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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묵상글 ( 대림 제2주간 월요일. - -치유와 구원까지 이르는 관상.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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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대림 제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치유와 구원까지 이르는 관상
대림 2주 월요일-2022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느닷없이 ‘관상’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관상 타령을 할까 합니다.
관상은 하느님 관상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하느님뿐 아니라 나도 보고, 이웃도 보고, 다른 자연도 보는 것이라고
저는 자주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주장합니다.
나를 보더라도 나의 고통을, 욕망을, 갈망을, 보고,
나의 고통을 보면서도 고통만 보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도 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도 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고,
나의 고통만 보지 않고 이웃의 고통까지 사랑으로 보는 것,
뭐 이런 것이, 관상이고 진정한 관상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관상이 아니고,
사랑으로 보는 것이 관상이라고도 얘기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 고통에 나의 시선을 빼앗긴 것이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실은 관상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관상도 하느님을 보는 것이지만
하느님만 보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사로잡힘이지 진정한 관상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얼마 동안 완전히 하느님께 몰입되고
성인들이 탈혼 상태에 있듯이 하느님께 사로잡힐 수는 있어도
계속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런 관상을 진정한 관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느님 관상은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라고 제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오늘 관상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 때문입니다.
Say to those whose hearts are frightened:
Be strong, fear not!
Here is your God.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보면/관상하면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는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 병자와 동료들은 바로 이렇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어느 마음에 들어오셨을 때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은
주님께서 어쩌시나 보려고 왔지만, 이들은 치유를 받기 위해 옵니다.
중풍 병에 맥없이 주저앉아있지 않고 어떻게서든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왜? 물론 치유 받기 위해서지만
그 이전에 주님의 능력을 보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이들이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고, 그런 주님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치유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관상이 치유와 구원까지 이르는 것을 본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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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예수님께서는 ‘함께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루카 5,24)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4-25)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치유 받았어도 “들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이요, 이미 용서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들것'에 메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상처’에 메여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들것'을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할뿐 아니라,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서 들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할 일입니다. 마치 몇 명의 남자들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태워 들고 왔듯이,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 우리의 죄와 인류를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다닙니다. 용서받고 치유 받았음의 표지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치유를 입었습니다. 신령스런 주님의 사랑을 말입니다. 이토록,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습니다.”(마태 5,26). 아멘.
하오니,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의 상처에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저도 상처에서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루카 5,24)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들것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그것을 들고 가라 하십니다.
하오니, 더 이상은 상처를 아파하거나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지니신 십자가의 상처처럼,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게 하소서.
이제는 사랑을 퍼올리는 구원의 샘이 되게 하소서.
아픈 이를 태워 나르는 들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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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좋은 이웃이 되어라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모습이 멀리 있는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살아가면서 이웃을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독거노인이 홀로 세상을 마감하고 오래 지나서 발견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주변에 함께하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라고 생각하면 이웃사촌이 더 간절해집니다. 이웃을 잘 만나 복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웃에게 복이 되어 주는 사람은 많지 않은가 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 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 천정을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5,2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인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병과 허약함뿐 아니라 그 속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고 판단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영혼까지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의 뿌리를 다스리시고 부족함을 충만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명의는 원인을 치료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중풍 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그는 이웃이 있었기에 능력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만난 이웃사촌이 복덩이입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웃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믿음을 보고도 은총을 허락하시니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이웃이 되어 주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큰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미심쩍어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마음을 아시고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을 드러내셔서 믿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두려움에 차서 신기한 일을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은 오늘도 믿는 이들 안에서 이어지고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계속됩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신부님 고맙습니다. 제가 성경에 맛들이게 되었습니다.”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날, 몸이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미사참례를 하였고 신부님께 안수를 받으며‘저에게 꼭 필요한 은총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몸이 아팠지만, 아픈 것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가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밥 대신 성경을 챙겼고 성경을 읽는데 말씀이 꿀같이 달았습니다.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저는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대단한 학자가 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날 이후로 성경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습니다.”
신기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고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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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LA에 머물 때입니다. 수도원 미사에 함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사 신부님과 교우들 10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강론을 부탁하였고, 저는 ‘갈망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 속담에 ‘우는 아이 떡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말씀을 아주 멋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 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복음서를 보면 갈망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하혈하는 여인, 가나안 여인, 소경, 나병환자, 중풍병자, 회당장 야이로, 백인대장, 자캐오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던 따뜻한 이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이 있다면, 그 갈망을 삶으로 드러낼 수 있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길을 보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미사를 마친 후, 신부님과 함께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는 ‘죽비’가 되어 지친 나의 마음을 깨워 주었습니다. 젊은 날에 한창 혈기가 왕성했을 때에 뜻하지 않게 ‘암’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다행히 암은 치유되었지만 심적인 근심과 두려움이 커서인지 ‘공항장애’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가족력이 있어서인지 ‘성인병’도 찾아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원망스러웠고, 괴로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런 아픔들이 있었기에 더욱 열심히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픔들이 있었기에 다른 이들의 아픔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픔들이 있었기에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기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저도 체질적으로 약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잇몸이 좋지 않아서 질긴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혈압이 높아서 약을 처방 받아야 합니다. 머리카락이 일찍 하얗게 되어서 염색을 하곤 했습니다. 잇몸이 좋지 않지만 치아관리를 꾸준히 하여서 아직은 임플란트를 하나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혈압이 높지만 꾸준히 운동해서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로는 염색하지 않고 하얀 머리로 지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얀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거울에 비친 하얀 머리가 좋습니다. ‘아픔만큼 성숙해지고’라는 노래 제목처럼 아픔은, 고독은 때로 우리를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갈망과 따뜻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갈망과 따뜻한 마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의심과 교만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배움이 많았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았지만 율법의 정신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안에 있는 교만함을 겸손으로 바꿀 수 만 있다면, 내 안에 있는 욕망을 비움으로 바꿀 수 만 있다면, 이웃의 아픔을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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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평상에 누워 있는 병자가 뚫린 지붕을 이용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천천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맞습니다. 누워 있는 병자의 믿음도 보셨겠지만, 그를 도와주던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이렇게 화답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주님 시대의 병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병이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죄에서 온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병에 시달릴 때 그들은 큰 죄의식을 함께 지니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병자의 마음을 먼저 치유하신 것입니다. 뿌리 깊게 박힌 죄의식을 먼저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 혹은 우리 가정에 어렵고 큰일이 일어나면 죄의식이 우리들을 지배합니다.
기도를 많이 안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이전에 나쁜 일을 해서 벌 받는 거야. 나는 죄인이야.
이런 생각들은 우리 마음에 또 다른 어둠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다른 힘든 상황이나 몸의 병보다 더 깊은 마음의 병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둠에 빠져들지 마세요. 그대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깊은 죄의식에서 나오세요. 당신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 사랑에 보답할수 있다면....
연말입니다.
연말에는 그간의 사랑에 감사하기 위해
고마운 분들에게 선물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 세상을 살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서로 무언가를 나누며 살아갑니다.
저는 올해 취미로 그림을 배우고 있습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매년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데
올해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린 작은 그림으로
이곳 갑곶순교성지를 위해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작은 선물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기를 바랍니다.
조금은 그 사랑에 보답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가정에 성모님의 사랑과 보호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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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장자’에 유명한 거목 이야기가 나옵니다. 쓸모 있는 나무는 베여서 대들보나 서까래로 사용되지만, 쓸모없는 나무는 베이지 않고 거목으로 자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실패했거나 낙오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삶을 새롭게 긍정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형제님이 있습니다. 공부도 잘했고, 운동이나 기타 예능 쪽에서도 남들과 달랐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그곳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능력 많은 그에게는 너무 많은 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말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했습니다. 건강은 점점 나빠졌고, 어느 순간 공황 장애가 찾아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재능으로 좋은 직장, 안정된 부를 누릴 수 있었지만, 건강을 잃고 나서는 그 모두가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능력과 재능이 많아야 좋을까요? 또 부와 세상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면 행복할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스스로 거목이 될 수 있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사랑 타령이었습니다. 돈 버는 법, 높은 지위를 얻는 방법, 그리고 병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해 주셨다면 지금의 교회를 크게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스스로 성장시켜 큰 거목이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신체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체적인 고통 자체는 도덕적 악의 상징이고, 악에 그 이유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럴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때, 사람들 사이로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지붕의 기와를 벗겨 내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당시의 사람들 시선은 마치 죄인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에 맞춰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 5,20)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죄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그 용서를 받는 영광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살 수 있도록 건강까지도 부수적으로 받습니다. 만약 그가 중풍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의 친구들이 지붕의 기와를 벗겨 내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내지 않았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거목이 되는 길을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진짜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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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하나의 모범은 천 마디의 논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토마스 칼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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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향(歸鄕)의 여정
-“날마다 좋은 날, 행복한 날입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리라.”(시편85,11)
요즘 많은 형제자매들을 만나면서 50-60대 가장의 수난시대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도중에 쓰러지는 분들도 많고 존재감없이 참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생활력 약한 형제들도 많습니다. 반면 자매들은 책임감이 강하고 지혜롭고 강인하여 가정과 자녀들을 잘보며 가정의 중심이 되어 튼튼히 살아가는 분들이 태반입니다. 여자는 약해도 한국 어머니들은 얼마나 강인한지요! 남녀 형제자매들 모두가 분발하여 주님의 믿음의 전사로 참으로 충실히 살아가야할 때 같습니다.
새벽 화장실에 들렸다가 선반에 가득 쌓인 화장지들에 눈길이 갔습니다. 편안해 보이는 화장지뭉치 마다 글귀가 선명했습니다. 영어로 “해피데이(happy day)”, 그냥 우리말로 “행복한 날”이라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누구나 원하는 행복한 삶입니다. 언젠가 살아야 할 행복한 삶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바라는바 행복한 삶입니다. 더불어 생각난 두달전 써 나눴던 “모든 날이 다 좋다”라는 짧은시입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이 계시기에”-2023.10.21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참 좋은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날마다 좋은 날, 행복한 날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화답송 시편 두 구절입니다. 성가정 축일 미사 때마다 흥겹게 부르는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시편 화답송 후렴을 기억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산티아고 800리 2000km 순례여정, 신비롭게도 산티아고 대성전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도 가볍게 나는 듯 걷게 한 시편 한 구절도 그립게 떠오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뻣노라.”(시편122,1)
그러니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 사는 우리 수도자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요 행복한 날입니다. 영혼의 고향같은 주님의 집 수도원이기에 고향집을 찾듯 주님의 평화를 찾아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는 발길들입니다. 어제 영문주석을 보면서 반갑게 와닿은 “리턴닝 홈(returning home)”, 귀향(歸鄕)이란 글귀였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 영혼의 고향이시고 대림시기는 성탄의 주님을 향한 귀향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 귀향의 치유와 구원이 이루어지는 참 좋은 날이요 참 행복한 날이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이 주님을 만난 귀향의 기쁨과 행복을 신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야말로 하느님의 시인이요 신비가요 영성가입니다. 저는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보다 더 좋은 시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처음 읽듯이 늘 새롭고 좋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너희는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자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 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을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대림시기 오늘 이때가 치유와 구원의 그때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귀향의 기쁨과 행복을, 귀향의 치유와 구원을 체험하는, 그대로 주님의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영혼의 고향인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요 참 기쁨에 참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절망의 현장에서 하늘 나라의 희망과 꿈을 노래한 위대한 희망의 예언자 이사야서 말씀이 우리를 용기백배 힘을 내어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귀향의 희망과 꿈이, 치유의 구원이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역시 “더불어(together)”의 구원입니다. 참 좋은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주님을 만나 치유받으니 말 그대로 귀향의 치유와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궁즉통이라, 중풍병자 동료들은 믿음의 눈이 열려 구원의 통로를 찾아냈고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냅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감격한 주님의 치유와 구원의 선언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동료들의 지극 정성의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케 했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입니다. 이어 곧 이어지는 육신의 치유, 전인적 치유의 구원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중풍병자는 물론 동료들도 더불어 내적치유와 구원을 받았을 참 좋은 날, 참행복한 날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평상을 가지고 하느님을 찬양하여 집으로 돌아가니 그대로 부활체험이요,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아름답게 묘사하는 귀향歸鄕의 실현입니다.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치유받은 중풍병자와 네 동료들의 분위기가 분명 이러했을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하늘나라의 희망과 꿈은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고, 지금도 대림시기를 통해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안에서 계속 실현됩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전인적 치유와 구원의 참 좋은 날, 참 행복한 날을 살게 하시고 한결같이 귀향의 여정을 충실히 살게 해주십니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85,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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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런 것이라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루카 5,24)
하느님의 사람이니
오롯이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니
비로소
하느님의 사람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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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대림 제2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영과 육을 치료하시는 예수님
구원자께서 중풍 병자에게 하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은 전체 인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분을 믿는 이들은 영혼의 질병을 치유받으며 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테니까요. 그분의 말씀은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네 몸을 고치기 전에 먼저 네 영혼을 고쳐야 한다. 그러지 않고 그냥 걸을 수만 있게 된다면 너는 다시 죄를 지을 것이다. 네가 그것을 청하지는 없았지만, 하느님인 나는 네 몸에 질병을 불러온 네 영혼의 병폐를 보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영성에 영향을 준 신학들
5. 아우구스티누스를 경유한 신플라톤주의:
엑카르트의 영성에서 드러나는 주요 신학적 주제들
금욕적 수련법과 기교를 동원하는 수련법을 선호하는 서양에서 너무나 자주 단죄되고, 오랫동안 억압받고, 잊혀져 온 창조 중심의 영성 전통이야말로 엑카르트를 풍부하게 살찌운 전통이며, 엑카르트가 천재적 영성 체험과 표현으로 자양분을 공급한 전통이다. 창조 중심의 영성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주제가 몇 있는데, 독자들은 그것들을 살펴봄으로써 액카르트의 저작을 읽을 엄두를 내게 될 것이다. 그의 시대 이래로 배출된 대다수의 영성가들과는 달리. 엑카르트는 성서를 잘 알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서적 뿌리에 정통한 영성신학자다. 그는 얀센의 이원론, 고행,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남성 우월주의, 정치와 이 세상의 모순을 회피하는 내면 여행, 상아탑의 특권,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실로, 그의 영성은 서양에서 감상주의를 거부하는 최후의 영성이다. 나는 액카르트의 영성에서 드러나는 주요 주제틀을 아래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이 주제들은 창조 중심 영성신학의 개요를 말해 줄 것이다.(75)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묵시 1,9-20
요한의 소명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처럼 또 눈처럼 희고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으며,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 같고 목소리는 큰 물소리 같았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계셨으며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습니다. 또 그분의 얼굴은 한낮의 태양처럼 빛났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황금 등잔대의 신비는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고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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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대림 제2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병의 치유는
죄의 용서와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치유를 청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병의 치유가 죄의 용서와 연결된다는 것은
병의 원인을 죄로 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죄를 지어서 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오늘 복음에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보면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죄와 병을 연결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단죄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환자는 죄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연결 고리 때문에
치유는 두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우선은 죄의 용서가 앞서고
그 다음에 병의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즉 죄와 병의 연결 고리를 믿는 사람을
치유 하기 위해서
그의 눈높이에서 다가가십니다.
두 단계 모두 이루어졌을 때
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죄의 용서로 치유가 불완전하게 끝났다고
볼 수는 없지만
병자의 입장에서는
두 가지가 모두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나의 관점에서는 괜찮지만
너의 관점에서는 불편할 때
그것을 배려해 주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병의 치유로 충분하지만
병자의 관점에서는 병의 치유 앞에
죄의 용서가 먼저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 안에서
나의 관점과 너의 관점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나의 관점과 너의 관점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나의 관점을 배려해 주시는 하느님을
먼저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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