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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못하는 양치기가 되지 맙시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형제들이 있습니다. 이역만리 물설고 낯선 땅으로 건너가서, 한두 해가 아니라 십 년, 이십 년, 아니 남은 평생을 그곳에서 헌신하는 선교사 형제들입니다.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닙니다. 마치도 수많은 봉우리를 거느린 지리산이나 금강산 능선 타듯이 극복해야 할 도전들이 줄지어 기다립니다. 평생 노력해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언어 문제, 문화 차이, 식습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그저 직진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보니파시오 주교님이 딱 그랬습니다. 주교님의 어록을 묵상하다 보니, 세상 모든 선교사들의 이정표요 모델이 따로 없습니다.
“비록 흔들리는 배인 우리 교회이지만, 그 안에 선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승선하고 진두지휘하시니 우리 교회는 안전합니다. 비록 전후좌우로 쉼 없이 흔들리지만 굳건한 안전장치인 주님의 현존에 힘입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꾸준히 전합시다!”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눈에는 구원의 문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던 이교도들의 모습이 너무나 측은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외쳤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던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던 보니파시오 주교님은 우리나라로 치면 당산(堂山) 나무처럼 여기는 그들의 참나무 신목(神木)을 과감하게 베어버렸습니다. 그 나무로 소 성당을 지었습니다. 이교도들은 그가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의 목숨 걸고 선교활동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선교 사업이 언제나 탄탄대로만을 걸은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때로 혹독한 실패도 맛보았고 눈물을 머금고 철수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란 없었습니다.
일단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고, 지난 상황을 복기하면서 실패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또 다시 선교활동의 성공을 위한 로드맵을 만들었습니다. 효과적인 전략을 세운 후, 또 다시 시도하고, 그래서 큰 성공을 거두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보니파시오 주교님도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평생토록 수많은 이방인들을 개종시켰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존경받는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기도하면서 편안히 노후를 보내도 아무도 뭐라 그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사랑과 구원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이교도들의 영혼이 늘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연로한 몸을 추스르고 고단한 선교 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결국 그는 앙심을 품고 있던 적대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전도 여행 중에 머리에 칼을 맞고 땅에 쓰러졌습니다.
보니파시오 주교님께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언제나 한결같이 지니고 계셨던 영혼 구원을 향한 활화산 같은 열정이 오늘 우리 마음 안에서도 솟아나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못하는 양치기가 되지 맙시다. 늑대가 가까이 올 때 도망쳐 버리는 삯꾼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양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가 됩시다.”
“고통과 고뇌의 날들이 우리에게 닥쳐온 이때, 주님의 날이 임할 때까지 굳건한 자세로 전투에 임합시다. 우리 선조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거룩한 법을 수호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까지 불사합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누구에게 성경을 배워야 할 지 결정하는 법
세상은 어떻게 멸망하게 될까요? 인간의 이기심이 극대화되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예들은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그것을 잊고 또 그러한 역사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개구리가 점차 물을 끓이면 뛰어나오지 못하고 그냥 익어버린다고 합니다. 이 세상도 그렇게 멸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보면서도 보지 못할까요?
모든 멸망에는 이기적 욕망의 원인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있습니다. 로마도 지나친 쾌락주의에 빠져 멸망에 이르렀고, 프랑스 혁명 때 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굶은 사람들을 조롱하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도 멸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올바로 성경을 해석해 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고 유일한 스승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인도자가 없으면 멸망하는 게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보다 훨씬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와 결탁하여 신앙은 그저 액세서리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기는 해야 해서 억지로 모세오경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한 여자가 일곱 형제와 살았는데 만약 부활이 있다면 일곱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오경 중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은 이들의 하느님으로 당신을 소개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죽은 개의 주인이라고 하는 게 무슨 능력을 나타내는 소개가 될까요? “100억짜리 말의 주인입니다.”라고 하면 놀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닌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신 것이고 그래서 부활은 존재합니다.
다만 사두가이들은 자기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백성들의 지도자요 선생이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으로 나아가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안 그럴까요? 욕망은 비교할 때 더 커집니다. 인스타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만 못 가지고 못 먹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굳이 더 맛있는 것을 먹는 프로그램을 보고 더 잘나가는 셀럽들을 찾아봅니다.
이렇게 로마나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보다 세상 사람들의 욕망은 더 극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돈이 부족합니다. 나도 생활 수준이 그들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소비경제가 둔화하고 그렇게 살기 어려워지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세상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멸망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뜨거워지는 물에서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스승은 제대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눈이 머는 이유는 욕망 때문인 것을 알았다면 그러한 욕망을 이기고 복음을 전하는 이라야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여 생명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올바른 스승을 찾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성령을 힘입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이들은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메주고리예는 개인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한 번 가봤는데 성모님의 증인 여섯 명이 전부 결혼했습니다. 결혼이 무슨 죄냐고 할 수 있지만, 성령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라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싶어집니다. 욕망이 완전히 불타버린다는 뜻입니다.
루르드나 파티마는 성모님을 본 분들이 다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섯 명이 모두 결혼하였다면 저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사제였는데 수녀와 결혼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결혼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을 따라다니고는 온전한 결혼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아내나 자녀, 자기 자신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해석하십니다. 그러니 욕망에 조금이라도 사로잡혔다면 그만큼 성경이나 세상을 보는 눈에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욕망에 자유로운 예수님과 같은 이들을 스승으로 삼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이들이 많아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2,18-27: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질문은 신명 25,5이하에 나오는 규정에 근거한 것으로서 아주 과장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부활을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부활을 인정하셨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24절) 하시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26절)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자체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25절) 부활한 다음에는 다시 죽는 일이 없어 혼인의 필요성이 천국에서는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천사들과 같아서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한 그 여자도 부활한 다음에는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였다. 이 세상을 떠난 뒤 부활하여 천사들과 같아질 우리에게 약속된 것은 혼인이 지닌 육체적 요소들의 회복이 아니다. 혼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이어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 것이 혼인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탈출 3,6의 말씀으로 증명하신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이렇게 성조들의 하느님이라면 그들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부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하느님 최대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살아있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들은 구원의 길을 모르고 하느님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살아있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우리들의 하느님이 되시지 않겠는가? 당신을 떠나 죽은 자들이 되지 말고 그분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언제나 살아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현대인의 딜레마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기 위해 일하느냐, 일하기 위해서 사느냐?”
솔직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삶과 일은 이렇게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은 삶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요? 일도 나의 삶임을 인정하면 일 자체에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이 나의 삶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차이로 인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헬렌과 스콧 니어링이 쓴 ‘조화로운 삶’에서 “경제적 노력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일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심오한 믿음과 진솔한 감정들이 조화를 이룬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의 한 고등학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제 성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학생은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사회에 나가 생활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재산을 축적하고 또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지위를 얻는 것도 행복할 것 같고, 사제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은 채우면 더 갖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사제의 길은 세상 것을 멀리하며 대신 삶과 일 모두가 주님을 향하기에 진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반드시 성직자, 수도자로 살아야만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쉽게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여건일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충분히 조화로운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기억한다면 주님 뜻에 맞춰서 충분히 조화로운 삶을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기들의 주장이 맞음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즉,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재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앞서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에 맞춘 삶,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춰서 그분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들은 행복해진 순간마다 잊는다. 누군가가 우리들을 위해 피를 흘렸다는 것을(프랭클린 루스벨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우리가 안수를 받는 것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기 위함이라네.
삶에 지쳐
한동안 잊고 살았던
하느님의 은사들이
우리 안에서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으로
타올라야만
우리는
부끄럽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하느님을 찾게 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 수련원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와
나를 거쳐 이웃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고여있으면 죽은 겁니다.
현재에 안주하는 삶은,
그래서 안에 박혀 있는 삶은
우리에게 당신을 바치신
그 사랑을 기억하기에 부족합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현존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머무름이 우리에게 영적인 힘을 줍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나의 편의나 안위만을 생각하지 않으며,
세상에 나가 투신할 수 있는 삶으로
우리를 안내해 줍니다.
안락한 곳에 머무르는 사랑이 아니라
정의를 위한 투신과
아픔을 함께 나누기 위한
연대의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신
그 마음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말씀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