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평저수지(草坪貯水池)’는 미호천의 상류를 막아 축조했으며, 안에는 수초섬·큰섬 등의 작은 섬들이 있다.
나지막한 구릉성 산지에 생긴 대로 저수(貯水)되다보니 제멋대로 휘어져 흡사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닮았다.
저수지의 물은 농업용수로 공급되며, 겨울철에는 얼음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만들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고, 연안에는 각종 부대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훌륭한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미호천(美湖川)’은 충북 음성군 보현산(482m) 계곡에서 발원해 충남 연기군을 거치며 89km를 달려 금강에 합류된다.
‘농다리(籠橋)’는 퍼뜩보면 세련된 징검다리의 모습이다.
겉모습은 듬성듬성 구멍도 뚫리고 발로 밟으면 삐걱거리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대식 토목공법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
교각(橋脚)이 있고 그 위에 묵직한 상판(床版)을 얹어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러 개의 교각은 큰 돌을 쌓고 그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어 투박하게 보이지만 천년 세월을 견뎌낸 다리다.
여기에는 거센 물살에도 떠내려가지 않는 과학적 원리와 철학적 뜻을 담고 있다.
음양(陰陽)의 기운을 고루 갖춘 돌을 이용해 하늘의 기본 별자리인 28숙(宿)을 응용해 28개의 교각을 만들었다.
거기다 수월교(水越橋) 형태로 만들어 다리 위로 물이 넘쳐흐르게 하였고, 구불구불 지네를 닮은 모양도 물살을 견디기 위한 구조다.
‘농다리’의 ‘농(籠)’자는 해석이 분분하다.
물건을 넣어 지고 다니는 도구의 ‘농(篝)’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고려시대 임연 장군이 ‘용마(龍馬)’를 써서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에서 ‘龍’자가 와전되어 ‘농(籠)’이 됐다고도 한다.
‘구산동(龜山洞)’은 구곡리의 옛 이름으로 ‘안굴테·박굴테’, 또 ‘내구·외구마을’로 부르기도 한 고려때부터 이어온 ‘상산임씨 집성촌’이다.
구곡리에 있는 ‘부자충신문(父子忠臣門)’은 조선 후기 나라를 위해 순국한 충신 ‘임수전·임현 부자’의 정려다.
임수전(林秀荃)은 임진왜란 당시 아들 임현(林賢)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죽산(竹山) 봉성(鳳城)에서 격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아들 임현은 만주의 부차성 전투에서 명의 원군으로 나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먹뱅이산(211.7m)’을 ‘묵방산(墨坊山)’이라 표기하는 건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이다.
‘먹방’이 있어 ‘묵방(墨坊)’이라 했을 수도 있고, 또 농사를 짓지 못한 ‘묵밭’, 즉 ‘묵은 배미’가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묵뱅이’ 또는 ‘먹뱅이’가 됐을 수도 있을 것.
산행코스: 상산임씨 부자충신비 주차장-농다리-농암정-미호천전망대-청문-고개-먹뱅이산(U턴)-고개-험로-전망데크-하늘다리-야외음악당-용고개(성황당)-농다리 주차장(7km, 3시간 10분)
궤적.
약 7km로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고도표
<산길샘>
급조한 표지기를 서두에 올렸다.
대형주차장.
산자락 아래에 여러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하산한 뒤에 들여다 볼 일이다.
대형버스 주차장.
구산동(龜山洞) 비석. 상산임씨(常山林氏)천년세거지.
농다리 유래비.
원형복원사적비.
수문 28間을 일제 강점기에 3칸을 메워 25칸이었으나 28칸으로 복원하였다.
농다리문화공원에는 진천군이 낳은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다.
김유신 장군이 이 지역 출신.
삼국시대 김유신 장군의 부친 김서현 장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농다리를 놓았다는 설도 있다.
중부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
마주 보이는 나지막한 산으로 건너는 곳에 농다리가 있다.
진천 농다리(충북 유형문화재 제 28호 ) 안내판.
미호강(미호천)을 가로 지르는 돌다리가...
농다리(籠橋)다. 물이 흘러야 다리이고, 물이 흐르지 못하면 뚝방(제방)이 될 것.
<동영상>을 찍었다.
그러고 보니 발이 28개인 지네가 기어가는 모습이다.
1/28칸을 가까이 들여다 보았더니 폭은 1m가 되지 않는다. 돌 상판(床版)이 없었다면 폴짝폴짝 건너 뛸 수 있는 징검다리일 것.
농다리를 건너 뒤돌아 보는 모습. 다리 위와 아래가 수면의 높이가 달라 물살의 흐름이 사뭇 달라 보인다.
이정표. 길은 미호천변을 따르는 길과 데크를 따라 산 위로 오르는 길로 나뉘어 진다.
안내판.
초평호는 생긴 모양이 흡사 용의 모습이다.
데크계단을 오르며...
다시 한번 뒤돌아 보았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은 살아서는 진천땅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땅이 좋다 라는 뜻.
그런데 사실은 자기 혼령으로 남의 육신을 살아가야 했던 추천석을 바탕으로 옛말이 생겼다고 한다.
이 사자성어의 의미는 충북 진천은 물이 좋아(풍수적) 살기 좋다는 뜻이고, 경기도 용인은 묻힐 때에(지리적) 명당이 많다라는 뜻이리라.
데크 쉼터에 나란히 마련된 스토리 텔링.
<1>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은 진천과 용인에 사는 동명이인(同名異人) '추천석'에 괸한 이야기다.
<2> 아내의 통곡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추천석이 자기가 죽은 것을 알았다. 혼(魂)이 된 자기가 죽은 자기의 육신을 내려다 보게 된 것.
<3>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간 진천의 추천석이 저승사자의 실수로 그만 자기가 잡혀온 것을 알았다.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온다는 게 동명이인에다 생일까지 똑 같은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
<4> 이승으로 돌아온 진천의 추천석이 자기의 몸으로 들어가려했으나 이미 땅에 묻혀 위패만 있어 소용없었다.
할 수 없이 용인의 추천석을 찾아가 온기가 남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으니 이젠 용인 추천석이 되어버린 것.
<5> 용인 추천석이 된 그는 자초지종을 말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기담아 들어주지 않고 헛소리하는 것으로 여겼다.
<6> 다시 급하게 고향 진천으로 돌아와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는 아내에게 "여보, 나요 내가 돌아왔소"하였으나 곧이 들을 리는 만무.
곧 뒤따라온 용인 추천석의 아내가 진천 추천석의 아내에게 "우리 남편이 잠시 정신이 나가서 그렇다"며 용서를 구했다.
<7> 결국 관가로 끌려간 추천석은 살아생전 집안내력과 재산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알고 있음을 안 고을 원님의 명쾌한 판결로 이어졌다.
"진천 추천석의 영혼이 용인 추천석의 육신을 빌린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생거진천 사거용인'할 것을 판결하노라."
<8> 추천석의 혼이 들어간 추천석은 생전에 진천땅에서 행복하게 살았고, 죽어선 육신을 빌린 용인땅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
◇ 원문보기 ☞김복현의 산이야기
첫댓글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행복한 일요일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