비밀리에 철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한미군 철수는 피할 수 없는 대세였다. 이승만에게는 통일논의나 주한미군 철수 모두가 국가의 정당성, 존립 등과 관련된 심각한 현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이승만이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소위 '여순사건'이 터졌다(10월 19일 발발). 미군의 진두지휘로 10월 27일 여수가 탈환됨에 따라 사태는 8일만에 마무리됐다. 이승만에게 여순사건은 위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반대세력을 일거에 쓰러뜨릴 기회였다.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면 사태를 사실대로 보고하거나 축소해야 할 터인데 이승만 정권은 오히려 사태를 과장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항간에는 백범 김구가 여순사건의 배후라는 낭설까지 떠돌았다. 이승만에게 여순사건은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최대의 정적인 김구까지도 궁지에 몰아넣을 '호재'였던 것이다. }
이미 해방정국에서도 보여줬듯이 이승만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세우는 최대 이슈는 '반공'이었다. 군 내부에 숙군 선풍이 불었다. 11월 2일에는 대구6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숙군의 속도와 강도를 높여줬을 뿐이다.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12월 1일 공포). 전날인 11월 19일 국회는 주한미군 계속주둔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정치권은 '친일파 정국', '통일 정국'에서 급속히 '반공 정국'으로 변했다. 국가보안법의 경우 '일제 치안유지법의 재판이다', '이 법률을 발표하고 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등 소장파 의원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피를 한 포기 뽑다 보면 나락이 다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피를 안 뽑을 수 있느냐'는 살벌한 논리에 밀렸다.
국가보안법이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이 법에 의한 첫 상징적 희생양은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소위 '국회프락치사건'에 걸려든 것이다. 조작임이 밝혀지고 있는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바로 반민법 제정과 반민특위 활동에 앞장섰고 국가보안법을 반대했던 의원들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경찰에 의한 반민특위 피습사건, 김구 암살사건과 함께 모두 1949년 6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이승만은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비로소 권력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미군철수는 바로 이런 일들이 있고 난 직후인 1949년 6월말 완료됐다.
이상 제주에서 초토화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1948년 11월 중순을 전후한 국내 정치상황을 살펴봤다. 그러면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왜 이승만은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이라는 잔혹한 학살극을 벌였으며, 하필 '1948년 11월 중순'이라는 시기를 택했을까.
우선 초토화작전의 배경으로 여순사건이 거론된다. 여순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제주에서 강경진압을 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이 시기 제주사건과 관련한 신문보도 내용을 보면, "폭도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다."는 10월의 상황보고와는 달리 여순사건이 끝난 후인 11월초에 접어들면 오히려 "반란은 완전 종식됐다."고 큰소리쳤다.
실제로 초토화작전이 벌어지기 전에도 토벌대는 노약자나 부녀자 등 저항조차 못하는 비무장 일반주민을 총살하기 일쑤였다. 실정이 이럴진대, 왜 11월 중순부터 더욱 가혹한 학살극을 벌였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이승만이 여순사건을 구실로 여러 난제를 '정면돌파'해 정치적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여순사건이 초토화작전의 한 배경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는 미군철수 문제와 관련해 초토화작전의 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이승만은 미군이 한국군의 지휘권을 갖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군대 육성에 소홀히 한다고 불만을 품었다.
주한미군 철수를 지연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이승만은 11월 초 5만 병력의 훈련과 장비지급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국군'이란 명칭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약속했던 군사·경제 원조도 지지부진 했다. 더구나 그 당시 미국의 방침은 12월 말까지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미군이 철수할 때를 대비, 그 전에 빨리 제주상황을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세번째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유엔의 정부 승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지위는 여전히 불안했고, 유엔총회 회기 중에 정부가 승인을 받을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승만은 혹시나 정통성 문제를 야기시킬지도 모를 국내문제, 특히 총선을 보이코트했던 제주도사태를 시급히 처리하려는 조급함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제주도가 언론이 통제된 고립무원의 섬이라는 점도 꺼리낌없이 무차별 학살을 하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이란 존재와 국내정세만을 놓고 초토화작전의 배경을 따지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미흡하다.
미군철수
'제주4.3' 때 벌어진 초토화작전과 미국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48년 8월 24일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전적으로 미군이 갖고 있었다. 또한 미군은 제주에서 벌어졌던 학살극의 현장에 있었고 배후의 정점에서 작전에 개입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미군과 초토화작전을 불가분의 관계로 묶는다.
박명림은 그의 석사학위논문 [제주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에서 미군이 초토화작전에 개입하게된 이유로 '상황론'과 '음모론'을 아울러 제시했다.
'상황론'은 당시 정황에 근거한다. 즉 "철수에 앞서 친미반공기지를 구축한다는 미군의 점령목표가 여순사건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고, 제주도 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전율할 학살극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음모론'의 요지는 "미군은 대공투쟁의 전초기지로서 제주도에서 '고도로 의도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박명림은 그 근거로 4.3초기 무장대와 경비대간의 '4·28 평화협상'이 미군정 경찰의 방해로 무산된 점과 1949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 미군이 그리스민주주의군대의 온건한 정전협상 제의를 거부하고 초토화전술을 구사한 것과의 유사성을 들었다. 일각에서는 "4.3봉기는 오히려 미제국주의가 먼저 민중을 유도하여 민중이 일어나면 되받아치는 작전으로서 계획적이요 의도적인 하나의 민중공격작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음모론의 경우 구체적 근거와 더욱 심화된 연구성과로 뒷받침되지 않는 한 아직은 '주장' 단계로 보인다.
아무튼 왜 미군은 초토화작전을 감행했을까. 취재반은 철수를 앞두고 있던 당시 주한미군의 처지에서 그 단서를 찾기로 했다. 그 무렵 소련은 유엔의 결의에 따라 1948년 말까지 북한에 주둔한 모든 소련군을 철수시키겠다면서 남한 주둔 미군도 이에 상응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소련의 공세가 아니더라도 미국 역시 연말까지 주한미군을 철수키로 방침을 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워싱턴 최고위급의 대한정책에서 내내 논쟁거리였다. 미군철수를 둘러싼 미국 내의 논쟁은 '왜 미군이 초토화작전을 감행했는가'라는 의문에 하나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그러면 우선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추이를 학계의 연구를 바탕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자.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의 세계전략은 1947년 3월 12일 발표된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을 계기로 큰 전환점을 맞는다. 사회주의 봉쇄정책을 천명한 트루만 독트린은 전쟁 종식 후 급속히 진행된 동원해제와 전쟁경제 해체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미소 냉전'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됐다. 냉전이 시작될 때 오히려 미군철수가 추진됐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이는데, 이는 미국의 소련봉쇄정책이 유럽에 한정됐고 한반도는 부차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런데 곧 주한미군 장기 주둔을 주장하는 국무성과 조기 철수를 주장하는 군부(국방성, 육군성 등) 간에 지루한 논쟁이 시작됐다. 국무성은 이데올로기 격전장으로서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소 대결에서 패배해 한반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위신문제였다. 따라서 미군의 장기주둔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군부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또 2차대전 동원체제 해제로 인한 병력감소와 군비삭감으로 더 이상 주한미군을 주둔시킬 수 없다고 강력 주장했다.
이런 논쟁 속에서도 대한정책의 핵심은 남한에 '공산주의 방벽'을 구축해야 한다는 과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철수해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있었다.
결국 국무성과 군부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안보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에서 의견절충을 벌인 끝에 양자간 타협안으로서 대한정책의 최종지침서 격인 'NSC-8'과 'NSC-8/2'가 발표된다.
미군철수 일지는 다음과 같다.
△1948년 4월 8일=미 대통령, 'NSC-8'을 승인함에 따라 1948년 12월 말까지 미군을 철수키로 잠정 결정
△1948년 9월 15일=주한미군, 비밀리에 철수 시작
△1948년 9월 19일=소련, UN결의에 따라 북한주둔 소련군을 연말까지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
△1948년 11월 12일=미국 특사 무초, 여순사건을 계기로 남한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면서 미군철수를 연기토록 요청
△1948년 12월 12일=UN총회, 대한민국을 승인하면서 미·소 양군의 조속한 철수를 요구
△1948년 12월 17일=국무성, 12월 말까지 주한미군을 철수키로 결정한 'NSC-8'을 재고해 줄 것을 요청
△1948년 12월 25일=소련, 북한 주둔군을 완전 철수했다고 발표
△1949년 3월 23일=미 대통령, 주한미군 철수를 1949년 6월 말까지 연기한 대한정책지침서 'NSC-8/2'를 승인 △1949년 6월 30일=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을 남긴 채 철수완료
이상의 일지를 살펴볼 때, 우선 여순사건이 주한미군 철수 연기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또 1948년 12월 말까지 철수키로 결정한 'NSC-8'에 대해 국무성이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철수시한에 대한 논란이 다시 벌어지던 시점에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1948년 11월 중순부터 개시)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살펴본 미국의 정책결정권자들의 입장과 국내외 정세를 바탕으로 '미군이 왜 초토화작전에 개입했느냐, 그리고 왜 11월 중순을 택했느냐'는 의혹의 단서를 찾아보자.
첫째, 국무성의 입장이 관철됐다는 추정이다. 국무성은 초지일관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주한미군의 장기주둔을 주장했다. 그러나 군부의 주장에 따라 철수가 결정됐고, 12월 말로 정해진 철수시한이 임박하자 강공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추정에는 국무성이 과연 군부의 하부조직인 주한미군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이 따른다.
둘째, 조속히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던 군부의 입장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군부는 여순사건 등 한국 내 혼란을 국무성이 문제삼음으로써 이미 결정된 철수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조짐이 보이자 '철수의 걸림돌'을 서둘러 제거하고픈 조급함이 있었을 것이다. 군부가 철수강행을 주장하면서 '여순사건이 해결됐음'을 강조한 점은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셋째, 주한미군 차원에서 초토화작전을 전개했을 가능성이다. 본토에서의 논쟁이 '철수 불가피론'으로 기울자 현지를 책임지고 있는 주한미군사령부, 특히 군사고문단으로서는 철수에 앞서 한국 내 문제를 서둘러 '정리'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런데 미국내 철수논쟁의 핵심은 '과연 남한정부가 공산주의의 방벽이 될만큼 자생력을 갖췄느냐'는 문제였다. 국무성을 설득해야 하는 군부 역시 무조건 철수를 주장하던 초기와는 달리 남한정부의 자생력을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따라 미군은 여순사건 진압과 숙군작업에 앞장섰고, 경찰과 경비대에 서북청년단을 투입했다. 1948년 11월 중순 제주도에서 전개된 초토화작전은 바로 이런 시점에 벌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