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자들이 / 이소영
조교실이나 합동연구실에 가보면, 붙박이장처럼 거기서 종일 논문을 쓰며 옷섶에 볼펜 잉크를 묻히고 다니는 학생이 몇 명씩 있다. 대학원 시절 내가 그런 학생이었다. 속상하거나 답답할 때 고작 하는 거라곤 이어폰 꽂고 볼륨을 높여 음악 듣거나 폐지를 싹둑싹둑 자르는 정도였다. 이따금 그걸로 마음이 풀리지 않으면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일탈’했다. 일탈의 종착지라 해봐야 광화문 근처 대형서점이었지만 말이다. 신간들을 뒤적이다 그중 한 권을 골라, 당시 서점 근처에 있던 ‘미국 동부식’을 표방하는 빵집으로 향했다. 동그란 하드롤빵 안에 담겨 나오는 클램차우더 수프를 천천히 떠먹으며 간만에 전공서 아닌 책을 읽고 있자면 호퍼(Hopper)의 그림 속 인물이 된 양 기분이 근사해지곤 했다.
김연수의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도 그렇게 처음 접했다. 밤늦게 학생회실에 남아 문건을 정리하던 이십대 초반의 두 사람이 서로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가까워지는 데서 소설은 시작한다. 둘은 각자의 삶 안에 그토록 많은 이야기 조각이 숨어 있었음을 서로에게 그걸 들려주는 과정에서 깨닫는다. 그게 부러웠다. 이십대 초반 무렵 난 그처럼 상호적으로 호감을 키우기보단 발치에서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동경했으니까. 내가 동경했던 이들은 예민하고 섬세한 자기 세계를 가졌으나 아직은 나만큼이나 어렸다. 자기 어둠을 감당하기도 버거운데 곁을 서성이던 이의 숨은 선망까지 헤아릴 여유는 없었을 테다. 이쪽에서 뭔가 노력하면 저쪽에선 따분한 표정을 짓거나 이미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 있었다. 나는 주눅이 들었다. 그 지점부터는 늘 같았다. 말을 못했다는, 혹은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후회, 굳어진 표정, 경직된 몸짓.
그리고 생각했다. 만일 그때 만났던 그들이 더 어른이었더라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귀 기울일 상대방을 그때 가졌었더라면, 난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이젠 알 것 같다. 그 시절, 문제는 상대가 덜 어른이어서가 아니었음을. 아무리 긴 시간을 살아내어 세상을 잘 아는 이일지라도 누군가와 친구가 되려면 그에게 마음 누이고 아이처럼 위로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대가 경계를 풀고 내면의 이야기를 끌러놓을 틈을 내 쪽에서도 내어 보였어야 했던 거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 어느 시인은 말했다. 일전에 누군가 그랬다. 사랑을 잃은 와중에 ‘엉엉 우네’도 ‘꼴깍꼴깍 술 마시네’도 아니고 ‘나는 쓰네’라니, 시인이란 어떤 사람일지 싶다고. 선망하는 단계에 그쳐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데다 시를 지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 역시 그랬다. 적절한 순간 말로 건네지 못한 이야기를 뒤늦게 글로는 적을 순 있어서, 그거라도 하고 싶어서, 그래서 썼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안 자체에 관해서가 아니어도 영화나 음악이나 일상에 대해 한참 끄적거리다 보면 성마르게 울던 마음이 잦아들곤 했다. 생각해 보면 연구하고 가르치는 직업적 소임에 따른 글쓰기 이외의 글쓰기는 대부분 그런 이유로 행해졌던 것 같다.
드물지만 가끔, 아무것도 적을 수 없을 만큼 내면이 복잡하거나 고통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예전에 어딘가 써둔 걸 뒤적여 찾아 읽는다. 괴로움을 덜고자 적었던 글자들이 시간을 횡단하여 ‘자장자장 잘도 잔다’ 토닥이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의 나는 언어로 다듬어낸 나보다 얕고 고집스러우며 속 좁은 사람일 것이다. 문득문득 그 간극으로 인해 자괴감이 솟는다. 하지만 부끄러움 때문에 의지적으로나마 깊고 유연하고 넓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므로, 적어도 날 사랑하는 이라면 간극을 이유로 그만 사랑하게 되진 않으리라 믿고 싶다. 과거의 글자들이 오늘의 나를 토닥이듯, 지금의 글자들 역시 미래의 나를 보듬어줄 것이다. 아마도 이는 ‘쓰기’의 수많은 효용 중 하나일 테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입력 : 2021.07.28 03:00 수정 : 2021.07.28 03:00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728030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