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가을 구경 못한 분들에게 이번 주말, 충남 예산 땅을 추천한다. 단풍들이 휩쓸고 간 명산대처들과 달리 이제야 가을이 내려앉고 있는 땅이다. 웬만한 곳에서는 당일 여행이 가능하고 화려한 자연과 함께 사연 담긴 역사도 구경할 수 있는 여행지다. 코스는 이렇게 잡는다.
남연군묘→대흥향교→봉수산 자연휴양림→추사 고택
권력, 남연군묘
그 옛날 덕산면 서원산에 절이 하나 있었다. 가야사(伽耶寺). 금탑(金塔)이 있을 정도로 흥성했던 절이었다. 수덕사보다 더 컸다. 헌종 10년(1844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가야사에 불을 질렀다. 화재의 참상을 볼 수가 없던 산속 미륵석불은 무거운 몸을 돌려버렸다. 이 미륵불은 지금 절의 반대 방향, 북쪽 산봉우리를 향해 서 있다.
(왼쪽부터) 남연군묘 가야사터, 남연군묘 비석, 남연군묘 전경
선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려는 대원군에게 지관이 물었다. “자자손손 복을 누리길 바라시오, 아니면 자손 2대까지 황제가 나오기를 바라시오.” “2대까지 황제가 되게 해주시오.” 2대 발복 명당에는 가야사 대웅전 석탑이 서 있었고, 그게 화재가 난 연유다. 경기도 연천에 있던 선친 묘는 긴 상여 행렬에 실려 이곳으로 옮겨졌다. 1844년이다. 19년 뒤 이하응의 아들이 왕이 됐다. 고종(高宗)이다. 1907년 손자가 황제에 올랐다. 순종(純宗)이다.
2대에 걸쳐 제왕이 나왔으나 끝은 허망하였다. 대원군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지 5년째 되던 해,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묘를 도굴하려다 발각됐다. 오페르트 무리는 지금 서해안고속도로 행담도휴게소 부근에 배를 대고 곧장 남연군묘로 향해 관까지 드러나도록 묘를 파냈다. 철저한 쇄국론자였던 대원군은 이를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끌고 갔고, 천주교 박해 및 쇄국 정책이 조선 팔도를 휩쓸었다. 근처에 있던 해미읍성에는 무수한 천주교도들이 죽어나갔다. 천하 명당 남연군묘는 석회를 채워 도굴을 원천봉쇄했다. 대한제국으로 국체를 바꾼 나라는 훗날 식민지로 전락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이 왕이 되고난 뒤 가야사 부근에 새 절을 짓고 보덕사(報德寺)라 명명했다.
남연군묘는 덕산도립공원 안에 있다. 쉼터에서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얕은 야산인 묫자리를 360도 산줄기가 에워싸고 그 사이에 너른 들판이 출렁인다. 풍수지리를 몰라도 막연하게 명당이라는 느낌을 주는 풍광이다. 권력의 흔적 한가운데 내려앉은 가을을 즐긴다.
대흥향교 은행나무
남연군묘에서 나와 예당저수지쪽으로 길을 가면 대흥향교가 나온다. 2대로 끝난 권력과 1000년을 살아 있는 생명체를 비교할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시멘트 포장길 끝에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포인트다.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베면 반드시 화(禍)가 있었다는 나무다.
자세히 보면 큼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은행나무 중간에서 자라고 있다. 두 나무 가지가 얽힌 연리지(連理枝) 이야기는 곳곳에 있지만 이렇듯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게 이토록 긴 세월 몸을 빌려줬다는 이야기는 드물다. 지금쯤 노랗게 물들어 있을 나무 그늘 아래에서 또 가을을 맞는다.
빛나는 가을, 봉수산 휴양림
향교에서 길 따라 10분만 더 남쪽으로 가면 봉수산 자연휴양림이 나온다. 길 왼편으로는 예당저수지가 보인다. 휴양림 길섶에 ‘의좋은 형제’ 공원이 있다. “…의좋은 형제가 살았는데, 아우의 끼니를 걱정한 형이 밤에 볏단을 아우 집 앞에 놓고 갔더라…아우는 아우대로 형을 걱정해 밤에 자기 볏단을 형 집 앞에 놓고 갔더라…” 무한 반복되는 이 덕행이 훗날 공덕비가 발견되면서 사실로 드러났고, 그곳이 바로 이곳 대흥면이다.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으며 휴양림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찬란한 가을이 있다. 차량도 통행할 수 있다. 유명 휴양림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제법 땀을 내게 하는 예쁜 산책로가 인상적이다. 되도록 오후 시간에 가면 산 너머에서 떨어지는 태양빛에 빛나는 가을을 즐길 수 있다. 휴양림 안에 숙박시설도 있다.
문향을 듣는다, 추사 고택
남연군묘에서 묻혀왔던 권력과 부귀영화의 냄새는 추사 고택에서 털어버린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태어나고 묻힌 곳이다.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였다. 왕족의 인척. 그러니까 권력으로부터 애시당초 배제된 집안이다. 김정희는 그 견제의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흥선대원군과 비슷한 신세였지만, 대원군은 권력을 끝까지 욕심했고 추사는 반대로 갔다. 어릴 적부터 재능을 보였지만 벼슬에 오른 뒤 당쟁에 휩쓸려 결국 제주도와 함경도로 유배를 당한다.
그 불우한 말년에 그는 학문과 서예에 정진했다. 유배에서 돌아와 그는 선친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의 한 절에서 살다가 71세에 죽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무덤은 그가 태어난 집 바로 옆 언덕에 있다. 200년이 채 안된 시대에 그가 이 집에서 사랑을 했고 학문을 했고 화장실을 갔고 잠을 잤다.
고택 곳곳에 걸린 주련에 적혀 있기를, ‘세상에서 가장 큰 일 두가지는 농사와 독서라’ ‘천하의 최고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자라’ ‘가장 맛있는 요리는 두부와 푸성귀’ ‘가장 귀한 만남은 아내와 아이들을 보는 것’…. 가장 단순하여 가장 귀한 말들이 아닌가. 교과서와 사진에서 보는 감흥과 그가 살아 숨쉬던 공간에서 대면접촉하며 느끼는 흥분은 비교할 수가 없다.
고택 오른쪽으로 증조부 김한신의 묘가 있다. 부인 화순옹주와 합장한 묘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딸이다. 왕의 부마로 월성군이 된 김한신이 나이 서른여덟에 요절하매, 화순옹주는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에 아버지 영조가 만려하였으나 끝끝내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옹주는 남편과 함께 묻혔고, 영조는 이를 서러워하며 비문을 어필로 내려 보냈다.
그 옆에는 화순옹주 정려문이 있다. 정려문은 일종의 열녀문이다. 영조는 조정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만류를 듣지 않는 미운 딸에게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결국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가 정려문을 내렸다. 화순옹주는 조선시대 유일한 왕족 열녀로 기록됐다. 그 옆 백송공원에는 1811년 추사가 청나라에서 가져와 심은 백송(白松)이 서 있다. 1811년에 씨앗을 심었으니 심은 사람과 연대가 정확하게 남아 있는 흔치 않은 나무다. 순식간에 와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가을의 꼬리, 여기 예산 땅에 아직 남아 있다. 그리 멀지 않은, 우리의 역사도 가을 속에 반짝인다.
여행수첩
가는길(서울 기준)
1.남연군묘:서해안고속도→당진상주고속도로 당진분기점 대전방향→고덕IC 덕산, 고덕 방면→예덕로→가야사, 남연군묘 이정표
2.대흥향교:남연군묘에서 나와 45번국도로 예당국민관광지 방면으로 50분. 길섶에 작은 이정표가 나오고 그 뒤로 마을 안길이다. 봉수산 휴양림은 가던 방향으로 10분.
3.추사 고택: 봉수산 휴양림에서 나와 45번 국도 좌회전→21번 국도 우회전→예산역 지나 발연삼거리에서 좌회전→이후 추사 고택 이정표.
먹을 곳 수덕사 앞 사하촌 산채정식 추천.
기타
1.예산군청:www.yesan.go.kr/culture, (041)339-7114
2.투어버스:매주 토요일 예산 주요 관광지를 버스로 순례. 예산시외버스터미널 출발. 20~40명 예약. 무료(입장료 제외). (041)339-7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