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역 땅에서 겪은 가지가지의 고난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내가 걸어온 길을 회상해 볼 때에 뉘우침이 없었고 또 조국과 민족 앞에 떳떳하였음을 자부하는 것이다.”-선생의 자서전, [나의 인생백서], 59쪽
보성중학에서 민족교육 받아
김도연(金度演, 1894.6.16~1967.7.19)선생은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염창리(현 강서구 염창동)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선생의 집안은 매우 유족하여 당시 선생의 집 주위에 별로 남의 땅이 없을 정도로 수천 석의 부농이었다. 부농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7세 때부터 3년 동안 종조부로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 계몽편을 배웠으며, 그 후 한학을 수학하였다. 선생이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있을 무렵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면서 마침내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인천 앞바다의 포성이 선생이 사는 마을에까지 울리게 되었다. 일제의 침탈로 나날이 국권이 상실되어 가자 선생은 신학문을 배워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선생은 서울 서대문 밖 차석희, 김덕문 등 우국인사들이 세운 태극학교2학년에 입학하였다. 태극학교에 들어가 비로소 근대학문에 접하게 되면서 당시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번민을 하게 되었고, 이원재, 최연택 등의 친우들과 의형제를 맺고 국권을 되찾기 위한 방도를 토의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대한자강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도 자주 참석하고 그밖에 각종 학생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선생이 17세 때인 1910년, 마침내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병탄을 당하고 말았다. 태극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교사들로부터 민족교육을 받았다. 특히 한글 학자인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게 되었고 이 같은 인연으로 훗날 ‘조선어학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성중학교 재학 중 선생은 면학에 열중하는 한편, 민족과 국가를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준비하였다. 선생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일본과 일본인을 더 많이 알아 우리나라 침략에 대한 불법성을 쉽사리 알아차려 대일투쟁을 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의 태극학교 포증서 (우등상장, 1911)
일본 유학과 2.8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발표한 2.8독립선언서
선생은 1913년 초가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학교 재학시절 그는 한국 유학생들 간의 단합을 목적으로 하는 ‘반도중학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긴조중학교 졸업 이후 경제학으로 유명한 게이오대학 이재과(理財科)에 들어갔다. 선생이 유학할 당시 일본에는 한국인 학생들이 약 7, 8백명 있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조직되어 학생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재일유학생의 중추기관으로 기능했던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선생은 총무를 맡으면서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조선유학생학우회’ 외에도 ‘기독교청년회’의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18년 12월 29일 동경유학생들은 메이지회관에서 학우회 주최로 유학생망년회를 열었고, 이튿날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동서연합 웅변대회도 개최하였다. 웅변대회에는 4, 5백명의 학생들이 모여 조국광복운동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서춘, 이종근, 윤창석, 김상덕등이 연사로 나서 세계사조의 변화와 민족자결의 대원칙에 입각하여 자주독립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학생들의 연설이 있은 후 선생은 운동을 주도할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안을 강구하게 하자고 제의하여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실행위원은 선생을 비롯하여 최팔용, 서춘, 백관수, 이종근, 송계백, 김상덕, 전영택, 윤창석, 최근우 등 10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일제경찰의 감시와 미행을 피하며 비밀리에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이 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같은 계획에 따라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이광수가 작성하고 그것을 영문과 일문으로 각각 번역하여 일본의 조야와 외국공관에 발송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각 대학에 있는 유학생들에게 연락하여 빠짐없이 거사에 참가시켜 동경시내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계획하였다. 약 2개월에 걸쳐 준비한 끝에 드디어 1919년 2월 8일 선생은 아침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준비한 유인물을 꾸려 들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으로 향했다. 유학생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모임의 명칭을 ‘동경유학생 임시총회’로 하였다. 기독교청년회관은 거사 시간인 오후 2시보다 1시간 전에 이미 초만원을 이루었다. 마침내 최팔용과 윤창석의 사회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선생이 등단하여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선생이 결의문을 낭독할 때 구절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으며 학생들은 비분이 충만하여 눈물을 흘렸다. 낭독이 끝나자 만장일치로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이어서 비분강개한 유학생들의 독립을 향한 열변과 끝까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해야만 한다는 학생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준비된 계획대로 태극기를 흔들며 동경시내를 행진하기로 하였으나 일경들이 회관을 완전 포위하고 말았다. 독립선언을 한 학생들은 무장한 일경들에 맨손으로 대항하였지만, 회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면서 일경들에 의해 3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는 국제적 여론을 의식하여 선생 등 주모자들을 미결수로 약 반년 가까이 구금하였다. 얼마 후 동경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하나이(花井卓藏), 우사와(鵜澤廳明), 후세(布施辰治), 카나이(金井佳行) 등 양심적인 일본인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해 주었다. 재판 결과 선생과 최팔용, 백관수, 윤창석에게는 ‘출판법위반’으로 9개월의 금고형이 언도되었고, 나머지 학생들도 7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선생은 1920년 4월에 출옥할 수 있었다.
2·8독립선언 시 학생대표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복역한 김철수, 윤창석, 김도연, 최팔용, 백관수, 송제백, 서춘의 출옥 기념사진
미국 유학 중 임시정부 후원을 위해 <삼일신보> 발간
선생은 2.8독립선언 이후 일본에서 유학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미국으로 건너가 더 깊은 공부를 하려고 결심하였다. 이에 1922년 6월 두 번째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한 선생은 오하이오주에 있는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선생은 경제학을 전공으로 2년 동안 공부하다가 뉴욕에 있는 명문 콜롬비아대학으로 옮겼다. 콜롬비아대학에서도 선생은 경제학을 택해 2년 만에 ‘균형가격론을 분석함’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제출하여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3.1운동 이후 미국에서는 유학생들의 친목과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학생단체가 조직되었다. 1921년 4월 출범한 ‘북미대한인유학생회’는 1923년 6월 시카고에서 제1회 ‘북미대한인유학생대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유학생회는 학우들간 친목과 단합뿐만 아니라 미국정부와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등 외교활동과 선전사업을 통해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선생은 학문을 닦는데도 열성적이었지만 유학생회에 가입하여 미국에 사는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 학생회의 사교부장으로서 선생은 유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한편, 미주지역은 이승만의 동지회 측과 안창호의 국민회 간의 알력이 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 같은 대립을 해소해 보고자 선생은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파벌타파에 나서게 되었다. 우선 그는 뉴욕에 있던 유학생들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첫 과업으로 <삼일신보>라는 신문을 발간하기로 하였다. 이 신문을 발행한 취지는 미주 동포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나아가 동포들이 합력하여 독립운동에 온 힘을 다하도록 만드는데 있었다. 그 후 선생은 면학에 힘쓰기 위해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칸대학 대학원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가, 1932년 7월 3년간의 연구 결과 ‘한국의 농촌경제’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선생이 한창 박사학위 논문에 몰두하고 있을 즈음인 1929년,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그 열기가 미국의 신문에도 보도되고 있었다. 이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안승화 등 유학생들과 미국 국무성에 찾아가 광주학생운동의 전말을 설명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다
1932년 7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선생은 연희전문학교에서 경제학원론과 경제학사를 맡아 강단에 서게 되었다. 2년간 강단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중 교육계에도 일제의 강압적 식민정책이 가중되는 것은 보고 실업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선생은 지인들과 협의하여 자본금 30만원의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하였다. 사장에 취임한 선생은 토지개간, 임야벌채 광산업 등 광범위한 분야의 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선생이 경영하던 회사는 단순히 이익만을 추구하는 회사가 아니었다. 직원들의 화목과 상호부조를 도모하였으며, 우국인사들의 울적한 마음을 풀어주는 휴식처로서의 구실도 하였다.
이같이 사업에 열중하고 있던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였으며 국내에도 이른바 ‘황민화정책’을 시행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었다. 특히, 일제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국내에서의 반일 인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각급 학교와 공식 회합에서 조선어의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1942년 ‘조선어 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던 조선어학회를 해체시키려고 함흥학생사건을 조작하여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사업에 협조한 사람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당시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있던 선생도 1942년 12월 함경남도 홍원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종로경찰서에 구속되고 말았다.
선생이 이 사건에 연루된 이유는 일찍이 조선어학회의 인사들과 깊이 교류를 하고 있었고, 또한 조선어학회에 음으로 양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된 선생은 종로경찰서에서 다시 홍원경찰서로 이송되어 일제 경찰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이때 선생은 이른바 ‘비행기 고문’이라는 악형을 받고 의식을 잃기도 하는 등 매일같이 경찰서에서 혹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된 인사들은 경찰의 취조와 검사의 조사를 받기까지 근 1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선생은 예심판사의 심문을 거쳐 무려 20개월 동안 미결수로 함흥형무소에서 보냈다. 결국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재판소에서 최종 판결은 선생은 판결 직후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선생이 감옥에서 출소한지 7개월 만에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선생은 ‘한국민주당’ 창당에 주역으로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1946년 12월 과도정부 입법의원으로 서울에서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 입법선거 때에는 서대문구에 한민당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재경분과 위원장에 피선되었다가, 같은 해 8월 초대 재무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그 후에도 선생은 계속해서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1967년 7월 19일 아침 73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