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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竹橋에 흘린 피
공양왕의 세자 석(奭)이 명나라에 가 있다가 돌아오자 이성계는 황해도 황
주에까지 나아가 마중을 한 후 해주에서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노루가 있어 이를 쏘아 잡게 되었는데 채 말고삐를 잡지 못하여 마상에서
떨어져 몸을 몹시 상해 견여(肩輿)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
시중(侍中=정승 벼슬) 정몽주(鄭夢周)는 이성계의 위덕(威德)이 날로 성해
가는 것을 걱정스럽게 생각하여 자기 파와 동모하고 성계를 제거하려는 결
의를 품고 있었다. 성계가 때마침 말에서 떨어져 고생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당시의 대간(臺諫)에게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대단히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먼저 그의
우익(羽翼)으로 있는 조준(趙浚) 등을 도륙하고 나중에 성계를 처치하는
게 좋겠다."
라고 제언하였다.
그리하여 대간은 이를 삼사(三司)에 고하였다. 삼사는 조준, 정당문학(政
堂文學) 정도전, 밀직사(密直使) 남은(南誾), 예조판서(禮曺判書) 윤소종
(尹紹宗), 청주목사(淸州牧使), 조박(趙璞) 등의 죄를 들어서 왕에게 아뢰
었다.
왕은 이를 도당(都堂)에게 내주어 처리하게 했다. 이때 몽주는 도당 속으
로 들어가 그들의 조에 부채질을하여 여섯 사람이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하였다. 또 나아가서는 자기 당파의 사람인 순군천호(巡軍千戶) 김구련
(金龜聯)과 형조정랑(刑曺正郞) 이번(李幡) 등으로 하여금 구금해 놓은 장
소로 나아가 국문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때 방원은 제릉(齊陵=태종 모후 한씨의 묘소) 곁에서 여막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말에서 떨어져 돌아왔다는 소문과 또 몽주는 아버
지가 입경하는 날에 난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왔
다. 방원은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부친에게
"정몽주가 저의 집을 구렁에 넣을 음모를 하고있습니다. 속히 돌아가셔야
합니다. 여기에 유숙하시다간 큰 봉변을 당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진언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이 말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도 방원은 재삼 재사
간하여 마지 않았다. 성계는 부득불 응하지 않을 수 없어 억지로 고통을
참아가면서 밤새도록 걸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몽주는 대간을 시켜 교대적으로 글을 올리게하여 조준, 정도전 등
을 죽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방원은 몰래 성계에게로 나아가
"아버님, 정몽주를 죽여야 합니다. 몽주를 죽이는 것은 저희 집을 살리는
것이올시다. 속히 처치하소서."
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이 말을 듣고
"그게 무슨 말이냐? 사생(死生)은 유명(有命)한 것이다. 나는 그리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방원은 그래도
"몽주를 죽여야 합니다."
고 고집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여전히 불을하면서
"다 듣기 싫다. 그만 말하고 빨리 돌아가 너하는 일이나 완수하라."
라면서 아들을 돌려보냈다.
방원(芳遠=성계의 다섯째 아들 후에 태종)은 숭교리 구저(崇敎里舊邸)에
있으면서 성계의 응낙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같이 방안만 지키고 있을
때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방원은 나는 듯이 나가 보았다. 대문을 두드린 사람은 광흥창(廣
興倉) 사자(使者) 정탁(鄭擢)이란 사람이었다. 정탁은 방원을 보기가 무
섭게
"오늘 생민은 이장군님을 신명과 같이 보고 있소이다. 바로 신명으로 나
서실 때올시다. 왕후장상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라고 충고 하였다.
그리하여 방원은 방과(芳果=성계의 둘째 아들) 및 제(濟=성계의 사위)와
더불어 의논한 후
"몽주를 볼가불 없애야 하겠소. 내가 천인(天人)이 공노(共怒)할 죄를 지
게 될지라도..."
그리고는 이두란으로 하여금 정몽주를 격살할 것을 부탁했다. 이때 두란은
"글세? 이성계공(公)이 모르시는 일을 내가 어찌 감행한단 말이오?"
달게 응낙하지 않으매 방원은 조영규(趙英珪) 등을 불러
"우리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다해 온 것은 이 나라 백성이 다 아는 바이
다. 그런데 정몽주의 모함으로 이제 악명을 듣게 되었다. 나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에 필요한 사람인가? 이씨를 위하여 나서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단 말인가?"
부르짖었다.
이때 조영규는
"제가 이씨를 위하여 최대의 힘을 바치고자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방원은 조영규, 조영무(趙英茂), 고려(高呂), 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들어가 몽주를 없애게 하였다. 그런데
별안간
"어서 물러있거라."
"어서 물러있거라."
하는 벽제성( 除聲)이 들려왔다. 그래서 나가보니 정몽주가 문전에 당도
해 있었다.
성계의 서형(庶兄) 원계(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은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을 몽주에게 알렸다.
몽주는 이말을 듣고도
"무엇이라? 그러면 한 번 봐야 하겠다. 문병을 온체하고.."
이어 문을 두드렸다.
이때 이성계는 몽주를 여전히 친절히 대하였다. 성계의 서제(庶弟) 화
(和)도 있었는데 그는 방원에게
"몽주를 처치할 때는 바로 이때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진노하실까 걱정된
다."
말했다.
"그러나 기회란 뒤를 이어 오는 것은 아니올시다. 이 기회를 잃으면 다시
는 얻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방원은 이와같이 대답하고 조영규로 하여금 칼을 차고 몽주가 지나는 길에
서 대기하도록 했다. 때마침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사
망하였다.
몽주는 유원의 집으로 가 조상을 하고 거기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영
규등은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몽주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몽주가 나타났다.
영규는 나는 듯이 달려가 몽주에게 일격을 가하였으나 빗나가서 헛수고로
돌아갔다. 몽주는 말을 빨리 달리게 하면서 피신하기 시작했다. 영규는
또 달려들어 말목에 일격을 가했다. 말이 쓰러지자 몽주는 말에서 떨어져
서 다시 도망하기 시작했다.
이때 영규의 일당인 고려(高呂) 등이 달려들어 몽주를 격살하고 말았다.
몽주를 격살한 후 방원은 아버지 성계에게로와 몽주를 격살한 것을 보고하
였다.
이성계는 이 말을 듣기가 무섭게 대경실색하면서
"무엇이. 어째? 우리 집은 대대로 충효(忠孝)로 유명한 집인데 너희들이
맘대로 일국의 대신을 죽였단 말이냐? 국인이 나를 무엇으로 보겠느냐?"
고 소리를 내 꾸짖었다.
그러나 방원은 엄연한 태도로 말했다.
"아버님, 몽주와 몽주의 일당은 우리 집을 멸망의 구렁으로 쓸어 넣으려
노리고 있은지 오래였습니다. 이러한 몽주를 어찌 그대로 내버려 둔단 말
씀이오니까?"
그러나 성계의 노기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
강씨 부인은 성계의 기색을 두루 살피고는
"대감께서는 평소에 대장군으로 자임하시고 모든 일을 잘 처단하시더니 지
금 와서는 왜 그리 비겁해지셨습니까? 용기와 담력을 내서 행하십시오."
격려했다.
그리하여 성계는 다음 날에 사람을 보내 이와같이 아뢰게 했다.
"몽주는 남몰래 대간(臺諫)과 손을 잡고 충량한 사람을 모함했기 때문에
마침내 죽고 말았사옵니다. 바라건대 준(조준) 등을 조치하시와 대간과 더
불어 이를 변명케 하소서."
그리하여 왕은 부득이 대간인 사람들을 순군옥(巡軍獄)에 구금시키고 배극
렴, 김사형(金士衡)으로 하여금 그들을 국문하도록 했다. 이때 좌상시(左
常侍) 김진양은
"몽주 및 이색 또는 우현보(禹賢寶)가 이숭인과 이종학, 조호(趙瑚) 등을
보내 신 등으로 하여금 탄핵하도록 시켰나이다."
라는 말을 했다.
그리하여 숭인 등 세 사람을 순군옥에 구금하였다가 얼마 안 돼서 김진양,
이확(李擴), 이뢰(李 ), 이돈(李敦), 권홍(權弘), 정희(鄭熙), 김묘(金
畝), 서진(徐甄), 이작(李作), 이신(李申) 및 숭인, 종학 등을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당시의 유사(有司)인 사람은 말하기를
"진양 등의 죄는 참형을 받아야 한다."
고 주장했지먈 성계는
"그러나 김진양이란 탄핵한 것은 몽주의 사주(使嗾)에서 생긴 일이다. 어
찌 극형을 진양에게 가한단 말이냐?"
하며 진양을 용서하였고 이색은 한주(韓州=韓山)로 추방하였다.
정몽주와 이성계는 당초부터 나라의 중신으로 유명하였다. 성계가 위화도
에서 회군(回軍)한 후부터는 성계도 몽주와 같이 정승의 열(列)에 들어가
함께 나라에 몸을 바치고 지냈다.
그런데 이성계의 공훈이 날로 높아져 민심이 성계에게 쏠렸다. 이러했기
때문에 정몽주는 이성계가 고려조에 대신하여 왕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남
모르게 성계를 없애려는 꿈을 꾸었다.
방원은 일찍이 아버지 성계에게
"정몽주는 어째서 저희 집을 멸망의 구렁으로 쓸어넣으려 하는 것인가요?"
물었다.
성계는 그렇다고 해서 몽주에게 무슨 앙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
몽주의 음모가 청천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하자 방원은 어느 때 집에다 잔
치를 베풀고 몽주를 청하였다. 이 좌석에서 방원은 시조로 몽주를 종용
(慫慂)하였다. 그 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방원이 이와같이 먼저 부르자 몽주는 이에 화답하는 노래를 불러 자기의
심경을 피력하였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몽주가 이와같이 화답하자 방원은 몽주가 변심하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 마
침내 부하로 하여금 격살케 한 것이다.
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남은(南誾)은 조인옥(趙仁沃)과 더불어 성계
를 임금으로 추대할 것을 남몰래 의논하고 이를 방원에게 알렸다. 비밀히
방원은 이 말을 듣고
"알겠소. 그러나 이 일은 대사이므로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되오."
대답하였다.
당시의 민심은 모두 성계에게로 돌아 조인광좌(稠人廣坐) 중에서도
"천명과 인심이 벌써부터 이시중에게 돌아갔는데 왜 급히 서두르지 않는
고?"
하고 떠들어대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리하여 공양왕 임신 유월(壬申六月)에 이르러 방원은 남은과 더불어 추
대 계획을 세우고 비밀히 조인옥, 조준, 정도전, 조박 등 52인과 협력하여
추대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이에 불응하고 노발대발할까봐
방원도 보고할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부득이 강씨 부인에게로 나아가 추대
계획의 전부를 알림과 동시에 이를 성계에게 알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강씨 부인은 기회를 엿보고 지내다가 어느날 밤에 이를 이성계에
게 알렸다. 강씨에 대한 성계의 태도는 방원에 대한 태도보다 지극히 부
드러웠다.
마침내 7월 12일에 시중 배극렴 등은 정비(定妃=공민왕비)에게로 나아가
"오늘의 상감은 명철하시지 못하여 임금으로서의 위망(威望)을 잃어 민심
이 벌써부터 이반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상감으로서는 이 사직과 이 백성
을 부지하지 못하실 것으로 믿사오니 바라컨대 오늘의 임금을 폐하소서."
하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정비는 왕을 원주(原州)로 내쫓고, 13일에 이성계로 하여금 국사
를 맡게 하였다. 그리고 15일에 이르러서는 배극렴 등이 국보(國寶)를 성
계에게 전하고자 성계의 잠저(潛邸)를 향하여 나섰다.
그런데 이때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만이 불찬성하고 입을 열지 않았
다. 그래서 남은만은 민개를 죽이려 하였다. 이때 방원은
"도의상 그리할 수는 없다. 멈추라!"
재삼 만류하였다. 그리하여 민개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성계는 대문을 굳게 닫고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혼자 앉아 있
었다. 이를 안 배극렴은 대문 짝을 떼 던지고 들어가 옥새를 청상에 놓고
대배(大排)를 하며 동시에 북을 울리면서 <천세(千歲) 천세>하고 성계를
찬송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이를 굳이 사양하면서
"옛날부터 임금이 되려면 천명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천명도 못 받은데다 덕이 부족해서 임금 노릇을 못하겠다."
여전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소신료(大小臣僚)는 말할 것도 없으며 여항의 장로(長老)들도 그
냥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임신 7월 16일 병신(丙申) 즉 西紀 1,392년 음력 7월 16일이었다.
이날 백관은 반(班)을 지어 수창궁(壽昌宮) 서편에서 성계를 맞이하였다.
이 환영의 의식이 끝나자 이성계는 말에서 내린 후 걸어서 정전(正殿)으로
들어가 즉위한 후 옥좌에서 물러나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고 육조판서 이
상의 관직을 가진 사람을 전각 위로 모이게 하고
"과인이 이 나라의 우두머리 정승이 된 것만해도 분수에 넘치는 일인데 오
늘 또 이런 일이 있게 되니 참 의외가 아닐 수 없소. 병중에 있지 않고
몸이 건강했더라면 필마로 이 불의의 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요. 그런
데 병에 걸려 수족을 맘대로 쓰게 되지 못하여 이런 일을 받게 되었소.
경등은 여전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과인을 도웁고 나아가서는 전조의 중의
대소료로 하여금 여전히 국사에 힘쓰게 하오."
간곡히 부탁했다.
임신 7월 16일! 이날은 이성계가 여조 5백년 사직을 전복시키고 조선국 태
조로 출발한 첫날이었다. 그때 나이 58세였다.
그런데 나라를 들어 이성계에게 공손히 바치고 만 고려 32대 임금 공양왕
은 어떠한 임금이었던가를 다음에 잠깐 써 보고자 한다.
공양왕은 한갓 유하고 잔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랬던지 울기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런데다 국정에는 마음이 없고 불도(佛道)에만 쏠
려서 국사가 어려워지기만 했다.
그리하여 고려의 우국대신(憂國代臣) 정몽주는 어느날 경연(經筵)이 벌어
졌을 때 왕에게
"선비의 도는 일상 유용한 일을 함에 있고 요순堯舜)의 도도 또한 이에 있
사옵니다. 기거 동작에 있어 그 옳은 바를 얻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요순의
도가 되는 것이올시다. 그런데 저 불가(佛家)의 도는 이와 정반대가 아니
오니까? 친척을 멀리하고 남녀와의 관계를 끊고 홀로 암굴 속에 앉아서 초
의(草衣)를 몸에 떨치고 목식(木食)을 하니 이는 관공적멸(觀空寂滅)을 본
받는 생활이 아니고 뭣이겠습니까?"
사불(事佛)의 폐를 말해 올렸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들은 척 만 척할 뿐이었다. 정몽주는 온갖 방법으로 고
려를 구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그런 정도였으므로 몽주의 우국열성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고려는 마침내 이성계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고려의 멸망과 함께 죽고 만 정몽주는 어떠한 사람이었가? 그의 약전(略
傳)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정몽주의 자(子)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圃隱)인데 지주사(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예다. 그의 어머니 이씨는 그를 잉태할 때 난초분을 안고
있는 꿈을 꾸었으므로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지었다. 천생 사람됨이 수
려하고 또 어깨에 사마귀가 일곱이나 있는데 그 벌려져 있는 모양이 북두
(北斗)와 같았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그의 어머니가 낮에 흑룡(黑龍)
이 후원 배나무에 올라가는 꿈을 꾸고 깨어 보니 그것은 바로 몽난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고쳐 몽룡(夢龍)이라 지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藝文館檢閱)로 있다가 태조(이성계)를 따라 삼선삼개(三善三介)를 물리쳤
다.
그는 부모상(父母喪)에 반드시 묘측에 여막을 세우고 여기서 종상(終喪)하
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효자문(孝子門)을 세워 그를 표창하였다. 그리고
주자학(朱子學)에도 밝아서 모든 선비들은 스승처럼 앙시했다. 이색은 일
찍이 말하기를
"몽주의 논리가 횡성수설같이 들리지만 어느 하나라도 이론에 안 맞는 것
이 없다."
고 칭찬했다. 이 때문에 후인들은 그를 이학의 조(祖)로 추대하였다.
몽주는 인격적으로 보아 첫째 기백(氣魄)의 인(人)이었다. 그가 일찍이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서장관(書將官)이 되어 명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해
중에서 사나운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 일행이 다 죽게 되었을 때에 일개
암도(岩島)에 표착하여 13일 동안을 천명만 기다리고 초조히 굴지 않았다
한다. 이런 것을 보면 그의 기백을 알 수 있고 또 하나는 명나라가 원나라
를 전복시키고 일어났을 때 그는 당시의 조정에 대하여 명나라와 가까이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권신(權臣) 이인임은 또다시 원나라를 섬기고자 이에 응하
지 않았다. 그러나 몽주는 한사코 문신 10여인과 더불어 왕에게 그 불가
함을 역설하여 사명(事明)할 것을 글로 아뢰었다. 이 때문에 권신 이인임
은 몽주를 미워하여 언양(彦陽)으로 귀양보냈다.
이런 점은 몽주가 수정불굴(守正不屈)의 대장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몽주는 대담한 변설(辯舌)의 인(人)이었다. 어느 때 왜구(倭
寇)가 해주로 쳐들어와 전군이 텅 비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일본으로
가 문책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이인임은 정몽주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몽주를 일본에 보내고자 왕에게 창하였다. 몽주는 이인임의 심사를 알면
서도 가기로 하였다.
수월치 않은 일본이었지마는 일본은 몽주의 청산유수와 같은 변론을 듣고
칙사와 같이 대접했다. 그리고 그의 시문을 구하는 자가 떼를 지어 모여
들었기 때문에 몽주는 단 하루를 한가히 보내지 못했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국내에 말썽이 생겨 고려에 군사를 보낼 결심을 하고
있었다. 고려는 적당히 사절을 보내 성절(聖節)을 치하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의 사람들은 무슨 호령이나 받을까봐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이때 권신 임견미가 신우왕에게 몽주를 추천했다. 그리하여 몽주는 사명
을 완수할 것을 장담하고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성절일(聖節日)에 하표
(賀表)를 내 놓았다. 명나라 황제는 하표를 보고
"너희 나라는 무슨 핑계를 하고 오지 않으려다 할 수 없으니까 박두해서
온 것이지?"
힐책하듯이 묻는 것이었다.
몽주는 지난날에 있었던 해상에서의 조난사실을 들어 여전히 현하(縣河)
변(辯)으로 대답하였다.
명제(明帝)도 이 말에 감동하여 몽주를 특대하였다. 그리고 신우왕 12년
에도 몽주가 명나라로 가 관복(冠服)을 청하고 또 세공(歲貢)의 면제를 청
하였다. 그리하여 5년간 미납(未納)한 공물이 면제되었다. 이 때문에 그
는 신우왕으로부터 두터운 상사(賞賜)를 받았다.
몽주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인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내(內)에 있어서도
외(外)에 있어서와 같이 큰 일이며 큰 문제를 처리함에 놀랄 정도로 시원
하고 통쾌하였다.
그리하여 이성계가 공양을 임금으로 세움에 있어서도 도움이 커 문하찬성
사(門下贊成事)로 승진됨과 동시에 순충론도 좌명공신(純忠論道 佐命功臣)
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또 이조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이란 벼슬을 증
(贈)하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문묘(文廟)에 모시게 하
였다.
그가 조영규 도배에게 격살을 당한 때의 향년은 5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