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륙 향토사료로 보는 동이계 토가족
국내에서도 장가계 패키지 투어가 자리잡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로 이미 알려져 있으나 그곳 토가족이 동이족으로 백족, 이족, 묘족 등의 동이족 갈래와 친연관계를 맺고 있는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곳의 문화인류학적 혈통관계와 족원은 초민족의 족원과 파민족의 족원이 서로 연관되어 있어 근원이 동이족인 초민족도 장차 자세히 향토사료를 밝혀 소개하고자 한다. 족원의 결론은 독자들이 모든 글을 읽고 결론내릴 것으로 믿는다.
투지아쮸(土家族) 문화의 생성메커니즘
토가족은 주로 湖南성 서부지역과 湖北성 서부지역, 四川성 동남지역과 貴州의 동부지역 등에 거하고 있으며 인구는 약 284만 명(1982년 통계)에 이른다. 토가족은 자 "비쯔카", 漢語로는 "토가" 라고 불리워진다. 토가족은 역사상 많은 칭호가 있었는데 "土家"를 이 종족의 속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토가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진나라가 바후를 멸한 후에 호남, 호북, 사천, 귀주 등에 거하고 있는 파인과 한족들이 혼합해서 된 것으로 말하고 있고(한족이란 칭호가 당시 없었으니 이것은 지나사학자들의 궤변이다), 또 하나는 토가어가 彛語가 가깝고 또 토가가 운남지역에 거하고 있는 이족 풍습과 같다는 것을 근거로 그 기원을 당나라 중반기 때의 오만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토가족은 자기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토가족어는 漢藏語系이 藏納語族에 속한다. 해방되기 전 토가족지역은 봉건지주 경제개발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본주의 경제적 기반이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2천여년 전부터 오늘날의 샹시(湘西:Xiangxi)와 어시( 西:Exi)일대에 거주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투지아쭈(토가족)를 다른 소수 민족과 함께 '무릉만'(武陵蠻) 또는 '오계만'(五溪蠻) 등으로 기술하고 있고, 송사(宋史)에는 '토정'(土丁), '토인'(土人), '토민'(土民), 또는 '토만'(土蠻) 등으로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투지아쭈는 고대 귀주(貴州)로부터 호남의 서부지역으로 이동해 간 파인(바人)의 후예로서, 오만(烏蠻)이라 불렸던 민족이다.
호남성(湖南省)일대에 사는 투지아쭈는 혼담이 오고가기 시작하면 청년은 결혼할 규수집을 찾아가서 장래의 장인, 장모에게 인사를 한다. 대문에 들어서면 먼저 한쪽 무릎을 꿇고,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세요!"라고 말한다. 규수는 장래의 사윗감을 일으켜 세우고 그가 짊어지고 온 대나무를 내려서 안방으로 들여보낸다. 규수는 가슴을 졸이고 있다가, 살짝 안방으로 들어가서 바구니를 열어본다. 그리고는,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돼지발을 손에 들고 자세히 살펴본다. 만일 돼지발에 아무런 표시가 없을 경우, 청년쪽에서 아직 결혼날짜를 정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반면에 발굽 근처에 구멍이 뚫려 있으면 택일을 재촉하는 의미이므로, 이때 규수는 서둘러서 결혼 준비를 하게 된다.
또한 돼지발에 꼬리가 달려 있으면 추수 후에나 가능하다는 표시이다. 반대로 규수 쪽에 사정이 있어서 그해에 결혼할 수 없거나 한동안 부모 곁을 떠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에도 그 자리에서 이야 기 할 필요는 없다. 청년이 돌아갈 때, 돼지발과 꼬리를 답례품과 함께 바구니에 넣어 보내면 된다. 청년이 집에 돌아가서 풀어보면 곧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청년은 다음해까지 기다려야 한다. 투지아족의 혼인은 매우 개방적이고 청년 남녀간
의 자유로운 연애가 가능하다. 결혼풍습 중 독특한 것 하나는 신부가 집을 떠나기 약 보름 전부터 우는 곡가(哭歌)라는 것이다. 때로는 6개월 동안 계속 우는 적도 있다. 울면서 부르는 "哭歌"의 내용 은 부모님과 형제, 자매, 선조들을 떠나는 슬픔과 중매한 사람을 욕하는 등 이별의 정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다. 시집갈 아가씨 혼자서 우는 것도 있고 어머니와 자매들과 같이 우는 것도 있다.
투지아쭈(토가족)가 보편적으로 신앙하는 대상은 투왕(土王)으로 촌락마다 투왕의 묘가 있어 매년 봄에는 집단으로 토왕제 의식을 거행 한다. 자연숭배 사상도 있어 매년 사냥시마다 꼭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종교신앙은 민간 종교(귀신과 조상숭배) 위주이다. 과거에는 토왕을 보편적으로 믿었다. 각 촌 마다 토왕묘가 만들어져 있는데, 매년 봄이면 '제토왕'의식을 거행한다. 이 외에도 사냥을 나갈 때마다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 등 자연신에 대한 숭배도 있고, 도교도 토가족의 종교 신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초인은 고신씨(高辛氏)의 후예다.(초는 전통적 동이족 회이족 후예 국가임을 알아야 한민족 대륙사의 뿌리를 빨리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열린다. 중국의 역사부도에도 초 앞에 "동이東夷"의 "이夷" 자를 덧붙여 이초로 쓰이고 있음을 본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는 “ 동이족 전욱 고양(高陽) 황제의 묘족 후예다.”라고 말하고 있다. 춘추전국시기에 토가족 지역은 초파(楚巴) 두 나라의 교차 지대였다. 비록 파인이 토가족 지역에서 세력이 비교적 컸지만, 토가족 지역에 초인도 진입했다. 게다가 토가족의 여러 부족 중에 초인이 부분적으로 있었다. 다시 말해서, 초인도 토가족의 한 몫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문화의 토가족에 대한 영향은 주로 두 가지 방면에서 실현되었다.
첫째는 토가족이 되었던 초인의 문화 인자가 직접적으로 토가족에게 전달된 것이고, 둘째는 초문화와 토가족을 형성한 파인 문화가 밀접하게 왕래하여 파문화 중에도 초문화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 오만(烏蠻)의 선민은 ‘호방(虎方)’의 민족이지만, 오만의 후예 중 하나인 이족(彝族)은 오늘날에 이르러서 오히려 흑호(黑虎)를 토템으로 하고 백호를 경시하여 백호를 쫓는 습관이 있다.<유요한(劉堯漢), 양화삼(楊和森) : 《이족과 토가족이 모두 호 복희에서 기원하다.(彝族與土家族同源于虎伏羲)》에서 《토가족 역사토론회 문집(土家族土會文集)》(내부자료)에 기재됨.>
*토가족의 족원에 관해서는 이전의 학술계에 주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토가족이 고대 파인(巴人)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파인설(巴人說)’이고, 또 하나는 토가족이 고대의 토착(土著)주민을 주로 해 융합한 후에 이 지역에 진입한 파인, 한인(漢人)으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토착설(土著說)’이며, 다른 하나는 토가족이 귀주(貴州)에서 이주해온 오만(烏蠻)을 주로 해 융합한 토착인 파인으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오만설(烏蠻說)’이다. 근래에 와서 연구가 깊어지자 갈수록 많은 학자들이 토가족의 기원이 다원적이며, 이는 고대 파인의 한 갈래가 현지 토착인(九黎 東夷系列) 및 이 지대에 진입한 한인, 복인(濮人), 초인, 오만 등의 부족과 융합하여 당(唐)말 5대에 형성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토가족 지역의 파인의 활동 및 파문화의 상황-연구에 의하면 파인은 저강인(氐羌人)의 후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서남쪽에는 파국이 있는데, 동이족 태호(太暞)가 함조(咸鳥)를 낳고 함조는 후조(后照)를 낳았는데 후조가 파인의 시조가 되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파인은 서북지역에서 가장 먼저 생활했고 후에 섬서, 하남에서 호북, 사천으로 진입했음을 알 수 있다. 파인은 남쪽으로 이주한 뒤 지금의 토가족 지역으로 진입했다. 이에 대해서는 고고학의 발굴과 사적에서 모두 증명할 수 있다. - 필자가 보기에 지나 대륙에 있는 거의 모든 소수민족은 1만 년 전 광명제국 환국의 후예로 본류로부터 끊임없이 가지치고 나아가 역사와 더불어 자기동일성이 부단히 침식되고 깎이면서 이질화 되어갔다. 그러다 보니 그 족원은 분명히 동방 동이족이면서도 현재에 와서 현지를 가보면 전혀 동질성을 느끼기 어려운 경향이 많다. 그러나 그 족원을 다양하게 추적하면 어느 소수민족이 되었든지 환국의 후예로 귀결된다. 따라서 다양한 색깔을 갖고 있는 이들 이질화된 다양한 소수민족은 그 자체의 각론적 추적만으로는 결론 내리기가 어려운 듯이 보이지만, 퍼즐게임을 하듯 다양한 이들 소수민족을 펼쳐놓으면 전체의 밑그림이 보인다.
여기 호남성 장자지에(장가계)의 동이 토가족도 환인천제 시대의 동이 환족의 후예가 어떻게 가지치고 나아가 자기동일성이 침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라 보고 국내에 처음 소개한다. 어차피 강단사학을 차지하고 있는 국내의 사학은 민족기원과 영토의 바운더리를 한반도로 한정하는 일제 반도 식민사관이다. 따라서 이들이 이러한 대륙의 소수민족의 올바른 족원이나 우리 민족사관으로 바라보는 지나 역사의 친화력있는 정보를 국내에 소개할리 만무하다.
한번은 한민족 대륙사관의 차원에서 필자가 우스운 소리로 호남성 장사의 한 지나인 교수에게 한국의 역사와 중국의 상고역사는 서로 공유하고 있으며 한국사는 꺼거-형님의 역사고 중국사는 띠디-동생의 나라라고 설명해 주니 하오하며 재배를 하며 웃음을 건네받은 적도 있지만 사실상 중국의 역사는 춘추전국시절까지만 해도 중국대륙을 석권한 동이족의 다양한 후예들이 아니면 성립할 수 없는 나라다.
미국이 전세계의 백성을 빌려다가 유나이티드로 합중국을 이루어 나라를 이루고 있듯이 중국 역시 상고시절로부터 가지치고 나아간 수많은 한겨레 후손을 지나 합중국의 구성성분으로 삼은 나라이다. 이? 입장에서 심지어 문화사적 혈통사로 지나 대륙의 뿌리를 가장 잘 밝히고 있는 임혜상 마저 종족분류를 견강부회하는 측면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동이족 혈통을 세탁한 황제 헌원 만 지나의 조상으로 삼았다가 동이족 염제 신농을 넣지 않을 수 없어 염제마저 세탁해 염황 민족이라 했다가 다시 은나라의 주체세력 동이 묘족의 시조 치우를 안 넣으면 중원의 역사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므로 지나 한족의 조상이 염, 황, 치라 슬며시 변개해 바꾸게 되었으니 결국 순수 쏠리드 동이조상 염제와 치우를 차례로 보태가면서 지나 상고 역사의 족원을 세탁, 보완했는가 하면, 고구려 역사가 지나역사의 일부라는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에까지 손을 대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현재 중국이 다양한 소수민족의 독립요구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터에 소수민족 중 가장 막강한 후원자를 가지고 있는 동북삼성의 조선족마저 독립을 요구하면 가히 티벳 독립요구, 위그루족 독립요구, 대만 독립요구와 더불어 중국이 자체분해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구려 문제가 향후 통일한국의 등장과 더불어 동북아 국제외교 역학문제에 뇌관역할을 할 것임을 내다보고 소위 상고사 차원에서 사전 정지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지나 대륙 곳곳에 산재한 고고학 유적지가 동이족 유적지임이 드러나자 동이족이 곧 중화족이라 보는 관점이 대두되게 되었으니 심지어 석학 임혜상같은 이까지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장선으로 보면 동북3성의 조선족은 당연히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구성성분일 뿐이요, 반도의 대한민국도 중국의 일부로 보는 대만처럼 바라보는 지나사관 특유의 견강부회적 사관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호남성에 포진하고 있는 주요 동이계열 소수민족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호남성 장자지에(長家界)는 동이 토가족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일찍이 장자방(장량)이 토사구팽의 분위기 속에서 한고조 유방에게 용퇴를 전하고 숨어들어간 곳이라는 것을 밝힌바 있다. 토가족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필자가 호남성에서 구한 향토사료 토가족문제연구 총서 <토가족문화사(土家族文化史)> 단초(段超) 著의 일부분을 발췌해 있는 그대로 소개한다. 지나사가의 관점-즉, 중화사관임을 알고 읽어주기 바란다. 어떠한 민족문화의 형성이든 모두 특정한 조건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조건의 유기적인 조합은 이 민족문화의 생성메커니즘을 구성한다. 이러한 생성메커니즘은 매우 폭넓게 이 민족문화의 특징과 발전 과정을 결정한다. 필자는 한 민족문화의 생성메커니즘은 마땅히 이 민족이 생활하는 지리환경. 민족의 기원(族源).인문생태의 세 방면으로부터 고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중 지리환경은 민족문화 생장의 기본 조건이고, 민족의 기원은 이 민족문화의 몇 가지 기본 특징을 결정하며, 인문생태는 민족문화의 발전방향에 영향을 준다. 세 가지가 서로 작용하여 민족문화의 생산․발전에 대해 중요한 영향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토가족 문화의 생성과 발전에 대한 고찰도 반드시 이상의 여러 요인들을 관조해야한다.
지리환경
지리환경은 인류거주지역의 여러 가지 자연 요소들의 총화이다. 우주적인 것, 지질적인 것, 기상적인 것, 수문(水文: 물의 각종변화와 운동현상)적인 것, 지문(地文: 산천, 구릉 등 대지의 온갖 모양)적인 것, 생물적인 것 등등의 조건을 총괄한다. 이것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인류 생활의 유기적 환경으로 생태 계통의 생물 성분 및 기타 유기 물질을 포괄한다. 다른 하나는 인류 생활의 무기적 환경으로 생태 계통의 기후, 토양, 무기물,
지형, 위도, 해발고도 등등을 포괄한다. 무기적 환경은 지질환경과 성간(星際: 별과 별 사이)환경이다. 어떠한 민족문화의 창조든 모두 이 두 부분의 환경요소 속에서 진행된다.
지리환경은 문화의 생성과 발전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준다. 한 방면에서는, 인류 자체가 자연지리환경의 산물로 그 생존과 발전은 지리환경의 제약을 받는다. 다른 방면에서는, 인류 생활에서의 자료를 자연에서 얻고 노동대상도 자연이다. 이 외에, 인류의 모든 활동은 생산 활동과 생활 활동 및 정치 군사 활동을 포괄하며 모두 특정한 지리환경 속에서 진행되고, 또한 이것과 교대로 관계가 발생된다. 지리환경의 문화에 대한 영향에 관하여는 문화지리학파가 상세한 소개를 했고(물론 문화지리학파의 과장된 지리환경의 작용은 잘못된 것이다.) 경전(經典) 작가도 자세한 논술을 전개했다. 마르크스가 고대 아시아의 게르만과 다른 원시관계를 언급할 때 지적하기를, 이러한 구별은 “기후 토양의 물리적 성질에 달려있다. 물리적 조건의 결정을 받는 토양의 개발 방식은 적대부락 혹은 사방의 이웃부락과의 관계 및 이전을 야기하고 역사적 사건 등의 변동을 *야기한다.” 고 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馬克斯恩格斯全集)》제46권, 인민출판사(人民出版社) 1956년판, 제 488쪽.
지리환경의 문화에 대한 영향은 여러 방면에서 드러나는데, 한 민족의 생산방식, 생활방식, 민족성격, 사유의 특징, 심미정취 등등은 모두 지리환경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이로 인해 한 민족문화의 생성메커니즘을 고찰하려면 반드시 그 지리환경에 대해 주의하여 고찰해야한다. 토가족 지역은 중국 남부의 산간지역에 속하는데, 이곳은 숭산(崇山)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하류가 종횡으로 흐르며 삼림이 빽빽이 분포하고 물자가 풍부하다. 이런 지리환경은 토가족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아래에서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분석을 진행했다.
지리환경
토가족은 상악(湘鄂) 투검(渝黔)의 교차지역에서 생활했다. 이 지역은 지리적 위치상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진다.:
(1) 전국의 중심지대다. 토가족 지역은 전국의 중심적 위치에 있는데, 그 북부는 하남(河南), 섬서(陝西),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이고, 남부는 호남(湖南), 광서(廣西), 광동(廣東)이며, 동부는 악동(鄂東), 상동(湘東), 안휘(安徽), 강서(江西), 복건(福建), 절강(浙江)이고, 서부는 사천(四川), 감숙(甘肅),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이다. 중국의 동서남북 거리에서 기본적으로 비슷하게 떨어져 있다. 장(壯)족, 위구르(維吾爾)족, 몽고(蒙古)족, 티벳(藏)족, 묘(苗)족 등의 소수민족과 서로 비교하면, 이는 중국의 변경도 아니고 외국과 접경도 아닌 중국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백만이 넘고 국경을 걸치지 않는 소수민족이다.
(2) 고대 중원(中原)과 서남(西南) 사이의 통로다. 중국 고대에 중원이 서남으로 진입하고 서남이 중원으로 진입하던 도로는 모두 반드시 토가족 지역을 거쳐야 했다. 중원이 서남으로 진입하던 도로는 구체적으로 세 곳이 있었다. 하나는 토가족 지역을 거쳐 귀주(貴州)를 지나 서남으로 진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토가족 지역으로부터 호남(湖南)을 거쳐 서남으로 진입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토가족 지역을 통과하여 사천(四川)을 거쳐 서남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토가족 지역은 또한 서북 각 민족이 중원, 동남, 남방으로 진입하던 지름길이었다. 역사의 기록에, 토가족 지역은 “바깥은 기협(蘷峽)으로 덮여 있고, 안은 시내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길은 험하여 다니기가 어려웠고, 만(蠻)과 료(僚)가 섞여 거주했고 파촉(巴蜀)으로부터 형초(荊楚)를 굽어보는 것으로 항상 이로써 특별함을 자아내는 *곳이다.”
*도광(道光)의 《시남부지(施南府志)》 권2.
몽고의 귀족이 전국을 통일할 때, 일찍이 사천지방을 우회하고 양양(襄陽)을 공격하여 취하고 토가족 지역의 북부를 거쳐 호광(湖廣), 화남(華南), 화동지역으로 진입했다. 토가족 지역이 바로 서북에서 동남으로 진입했던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몽고 병사의 남하를 막기 위해 송(宋)나라 정부가 토가족 지역에 병사를 배치하여 방어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사적(史蹟)에 명확한 기록이 있다.: “송말(宋末)에 몽고의 타하이(搭海)가 촉(蜀)에 들어 가, 형호사(荊湖師) 맹공(孟珙)이 병사를 보내어 시주(施州)에 주둔할 준비를 했다. 또 몽고병이 만주(萬州: 지금의 사천 만현(萬縣)임) 호탄(湖灘)을 건너, 시(施), 기(夔)가 진동하고 시(施),기(夔)의 안과 밖의 큰 강을 압도했고, 팽수(彭水)를 근원으로 하여 나오는 청강(淸江)과 중간에는 위경(衛境)을 관통해서 이릉(夷陵) 의도(宜都)에서 큰 강으로 합쳐지기까지를 빠른 길과 *지름길로 했다.”
(3) 장강(長江)의 경과 지역이다. 장강은 고대 중국 교통의 대동맥이며 동시에 고대 중국의 문화교류의 대통로로, 화서(華西), 화중(華中), 화동(璜) 세 구역의 문화가 장강을 통해 서로 유통되었으며, 장강의 줄기를 따라 있는 각 민족과 각 지역이 장강을 통하여 끊임없이 문화교류를 진행하고 있었다. 장강은 토가족의 북부지역을 통과하며 토가족 지역의 수많은 하류도 장강과 서로 통한다. 토가족 지역의 수많은 작은 계곡이 청강(淸江), 유수(酉水), 오강(烏江), 무수(武水), 누수(漊水)로 흘러 들어가고 오강, 청강은 장강으로 직접 흘러 들어간다. 또 유수, 누수, 무수는 원강(沅江)을 통해 장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토가족 지역은 장강을 통해 자신을 기타 지역과 소통할 수 있게 했고 경제문화 교류를 진행했으며 이런 형세는 토가족 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4) 한족지역과 직접 교차하고 중원과 서로 이웃하고 있다. 토가족 지역의 삼면이 한족지역과 접경하고 있는데, 동부는 호남의 원(沅), 진(辰), 상(常) 등 한족지역과 서로 접하고 있고, 남부는 호남의 장사(長沙) 형양(衡陽) 등과 서로 이웃하고 있으며, 북부는 하남, 섬서 한족 지역과 접하고 있고 오직 서부만이 서남의 각 소수민족과 서로 교차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토가족 지역은 중원과 거리가 매우 가까운데 이런 지리적 위치는 토가족 문화와 한(漢)문화의 교류에 매우 유리했다. 토가족이 처한 상술한 지리적 위치는 그 문화의 발전에 아래와 같은 영향을 주었다.:
첫째, 토가족 문화와 한족문화의 교류가 편리하고 빈번하게 했다. 한 방면으로는, 토가족이 한족과 직접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토가족 문화구와 한족 문화구는 직접적으로 서로 연결된 두 문화구라 할 수 있다. 문화학 이론에 의하면, 서로 이웃한 문화구의 문화는 가장 유동하기가 쉽다. 이것은 토가족 문화와 한족문화의 교류가 쉽게 발생되고 두 문화교류의 강도가 커지도록 했다. 일종의 높은 위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문화인 한족 문화는 줄곧 토가족 지역으로 흘렀다.(물론 토가족 문화도 한족지역으로 흘렀다.) 두 지역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한족지역에서 발생된 문화 정보는 비교적 빠르게 토가족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게다가 문화 전파 과정 중에 정보 유실이 적고 변이 요소도 적었다. 이 역시 토가족이 비교적 빨리 그리고 비교적 많이 한(漢)문화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민족의 부분 특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원인 중의 하나다. 토가족과 서로 비교하면 한족문화권과 직접적으로 접해있지 않은 그런 소수민족은 한족문화와의 교류 강도가 다소 약하며 한족문화의 토가족문화에 대한 영향은 한문화권과 직접 접해 있지 않은 소수민족의 영향보다 더 크다. 또 다른 방면에서는, 토가족 지역이 중원과 서남을 연결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중원지역과 서남지역을 서로 왕래하려면 토가족 지역을 지나야 했고, 문화교류의 통로인 장강은 토가족 지역을 통과하는데, 이 역시 토가족 문화가 한족 문화와 교류할 수 있는 더욱 많은 기회를 주었다.
둘째, 토가족은 기타 소수민족 문화와의 교류가 빈번했다. 토가족 지역은 서남에서 중원으로 진입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서남의 소수민족이 중원과 연계할 일이 생길 때 모두 토가족 지역을 거쳤는데 이 역시 토가족이 서남의 각 민족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 비교적 많은 기회를 얻게 해주었고 토가족 문화가 서남의 여러 소수민족 문화와 교류하는데 유리하게 했다.
참고: 토가족 이해를 위한 개관으로 필자가 과거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30대 초의 교원대 송호정에 대한 댓글 기사를 올려본다. “단군조선은 신화 영역, 역사 연구 대상은 아니다”는 반민족 송호정기사를 보고.... 본인은 한민족 대륙상고사학과 관련해 주로 대륙의 사료만 보는 사람이라 국내의 주장을 일일이 살피지 못하고 있는데 근자에 강단사학파의 신예 송호정의 주장이 인터넷에 난무해 이곳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송호정의 논문을 자세히 살피지 못해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그의 정통 식민사학의 학맥, 이병도-김철준-노태돈-송호정 등의 맥으로 보면 그의 전형적인 반민족적 단군사관을 헤아림직하다. 디지털 시대에 발전적 사관을 펴도 민족에 누가 될 터에 네가티브한 반골 학문을 편다는 것은 학계의 연구반경을 넓힌다는 무한한 학문자유의 만끽과 민족정사확립차원에서 반면스승으로서의 귀감 외에는 무슨 도움이 될지 의아스러울 뿐이다. 상고사학으로 들어가면 우리 피붙이의 종족 이름이 매우 다양해 이들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고고학적 계통을 확실히 파악하지 않으면 거란을 다른 종족으로 파악하기 쉽고 하다못해 만주족은 물론이고 양자강 중류의 초나라와 양자강 하류의 월나라가 동이족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종족으로 치부하기 쉽상이다. 혈통적으로 보면 연나라가 동이족인데 정치적 국가형성의 칸셉으로 대하여 우리와 연이 전쟁을 벌였다 하여 이민족으로 치부한다면 병자, 정묘호란을 빌미삼아 만주족을 이민족시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
산서성의 삼진이 동이족임은 춘추전국의 6국과 전국 7웅이 동이족임을 파악하면 고구마 줄거리를 캐면 상고 대륙사가 줄줄이 고구마 뿌리 캐지듯 캐지는 것인데 이는 국내 사료를 가지면 절대 캘 수 없고 대륙의 향토 사료를 연구해야 가능한 것이다. 혈통적인 뿌리 캐기는 석학 임혜상 이상으로 연구한 사람이 대만 중국을 통틀어 없다. 임혜상은 양자강 뿐 아니라 황하의 주인공이 바로 동이족임을 밝히고 있으며 동이 제 족은 수많은 종족명으로 대륙 전체를 석권했음을 밝히고 있는 바다. ( 무시해서 미안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노태돈이나 송호정이 평생을 공부해도 그 연구 성과가 서량지나 임혜상의 발바닥도 못가리라 확신한다. Anyway) 동시에 서량지는 고고학적 차원에서 임혜상의 문화인류학적 종족 계통의 분류에 대해 뒷받침하고 있는바 이들의 사관은 지금 서울대 등 일제 식민사관의 전수자들인 이들 다 낡아빠진 강단사학파들이 부정하는 환단고기 등의 사료를 불변의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못 믿으면 읽어보라. 맹장불여 지장이요 지장불여 덕장이요 덕장불여 운장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사학은 죽어있다. 한국의 사학은 일제 식민지 연장선 속의 반도사학으로 매몰되어 고고학을 해도 우물안의 반도 고고학일 뿐 대륙고고학이 없다. 그러니 다양한 이름으로 대륙 전체에 산재한 동이 제족의 분류를 이민족으로 치부한다. 반도사학의 병폐는 이미 첫 출발점부터 정도에서 벗어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오합지졸의 반민족적 학문적 성취-아무데나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오물 같은 똥을 내리깔기는 것과 같다.
비록 반민족적 패역사관이라 할지라도 머리 좋은 학자는 학문의 자유로운 영역확장에는 기여하겠지만 역사왜곡의 논조를 고도의 학문적 논리로 비벼놓아 철옹성을 만들어 놓으면 특히 역사라는 분야에 있어서는 조용히 살아가는 서민중생의 값어치보다 그 삶이 못한 것이다. 지장 불여 덕장이니 지장이 이러한 머리 좋은 패역사관의 학자라면 덕장은 머리는 모자라나 죄는 짓지 않고 사는 범인이다. 사관이 잘못서면 천재 이완용이 처럼 나라도 말아먹고 민족도 팔아먹는다. 이완용도 민족을 위한다고 생각하며 친일을 했고 고종을 협박해 나라를 넘겼다. 학문은 자유다. 그러나 학문에는 책임이 따른다. 특히 사학을 다루는 학자는 민족의 굴레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송호정은 대한민국 최고학부의 박사를 받았다 하니 그 사학적 내공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서울대는 세계 100위권 안팎으로 서있는 보잘것없는 대학으로 국내에서만 그 권위를 지키고 있는 정저지와에 불과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며 일 제 교육잔재의 무한정 경쟁, 주입식 획일교육의 병폐로 교육이 무너진 시점에서 과대포장 된 감이 없지 않다. 일제 식민사학의 청산은 이제 친일 수구파가 철퇴를 맞은 새 시대를 맞아 이들 반민족적 사관을 옹호하는 매국학자들을 학계에서 몰아내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역사왜곡과정과 수탈의 역사를 상기해 본다면 그들은 이미 학술토론을 해야할 상대로서의 학자가 아니다. 이제는 역사정립을 위해서나 민족정기 수립을 위해서나 학계에서 영구히 쫓아내야 할 대상이다. 그것이 민족적 정의이며 공의이다.
참고
*「환단고기」<태백일사>는 정 강성(鄭康成)이 5경을 논박해 이의를 제기해 말하기를 황제의 희(姬) 씨 성은 염제가 하사한 것이라 했다. 황보밀(皇甫謐)이 「제왕세기」에서 말하기를 황제는 유웅(有熊)씨인 소전(少典)의 아들 희(姬)씨 성이라(헌원의 후예로 황제헌원이다), 그 선조는 곧 염제의 어머니 집안인 유교(有喬)씨의 장녀로 소전의 가문과 혼인한 고로 「국어(國語)」에서 병칭했다. 이에 신농씨 말기에 유웅씨로부터 나라를 받아 헌원의 땅에 살았다. 「죽서기년」의 황제헌원 파트를 서술한 뇌학기는 이를 근거로 하여 황제는 신농의 모제(母弟)의 후예 소전의 임금 자손이며, 후일 염제(炎帝)대에 유웅(有熊)에 봉해져 희(姬) 씨를 사성 받았다고 말한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염제신농씨는 강씨 성이라. 어머니는 임사(任)라 하였는 바, 유교(有)씨의 여식(女息) 등(登)으로 소전(少典)의 비(妃)가 되었다. 화양(華陽)에 유(遊)할쎄, 신룡의 머리가 있어 이에 감응해 염제를 낳았더니, 몸은 사람인데 머리는 소로 오랫동안 강수(姜水)에 머물러 살았다."고 하였고,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에 "소전(少典)의 비(妃)는 안등(安登)이니, 화양(華陽)에 유(遊)할쎄, 신룡의 머리가 있어 상양(常羊)에 감응하여 신자(神子)를 낳았으며, 인면용안(人面龍顔)으로 밭가는 것을 좋아했으니 곧 신농(神農)이다"고 했다.
「일주서(逸周書)」<고덕편(考德篇)>에 "작도야근부(作陶冶斤釜), 위뢰사누(爲 : 쟁기 뢰, 보습 사, 김맬 누.) 라 하였고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신농이 밭갈고 도자기를 만들었다(神農耕而作陶)"라 했고, 「광운(廣韻)」에 "신농이 와기를 만들었다(神農作瓦器)"라 했고, 「물원(物原)」에 "신농이 옹기를 만들었다(神農作甕)"이라 했다. 복희로부터 신농에 이르는 세석기 회도문화의 주인공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 필자의 기억에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비롯 어떠한 사료에도 배달 환웅국의 성씨에 대해 언급한 것은 없다. 그러나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神農亦世及之君末帝楡罔時同姓黎君蚩尤作亂'이라 해서 14세 환웅인 치우천왕이 신농씨의 나라와 성씨(姜)가 같음을 말하고 있다.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신농의 도를 추종하는 무리가 있음은 「맹자」에도 보이고 있거니와, 「환단고기」에 5세 태우의 환웅의 12째 계자로부터 풍씨 성이 시작되었고, 또한 9세 안부연 환웅때 소전으로부터 그 아들 신농에 이르러 비로소 강수의 강(姜) 성이 시작되었으니, 유망은 비록 강씨 성의 적장자이자 신농의 후예였지만 배달 환웅국에서 가지치고 나아간 일개 제후국으로 모국이자 형제국인 배달국을 쳤다가 다시 황제와 싸워 패망하니 동족인 치우천왕이 복수전을 치른 것이 바로 유명한 탁록과 판천전투이다.
* 주나라의 뿌리는 「시경」의 대아(大雅)편 면( )에 잘 소개 되어있다. 이 기록은 지나족이 자신들의 뿌리로 삼고 있는 주 왕실의 뿌리 문왕의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바로 동이족인 신농씨의 강(姜)씨 처녀와 결혼해 자손을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공단보께서 어느 아침 말을 달려 기산 밑에 이르러 강녀와 함께 살림을 차렸다(古公亶父 來朝走馬...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
*저강( 羌)계는 장(藏)족을 이루고 있는 제 1의 기원민족이자 근간민족인데(신농씨 직계후예임은 앞서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은나라 때부터 기록에 보이고 있으며, 춘추시대의 서융(西戎) 대도(大都)가 곧 이 부족이다.
*태행(太行) 산맥을 중심으로 서는 산서(山西) 동은 산동(山東)이다. 산서성(山西省)은 춘추시대의 진(晋) 왕조의 발흥지로 뒤에 전국시절,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나뉘어 소위 3진(晋)의 시대를 연다. 산동이 전통적 동이족의 근거지로 동이족 은(殷)의 영향권에 속하고 주의 제후국 백금의 노나라가 있던 곳이라면 산서 역시 동이족에 뿌리를대고 있는 요(堯), 순(舜),우(禹)가 근거한 동이족의 근거지였다.
장량과 한신이 바로 이 3진(晋) 가운데 한(韓)의 후예니 한(韓)은 환단의 동이겨레 고유의 명칭이었으니 한신이 처음 초패왕 항우에게 간 것은 초(楚)나라가 전통적인 동이족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또 <삼성기전>이 서술하고 있듯이 진시황 정(政)을 친 것은 장자방(장량)이 개입된 동이족 한(韓)족으로, 정(政)이 그 황실(瀛씨 성)과 혈통(신농씨 姜씨 성의 후예 呂씨 성) 모두 동이족이었으나 장성을 쌓아 중원대륙을 석권하고 있던 동이 제 족을 압박하고 동족인 모든 동이 제 족을 흩어 민호(民戶)로 삼아 한족(漢族)화 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동이 제 족의 반발을 샀다. 뿐만 아니라
「북사(北史)」에 포함되어 있는 북주(北周)왕조 역시 우문(宇文)씨에 의해 개국되었는데,「북사(北史)」는 우문(宇文)씨를 염제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능히 우리 핏줄 국가임을 알 수 있으며 , 모용(慕容)씨 또한 동이족의 하나인 선비족 출신으로 중국에 들어가 5호16국의 하나인 연(燕) 왕조를 열었으니 연(燕) 또한 우리 핏줄 국가가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시경(詩經)」<상송(商頌)․현(玄鳥)>에 설명하기를:“하늘이 현조(玄鳥)를 명해 내려가 상(商)을 낳게 하다(天命玄鳥,降而生商)”, 연(燕)이 곧 현조(玄鳥)니, 고대 선주민(先民)인 동이족은 새(鳥)를 사랑해 부락 도등(圖騰:부대 상징깃발)으로 삼았다.
지금의 북경(北京) 옛 칭호는 바로 “연(燕)”이라 칭했으며, 북경 뒷 산맥을 칭해 “연산(燕山)”이라 불렀으니 이는 바로 아주 먼 옛날에 연(燕)의 자족(子族)이 남쪽으로 이동한 것과 관련이 있으니 이 모두 동이족의 중심무대라
할 수 있다.
토가족 족원(族源) 및 선민(先民)문화
지리 환경은 한 민족문화의 형성에 대해 단지 기초 작용만 할 뿐이고 일부분의 문화요소만 파생해 낼뿐이며 민족문화의 발전방향에 몇몇 선택을 제공할 뿐이다. 민족문화의 본질적 요소로 말하자면 그 족원 및 선민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한 민족의 족원 및 그 선민문화를 고찰하여 이 민족의 문화적 특질을 이해하는데 특수한 의의가 있다.
토가족의 족원에 관해서는 이전의 학술계에 주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토가족이 고대 파인(巴人)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파인설(巴人說)’이고, 또 하나는 토가족이 고대의 토착(土著)주민을 주로 해 융합한 후에 이 지역에 진입한 파인, 한인(漢人)으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토착설(土著說)’이며, 다른 하나는 토가족이 귀주(貴州)에서 이주해온 오만(烏蠻)을 주로 해 융합한 토착인, 파인으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오만설(烏蠻說)’이다. 근래에 와서 연구가 깊어지자 갈수록 많은 학자들이 토가족의 기원이 다원적이며, 이는 고대 파인의 한 갈래가 현지 토착인 및 이 지대에 진입한 한인, 복인(濮人), 초인, 오만 등의 부족과 융합하여 당(唐)말 5대에 형성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토가족 문화의 생성메커니즘을 연구하려면 상술한 부족의 문화 및 그와 토가족 문화의 관계에 대해 반드시 고찰해야한다.
5대 태우의 환웅 막내 아드님 동이족 태호(太暞)복희 후예 파(巴)문화의 영향
토가족 지역의 파인의 활동 및 파문화의 상황
연구에 의하면 파인은 저강인(氐羌人)의 후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서남쪽에는 파국이 있는데, 태호(太暞)가 함조(咸鳥)를 낳고 함조는 후조(后照)를 낳았는데 후조가 파인의 시조가 되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파인은 서북지역에서 가장 먼저 생활했고 후에 섬서 하남에서 호북 사천으로 진입했음을 알 수 있다. 파인은 남쪽으로 이주한 뒤 지금의 토가족 지역으로 진입했다. 이에 대해서는 고고학의 발굴과 사적에서 모두 증명할 수 있다. 고고학자는 지금의 토가족이 거주하는 상(湘), 악(鄂), 투(渝), 검(黔) 4성의 변경지역에서 신석기시대 풍격에 속하는 독특한 지역성 문화를 발견했다.*
* 왕굉(王宏): 《형남사 상대 도기 분석(荊南寺商代陶器試析)》의
《호북성 고고학론 문선집(湖北省考古學論文選集)》(1) 제 80쪽 참고.
또 그 시대는 하상(夏商)시기와 같아 학자들은 이 문화를 ‘조기(早期) 파문화’라고 부른다. 그 후속 문화도 토가족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시대는 동주(東周)시기와 같고 학술계는 이를 ‘춘추전국 파문화’라고 불렀다. 이 파문화는 지금의 토가족 거주지역 내에서 출현시간이 가장 이르고 계승성․안정성이 강하고 지속된 시간이 길며 복개면(覆盖面)이 큰데, 이 문화의 특징은 훗날의 토가족 문화에 비교적 많은 지역에 남아 있다. ‘조기 파문화’ 유적은 강가의 지세가 비교적 낮은 곳에 많이 분포한다. 가옥유적은 비교적 적고 간단한데, 이것은 아마도 파인이 강가에서 많이 생활한 것과 유관한 것 같다. 묘는 장방형의 토갱(土坑)묘로 몸을 반듯이 하여 누운 자세의 직지장(直肢葬)을 주로 한다. 석기의 마제(磨制)는 별로 정교하지 않고 타제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쪼개고 깎는 대형도구가 비교적 많고 특히 방각형(蚌殼形: 말씹조개껍질형) 격지(石片)인 간단하고 실용적인 괄삭기(刮削器)가 유행했다. 이 외에도 도끼(斧), 자귀(錛), 끌(鑿), 화살촉(石鏃)등이 있다. 도기는 가장 중요한 유물인데 일반적으로 모래를 섞은 회갈도(灰葛陶)를 주로 하며 수제도(手除)가 비교적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기본적인 도기의 형태는 단지(罐), 시루(甑), 굽보시기(豆), 바리(盂), 잔(杯), 세발주전자(盉), 도기뚜껑(器盖), 항아리(缸), 도기받침(器座) 등이 있다. 원저관(圓底罐: 원형의 낮은 단지)을 기본으로 하는 취사도구(炊器)는 조기 파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자주 보이는 격지는 아마도 (가축을) 도살하고(宰), 쪼개고(割), 껍질 혹은 털을 벗기거나(剝皮毛) 생선 비늘을 벗기는데 쓰였던 것 같고 주요 음식물은 야생동물 혹은 어류로 한 것으로 보아 조기 파인의 경제는 어렵을 주로 했음을 증명한다.
사적 중에는 파인이 지금의 토가족 지역에서 활동하던 상황에 대해서도 기재되어 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몇몇 파인이 지금의 삼협(三峽)지역에서 활동하던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무산(巫山)이 서쪽에 황도(黃島)가 있고 무산에는 황조(黃鳥)가 있어 현사(玄蛇)를 관리했다. ‘황조’, ‘현사’는 명백하게 고대의 다른 토템부락을 대표한다. ‘파사식상(巴蛇食象: 파사가 코끼리를 먹다)’의 전설은 일찍이 동정호반(洞庭湖畔)의 악양(岳陽) 일대에서 출현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자귀(秭歸) 서쪽의 대강(大江) 남쪽에는 ‘파(巴)’라고 불리는 오래된 부락이 있는데 하계(夏啓)의 신하인 맹도(孟涂)는 ‘파’에서 귀신(神道)을 주관하여 파인(巴人)은 맹도에게 구신(求神)했다. 맹도는 파인의 옷에 피가 묻은 자를 찾아 붙잡아 이로써 신에게 제사지냈다.(태호복희 후예) 《세본(世本)》에는 파인의 한 갈래인 늠군파인(廩君巴人)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있다. “늠군의 선조는 무탄에서 나왔다.(廩君之先, 故出巫誕)” 즉 ‘늠군’의 선조는 ‘무탄’이라는 오래된 부족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등소금(鄧少琴)은 이 ‘무탄’이 바로 《산해경․대황남경(山海經 大荒南經)》에 기재된 ‘무단민(巫蜑民)’이라고 생각했다.* * 등소금(鄧少琴) : 《파촉사적탐색(巴蜀史迹探索)》, 제57쪽.
그 지역은 대략 구당협(瞿塘峽)의 동쪽 입구(大溪口)에서 무협(巫峽)의 서쪽 입구(巫溪口)에 이르는 중간에 위치한다. 따라서 고고문화와 고고전설로부터 보면 지금의 토가족 거주지역 내에 조기 파문화와 옛 파족(巴族)이 존재했었음을 설명한다. 파인이 협강(峽江)지역에 진입한 후 그 세력이 매우 발전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후한서․남만전(後漢書․南蠻傳)》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파군(巴郡) 남군(南郡)의 만(蠻)은 원래 5성이 있는데, 파씨(巴氏), 번씨(樊氏), 담씨(曋氏), 상씨(相氏), 정씨(鄭氏)이다. 모두 무락(武落) 종리산(鍾離山)에서 나왔다. 이 산에는 적(赤), 흑(黑) 두 개의 동굴(穴)이 있었는데 파씨의 아들은 적혈(赤穴)에서 낳았고, 나머지 네 성씨의 아들은 흑혈(黑穴)에서 낳았다. 아직 군장(君長)이 없어 모두가 귀신(鬼神)을 모셨다. 이리하여 석혈(石穴)에 검을 던져 명중하는 자를 군장으로 봉하기로 했다. 파씨의 아들 무상(務相)만이 명중시켜 군중이 모두 감탄했다. 또 토선(土船)을 타고 뜰 수 있는 자를 군장으로 봉하기로 했는데, 나머지 성은 모두 가라앉았고 유일하게 무상만 혼자 떴다. 이로써 모두 그를 늠군(廩君)으로 세웠다. 이에 토선을 타고 이수(夷水)에서 염양(鹽陽)까지 이르렀다.……늠군이 죽어 혼백이 백호(白虎)가 되었다.
파씨는 호랑이로써 사람의 피를 마셔 이에 따라 사람으로 제사를 지냈다.”
춘추전국 이래의 파인의 활동상황에 대해서 고고학계에서도 발견이 있었다. 중경(重慶)의 파현(巴縣), 소화(昭化), 부릉(涪陵)에서 파인의 고분군을 발견했고, 투동(渝東)의 기타 지역에서 발견된 파인의 유물도 적지 않다. 또 호북의 파동(巴東), 자귀(秭歸), 장양(長陽), 건시(建始), 은시(恩施), 이천(利川), 강릉(江陵), 지강(枝江), 당양(當陽), 양양(襄陽) 등의 현에서 파인의 유물 혹은 고분이 발견되었고, 호남의 석문(石門), 용산(龍山), 길수(吉首), 대용(大庸), 고장(古丈), 화원(花垣), 봉황(鳳凰), 보정(保靖), 지강(芷江), 호계(滬溪) 등의 현에서 주로 교장(窖藏)에 속한 파인의 청동기를 발견했고 숙포(淑浦) 등지에서 파인의 고분이 여러 곳 발견되었다.
또 귀주(貴州)의 송도현(松桃縣)에서 아마도 교장에 속하는 파인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상술한 몇몇 지역에서 출토된 독특한 풍격을 지닌 기물(예를 들어 원저도관(圓底陶罐: 둥글고 낮은 단지), 원저동부(圓底銅釜: 둥글고 낮은 쇠가마)) 및 기물 조합은 동주(東周) 이래의 파문화와 ‘조기 파문화’의 전승 관계를 반영한다.
파문화의 특징
파인의 문화 중 비교적 특색 있는 요소는 주로 아래의 몇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1) 힘이 넘치고 용감하며 무예를 숭상한다. 사적에는 늠군(廩郡)이 검을 잘 다뤄 목표를 명중시킬 수 있어 파사(巴師)는 천성적으로 힘이 넘치고 용감하다고 말한다. 파인의 힘이 넘치고 용감하며 무예를 숭상하는 이러한 민족특성은 파인의 고분 및 출토된 문물 중에서 표현되는데, 무기가 비교적 많고 또한 독특한 풍격을 지니며 검(劍), 도끼모양 무기(鉞), 창(戈), 창(矛), 화살촉(箭鏃)을 주요 무기로 한다. 예를 들어 자귀(秭歸)에서 서쪽을 향한 지역의 파인고분 중에는 생활 무기가 매우 적고 병기가 많은데, 병기는 파식유엽검(巴式柳葉劍), 소형의 원인속요 식월(圓刃束腰式鉞: 둥근 날 허리띠식 도끼무기), 다리부분에 두 귀가 달린 파식모(巴式矛:창) 그리고 도끼와 갈고리를 이어 붙인 창이 있다.
어떤 고분의 죽은 자의 신변에서는 부채형으로 배열된 화살촉 14점이 나왔는데 이것은 파인의 장수가 전사한 후 몸에 지니던 병기와 화살촉 주머니를 함께 지하에 묻은 것으로 여겨진다. 파동(巴東)의 강가에 연한 계곡 동굴 속에서, 특히 큰 강 입구로 흘러 들어가는 돌 틈 속에서 여러 가지의 청동 화살촉을 찾을 수 있으며 어떤 때는 한 틈새에서 수백 점을 얻을 수도 있으며, 강가의 암초의 돌 틈 속에서는 종종 십 몇 근, 몇 십 근의 동화살경(銅箭敬)
과 잘리고 손상된 병기를 찾을 수 있다. 이것으로 그 해에 파인과 초인의 화살이 서로 교차하며 격렬한 전투를 하던 광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파인은 용맹스럽고 위세가 있으며 전쟁에 능하였기 때문에 장수가 많이 배출되었다. 《화양국지 파지(華陽國志 巴志)》에서 당시의 성어(成語)를 인용해 말하기를 “파에는 장수가 있고, 촉에는 재상이 있다.(巴有將, 蜀有相也)”라고 하여 실제로 깊은 문화적 배경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호랑이를 민족의 표지로 삼았다. 늠군이 죽어서 그 혼백은 백호(白虎)가 되었고, 일찍이 ‘백호’를 쏘아죽인 ‘판순만이(板楯蠻夷)’를 ‘백호복이(白虎復夷)’라고도 불렀다. 그 후예는 스스로 ‘백호만(白虎蠻)’이라고 칭했다. 이는 파인이 호랑이를 숭배했을 뿐 아니라 호랑이를 민족의 표지로 삼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투동(渝東), 악서(鄂西), 상서(湘西), 검동(黔東)에서 발견된 동주(東周)에서 진한(秦漢)시대까지의 파인의 청동기물(靑桐器物) 위에 병기든 아니면 악기든 거의 대부분에 호랑이의 무늬 혹은 형상이 있다. 파식 유엽형검(柳葉形劍)의 나뭇잎모양 위에 호랑이얼룩(虎斑形)무늬가 있고 검체의 손잡이 가까운 부분에는 호랑이 무늬와 손바닥모양이 주조되어 있다. 숙포(淑浦)의 전국시대 파인의 고분 속에서 검에 사람의 머리를 한 쌍호(雙虎) 모양이 주조된 파식검(巴式劍) 한 개가 출토되었다. 파식동창(巴式銅戈)에는 손잡이 뒷부분에 호랑이 머리모양이 부조되어 돌출되어 있는데 호랑이의 형상은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며 입을 옆으로 찢어질 듯 벌리고 있으며 두 귀는 뒤를 향해 뻗어 선을 넘어 창의 손잡이를 감싸고, 호랑이 몸은 안쪽 윗부분까지 뻗어나가며 음각(陰刻)으로 윤곽선을 표시했다.
사천의 아미부계(峨眉符溪)에서 출토된 동창(銅戈)에는 또 사람이 호랑이에게 제사지내는 형상이 선명하게 주조되어 있다. 호뉴순우(虎鈕錞于: 호랑이가 조각된 옛날의 동으로 된 악기)와 같은 이런 파식 악기는 호남 석문신관(石門新關)의 교장(窖藏) 속에서 15점이 출토되었고, 귀주의 송도목수향(松桃木樹鄕)에서 크기가 순서대로 배열된 5점이 한번 출토되었다.
또 사천의 부릉소전계(涪陵小田溪)의 파인 귀족고분에서 출토된 호뉴순우는 호북의 장양(長陽), 호남의 호계(滬溪)에서 출토된 호뉴순우와 대체적으로 비슷하고 은시자치주에서도 쌍호뉴순우(雙虎鈕錞于)가 한 점 출토되었다. 이 때문에 웅전(熊傳)은 상(湘), 악(鄂), 천(川), 검(劍)에서 출토된 이 호랑이무늬 청동기가 이미 도안과 장식의 범위를 뛰어넘어 토템 혹은 민족표지(族徽)라는 특수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새로이 지적했다.
*虎頭鞋(호두혜 : 호랑이 머리모양 신발) :민간에서는 어른들이 영아에게 호랑이 모양 신발을 신기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신발은 대부분 살구빛 면으로 만드는데, 신발의 양쪽 볼에는 호랑이 가죽 무늬가 되어 있고, 신발 코부분에는 위풍당당한 호랑이 머리 모양이 그려져 있다. 호랑이의 눈, 코, 입, 귀, 수염이 모두 있고, 이마에는 "王"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진짜처럼 귀엽게 생겼다. 사람들이 아이에게 이 신발을 신기는 이유는 실용적이고 예쁘게 보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 신발이 아이를 지켜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는 호랑이가 백수의 왕으로서 여겨 귀신이나 악마를 쫓고 재앙을 피하게 한다고 믿었고, 아이에게 이 신발을 신기면 아이를 위해 용기가 내서 아이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신발은 아이의 호신용일뿐만 아니라 어른의 호신용이기도 했다. 민간에서는 생소한 지だ犬� 야외에서 잠을 잘 때, 신발을 머리맡에 두고 자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머리맡에 기백이 있는 신발을 두면, 귀신이 감히 오지 못한다(頭枕爛潑鞋, 神鬼不敢來 : 침두란발혜, 신귀불감래)"는 속담도 있다. 이 외에도 신발의 의미는 아주 광범위한데, 예를 들면 목 매달아 죽은 귀신이 빨간 신발을 신고 이승에 오면 새신랑이 될 수 있다거나 물에 빠져 죽은 귀신은 꼭 신발을 물가에 두고 죽는데 이것은 신발까지 물에 잠기면 죽어서도 물속을 헤매고 다닌다는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발의 의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변화가 발생되었다.
(3) 예기희무(銳氣喜舞). 기록에 의하면, 파인은 일찍이 주(周)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때 ‘가무로써 위압했다(歌舞以凌)’하였고, 한(漢) 고조(高祖)가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 “선봉에서 적진을 함락시키고 예기희무(銳氣喜舞)했다.” 왕녕생(汪寧生)은 운남(云南) 덕굉(德宏)지역 및 사천 양산(凉山)지역의 몇몇 소수민족에 일찍이 옛 전투 습속이 존재했던 것을 결합하여 파인이 ‘가무로써 위압했다(歌舞以凌)’의 소위 ‘가(歌)’가 바로 크게 전가(戰歌)를 부르거나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뜻하며, 소위 ‘무(舞)’라는 것은 싸움터에 임할 때 어떤 이가 앞에서 무기를 휘두르며 하는 일종의 위협성 동작에 불과하다고 해석했다.**왕녕생(汪寧生) : 《‘무왕벌주, 전가후무’ 해석(釋‘武王伐紂, 前歌后舞’)》의 《역사연구(歷史硏究)》1981년 제4기에 기재됨.
한 고조는 파인의 용감하고 힘찬 정신에 대해 매우 찬양했고 파인의 이러한 가무를 여러 차례 관람했으며 악인(樂人)에게 파인의 ‘예기희무(銳氣喜舞)’ 동작을 모방하게 하여 파투무(巴渝舞)를 만들었다.
(4) 선관장(船棺葬)을 행했다. 전설에 따르면, 늠군은 토선(土船)으로 물에 뜰 수 있었고 ‘판순만(板楯蠻)’은 유수(渝水) 양 기슭에 살았으며, 동한(東漢)시대에 와서 강주현(江州縣: 지금의 중경(重慶))의 주민들은 작은 배를 띄어 물 위에서 거주하는 가구가 500여 집이 있었다. 이것은 파인이 오랫동안 배와 물가 가까이 살던 민족임을 설명한다. 선관장(船棺葬)은 바로 파인이 일찍이 거주하던 파현(巴縣) 동순패(冬筍壩), 소화(昭化: 지금의 광원(廣元)에 속함)의 보륜원(寶輪院)에서 잇따라 발견되었다.
이곳의 다수의 고분이 모두 독목주(獨木舟)를 매장도구(葬具)로 한다. 선관(船棺)의 매장방식 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체와 순장물을 직접 배 안에 넣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배 안에 목제로 된 작은 관에 시체 및 휴대품을 넣어 다른 곳에 놓고 도기 및 동기(銅器)는 관 밖의 배 안에 놓는 방식이다. 수장품 중에서 청동도끼(靑銅鉞)와 파식검(巴式劍)을 주요 무기로 하며 도기의 모양은 둥글고 낮은 것이 많다. 선관장 중의 독목주(獨木舟)는 그 크기 제작에서 보면 완전히 실제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매장도구는 아마도 묘의 주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수상 교통도구를 사후에 매장도구로 만들어 사람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배가 필요하다는 신앙을 나타내는 것 같다. 혹은 파인의 선조 숭배, 천리귀종(千里歸宗) 신앙―즉, 사람이 죽은 후에 배, 물길을 이용하여 사람의 영혼을 상상 속의 고향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을 나타낸다.
(5) 귀신을 믿고 도교를 섬겼다.(信鬼事道) 사적에 기재되기를, ‘파군(巴郡) 남군만(南郡蠻)’(늠군의 부(部))은 모두 귀신을 섬겼고, 종인(賨人)은 (판순만(板楯蠻)) 귀신과 무당을 좋아하는 풍속이 있었다. 무술(巫術)은 도술의 일부분으로, 주문을 주요 도술로 하는 ‘오두미도(五斗米道)’는 농후한 무술적 특성을 가지고 있고, 도교의 발전은 파촉(巴蜀)지역에서 무술이 성행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한(東漢) 말에 태평도(太平道)의 우두머리인 장각(張角)이 살해된 후 장수(張修) 역시 죽었다. 옛 역사에서 오두미도의 장수(張修)는 ‘사람을 홀리는 무당(妖巫)’이라고 칭했던 귀신의 주인(鬼主)으로 실제로 파군(巴郡) 토착(土著) 이인(夷人)의 교주이다. 장릉(張凌)은 장수(張修)의 귀도(鬼道)를 계속 사용하면서 그것을 좀 더 개조하여 천사도(天師道)를 창립한 사람이다.
이로써 왕가우(王家佑)는 사好【말한 “이는 도를 섬기고, 만은 귀신을 섬겼다.(夷事道, 蠻事鬼)”, “백호는 도를 섬기고, 만단과 파인은 귀신을 섬겼다.(白虎事道, 蠻蜑與巴人事鬼)”라고 말하는 진정한 의의는 파이(巴夷) 늠군 백호족은 도교(천사정일도(天師正一道))이고, 파만(巴蠻)과 파단(巴蜑)은 무귀교(巫鬼敎: 오두미도)”라고 생각했다. 천사도는 선진(先進) 파인이 원시 파인의 무귀교를 개조하여 나온 것이다.**왕가우(王家佑) : 《도교논고(道敎論稿)》제 163쪽. 서진(西晉) 말년에 이웅(李雄)은 성도(成都)를 함락시키고 범장생(範長生)을을 주모자로 삼았다. 진연각(陳演恪)은 말했다. “파(巴)는 천사도를 독실하게 믿는 민족 출신이고 범장생은 본래 천사도의 교주이기 때문에 거의 죽을 뻔 했을 때 이씨(李氏)를 구원하여……실제로 종교적 *배경이 있었다.” --
*진연각(陳演恪) : 《천사도와 해변지역의 관계(天師道與濱海地域之關係)》에서 《금명관총고초편(金明館叢稿初編)》
참고.
사실상 종교 신앙을 통해 파종인(巴賨人)의 이씨 정권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 파인의 이런 귀신을 믿고 도교를 섬기는 풍속의 지속시간은 매우 길다. 따라서 “파(巴)의 풍속은 도교를 일삼는 것으로 특히 노자의 주술을 *중시했다.” “파의 풍속은 귀신을 숭상하여 의학을 버리고 오직 무당의 말만이 효력이 있었다.” 라고 하였다. *《송사 후가전(宋史 侯可傳)》
(6) 적색을 숭상하고 단사(丹砂)를 정제했다. 파씨의 아들(늠군)은 적혈(赤穴)에서 태어났다. 《열선전(列仙傳)》중에, 어떤 적부(赤斧)라고 하는 파인이 있는데 이를 신선의 하나로 분류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적부는 파인으로 단사(丹砂)를 정제할 수 있었고 초석(硝石: 진산칼륨)과 함께 복용하여 신체 모발이 모두 *적색이었다.” *《문선(文選)》권 4. 이선(李善) 주석인용. 《도장(道藏)》제 5책 참고.
단사는 또 주사(朱砂)라고도 불리는데 역시 적색이다. 파인은 적색을 좋아하였으며 단사를 정제하는데 능했고, 오랫동안 단사를 정제하는 것으로 미신의 색체를 벗어났고 파인이 정통했던 채광(采鑛)과 광석 정제업(煉鑛業)을 이루었다. 《한서 화식전(漢書 貨殖傳)》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의 과부 청(淸)은 먼저 단혈(丹穴)을 얻어 그 유익함이 수 대(代)에 걸쳤는데 집에서도 청을 헐뜯지 못하고 과부도 그 공적을 지킬 수 있어 제물로 자신을 지켜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못했다.” 파의 과부 청은 진시황 시기의 사람으로 그 전대(前代)는 분명 전국시대이다. 따라서 파인이 단사를 캐고 정제하는 것이 전국시대에 이미 매우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란. 신석기 시대 주요 도기제작 방법 중 하나인 니조반축법(흙덩어리로 쌓아가며 만드는 법) 신석기 중기 앙소문화 시절 이미 출현. 그릇형 솥과 속이 깊은 항아리 심복관. 모두 니조반축법으로 흙덩어리를 가공해 붙여 만든 것이다. 양자강 하류 상해 항주 소흥 부근의 동이족 유적지인 하모도 유적지의 간란식 방옥 구조도.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이른 목구조 건축물이라 자랑한다. 양자강 하류는 하천이 그물처럼 얽힌 습한 지대로 아래는 돼지 등 가축을 기르고 사람은 위에서 생활했다. 건축은 기후와 풍토를 반영하므로 지금의 한반도 건축 습성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길이가 23미터이므로 70평 이상의 대단히 큰 가옥이다.
잔소리-대륙의 구석기 신석기 시대는 모두 동이족이 열었으니 이들 문화는 모두 동이족 문화다.
(7) 나무를 받쳐 거주했다.(간란(干欄)). 파군(巴郡) 강주현(江州縣)은 지세가 가파르고 험하여 모두 중옥누거(重屋壘居: 이층으로 쌓아 만든 집)였고, 이 중옥누거는 바로 간란(干欄: 큰 나무에 의지하여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은 것)에서 전해온 규칙이다. 중경시(重慶市) 박물관 에 소장되어 있는 호뉴순우(虎鈕錞于)에서 ‘간란’식(동이족 가옥) 가옥의 도안을 볼 수 있다. 사천 남충(南充)지역의 동한암(東漢岩) 묘석(墓石)에 새겨 있는 도안에도 간란식 건축이 있는데, 가옥은 2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나무 한 그루로 사다리를 만들어 올라간다. 당원진(唐元稹)은 통주(通州: 지금의 사천 달현(達縣))의 풍속에 대해 기록하여 말하기를 “평지는 겨우 1경(頃: 논밭의 면적 단위. 1경은 백 묘(2만 여 평)) 정도밖에 안되었으므로, 각란(閣欄)은 모두 소거(巢居: 나무 위의 집)와 비슷했다.”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주석하여 말하기를 “파인은 산비탈에 나무를 세워 많이 거주했으며, 스스로 각란두(閣欄頭)라 했다.”고 했는데 다시 말하면 이 역시 각란식 건축이다.
(8) 소금을 만들었다. 사적에 기재되어 있는 바에 의하면, 이르게는 늠군시대에 염수(鹽水) 염양(鹽陽) 등 염(鹽)을 이름으로 하는 지역이 파인이 입신출세하는 이야기 속에 일관되게 나온다. 《수경주 이수(水經注 夷水)》에서 말했다. “이수(夷水)에 온천이 있는데, 노인들이 서로 전하기를 이 샘에서 먼저 소금이 나온다고 하였고, 지금의 물에 소금기가 있어 이수(夷水)에 염수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이 역시 그 중 하나다.” 또한 염양(鹽陽)의 지역에서는 ‘어염(魚鹽)이 나오는 곳’이 있었다. 한 대(漢代)의 남군(南郡) 무현(巫縣: 지금의 사천 무산현(巫山縣)) 파군 구인현(朐忍縣: 지금의 운양현(云陽縣) 서쪽)에 모두 염관(鹽官)이 설치되었다. 임강현(臨江縣: 지금의 충현(忠縣))의 남쪽에 염정(鹽井)을 운영하는 집이 있었고, 무계수(巫溪水: 지금의 대령하(大寧河)에 염정이 있었다. 이수(夷水: 지금의 청강(淸江))에서 사천 운양(云陽) 충현(忠縣) 파인의 주거지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금을 생산하는 지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 술을 빚었다. 파인은 두우(杜宇) 교민이 농업에 종사하기 이전에 이미 농업에 종사했고, 비교적 빨리 술 빚는 기술을 장악했다. 성홍(盛弘)의 《형주기(荊州記)》에서 “남향(南鄕) 협서(峽西) 80리에 파향촌(巴鄕村)이 있는데, 술 빚는 것을 좋아하여 속칭 파향주(巴鄕酒)라고 한다.”고 했다. 《수경주 강수(水經注 江水)》에도 말하길 “강수의 경어복(經魚復: 지금의 봉절현(奉節縣))의 고릉(故陵) 북쪽 파의 왼쪽 기슭에 파향촌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술 빚는 것을 좋아하여 속칭 파향청군(巴鄕淸郡)에서 나온 명주(名酒)라고 했다.”고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파향촌은 영안궁(永安宮: 지금의 백제성(白帝城))의 서쪽에 있다. 고고(考古)와 민속 문화가 반영하는 상술한 파문화의 특징은 고대 파인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 방면의 주요 면모를 표현했고, 이는 후에 같은 지역의 토가족 문화가 출현하는데 비교적 많은 영향을 주었다. *鷄與生兒育女(닭과 아들, 딸을 낳아 기르는 것과의 관계)
土家族(토가족, 중국 소수 민족의 하나로 주로 호북성 호남성 등지에 거주하며 대부분 농사에 종사)의 부녀자들은 출산을 했을 때, 남자아이를 낳으면 사위는 가장 좋은 수탉 한 마리를 대바구니 안에 넣고 예쁜 토가족 꽃무늬 천으로 덮은 다음 장인집으로 가서 기쁜 소식을 알렸고, 여자 아이를 출산하면 사위는 곧 가장 좋은 암탉 한 마리를 대바구니안에 넣어 똑같이 예쁜 꽃무늬 천으로 덮개를 만들어 장인집으로 가져가서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암탉을 보내든 수탉을 보내든 처가집으로 가는 도중에 대바구니안의 닭을 공손하게 늙은 무당의 神像(신상) 앞에 두었는데, 이것은 세상에 태어난 아이를 이 무당의 신상앞에 두면 아이를 정성들여 키우는 것을 도와주고, 재앙을 피하고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예시했다. 여기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얘기가 있다.
武陵山(무릉산) 아래에는 장작을 패서 생활하는 나무꾼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결혼한지 십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었다. 어느 날 부부가 산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데, 산 중을 날아 나오는 닭 한쌍을 보았다. 남편이 얘기하길 "우리는 저 한쌍의 닭보다 못하구려, 그들은 여전히 알을 낳아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으니 말이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너무나 화가 나서 오래지 않아 병이 생겼고, 날이 갈수록 병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이렇게 되자 나무꾼은 너무 바빠서 죽을 지경이었고, 어느 날은 너무 피곤해서 신기한 잠들어 버렸다. 그는 꿈속에서 南天門(남천문)에서 날아오르는 한 쌍의 비범한 닭을 보았는데 그에게 말하길 "우리는 王母(왕모, 祖母에 대한 존칭)께서 보내셨습니다. 당신 부인의 병은 우리의 고기로 몸을 보양하면 나을 겁니다." 나무꾼은 잠을 깬 뒤 참 이상한 꿈이라고 여겼다.
이튿날, 그는 산에서 또 장작을 패고 있었다. 그때 마침 산중턱에서 鄒곯�(남방천) 하늘을 날아오르는 여러 가지 빛깔의 닭을 보았는데 그것들이 나무꾼 앞에 떨어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무꾼이 생각하길 "어제 꿈이 영험한 것이었나? 우선 집으로 가져가야겠다." 집에 돌아와서 나무꾼이 닭을 죽이자, 두 마리의 닭이 각각 3번씩 소리치니 입에서 안개 같은 작은 물방울이 나왔다. 그것은 곧 하늘로 사라지고 단지 고기밖에 남지 않았다. 나무꾼은 닭을 익혀 부인에게 주었는데 부인은 의외로 고기를 모두 다 먹었다. 그 이튿날, 병은 다 나았고, 오래지 않아 더욱 기쁜 일이 생겼는데, 아들 하나, 딸 하나 쌍둥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중년에 자식을 얻은 나무꾼은 너무 기뻐서 좋은 닭 한 쌍을 골라서 대바구니 안에 넣고 土花(토화, 중국목화)로 만든 천을 덮어 장인 집에 보냈다. 나중에 나무꾼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닭이 그들에게 아이를 점지해 준 신령스러운 동물이라 여겼다. 이리하여 닭은 토가족 사람들에게 자식을 얻을 수 있는 부적처럼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