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옛 하이텔 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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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 속의.. 이회택
제가 원체 기억력이 형편없어, 약간 틀릴 수도 있겠지만 생각나는대로..
제 기억에 남는 축구 선수들은 69년, 소위 멕시코 월드컵 15-A조 때부터
입니다. 축구계의 영원한 스승 고 김용식옹이 대표팀 감독, 작고한 손명
섭씨가 코치였던 양지팀(중앙 정보부/현 안기부 소속)이었죠. 이때 스트
라이커, 그때 포지션으로 센터포드(CF)가 이회택입니다.
센터포드와 현재의 TOP 포지션을 스트라이커로 한다면 계보는 이런 순서
일겁니다. 이회택, 김재한, 최순호, 황선홍, 최용수.. 김종부가 있었지
만, 계보는 아닌것 같습니다. 김주성, 차범근은 센터포드는 아니였지요.
여기에 제가 어른들한테 귀동냥해서 안 선수가 있다면 일제시대 때 김영
근(?), 이회택 바로 앞 세대인 최정민씨를 손꼽을 수 잇겠습니다.
김영근씨는 전설적인 발 재간을 가진 선수였답니다. 함경도 분으로 아는
데.. 흔히들 볼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를 따질때, 공을 발 바닥으로 다룰
줄 아는 정도로 따진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공이 발 바닥에 붙어 다
니는 것 같은 모습... 저는 이런 경우를 이태호 선수에게서 가끔 보았습
니다. 공을 발 바닥으로 끓어 땡기고 밀고 하면서 제어하는 것이죠. 재
작년인가 유럽 컵에서 크로아티아의 수케르가 골 키퍼를 농락할 때도 언
뜻 본 기억이 납니다. 아! 부산 대우의 아미르도 그 짓(?)을 드물게 하
는것을 보았었지요. 탄성이 저절로 나오지요.
최정민씨는 70년대인가 80년대초에 대표팀도 맡았었지요. 지병(당뇨?)이
있어 고생이 많았었던 걸로 아는데, 작고 하셨죠. 그는 50년대 말, 60년
대 초에 활약했던 스트라이커로 압니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에 가면 차범
근을 기억하듯이, 70년대엔 최정민씨를 동남아시아, 대만 등지에서 기억
한것으로 압니다. 그 세대에 어울리지않게 체격도 컸고, 빠르고 했던 선
수로 압니다. 제 육촌 형님이 최정민씨를 아주 칭찬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기억에 남는 첫번째 스트라이커 이회택! 저는 항상 그
의 이름 앞에 풍운아라는 말을 붙입니다. 풍운아 이회택! 60년대 말 70
년대 초에 팬들은 그냥 "회택이!"로 불렀습니다. "우리 회택이!"
키는 168, 백미터 11초대, 깡다구 엄청났지요. 깡패수준^-^; 그는 경기
도 김포 출신입니다. 부친이 이북에 계시는 이산가족이지요. 남북 통일
축구때 그는 이북의 부친을 상봉했었지요. 월남해서 할아버지와 함께 산
이회택은 그래서 "고아"로 알려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아주 강인한, 독
기가 철철 넘치는 반면, 정도 있는 사람..
아! 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축구 잘하는 사람중에 상당수가 이북출신입니
다. 평안도, 함경도 사람들이 축구를 잘했지요. 기골이 장대하고 깡다구..
지금도 원로분들중에 이북 말씨 쓰는분이 많은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동북고출신, 양지팀, 해병대 복무후 늦은 나이에 그당시에는 별 볼일 없
는 한양대에 입학을 합니다. 그후 포철에 입단했지요. 평탄한 선수 코스
가 아닙니다. 풍운아... 그런 연고로 포항을 이끌었고, 지금은 한양대
의 축구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는 69년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양지 팀이 유럽원정을 갔을때 독일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플레이를 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당시 귄터네처등
이 소속된 보루시아 MG에서 그를 스카웃 할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그는 70년대 당시 대표팀 지도자들 한테는 엄청 미움을 산 선수입니다.
그래서 그는 포악하다느니, 깡패 같다느니 하는 악담을 많이 들었지요.
그가 그당시 어느 주간지(선데이 서울류.^-^;.)에 밝힌 내용은 이렀습니
다.
"나는 직선적으로 말을 하는 스타일이다. 축구협회의 어른들이 나를 미
워하는 것은 우리 대표팀 선수들 수당을 코치, 감독이 다 가로채 버리는
데, 선수들이 후환이 두려워 말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것 못보는
사람이다. 그래 내가 총대를 메고 우리 돈 주시오! 했더니 나보러 버릇
없는 sae끼니..뭐니 한다. 나 열받아서 받아 버렸다.".. 등이지요.. 허허..
그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패전의 책임을 회택이가 다 뒤집어 쓰
자 머리 빡빡 깍고 절에 들어가 축구연습을 하기도 하고..그랬더니 당시
팬들이 우리 회택이가 빡빡까고 잠적했다! 살려내라! 이 ssi발놈들아!!!
아우성을 치고... 하하...
그 당시 운동 선수가 그랬었던 것처럼, 주먹(!)을 쓸 줄아는 선수요, 그
래서 후배들은 그를 엄청 무서워한 대신, 확실히 챙겨주는 선배의 역할
을 했던 것으로 압니다. 소위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카리스마...
마치 포항을 우승 시키고, 미련없이 바턴을 허정무에게 넘기고 떠났듯이..
한때는 지긋지긋한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축구계를 떠나 기름장사하다 홀
랑 날리고.. 다시 축구계에 컴백..
그의 인맥이 축구계에 상당한 것으로 아는데, 그의 이런 보스 기질이 한
몫을 하는 것이죠. 박이천씨가 그의 고교 1년 후배인데, 엄청 맞고 자랐
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대신 확실이 챙겨 주는 60년대식 의리의 싸
나이 이회택.. 그의 경기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한 장면이 많습니다. 아
주 대단했어요. 와! 소리가 절로 났던 기억.. 그만 주절거려야 겠군요.
집에 가야 허는디..
아! 이 당시(60년대 말, 70년대 전반)에 그 말고도 공격수(포드,하프)로
이름을 날린 선수로는 제가 무지허게 좋아했던 레프트인너 정강지, 레프
트 윙 정병탁, 이이우,홍인웅, 서윤찬, 임국찬, 박이천, 정규풍, 서윤찬
등이 기억납니다. 그 뒤를 이어 김재한, 김진국, 차범근, 고재욱, 이차
만, 김강남/김성남 형제, 허정무... 등이 공격의 대오를 형성했던 기억.
김재한에 대해선 나중에 시간이 나면.. 더듬어 보겠습니다.
아주 특이한 선수였죠.
음 죄송.. 오늘은 이만...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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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의 풍운아' 이회택 론 스타열전
내가 이회택(李會澤)이라는 이름 석자와 처음 맞닥뜨린 것은 구린내 등천하는 시골집 뒷간에서 ‘큰일’을 치러내면서였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으니 어림잡아 1972년경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휴지 대용(代用)으로 뒷간 한 켠에 비치해두었던 철 지난 썬데이서울(당시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대중잡지였다)을 뒤적이다가 문득 석유호스를 입 가까이에 댄 채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는 개성있는 외모의 축구선수 한 사람과 조우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그라운드의 풍운아’ 이회택이었다.
내용은 뭐 ‘국가대표 골게터 이회택이 지긋지긋한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축구계에 염증을 느껴 축구화를 벗어던지고 석유장사에 나섰다’는 허접한(?) 이야기였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기사내용이 꽤 흥미롭다 싶어 나는 해당 페이지를 북 찢어서는 ‘본연의 목적’에 쓰는 대신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어었었다.
이를테면, 그것이 이회택과 나와의 첫 만남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얼마 뒤 나는 그가 당대 최고의 축구스타라는 걸 실감할 수 있는 몇 가지 소문을 연달아 접하게 되었다.
내 귀에 가장 먼저 포착된 소문은, 포항제철이라는 굴지의 철강회사가 이회택을 간판으로 하는 준프로급 축구팀을 창단하기로 하였다는 소식이었다.
미상불, 국내축구라고 해봐야 국민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 외환은행, 농협 등 금융권과 육군, 해병대 등 ‘군바리’팀이 겨우 명맥을 잇던 황량한 시절에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대표적 철강회사가 축구팀을 창단한다는 소식도 흥미로웠거니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포철 사장 박태준이 '이회택만은 반드시 잡으라' 했다는 언론 보도가 내 구미를 자못 자극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즉각 이회택에 대한 내사(?)에 착수했다.
도대체 어떤 선수인데 그 작달막한 축구선수가 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 내 궁금증의 주된 이유였다.
내사(그래봐야 주로 스포츠 주간지를 사모으는 것이었지만) 결과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내가 뒷간에서 비로소 이름 석자를 접할 정도였던 그 ‘이회택’은, 알고 보니 이미 한국축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간판 스트라이커였던 것이다.
당시 그가 어느 정도의 선수였는지는 얼마 전(2005년) 한 월간지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 한 토막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할까 한다.
“…이회택(57)은 축구가 최고의 국민스포츠였던 60∼70년대 1m 67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귀신같이 골을 잡아내던 ‘국민스타’였다. 약관(1966년)의 나이에 첫 태극마크를 달았던 이회택은 “당시 대통령이 부럽지 않았다”고 했을 만큼 인기가 드높았다. 이이들은 ‘떴다 떴다 비행기’란 동요에 ‘이회택’이란 이름을 넣어 흥얼거렸을 정도였다.“
아닌게 아니라, 이회택의 복귀무대이자 포항제철의 처녀출전무대였던 ‘대통령배 전국축구선수권대회’는 그야말로 이회택을 위한 잔치무대였다.
국내 실업팀은 물론 대학팀까지 망라하여 자웅을 겨룬 이 대회에서 포항제철은 오석재라는 걸출한 신인이 버틴 건국대와 결승전에서 맞붙었는데,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을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매운 3만 관중 앞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상은 와!하는 탄성이 도처에서 연발할 정도로 ‘환타스틱’했던 것이다.
특히 후반 중반, 오른쪽에서 넘어온 크로스를 가슴으로 컨트롤한 뒤 떨어지는 공을 넘어지면서 골문을 향해 터트린 그의 통렬한 터닝슛 한방은 펠레에 비할 바 아니라는 찬사와 함께 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었다.
경기는 결국 포항제철의 승리(2:0)로 끝났고, 동대문운동장 잔디그라운드는 순식간에 뛰쳐나온 관중들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이회택의 화려한 재기에 열광한 5천 여명의(당시 중계방송을 하였던 조춘재의 추산) 관중들이 어느 순간 일제히 그라운드로 뛰쳐 나와 그를 에워싸고 행가래를 치는 진풍경이 꽤 오랫동안 펼쳐졌던 것이다.
기실 남미축구판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연출되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거니와 앞으로도 좀처럼 보기 힘든 희귀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다음으로 들려온 그에 관한 소식은 우리 집 ‘보물1호’였던 금성사(GOLD STAR) 라디오를 통한 해외에서의 활약상이었다.
”…한국 파고듭니다. 박이천 선수 한 사람 제치고 정강지 선수에게 패스, 정강지 센터링, 이회택 잡았다. 슈우웃 고올인, 골인됐습니다. 한국 고올인.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한국이 골을 넣었습니다….”
야심한 시각, 머리맡의 진공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이광재, 혹은 강창선으로 대표되는 중계 아나운서의 열띤 목소리를 통해 나는 해외에서의 활약상 또한 내 두 귀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즈음 그에게 따라다닌 별명은 ‘아시아의 포범’이었다.
내가 축구라는 운동에 광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얼추 이때쯤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가수 김상희는 당신을 알고부터 사랑을 알았다고 흥얼거렸지만, 나는 이회택을 알고부터 축구라는 운동을 알게 되었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축구 100년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선수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은 편이 못된다. 그 중에서도 스트라이커 계보는 한 손으로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야기할 때 흔히 최정민, 이회택, 차범근, 최순호, 황선홍 등을 거론하곤 하는데, 그 중에서도 ‘천부적 골잡이’라고 불릴 만 했던 선수는 이회택 정도가 고작이었다는 것이 근 삼십년 변하지 않는 나의 생각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축구인생은 또다른 의미에서 그의 '천부성'을 방증해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회택의 축구이력을 들여다보면,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였음에도 불구하고 축구와 연(緣)을 끊으려 했던 흔적들이 아물지 않은 상채기처럼 곳곳에서 드러난다.
혹은 특유의 반항아 기질이 발동해서, 혹은 빅매치에서 골을 터뜨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는 축구화를 벗어던지고 기름(석유)장수로 변신하는가 하면 머리 빡빡 깎고 사찰에 칩거하는 등(이 점 때문에 그는 그라운드의 풍운아라는 별칭을 얻었다) 기행(奇行)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돌출행위를 수차례 반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꽤 오랜 기간 축구와 동떨어진 생활을 하다가도 일단 그라운드에 복귀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여전히 탁월한 골 감각을 보여주었고, 늘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이회택 자신은 오랜 공백기에도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만들기가 다른 선수들보다 수월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지만, 우리 축구사에 한때 축구천재로 칭송받다 흔적없이 사라져간 선수들이 꽤나 많음을 상기해볼 때 이는 참으로 불가사의 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내가 그에게 ‘천부적’이라는 수식어를 감히 갖다 붙이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쯤되면 혹자는 '그래봤자 아시아권에서나 놀던 선수가 아니냐'며 그의 기량을 폄하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조금만 뒷바침 되었어도 유럽진출은 물론 어쩌면 게르트뮈러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스트라이커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격찬을 수도 없이 들었던 선수가 이회택이었다.
실제로, 70년대 초반 한국 국가대표 청룡팀을 잠시 지도하였던 독일인 감독(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은 이회택을 일컬어 “펠레에 절대 뒤지지 않은 뛰어난 기량의 보유자”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으며(mbc라디오 스포츠드라마에서 인터뷰로 소개되었다), 69년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양지(일명 실미도팀) 팀이 유럽원정을 갔을때 독일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당시 귄터네처 등이 뛰던 보루시아 MG에서 그를 스카웃 할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펠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회택은 실제로 펠레와 기량을 맞겨룬 적도 있었다.
1970년대 중반 국가상비군과 펠레의 산토스팀이 맞붙은 친선경기가 그것이었는데, 이 경기에서 그는 비호같은 몸동작으로 상대진영을 돌파하다가 2:1 패스를 한차례 주고받은 다음 그림같은 중거리 슛으로 동점골을 잡아내는 '원맨쇼'를 펄쳐 우리 국민로 하여금 또 한번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게 하였었다.
그런가 하면, 당시 그에 대한 팬들의 사랑은 유명 연예인들이 울고갈 정도로 가히 폭발적이었다.
일례로, 80년대초 mbc 라디오 프로그램 '스포츠 쇼'에서 진행자였던 이향렬 기자는 그를 일컬어 '혼자서 서울운동장을 가득 메우게 할 수 있는 선수로 축구협회 총람에 기록되어 있다'고 소개할 만치 6~70년대 그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인기의 원천은 파워 넘치는 그의 플레이스타일에 있었다. 167센티미터에 불과한 짧달막한 신장에도 불구하고 100미터를 11초8에 주파하는 준족에 뛰어난 개인기까지 겸비하였던데다 경기스타일 또한 다이나믹하여 당시 언론에서 '파워포워드'라는 표현을 즐겨 썼을 만치 역동적이고, 빠르고, 저돌적인 공격수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6~70년대 경제성장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총 매진하였던 우리 국민성을 함축해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공격수가 바로 이회택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찬사라고 나무랄텐가?
당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이자 '깡다구' 또한 대단(혹자는 거의 깡패수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한 선수이다보니 상대 수비수에게는 마크하기 아주 곤란한 선수로 '낙인찍힌' 선수가 이회택이었다.
70년대 중반인가, 인도네시아와 맞붙은 '박스컵' 결승에서 이회택만 찰거머리처럼 따라다니던 수비수(당시 KBS의 해설위원 선영재는 '저 선수 공차러 나온 게 아니라 오직 이회택만 따라다니기 위해 나온 선수예요'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처음부터 축구공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이회택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닌 희한한 선수였다)가 있었다.
가뜩이나 상대 수비수의 집중 타켓이었던데다가 전담마크맨까지 졸졸 따라다니자 볼이 공급되기는 커녕 어느순간부터는 숫제 없는 선수로 간주한 채 경기는 진행되고 있었다. 둘은 마치 마실다니는 시골어른들처럼 함께 그라운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관중석에서는 폭소가 연발하였다.
그 또한 볼거리라고 생각했던지, 텔레비젼 카메라도 집요하게 두 사람의 행적을 좇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경과하였을 즈음 관중석에서 갑자기 탄성이 터지면서 상대 수비수가 자기팀 골문 근방에서 얼굴을 감싸진 채 쓰러졌다. 심판이 안보는 틈을 타 이회택이 상대 수비수의 따귀를 오지게 올라붙였던 것이다.
이후 상대 수비수의 찰거머리 수비는 한결 느슨해졌고, 기회를 노칠세라 이회택은 물찬 제비같은 날랜 몸놀림으로 상대 문전을 마구 휘져어 결국 우리팀이 6:1로 크게 이기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회택은 보스기질이 뛰어나 따르는 후배들 또한 대단히 많았다. 특히 동 시대의 또다른 축구스타이자 동북고 1년 후배인 박이천은 그에게 엄청 맞았다는 풍문에도 불구하고 ‘의동생’을 자처할 정도로 그를 추종하였으며, 가요계의 전설 조용필 또한 대마초 사건으로 매우 어렵던 시절 이회택 '형님'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노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술회하였을 정도로 그는 후배들을 확실히 챙겨주는 보스로서도 유명세가 대단했다.
한편, 이회택이 약관의 나이에 국가대표 센터포워드로 선발되어 아시아를 쥐락펴락 하기 시작하자 많은 이들은 그가 아주 어린 나이부터 공을 찬 ‘신동’과였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 건 놀랍게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깡통이나 세끼줄을 꼬아 만든 공을 찼던 그는 김포농고(현재 김포종고) 1년 때까지 정규선수가 아니었다.
축구선수가 된 동기를 그는 2005년말 모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다.
“고1 겨울 무렵에 동네 선수 말고 진짜 선수가 되고 싶더라고. ‘선수가 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11월 한양공고를 찾아가 한달을 보냈는데 빠르기는 한데 기술이 없다고 집에 가라고 하드만. 다음해 1월 학교 선배의 삼촌(백원기씨)이 감독으로 있는 영등포공고를 소개받아 거기서 8개월간 있었지.”
영등포공고 정식선수로 등록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63년 6월의 제12회 전국고교대회에서 이회택은 데뷔전이었던 부산상고를 상대로 2골을 몰아 넣었다. 수중전으로 열렸던 이 경기에서 그는 야생마처럼 그라운드를 누벼 단번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축구명문 동북고의 박병석 감독은 그가 무적선수임을 알아내곤 한해 꿇은 1학년으로 스카우트했다. 그리고 그는 정식선수가 된 지 불과 2년만에 청소년대표 주전으로 발탁되어 주위를 놀라게 하더니, 그 1년 뒤 일약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되는 눈부신 변신을 거듭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교졸업 당시 이렇듯 '떡잎'이 시퍼렇던 이회택이었던지라 그를 잡기 위한 대학팀들의 스카웃전은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할 만치 치열했었는데, 특히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이 이회택을 놓고 벌인 스카웃전은 한편의 첩보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결국 이회택은 몇해 뒤 한양대라는 전혀 엉뚱한 대학을 선택하고 말았지만...... (후에 김덕기 기자가 모 스포츠지에 연재하였던 '이회택 스카우트 비사'를 날로 올리도록 하겠다)
돌이키건대, 고등학교 2학년의 초여름, ‘촌놈’의 상징같은 존재였던 나는 이회택의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홀홀단신으로 경춘선 열차에 몸을 싣는 대모험(?)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비록 춘천이라는 수부도시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신분이긴 했지만, 근본이 강원도 '감자바우'였던 나는 시내 나들이조차 변변히 못해내던 숙맥이었다. 그런 숙맥이 서울의 중심부로 진출하겠다고 당돌한 결심을 한 것은, 순전히 이회택의 경기를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는 일념 그 하나 때문이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경춘선 열차 속에서 만난 세련되고 뽀시시한 정신여고 여학생 3명에게 1시간이상 능멸(?)을 당해 홍당무처럼 벌개진 낯짝으로 겨우 내린 청량리역에서 또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비로소 도착한 서울운동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물론 이회택의 팀(포항제철)이 결승에 올랐다는 것은 그 자체가 흥행보증수표였기에 어느정도 예견된 장면이기도 했지만, '토종 감자'인 내게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콩죽같은 땀을 비질비질 흘려대면서 겨우 서쪽 골대 뒤편에 엉덩이 한짝를 걸치고 땀을 식히면서 한참을 기다리려니 드디어 선수들이 출전하기 시작했다.
한데,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이차만, 최재모, 황재만, 이영무, 조광래, 박성화 등 당대 의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특유의 주황색 웃도리에 검은 팬츠 차림으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우리의 이회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회택이가 안보여….” (당시 축구팬들은 그를 일컬을 때 “회택이!” 혹은 “우리 회택이!”라고 하였다)
“그러게 말이여. 이거 어떻게 된 거야. 후반전에 내보내려고 그러나?”
“야, 어제까지 방방 날던 앤데, 후반전에 내보낼 이유가 뭐있냐? 그리고 오늘 결승전인데 왜 골게터를 후반전에 내보내?”
“그러게……. 어제, 감독하고 한바탕 벌인 건 아닐까? 회택이 한 성질 하잖냐.”
“얌마, 팀이 결승까지 올랐는데, 열쳤다고 한바탕 벌이냐? 이런 덜떨어진 세끼하고는…….”
이런 시덥잖은 잡담들이 귓전을 간지럽히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야, 우리 회택이 내보내라." 하는 고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회택을 보기 위해 운동장을 찾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목청을 한껏 돋운 채 이렇게 외쳐대는 것이었다.
“에고, 이회택은 경고 누적으로 오늘 출전할 수 없다네요!”
순간 전신에서 기가 모조리 빠져 달아나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의 그 당혹감은.... 내 필력으로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는 정도로만 언급하고 일단 넘어가려 한다. 이회택의 경기는 커녕 얼굴조차 보지못한 채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의 그 막막함이란......
한데, 낙태한 고양이상으로 경기장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일단의 관중들이 갑자기 스텐드 앞쪽으로 마구 쏠려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직감적으로 '이회택이다!' 싶어 나도 스텐드 앞쪽으로 튕겨지듯 튀어나갔다. 예상했던 대로 이회택이 스텐드 바로 아래에서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없이 '이회택!'을 연호하면서 그의 출장을 독촉하기 시작했다. 경기를 중단하고 축구협회 간부회의를 소집한다 한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를테면 나훈아가 불참한 '나훈아 쑈' 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꽤나 사납게 목청을 돋우웠었다.
그러나 이회택은 그런 돌발적인 상황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던지 얼마 뒤 운동장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고, 상당수의 관중들이 그를 따라 운동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럴 때의 그의 모습은, 마치 당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양김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의 실물을 볼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오지 않았다.
한데, 조영남이 읊조렸던가. 인생은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것이라고.
내가 이회택을 만나려고 '대모험'을 감행했다 실패한 지 어언 30년 뒤,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이회택을 어처구니없게도 축구의 'ㅊ'자도 모르던 나의 딸아이가 만나고 와서 그의 사진 한 장을 불쑥 내밀면서 “아빠, 이 아저씨 알아?”하고 물어왔을 때, 나는 인연의 끈 - 비록 내 일방적인 것이긴 해도 - 이란 후대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이어진다는, 금강경에나 적혀 있을 법한 담론을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사연인 즉 이러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 축구가 4강의 신화를 이루고, 나라 안이 온통 축제분위기에 도취되어 흥청거리던 그해 여름, 둘째가 ‘추억만들기’라는 그럴싸한 구실 아래 친구 한명과 김남일(당시 전남팀 소속이었다)을 만나러 전라남도 광양으로 떠나는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내가 둘째의 이 같은 돌출행동을 ‘사건’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아이 또한 나 못지않게 길을 못찾기로 소문난 ‘길치'였기 때문이다.
이 놈 어디 두고 보라지, 오늘 밤 안으로 초인종을 마구 눌러 대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질 것이다. 이렇게 주절거리면서 나는 녀석의 돌출행동을 평가절하하기에 조금도 인색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남일의 집(인천)에 찾아가서 부모님으로부터 라면을 한 그릇씩 얻어먹는 당돌함까지 보여준 둘째 일행은 기어이 그날 밤 야간열차로 전라남도 광양까지 내려갔고, ‘오매불망’ 꿈에도 그리던 김남일을 직접 만나보고는 여기저기 들렀다가 사흘 뒤 거지행색이 다 되어 귀가했다.
한데 정작 그의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은 김남일의 사진이 아니라 당시 전남팀 감독이었던 이회택의 사진이었다. 김남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떤 할아버지같은 분이 우산을 쓴 채 옆을 지나치면서 ‘남일이 너무 늦지마라’ 하기에 높은 사람인가보다 싶어 엉겁결에 한 컷을 찍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바로 코밑에서 찍은 듯 목덜미깨에 박힌 검은 점까지 선명한 그 사진을 한동안 들여다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이회택의 코앞에 서있는 듯한 착각이 다 들 정도였다.
한동안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던 내가 자못 감회어린 목소리로 딸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만 우상이 있었던 것이 아니야. 어른들에게도 우상은 있지. 여기 사진속 이 할아버지가 아빠의 우상이었단다. 너희에게 김남일이 있다면 아빠에겐 이회택이 있었어."
딸아이를 통해 어린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이회택을 30년만에 만나게 된 이 기막힌 인연(?) 이 상승작용을 한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 나는 이회택이 경영한다는 장안의 어느 일식집 안방에서 이회택과 단둘이서 호젓하게 정종잔을 기울이며 정담을 나누는 영광(?)을 꽤오랫동안 누렸었다.
다음날 아침에야 비로소 그것이 한갓 꿈이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입맛이나 다시면서 한동안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고 누워있어야 했지만 ........
[부록]이회택 스카웃 비사 스타열전
‘풍운아’ 이회택.
1946년 10월11일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이회택이 첫 스카우트 대상이 된 것은 63년 6월이었다. 김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59년 김포중학교에 진학한 이회택은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기계체조 선수였다.
그러나 ‘걸음마를 하면서 축구를 했다’는 이회택은 축구가 좋아 기계체조를 때려 치웠다. 그리고는 또래를 모아 논두렁 축구팀을 만들어 학교 운동장과 광활한 김포평야에서 해가 질 때까지 공놀이를 했다.
62년 김포농고에 진학하자 축구에 대한 열정이 더욱 강해진 이회택은 선배들과 김포농고 축구팀을 조직, 김포 일대를 주름잡았으며 축구 실력은 당연히 발군이었다.
그러기를 1년. 2학년이 된 그는 63년 3월 축구화 하나만을 달랑 메고 상경, 한양공고 축구부를 찾아갔다. 고달픈 훈련생 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나 청운의 꿈은 한양공고 A감독에 의해 한달여 만에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A감독은 흙 속에 묻힌 ‘김포의 진주’ 이회택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
눈물을 머금고 한달여 만에 김포농고로 돌아온 이회택은 한달 뒤 영등포공고 백원기 선생의 부름을 받고 두 번째 상경을 했다.
백선생은 이회택의 타고난 축구 자질을 높이 사 그를 팀 훈련에 합류시켰고 한 달 뒤인 그해 6월1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12회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 선수등록도 하지 않은 ‘무적선수’ 이회택을 영등포공고 유니폼을 입혀 출전시켰다.
이회택은 이 경기가 첫 공식대회 출전이었으며 인생을 바꿔 놓은 경기였다.
영등포공고는 수중전으로 벌어진 부산상고와 첫 경기에서 2-1로 승리했다.
이회택이 2골을 모두 기록했다.이 경기를 지켜보던 고교 최강 동북고 박병석 감독은 빗속을 야생마처럼 누비며 골을 낚아내는 이회택의 플레이에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박감독은 주위의 축구인들에게 “저 선수가 누구지”라며 물었으나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첫 경기에서 축구인을 놀라게 한 이회택은 광주상고와의 2차전부터는 무적선수임이 탄로날까봐 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 치고 장구 치며 2-1 승리로 이끈 중앙무대 데뷔전인 부산상고와의 경기는 이회택이 어떤 인물인지 확실히 각인시켜 준 성공무대였다.
특히 고교 최강인 동북고의 박병석 감독의 눈길을 끈 것은 이회택이 가장 기대한 일이었다. 동북고는 임창수 김삼락 이풍길 등을 배출한 국가대표 산실로 일단 동북고 축구부에 들어가기만 하면 청소년대표가 보장될 정도였으니 경쟁 또한 치열했다.
이런 동북고 박감독의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니 한양공고에서 '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은 이회택으로서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한양공고에서 쫓겨난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이회택은 영등포공고 백원기 선생에게는 죄를 짓는 듯했으나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동북고로 가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이회택은 그해 8월 동북고 축구부 합숙소로 들어갔다.
그러나 2학년이 아닌 1학년이었다. 그나마 중학교 4학년, 5학년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회택의 축구인생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청운의 꿈을 이룬 이회택이 65년 청소년대표가 되면서 그를 잡기 위한 스카우트의 손길이 많아졌다.
가장 먼저 스카우트 제의를 한 것은 연세대였다.
그뒤 고려대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북고 은사인 박병석 선생이 창단 감독을 맡게 된 성균관대는 '이회택 노흥섭 최창선 고봉우는 우리 선수'라며 이회택의 입학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럴수록 이회택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63년 8월 동북고로 전학한 뒤 2년만에 청소년대표는 물론 국가대표 후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부쩍 성장한 이회택에게 집중 스카우트 공세가 펼쳐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먼저 스카우트 제의한 학교는 연세대였고 적극적인 곳은 고려대였다.
여기에 이회택을 청소년대표선수로 조련시킨 동북고 은사 박병석 감독을 창단감독으로 영입한 성균관대까지 뛰어들어 스카우트전은 3파전으로 발전했다.
연세대 ‘알카포네’ 김지성 감독은 서울 충무로 사보이호텔에 캠프를 차리고 동북고 출신 김삼락 최동욱을 앞세워 이회택 잡기에 나섰다.
동북고와 진주농고 출신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창단하려는 성균관대는 ‘의리의 사나이’ 이회택이 은사인 박감독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비교적 느긋한 입장이었다.
이회택의 후원자인 박종철 한국유리 경리부장을 앞세운 성균관대는 이미 노흥섭 고봉우 최창선 등 알짜배기 선수들에게 입학 약속을 받아놓은 터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이회택은 65년 12월이 다 지나는데도 어느 대학에도 약속은 커녕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
이회택은 마음속으로는 연세대를 가고 싶었으나 박감독이 눈에 밟혀 고민이 깊을 수 밖에 없었다.
이회택의 고민이 깊을수록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스카우트 관계자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해가 바뀌어 66년이 됐다. 입학시험 날짜가 가까워지자 고려대가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섰다.
연세대에 김감독이 있다면 고려대에는 고우체육회를 이끄는 거목 이병우 선생이 있었다.
이선생은 이회택 문제가 지지부진하자 스카우트 캠프인 돈암장으로 고려대 진학을 결정한 이회택의 동북고 동기인 제주 출신 이성철과 3학년 박영환을 불렀다.
그리고는 동북고 교장을 만나 입학원서를 받아오도록 임무를 부여했다.
고려대 스카우트 캠프인 돈암장은 돈암동에 있는 김강준 삼양염업 사장의 99칸 한옥으로 고려대 출신 운동선수는 누구나 한 차례 거쳐 가는 곳이었다.
고우체육회 이병우 선생으로부터 특명을 받은 고려대 행동대원 박영환과 이성철은 66년 1월 초 동북고 교장실에서 이회택과 그의 친척 형, 그리고 교장선생님 이렇게 5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교장선생님은 탁자 위에 놓인 고려대 입학원서를 응시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박영환과 이성철은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회택과 나란히 앉아 있던 친척 형은 고려대를 가지 말고 진로를 좀 더 생각하라며 박영환과 이성철의 애를 태웠다.
입장이 곤란해진 교장선생님은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을 수 없다고 했다.
다급해진 고려대 쪽은 "그렇다면 이회택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자"고 했다.
교장선생님이 이회택에게 "너의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기를 싫어 하는 이회택은 빨리 교장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고려대행을 반대하는 친척 형이 걸림돌이었다.
이회택은 "고려대로 가겠다"는 말을 던지고는 교장실 문을 열고 후다닥 뛰었다.
박영환과 이성철도 용수철처럼 일어나 이회택의 뒤를 향해 뛰었다.
장충동 파출소를 지나 수정약국으로 향하던 중 박영환은 뒤에서 누군가에 의해 일격을 맞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사복경찰이었다.
사복경찰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뛰는 박영환을 소매치기로 오인, 뒷덜미를 낚아챈 것이었다.
파출소로 끌려간 박영환은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풀려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덧 1시간여가 흘렀고 이회택은 커녕 이성철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낙담을 한 채 고려대 스카우트 캠프인 돈암동 삼양염업 김상준 사장 집에 오니 이회택이 이성철과 마주 앉아 불고기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1966년 3월 노흥섭 최창선 고봉우 등과 입학식을 갖고 성균관대생이 된 이회택은 5월16일 시작된 제2회 춘계연맹전을 끝으로 성대를 떠났다.
동북고 은사인 박병석 선생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성대를 갔지만 고려대나 연세대에 가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이회택은 이듬해 대학입학 때까지만 선수로 뛴다는 조건부로 김덕준 감독이 지도하는 석탄공사 유니폼을 입었다. 축구협회는 66년8월 메르데카배 3·4위전에서 인도에 패하자 대대적인 대표팀 개편을 했다.
이회택은 9월22일 확정된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12월9일 태국 방콕에서 막을 올린 제5회 아시안게임에 대표선수로 처음 출전했다.
예선 A조 첫 경기에서 태국에 0-3으로 패한 한국은 두 번째 상대 버마에도 0-1로 져 예선탈락했다.
이회택이 예선탈락의 불명예를 안고 여의도공항에 내리자 동북고 선배 김삼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세대의 이회택 확보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해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고려대와 성대에 참패를 당한 연세대는 이회택을 사보이호텔 캠프로 데려오는데 성공하자 ‘이제는 틀림없다’며 쾌재를 불렀다.
‘알 카포네’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한 김지성 감독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이회택을 맞았다. 이회택도 홀가분한 기분으로 연세대로 마음을 정했다.
곧바로 운동용구를 챙겨 김삼락과 함께 연세대가 마련해 준 승용차로 대전 유성으로 향했다.
한 달여를 유성에서 훈련하며 시간을 보낸 그는 67년 1월 입학시험 당일 서울로 이동했고 다른 수험생과 함께 입학시험을 치렀다.
며칠 뒤 상과대 경영학과 합격자명단에 이회택이란 이름이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이회택이 가장 가고 싶던 연세대에 합격한 것이다.
이회택은 우여곡절 끝에 67년 1월 연세대 상과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66년 성균관대에 이어 두 번째 대학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회택과 연세대와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성균관대를 중퇴하면서 입영연기 사유가 소멸된 이회택은 병역기피자가 돼 ‘군에서 부르면 언제든 입대한다’는 각서를 쓰고 66년12월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김형욱 정보부장은 북한이 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하며 세계를 놀라게 하자 67년 2월 3군 소속 선수를 주축으로 양지팀을 창설했다.
최정민 창단감독은 이영근의 협조를 얻어 유망선수 명단을 작성했고 명단에 포함된 선수 중 병역 기피자는 무조건 잡아들였다. 국가대표로 부쩍 커버린 이회택을 최 감독이 놓칠 리 없었다.
이회택은 연세대 입학시험을 치른 뒤 곧바로 축구부 숙소인 신촌 무악사로 들어가 연세대 선수들과 훈련을 했다. 훈련을 시작한 지 한 달여가 지난 2월 말 연세대 운동장 한쪽에 검정색 지프가 나타났다.
선수들이 훈련을 마치자 건장한 두 사내가 선수단 쪽으로 다가오더니 ‘이회택이 누구냐’고 물었다. 연세대 선수들이 손끝으로 이회택을 가리키자 대뜸 다가가 재차 이회택을 확인한 뒤 지프에 타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지성 감독이 이들에게 항의하자 붉은색 두 줄이 쳐진 중앙정보부 감찰실 신분증을 코앞에 보여주고는 그대로 운동장을 떠났다.
이회택은 곧바로 중앙정보부 이문동 장교숙소의 양지 팀 합숙소로 가 양지 팀 선수가 됐다. 연세대 입학식을 불과 며칠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강제 징집된 이회택은 육군 공군 해병대 중 복무기간이 가장 짧은 해병대를 택했다. 대부분 선수들은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이회택은 예외였다.
군번과 군복이 양지 팀 숙소인 서울 이문동으로 전달됐다. 결국 이회택 스카우트전 2라운드는 고려대 연세대도 아닌 해병대의 승리로 끝났다.
이회택 스카우트의 최종승자는 따로 있었다.
양지팀으로 끌려간 이회택은 여전히 부동의 국가대표팀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외환은행은 이회택의 제대가 가까워진 69년 5월 가장 먼저 스카우트 손길을 뻗었다.
외환은행은 입행을 약속하면 300만원의 위로금을 주겠다는 당근작전을 폈다. 300만원이면 당시 한옥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으로 적잖은 액수였다. 이회택은 ‘옜다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외환은행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연세대와 한양대가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마음이 흔들리면서 대학생이 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다. 그러나 외환은행에서 받은 300만원이 걸림돌이었다.
평소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안 쓰고는 못 배기는 의리파 이회택은 동료 선후배들과 어울리다 보니 어느새 150만원이나 되는 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김지성 연세대 감독은 300만원이라는 변수가 등장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69년 10월 축구계의 마당발로 통하는 김창기 한양대 체육부장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김부장은 뒤늦게 한양대에서 감독 겸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이회택의 동북고 선배 김삼락과 함께 이회택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김부장은 이 자리에서 시원스럽게 “외환은행에서 받은 돈을 책임지고 갚아주면 한양대로 오겠느냐”고 제의했다.
대학축구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한양대는 사실 이회택 스카우트에 모든 것을 건 상황이었으므로 150만원이나 되는 큰돈의 대납이 가능했다.
이로써 이회택을 둘러싼 대학팀의 스카우트전은 한양대의 최종승리로 막을 내렸다.
동북고를 졸업한 지 4년 만에 한양대 학생이 된 이회택은 그로부터 4년 뒤인 74년 2월 마침내 학사모를 썼다. -김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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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속의..이세연
태국 킹스컵에서 우리가 2,3연패의 위업을 달성할 시절, 우리측 골문 뒤
에서, 사납기 이를데 없는 태국 관중들이 모라모라 떠들면서, 팔을 휘둘
르고 난리가 아니었다.
나는 "쟤네들 나한테 유감이 있는 모양이네. 퇴장할때, 이러다 한 대 맞
는거 아냐? 경기장 어떻게 빠져나가지?" 걱정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보고 '구두쇠'라고 야유를 보내는 말이었다"
당시 한국팀의 수비는 그야말로 철벽이었다. 무실점 우승 아니면 1실점
우승을 할 정도였으니...
구두쇠 소리를 들을만큼 철벽을 자랑했던 골키퍼. 아들 이름을 태국을
이긴다는 뜻으로 "승태"라고 지었던 축구선수. 그 아들이 부산 대우이던
가에서 골키퍼로 활약하는 이승태이다.
이세연. 70년대의 대표적 골키퍼. 대학을 나오지 않은 축구선수. (이게
정상 아닌가요?) 키가 175세티 전후였었나. 하여튼 178이상은 절대 아니
었슴. 몸무게는 자기키에 100을 뺀 수치를 자랑하는 무게를 가진, 허벅
지가 내 허리만큼 굵었던 선수(난 왜 이리도 선수들 허벅지에 관심이 많
지? 변태인감?) 가슴팍이 역도선수 만큼 두껍고 단단했던 선수. 항상 스
포츠 머리를 한.. 전사. 투사. 골키퍼 이세연.
내가 왜 전사, 투사라고 서슴없이 말했냐하면..
그 앞에선 상대방 공격수가 쪽을 못썼기 때문이다. 심한말로 이세연과
신체접촉을 했다하면 그는 반쯤 죽을 것(^0^;)을 각오해야 했다. 아니
반쯤 죽였다. 그 육중한 몸매로 상대방을 무조건 짓누른다!, 공 잡으러
튀어 나오면서 그 특유의, 기계체조 선수를 방불케하는 덤블링으로, 공
과 함께 어찌됐던 상대방을 가격을 하든지 아니면 뭉게버린다. 당시 엄
청인기있는 레스링 선수 장영철의 두발당수를 능가(!)하는 그의 양발공
격을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난다고나 할까~~ 으~ 무시~
골키퍼의 기술적 영역을 넓힌(!) 그의 각종 격투기술(^-^;)을 전수 받은
골키퍼는 이제는 없다. 생각해 보라 75킬로그램을 상회하는 몸무게로 돌
진하면서, 경황이 없는 상대 골게터의 무릎, 가슴, 발목할 것 없이 치명
적 약점 부위를 파울을 교묘히 피하면서 가격을 하니..그 어떤 공격수가
함부로 그와 공 경합을 하겠는가!!.
당시 일본팀의 스트라이커는 일본 축구사의 최고의 선수인 가마모토 구
니시게였다. 가마모토를 한자로 쓰면 부본(釜本)이다. 그가 조선계라는
소리가 얼마전 나까다 조선계설이 있을때 잠깐 기사화 된것을 보았는데
하여튼, 그는 그 당시에도 그런 설이 자주 보도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부산이 본거지란 뜻이라나. 그는 완강히 부인했지만.. 내가 보기에 일본
축구사의 최고 선수이다. 179센티였던가 당시에는 보기 드믄 신체조건,
엄청난 두께의 허벅지(으~ 또 허벅지.. 얘는 허벅지만 보고 다니나... ),
대단한 개인기, 득점력, 그가 공을 잡으면 느껴지는 위기감.. 일본이 멕
시코 올림픽 동메달을 딸 때 득점왕 이었을 거다. 하여튼.. 그 가마모
토가 우리 문전에 볼이 떨어져 이세연과 경합을 하면, 아예 노골적으로
대쉬를 멈추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이세연을 기피했다.
하챦은 골 욕심 부리다 맞아 죽느니(!).. 볼을 주는 게 신상에 이로우니
까! 하하..
이세연 그는 그 특유의 덤블링도 멋있었지만, 세이빙 또한 기가막히게
폼났다. 마치 제비가 날르는 폼이랄까..
국제 경기에서는 그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골키퍼로서의 능력이
국내에서는 나의 적의의 대상이었다. 왜냐? 우리 선수들도 그 때문에 숫
하게 고꾸라졌으니까. 이회택과 경합을 벌일 정도로 대단한 공격수였던,
?인권(김인권 이었던가? 한때 포항제철팀의 코치도 했었던가요?) 선수의
무릎은 그와 문전에서 경합하던 중 짓이겨져서 선수 생활에 치명적 부상
을 입은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시셋말로 " 좋은 선수 많이 망쳐 놓았다.
이세연이..."
효창구장 시절... 이북에서 월남한 억센 억양의 중년들이 흥분조의 투로,
"저 쌍간나 X끼... 또 애 죽이누만..." 류를 꽤나 들었던 기억이다.
하여튼, 그는 골키퍼로서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
으로 나는 기억한다. 국제경기와 국내경기를 가려서 그랬으면 얼마나 좋
았을까 하고 지금도 생각한다.
어쨋던 그의 그 탁월한 방어 능력 때문에, 또 한명의 탁월한 골키퍼 변
호영은 맨날 후보 신세요, 당시 대표2진이었던 백호팀의 수문장을 벗어
날수가 없었다.
그 후 변호영은 홍콩 세미프로의 해봉팀(?)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장수한 결과 홍콩에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고, 지금은 재 홍콩교민중에
서도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세연 선수
는 얼마전까지 축구협회의 무슨 간부를 맏고있는 걸로 아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시는지..
그 이후 골키퍼는.. 권이운, 김황호, 조병득, 최인영, 김병지..등으로
대표팀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하겠다.
이세연 그를 보면 생각나는 유행가.. 그대~ 앞에만 서면, 나(공격수)는
왜 쫄아드는가~ 모.. 애모 때문이 아니라.. 무서우니까 그랬을 거다.
이만. 희미한 기억 속의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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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속의...서윤찬
우리 축구 선수들을 보며는 참 다양한 유형이 있다.
천안 일화의 박광현과 같이 터프한것을 넘어 이태리 고유의 축구인 칼치오
선수와 같아, 연전에 포항의 라데가 "박광현 같은 선수는 교도소에 가야한다"
고 일갈 할 정도로 무~쉬 무~쉬한 류가 있는가하면, 이태호나 최문식과 같이
"쟤, 서커스 하냐? "류의 현란한 기교파도 있고, 차범근, 변병주,박경훈과
같이 총알을 탄 싸나이류나 바람의 아들류도 있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류인데, 상대방을 완죤~히 무력화 시키는 한방의 스루
패스를 날리는 예술적 기질이 농후한 류도 있겠다. 최순호, 윤정환등이 이에
속할거다. 이밖에도 엄청나게 많은 류로 분류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축구라는 종목이 공을차는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보면 너
무나도 많은 스타일이 존재하는 그 이유와 같지 않을까 싶다.
약간 뻥을 치면... 세계의 문화의 종류만큼 다양할 것이다.
하여튼...
오늘은 이런 류 중에서, 너무도 황당한 류의 선수를 회상해 보고자 한다.
황당하다 함은.... "저거 축구 선수 맞어?..." 류 이기때문 아닐까 한다.
지독히 많이 뛰는 형태의 선수들이다. 마라톤을 했어도 성공했을법한 선수..
썬 파워류 선수...
서윤찬 선수. 1960년대 후반부에서 1970년대 초반기에 우리나라를 대표한 허
리진영중의 한사람. 양지팀, 청룡팀, 신탁은랭 소속, 키는 165 정도였을거다.
내가 중1때 168 정도 이었는데, 효창구장에서 눈대중으로 맞추어본 결과 나
보다 작았다. 무..진..장... 숏 다리... 아니 장농다리... 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가 하얀 스포츠형, 엄청 활발하고 괄괄한 성격 같
았다. 당시 포매이션으로보면 하프진영 이었는데, 이는 과거 링커나 현재의
미드필더에 해당 될 것이다. 공격과 수비를 모두 커버하는...
그는 한마디로... 오토바이 and 알카라인 건전지를 탑재한 썬파워 였다.
고등학교 책에 나오는가? 동물 분류체계를 세운 린네라는 학자가 있지요?
그가 동물의 분류를 종>속>과>목>강>문>계로 분류 했던가? (와! 대단~~~)
축구선수를 이 린네의 분류로 할라치면...
이 부류에 속하는 종(種)이 있다면 그것은... 동렬님의 글에도 나오는 "기도
하는 사마귀, 이영무" 정도이겠다. 그후 한참을 지나 전남팀의 최윤열이 비쇼
베츠시절 윤정환이를 커버할려고 그래도 많이 뛰었는데, 최윤열은 종,속은 같
지만 그 이하에서 많은 변이(^-^;)를 거친것으로 나는 관찰한다.
내가 좋아하는 부천의 김기동 선수도 최윤열과 비슷한 정도 아닐까?
하여튼, 이영무와 서윤찬은 같은 종일 뿐만 아니라 속,과,목,강 정도까지 같
은 사촌 지간이다. 몸매도 오십보 백보고, 뛰는 양도 오십보 백보였다. 찐드
기식 맨 마크도 비슷했고... 이 종은 막무가내로 상대방에게 덤비는데도 잘
다치지도 않는 비상한 특성이 있슴이 학계(?)에 관찰되었다는 낭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종은 지금 멸종(!)된것으로 보는게 타당할거다. ^-^;
모르지.. 또 돌연변이가 나타날지... 관찰되면 갈켜 주시압!
정말 지독한 선수였다. 효창구장을 먼지를 혼자 다 뒤집어 썼는지, 우쨌는지
한경기를뛰고 나면, 눈썹까지 노란 먼지로 뒤덮혀 있었고, 어느 경기에선간,
얼마나 빨빨거리고 뛰어나녔는지, 경기 끝나고 보니, 유니폼의 한쪽 소매가
없어져 버렸다. 상대 선수와 몸싸움 끝에 틋어진 것이었다.
그때 신탁은행 유니폼 상의가 감청색이었던것 같았는데, 소매만 흰색이었다.
그러하니, 반팔 소매가 없어졌지만, 그 속살이 허연 색이라 아주 조화로와
보였다. 생각해 보라! 축구선수 유니폼이 격투(!) 끝에 람보식의 소데나시가
(음.. 일본 말 같은데... 죄숑..) 되어버린 꼴을!...
그래도 이겨 우승했다고 누런이빨을 내놓고 웃는 그의 모습에서 참 천진난만
함(?이런 무례한 자 같으니... 감히 어른헌테...)을 엿볼 수 있었다.
이영무도 그렇지만 그의 선배인 서윤찬도 천부적 기술을 보유한것 같지는 않
았는데 도저히 남들이 흉내내지 못하는 기가막힌 장점은 하나 있었으니 남보
다 두배는 더 뛰어 다니는 그 독기였다. 오직 내 기억에 남은 서윤찬 선수
에 대한 기억은 뛰고 뛰고 또 뛰고... 패스, 막무가네의 찐드기형 상대방 마
크, 제끼면 또 달라 붙고, 그래서 또 제끼면 빤스를 잡아서라도 달라붙고, 자
빠지면 발딱 일어나 다시 달라 붙고... 아귀(!)가 따로 없었다...
그는 은퇴후 사업인가를 하다가, 잘 안되었는지 구속되어 형을 산적이 있었을
거다. 기업하다가 잘못하면 사기죄나 부도로 곧잘 구속되는 그런거 말이다.
아마 그랬을 거다. 한참전에 월간 축구지에서 그의 이름을 본 기억이 나긴
하는데, 축구 관련일을 하는것 같았는데...
축구에서 보여준 그의 그 성실성과 악착같음은 그가 인생에서도 꼭 성공하리
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돈많이 버세용!!! 서윤찬 선수~~
희미한 기억속의 .... 서윤찬 이었습니다.
[Re]희미한 기억속의...서윤찬
저의 회사 고문님...이랑 아시는 분이라...
거의 매일 얼굴을 마추치는 편이십니다.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저는 잘 모릅니다만
그냥 옛날엔 유명했단 어른들 얘기에
여기저기 뒤져보다.
정몽준회장님이랑 축구협회의원들 같이 찍은
사진을 보니까
맞는거 같아... 여기다 글을 한번올려봅니다.
저에게 살며시 비타오백이랑 빵한봉지를 놓아주시고
가신 깜찍한 면이 있으시고요...
암튼 감회가 새롭네요..
아직도 사업하시구요...
잘되셔야 할텐데... 아직은 모르겟구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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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속의...변호영
1970년 8월 중순 어느날 오후 1시인가.. 그날이 중복? 말복?이었을 거다.
뙤약 빛 아래의 성동원두 서울운동장(현 동대문구장)엔 정원 27,000명을
훨씬 초과하는 35,000여명이 통로고 뭐고간에 콩나물 시루처럼, 벼 이삭
에 붙은 메뚜기떼 처럼.. 가득 메운채 우리 대표팀인 청룡팀과 포르투갈
의 어느 프로팀이 죽기살기(? 생각해보라! 그 살인적 더위를 ...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런곳에서 축구를 하고...또...봤다...)의 경기를
치루고 있었다. 결과는 1:1 무승부였다. 우리로선 엄청난 선전이었다.
우리팀은 이회택이 선취 득점했고, 폴투갈은 에우제비오가 페널티킥으로
득점했었을거다... 물론 심판은 우리편이었지만... 흐~
그 포루투갈 프로팀의 이름은 '벤피카 리스본'이다.
당시 벤피카는 유럽 최고의 팀 중의 하나였다. 그 팀에는 66년 잉글란드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니까.. 66년 월드컵 득점왕
인 캐논슛의 왕자,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 (흔히들 유세비오라고 불렀었
지요...), 북한과의 경기에서 한 골을 기록했던 190이 넘는 장신 토레스,
그리고 ...시모에스....등등..
경기후 이세연이 말했던가... "에우제비오의 슛을 가슴으로 받으면 숨을
쉴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골이 깨질것 처럼 아팟다..."
그 에우제비오가 그 이틀전인가 대표2진격인 백호와의 야간경기(아마 그
럴 겁니다..)에서 경악에 가까운 골을 넣었다. 전율... 그 자체였다. 하
프라인 근처에서 얻은 프리킥을 바로 골로 연결 시켰다. 공은 포물선이
아니고 무릎 정도의 높이로 근 40여미터를 날라가 우리 골키퍼가 손 쓸
틈도 없이 스핀을 머금은채 빨려들어가 네트를 갈랐다. 흰 색 공은 유성
과도 같이 날라갔다..
우리편으로 보면 참으로..어처구니 없는 골이었다. 이때 골키퍼를 본 선
수가.. 변호영이다. 시셋말로... 완~죤~히 스타일 구긴것이렸다.
그는 178 정도의 키에, 얼굴은 영화배우 찰손 브론슨처럼 험악하기 이를
데없이 생겼다. 그가 인상 한번 팍~ 쓰면.. 모르는 사람은.. "음~... 손
해보기 전에 도망가자..."가 정상적 반응이었을거다. 하여튼... 어린 나
는... 변호영, 그가 엄청 무서웠다.
나의 그에 대한 이미지는 그 벤피카 대전에서 황당스레 먹은 (거기서 슛
을 날릴줄을 누가 생각 했겠는가..) 그 여파가 상당기간 지속됐다. 그래
서 그런지 그는 항상 이세연에 밀려 후보신세요, 대표팀 2진 수문장이었
다. 그런 그를 내가 다시 보게된 계기가 있었으니...
중2때인가? 바람이 엄청부는 효창구장, 소위 효창 모래바람이 눈을 따갑
게하는 늦가을, 초겨울의 경기였다. 그는 서울은행 소속이었는데 상대팀
이 외환은행인가 였을거다.(외환은행엔 김정남, 박수일등이 있었지요..)
그는 그날 거의 날라다녔다. 항상 장발을 했었는데, 증말 머리 휘날리며,
한마리 제비처럼 공을 세이빙하고, 펀칭하고, 캐칭했다. 지금까지도 내
가 축구를 보면서 그런 서커스 같은 풍경은 그게 유일했다.
어땟냐하면.....,
서울은행 문전, 정확히는 골라인과 골포스트 1,2미터 내에서 혼전이 벌
어졌는데... 변호영이 선수들과 몸싸움을 하면서 거의 엎어질 듯이 공을
두손으로 덮쳤다.. 그러더니 몰려드는 선수들의 발길질을 피해, 공을 중
심삼아 물구나무서는게 아닌가! 완전한 물구나무 였다! 그러더니 한 쪽
손으로 땅을 짚고 다음 동작으로 팔꿈치로 공을 보호하면서 땅을 짚더니,
아주 차분히 가슴에 안으면서 엎어지는것이 아니가!!! 관중이고, 선수고
모두가 다 멍~허니 지켜보고 말았다. 모두 순간적으로 동작그만! 이었다.
하두 괴이한 동작이라... 전무후무한 광경이었슴...
그는 이세연에 밀려 대표팀에선 후보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던 70년대 후반인가? 그는 홍콩 세미프로팀으로(해봉인가? 해피벨리
인가?생각이 잘 안나네요..) 이적을 한다. 그런데... 홍콩에 가서, 그는
그야말로 홍콩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그의 성공에 힘입어, 그가 다리를
놓아, 우리 선수들이 홍콩 프로팀으로 줄줄이 가게 되었다. 김재한, 정
규풍, 박이천.. 상당히 많은 선수들이 홍콩으로 갔지만 변호영 만큼 성
공하진 못했다. 그는 78년 월드컵 예선때인가는 우리 대표팀으로 복귀를
해서, 이세연이 은퇴한 이후의 골문을 굳건히 지켰다.. 물론 기량 향상
이 엄청되었다고 축구계의 찬사를 받으면서.. 당시 그의 2중 점프를 동
반한 세이빙은 예술작품 같았으니까..
그당시, 매스콤의 인터뷰에도 상당히 많이 응했는데, 그 때 변호영의 목
소리는 정말 매력 만점의 부드러운 저음 그 자체였다. 인성도 아주 부드
럽고.. 내가 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그의 험악한 외형만보고 지레 짐작
했던 그가 아니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사람을 인상만 가지고 예단
하시지 말도록.... 하하...
그는 홍콩에서 선수로서의 성공을 발판삼아, 기업가로서도 상당히 성공
을 한 것으로 알고있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씀... 현재 홍콩주재 교
민들이 전국 체전등에 참가하면 그 일원으로 참가를 하던데.. 그것도 대
단히 높은 직위를 가진채로... 아마 찬조금도 많이 냈을 걸?
이세연 이라는 참으로 훌륭한 동시대의 골키퍼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보았
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열어간 변호영 선수에게 또다른 의
미에서 최고!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
이만... 희미한 기억 속의 ... 골키퍼 변호영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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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속의... 박병주
제가 연전에 김재한 선수를 이야기 할때, 잠시 스쳐지나가듯 언급한 선수가
있었지요. 그중에 한분이 박병주 선수입니다. 이번 대표팀에 포함됐던 대학
생선수 박병주도 있지만, 오늘 말하는 박병주는 현재 안양팀의 감독인 그
박병주 선수 입니다.
그는 제 기억에 양지팀 멤버는 아니고, 청룡팀 멤버였던 것 같습니다.
70년대 초와 중반에 대표였을 겁니다.
지금 그 분의 외모를 보면 완~죤한 대머리에, 안경을 쓰는등 전혀 선수 출신
이 아닌것 같지요? 그런데 그도 대표선수 출신으로 대단한 파워를 가진 선
수였답니다. 공을 몰때의 속도는 증말 폼났답니다.
그는 좀 독특한 경력의 선수입니다. 70년대초 월간축구지선가요? 본기억이
납니다. (거의 25년이 된 기억인데... 아마 맞을 겁니다.)
축구선수 대부분이 중고교때 축구에 입문을 하는데, 박병주 선수는 군대에
들어가서야 축구를 본격적으로 한것으로 저는 압니다. 육상선수 였던걸로 압
니다.
현재 대표팀 코치인 김평석씨는 조기축구팀 선수였다가 발탁이 됐었지요.
군대들어가 축구를 하고, 대표 선수로 뽑힐정도이니 그 선천적 소질과 각고
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축구란 종목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반면,
제대로 할려면 한두해 찝적거려서 되는 경기가 절대 아니랍니다.
포지션이 풀백이었던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의 스피드는 정말 바람을 가를 정
도로 빨랐던 기억입니다. 4-2-4 전법 시절 오른쪽 풀백이었던 것 같은데,
등빨도 있고 (물론 허벅지도 우람 했지요... 으~~ 또 허벅지... ^-^;), 상대
방 마크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기억... 지금으로 치면 윙백이 되는 셈인데, 그
당시에는 풀백이 지금의 윙백처럼 적진 깊숙히는 침투하지 않았었습니다.
게다가 그분을 보시면 알겠지만 눈이 거의 새우젓 수준입니다. ^-^:
지금이야 안경도 끼고 세월의 풍상에 그래도 많이 온화해 진 풍모지만,그 매
서운 눈으로 상대방 공격수 째려 보면.... 한마디로... 쌀벌한 것이지요.
남극수준.. 아니 화성수준... ^-^;
서울은행 소속이었을 겁니다.(음... 지금의 서울은행은 원래는 신탁은행과
서을 은행이 합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 신탁은행이 되었다가 서울 은행
으로 개명이 되어 지금에 이릅니다. 신탁은행 쪽이 축구에 더 명성이 있었지
요. 신탁은행에는 정강지, 서윤찬을 비롯 그 이름도 찬란한 차범근도 한때
몸을 담았었지요.)
박병주 선수는 20대 시절에 이미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정수리 부분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도너츠형 대머리 였죠. 당시 발행되는 월
간 축구에서도 박병주 선수가 머리 빠지는 것 때문에 고민이라는 인터뷰 기
시도 실렸었죠.
그러고는 제 기억에서 잊혀졌는데, 어느날 보니 신탁은행 감독을 하더라고요.
또한 한때 어느 라디오 방송인가에서 해설자로도 활동을 하셨지요.
성격이 활달하고 언변이 좋은 축구인이라서 그런지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
하는 듯 싶군요. 모르지요... 선수들헌테는 쌀벌할 수도...
작년 안양팀은 죽을 쒔는데, 박감독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올해는
그래도 좋은 성적을 내는것 같습니다.
아마 작년에 성적이 않좋아, 가뜩이나 없는 머리카락 더 빠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올해는 좋은 성적을 내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제 중1때 본 물이 적덩히 빠진 멋진 청바지(지금이야 흔해 빠졌지만
당시에 리바이스나, 리...같은 류의 원단 청바지는 구할 수가 없었지요.)와
폭이 넓은 가죽 허리띠를 찬 그가 생각납니다.
그 기억속의 박병주 선수처럼, 멋진 감독님이 되시기를...
이만.. 희미한 기억속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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