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은 한국에 어떤 나라인가..?
조선시대부터 중국과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 지배기간 비율이 503 : 36이다.
우리에게 일본이 더 큰 원수국인가, 중국이 더 큰 원수국가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중 503:일 36으로
중국이 훨씬 더 큰 원수다.
■■"중국은 한국에겐
'천년의 원수다.'"■■
일본은 부스러기라도 남겼지만, 중국은 가져만 갔다!!
■ 일본에 위안부가 있다면
중국은 50만에 이르는
'환향녀'가 있다!!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당시 조선 인구의 10%를 청으로 끌고 갔다.
환향녀 뿐인가?
걸핏하면 우리의 처녀들을
중국놈들이 공물로 데려가지 않았는가.
중국은 사실상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서 부터
1895년 시모노세끼 조약때 까지 503년 간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 왕조는, 이성계가 나라 이름도 명나라에 조선과 회령 중에서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성계의 쿠데타는잘못된 것이고
망국적 치적이므로,
최영 장군의 명나라
정벌 계획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1407년 태종은 중국을
숭모한다는 모화루
(모화관)을 세우고,
영은문의 전신 홍살문도 세워 중국 사신을 영접해 오다가, 중국의 요구로
1539년 중종때
■ 중국의 은혜를 영접한다는 '영은문'으로 이름까지
바꿔 세운 것이다.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해
우리를 분노케 했지만,
사실 그들은 500년 이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조선은 무력을 사실상 포기하고 중국 밑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 간 나라였다.
치욕적이게도 중국 황제가
승인해야 왕이 될 수 있었다.
매년 바쳐야 하는 온갖 공물에 백성들의 진이 빠졌다.
심지어 중국 사신의
서열이 조선 왕보다 높았다.
■ 사신이 한 번 뜨면
조선의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
중국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사신에 임명된 者들이
조선에 와 본전의 몇 배를 뽑았다.
중국 사신이 오면 조선 왕이
나가 영접하던 곳이 영은문이었다.
중국 황제의 은혜를 맞이 한다는 것이다.
1894년 발발한 일본과 청
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 일본 이등박문과
중국(청) 이홍장 간의
조약으로
"청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라고
선언함으로서
■ 조선은 중국의
503년 지배에서
독립할 수가 있었기에
일본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될 것이다.
그리하여
■ 서대문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고
■ 영은문 자리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독립하면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으로만 아는데,
서대문에 있는 독립관이나
독립문은 36년간 지배해 온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503년 동안 지배받던 중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7년 서재필 박사가 주축이 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을 존경하고, 반일을 내세우는 주사파 운동권이 권력을 잡으면서 중국이 우리에게 준 막대한 피해는 묻히고 잊혔다.
1950년 6·25 남침을
김일성과 모의하고
우리 국민 수십만 명을 살상한
■ 마오쩌둥을
존경한다는 정신나간
전직 대통령까지
등장했다.
독립문에 대한 오해가
희극이 돼버린 사례가
■ 문재인의 2018년
3·1절 기념식이다.
대통령이 3·1절 기념
행사를 마치고
■ 독립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일본이고,
■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미국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겐
8.15만 광복절이 아니라
1895년 4월 17일도 광복절임으로 둘 다 기념해야 될 것이다.
■ 중국과의 관계는
오래된 역사이니
잊자고 한다면,
■ 일본도 이젠 잊고, 극일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무식하면 용감은 하겠지만,
국민과 국가를 이끌 지도자가 될 자격은 못 된다.
역사 해석은 결코객관식 문제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