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67
7월30일[연중 제1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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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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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DuDrWQJ2qx4 (이영춘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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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다시 획득해야 할!>
가끔 잘 준비되지 않고, 분위기도 전혀 아니며,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상태에서 미사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축제와 기쁨의 잔치가 미사인데, 참석하고 있는 얼굴들은 소 닭 보듯이 심드렁합니다. 눈동자는 오래되어 한물간 고등어 눈동자입니다. 주님과의 은혜로운 만남을 앞두고 기대감도 가슴 설렘도 없습니다. 그저 의무감에 숙제해치우듯이 후다닥 해치웁니다.
우리가 매일 습관적으로 드리는 미사, 사실 이거 보통 보물이 아닙니다.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왜냐하면 매 미사를 통해 우리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홍해 바다를 건넜던 파스카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매 미사를 통해 죄와 죽음의 땅에서 생명과 구원의 땅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매 미사 때의 영성체를 통해 황공하게도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과 죄인인 우리 인간이 만납니다.
수십 년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미사에 참석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 말씀에 따르면 미사 없는 하루, 영성체 없는 하루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답니다. 미사는 그분에게 있어 하루하루를 살아갈 힘이요, 에너지요,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분의 삶 안에 미사는 다른 어떤 것에 우선하는 No.1 이었습니다. 그분은 미사가 얼마나 값진 보물인지,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인지를 잘 깨닫고 계셨습니다. 이렇듯이 우리 인생에 값진 보물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면에서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가장 값진 보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이미 파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보려고 해도 결코 보지 못하는 천국을 이 세상에서부터 맛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입양해온 강아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강아지들이 최우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특식이나 간식입니다. 간식거리를 들고 다가가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꼬리뿐만 아니라 온몸을 흔듦으로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데리고 놀아주는 것, 산책시키는 것, 이 정도가 그들에게 큰 가치입니다.
그러나 강아지들은 우리 인간이 큰 가치를 부여하는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강아지에게 5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선물로 줘보십시오. 그것의 가치를 모릅니다. 고급 개 사료 한 달 치 살 수 있는 대단한 돈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입으로 물어뜯어 찢어버립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한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고, 값지고, 중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잡동사니 취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잠시 쥐고 있었지만 즉시 날아가 버릴 재산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는 불멸의 보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더 이상 고통이 다가와도 울부짖지 않습니다. 더 이상 아쉬움도 안타까움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다시 획득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회개의 곡괭이로 자신의 그릇된 과거를 갈아엎는 사람, 믿음의 쟁기로 자신의 부끄러운 하루를 뒤집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 만남이라는 큰 선물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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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6w34DIlIj_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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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 묻힌 보물: 아이들은 알고 어른들은 모르는 비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고 하십니다. 보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자기 집을 팔아서 그 밭을 삽니다. 하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밭은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 때는 칠성사의 보물이 묻힌 교회에 머물기 위해 가진 재산을 다 바쳤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가치를 ‘기회 비용’이라고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을 누리기 위한 기회 비용은 선악과였습니다. 하느님은 그 선악과조차 바칠 수 없는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을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이용 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기에게 일부러 피를 빨리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집착을 끊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보듯 세속-육신-마귀에 집착하면 모기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소유하려고만 하지 내어주지 못하고 내어주더라도 더 큰 이익을 위해 사랑을 가장할 뿐입니다. 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려면 이 세상 것들이 귀하게 보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도 하느님의 일을 한답시고 늦게나마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내가 끊고 들어온 것에 대해 억울한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끊고 들어왔던 것들이 아직도 나에게 소중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 것을 끊으면 보물을 차지하게 된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밭에 있는 보물의 가치를 알면 세상 것을 쉽게 끊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억지로 끊으려고 하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교만만 자랍니다. 정말 쓰레기처럼 보여야 합니다. 쓰레기를 버리고 그 쓰레기를 아까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물을 찾아야만 합니다.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어느 날 마약을 먹다 혀의 미각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치즈버거도 매우 좋아했는데 그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당장 평생 해오던 마약을 바다에 집어 던집니다. 감히 네가 뭔데 치즈버거의 맛을 못 느끼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이렇듯 무엇을 끊으려면 무작정 끊는 것이 아닌 더 행복한 것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아이들은 무엇이 가장 행복할까요? 부모로부터 사랑 받는 것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애착 실험에서 어미와 떨어진 원숭이는 수건을 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수건의 따스함에서 어미의 따스함을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원숭이는 철사로 만들고 젖병이 달린 원숭이보다 젖병이 없지만 수건으로 감긴 원숭이를 어미로 인식했습니다. 어미 배 속에서부터 느끼던 따스함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있기 때문에 세상 집착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고 그래서 형제에게 가진 것을 쉽게 내어줍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그들의 행복은 돈이나 먹고 마시는 것, 혹은 명예나 권력이 되어갑니다.
빌 포터는 뇌성마비로 태어나 한 손과 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말도 어눌하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누구도 깨지 못한 기록을 가진 판매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엄청난 거리를 남들보다 느린 속도로 걸으며 문을 두드렸습니다. 처음엔 아무도 사주지 않았지만, 차차 그의 마음을 알고는 사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를 그렇게 살 수 있게 만든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샌드위치에 ‘인내와 끈기’라는 말을 케첩으로 써넣어 매일 먹게 하였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무너질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정말 우리 창조자일까요? 우리는 우리 생명을 주신 분이 따로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으로부터 사랑 받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안다면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주님께 많은 것을 드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체를 영할 때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우리에게 다 주시는 분,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믿음이 가장 큰 보물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아니 내가 버린 것들이 억울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끊기가 쉬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것도 쉬워졌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하는 유일한 보물은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입니다. 이것만 찾으면 이 세상 것을 끊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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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또 우리의 모든 상황을 포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하늘나라 또는 주님의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그물의 비유는 지난 주일의 가라지 비유와도 비슷하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9-50) 이것은 항상 그리스도를 철저히 선택하라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도록 가장 소중한 것, 즉 지혜와 분별력을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1열왕 3,7-9)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이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1열왕 3,11)을 청하지 않고 지혜를 청한 것을 칭찬하시며, 그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실 뿐 아니라 다른 은총도 무수히 베풀어주신다.(1열왕 3,12-13) 솔로몬의 이 기도는 모든 사람의 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을 꿰뚫어 본 기도이다. 선과 악을 가려내고 공동체에 유익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명석한 머리는 더욱 그렇지 않은가? 교회 안에서도 책임을 맡은 입장이라면, 바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그들의 행복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현세의 모든 것을 통하여 어디서나 그분을 발견하고, 솔로몬이 백성들을 위해 하느님께 청했듯이 우리 형제들을 위해 청하기를 바라신다.
복음: 마태 13,44-52: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진주에 대한 비유에는 다 같이 값진 보물을 찾자마자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팔아버리고 그 보물을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44; 참조: 46절) 그들은 그들이 발견한 엄청난 가치,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존 즉 하늘나라에 압도되어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것을 소유하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떠한 모험도 무릅쓸 수 있는 용기를 내게 된다.
여기서 이제 그리스도와 복음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망설일 수 있겠는가? 그분 때문이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러나 이것이 어려운 것은 그러한 가치를 알면서도 그것을 잡기 위해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또 그것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하찮은 일들을 포기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밭에 묻혀있는 보물이나 유일한 진주를 얻을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인간적인 모든 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 새롭게 변모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때, 그렇게 될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새롭게 변모시키는 능력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때 우리는 그 보물과 진주를 갖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지혜이다.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참된 제자의 모습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 이 비유는 구약성서의 모든 내용(옛것)이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빛에 비추어 재해석된 무한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앙의 유산으로 전해진 복음의 무한한 부를 더 깊게 하고,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초대를 받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세대가 처음부터 발굴해서 세상에 드러내야 할 보물의 진가를 발견하고 또한 널리 알리는 방법이다.
사도 바오로 역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깊이 사고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생각하셨고(에페 1,3-14) 모든 것을 우리의 선익을 위하여 마련하시고 미리 정하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로마 8,29)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하늘나라가 확장되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계획 속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주실 계획까지도 세워놓으셨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을 드리고 그분을 다시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참된 지혜란 무엇인가?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뜻에 항상 일치하려고 하는 삶을 통하여 그분을 소유하는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참된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셨던 그리스도는 지혜 자체이신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닮으려 진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삶이 된다면 우리는 진정한 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을 닮을 수 있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팔 수 있을 때, 하늘나라와 그분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 지혜와 함께 참된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참된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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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후배 신부님과 크루즈 여행을 가면서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들었습니다. 한번은 방 청소를 하는 직원에게서 들었습니다. 직원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들하고 같이 왔습니까” 저는 친절하게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머리가 하얗게 변해서 그렇지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같은 한국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르신! 아들하고 같이 여행 다니시니 부럽습니다. 나도 아들이 20살인데 같이 가자고 하니 안 간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에도 친절하게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머리가 하얗게 변해서 그렇지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후배가 다음 달이면 한국으로 가는데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같이 여행 왔다고 하였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분별력이 없어서야!’ 하긴 후배는 옷을 아주 젊게 입었습니다. 저는 복장도 그렇고, 특히 머리카락 색깔이 그런 오해를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저를 아버지로 봐 준 분들은 어쩌면 저의 내면에 있는 중후함을 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금도끼와 은도끼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마음 착한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가 그만 연못에 도끼를 빠트렸습니다. 산신령이 은도끼를 보여 주면서 ‘이것이 너의 도끼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나무꾼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금도끼를 보여 주면서 ‘이것이 너의 도끼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나무꾼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산신령은 쇠도끼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너의 도끼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나무꾼은 ‘예, 그것이 저의 도끼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산신령은 착한 나무꾼에게 금도끼도, 은도끼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금도끼와 은도끼의 또 다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착한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가 역시 도끼가 연못에 빠졌습니다. 산신령은 착한 나무꾼을 알아보고 이제는 나무꾼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무꾼은 생각하였습니다. 세상을 지혜롭게 살려면 ‘머리’가 좋아야 했습니다. 세상을 풍요롭게 살려면 ‘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세상을 행복하게 살려면 ‘여자’가 있어야 했습니다. 고민 끝에 나무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머리 돈 여자’ 산신령은 착한 나무꾼에게 ‘머리 돈 여자’를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식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축복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이 지혜를 청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솔로몬을 지혜의 상징으로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가짜엄마와 진짜엄마를 가려낼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산적한 많은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똑똑하다는 사람, 지혜롭다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이렇게 작은이들에게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보여주셨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식별의 은사는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물‘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물‘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이라는 보물을 팔아서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쓰레기를 사려고 합니다. 우리는 겸손과 희생이라는 보물을 팔아서 교만과 욕망이라는 쓰레기를 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창고에 쓰레기를 가득채운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팔아서 사야할 보물은 진실과 정의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팔아서 사야할 보물은 우정과 사랑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팔아서 사야할 보물은 십자가입니다. 내 기억의 창고에, 내 삶의 창고에 겸손, 진실, 정의, 우정, 사랑, 십자가가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나라에 초대 될 수 있습니다. 여름입니다. 농부가 땀 흘려 밭을 가꾸듯이, 우리들도 가진 것을 팔아 보물을 찾으러 가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이나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습니다.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기뻐하며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살 수 있는,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마음을 주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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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쁨>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여기서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는, 뜻으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은 ‘기쁨’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비슷하다.”입니다. ‘밭에 숨겨진’이라는 말과 ‘다시 숨겨 두고서는’이라는 말은, ‘기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는, 뜻으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은 ‘기쁨’은 좋은 진주를 찾던 상인이 그 진주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비슷하다.”입니다.
하늘나라는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관한 복음을 들었을 때 누구나 똑같은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듣더라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사람만이 기뻐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라는 말과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라는 말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온 삶’을 다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던 어떤 부자 청년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16.21-22)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 청년에게 ‘밭에 숨겨진 보물’을, 또는 ‘값진 진주’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기뻐하기는커녕 슬퍼하면서 떠나갔습니다. 보물을 발견했는데도 왜 기뻐하지 않았을까? 그는 영원한 생명을, 또는 하느님 나라를 원하긴 했지만, 갈망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그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슬퍼했을까? 둘 다 가질 수는 없고,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슬펐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면 세속의 재물을 포기해야만 하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텐데, 예수님의 답변은 명확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이 말씀을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에 적용하면,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차지하려고, 또 값진 진주를 차지하려고, 가진 것을 다 처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처분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차지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면 자신의 목숨을, 또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쳐야 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가 주는 영원하고 큰 기쁨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기쁨으로) 자신의 목숨과 인생 전부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바치는’ 그 일은 절대로 슬픈 일이 아니고, 그 일 자체도 ‘기쁜 일’입니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그물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종말의 심판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물에 ‘온갖 종류의 고기’가 들어 있는 모습은 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는 ‘가라지의 비유’와 비슷합니다. 심판에 관한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와 똑같습니다.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는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에도 있습니다. ‘그물’을 인간 세상으로 볼 수도 있고, 교회 공동체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 세상은 의인들과 악인들이 섞여 있는 세상입니다. 종말의 심판 날이 되면 의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악인들은 멸망당할 것입니다. 그물을 교회 공동체로 생각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 되어서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해도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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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다시 비유를 통하여 하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살펴볼 것은 비교되는 대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비교가 되는 것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그물입니다. 하늘 나라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밭에 숨겨진 보물처럼 값진 것입니다. 또한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습니다. 값진 것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알아 그것을 얻고자 노력하는 상인과 같이 역동적인 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그물과 비교되는 하늘 나라는 모든 사람을 모아들입니다. 하늘 나라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고 그들을 초대합니다.
무엇보다 값지고 역동적이며 모든 이를 모아들이는 하늘 나라의 모습은 구약 성경에서 일컫는 지혜와 닮았습니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지혜 7,9) 여겨집니다.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지혜 7,24) “지혜가 언덕 위,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네거리에 서 있다. 성읍 어귀 성문 곁에서, 여러 대문간에서 외친다.”(잠언 8,2-3)
하늘 나라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선포하신 내용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비유는 대부분 하늘 나라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하늘 나라는 찾고 얻어야 하는 것으로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값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늘 나라가 어떠한지 가늠할 수 있게 하여 줍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고 상상하기 힘든 하늘 나라에 비유로 조금 더 다가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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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최우주 필립보 신부님]
<하느님의 약속>
구약성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말씀하시면서, 그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자주 표현하셨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실제 당시 이스라엘 땅은 사막과 광야가 많은 척박한 황무지였습니다. 약속받은 축복의 땅이라 할지라도 양과 염소의 젖을 짜고 야생벌의 꿀을 모아야 살아갈 수 있는 고된 노동이 요구되는 환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율법에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위한 종교적인 내용도 있지만, 척박한 환경의 생존을 위한 삶의 지속성을 염두에 둔 생태학적 접근도 있습니다. 음식과 농사에 대한 규정 등이 그렇습니다.
특별히 ‘희년’ 기간에는 토지 사용을 금하고 그 전년도에 곡식을 저장해 놓고 토지의 힘(지력)이 회복될 수 있도록 기다립니다. 저장해 놓은 곡식이 한 해를 사는데 넉넉지는 않지만 아껴가며 희년을 지냅니다. 이는 제한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지속적인 생존을 위한 공동체의 결단과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로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이와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의 행동을 전합니다. 두 사람 모두 발견한 것을 얻기 위해, 가진 것을 팔아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 인류와 사회는 지속성과 생존을 위해 공동체적인 숙고를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 숙고와 결단은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을 추구하되 모든 인류와 피조물이 함께 공존하고 지속적인 삶을 위한 방향이어야 합니다. 근시안적인 이득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복음의 빛’으로 주어진 힘과 지혜를 잘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히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생태계의 목소리마저 담아내야 진정한 변화, 하늘 나라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혁신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로마서를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경험으로도 서로가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았을 때 좋은 결과를 이루어 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마음과 힘을 모을 때, 힘이 들더라도 희망과 기쁨이 우리 안에 자리하게 됨을 체험합니다.
오늘의 복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우리의 모습은 입당송의 시편과 같이 “하느님은 한마음으로 모인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하늘나라 완성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파는” 결단과 용기를 내보이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복음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지기를 희망하며, 하느님께 우둔한 마음을 주시도록 축복을 청합니다.
‘많은 이들이 절망해도 우리의 노력이 이 세상에 작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도록. 많은 이들이 주어진 현실에 불평하고,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시행하여 가난한 이들과 우리의 자녀들에게 정의와 친절함을 가져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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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문양기 다니엘 신부님]
<애물단지·보물단지의 삶>
요즈음처럼 멀쩡하던 분들이 뜻밖의 중병에 걸려있음이 발견되어 생사를 오가는 안타까운 정황이 비일비재한 적도 없는 듯합니다! 반면에 생생히 건재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천국의 방을 이 세상에 옮겨 놓으셨나?" 여겨지는 분들도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하늘나라는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 보물의 비유와 진주의 비유는 다름 아닌 쌍둥이 비유죠? 그 공통점은 먼저 값진 물품이 발견되고 있고, 주인공들 - 발견한 사람이나 진주 상인이 그 값진 물품을 획득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기꺼이 다 팔거나 처분하여 그 물품을 샀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쌍둥이 비유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 늘나라이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지상 것들에 집착하는 저희로서는 힘든 일이죠? 고맙게도 오늘의 말씀은 바로 그렇게 살 수 있음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솔로몬이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백성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는 지혜듣는 마음을 주시어, 백성 통치나 선악 분별!)를 청하자. 그때 하느님께서 주신 응답! -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 배려해 주심!) 이 그렇고, 또한 2독서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 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며, 의롭게 하셨으며,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하며, 살아갈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네 인생.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저 현실. 물질, 세속 가치에만 젖어 살면 애물단지의 삶이 되고, 하느님 지혜 - 하늘나라 가치에 따라 살면 보물단지의 삶이 된다는 거! 이미 체험해 오셨죠?!
- 아무리 세상 <물질> 가치가 우리를 현혹한다 하더라도, 솔로몬이 지혜를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사연과 사도 바오로의 조언에 힘입어 늘 예수님의 큰 사랑의 삶을 따라 산 덕분에, 지금 여기 이 현실에서부터 참 하늘나라의 기쁨을 살고 서로 기쁘게 나누는 더 신나는 행복한 일상이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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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제주》 말씀
[제주교구 현경훈 미카엘 신부님]
<새로운 보물, 마지막 보물>
+ 찬미예수님
보물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나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사람 각각 다 다릅니다. 그럼 마지막 보물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사는 동안의 보물은 생각하지만, 마지막 보물을 생각하고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날이 아직은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솔로몬은 보물로 분별력을 청합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먼저 듣는 마음입니다. 다 허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백성을 통치하는 것은 들음에서 출발합니다. 교회는 시노드를 통해 들으려 합니다. 그것은 허락과는 다릅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듣고 다음 통치를 합니다. 이 통치에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이 분별력입니다. 분별력은 선악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지?
새로운 보물을 발견하면 지금의 보물은 다 처분합니다. 보물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가치 있는 것이 나타나면, 모든 것을 다 팔아버립니다. 지금 가진 것보다 그것이 더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물의 고기를 나누듯이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헌것을 나누듯 하느님 나라에서 나는 어느 편이 되어 있을까요? 보물을 찾아 나서는 상인처럼 나는 새로운 보물이어야 그릇에 담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30) 먼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새로운 보물이 되도록 의롭게 만드십니다. 마지막 보물이 되어 영광스럽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과정 안에서 단련을 받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보물로 보아 주십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많은 보물을 만납니다. 그리고 새로운 보물을 발견하고 다시 새로운 보물을 찾습니다. 마지막 보물은 무엇일까요? 내가 새로운 보물이 되고 내가 마지막 보물이 되는 것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고, 만들어 가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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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민호 베드로 신부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는 보배로운 눈과 분별의 은총을 청합시다.”
‘눈이 보배’라는 우리말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에는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좋아 보이는 것’과 정말 ‘좋은 것’을 구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뜻 보면 이 두 가지가 비슷해 보이거나, 좋게 보이기 위한 포장을 잘해서 오히려 나쁜 것들이 좋은 것보다 더 그럴듯해 보이는 경우들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솔로몬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느님께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청하였으며,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보물을 발견하고 알아 볼 수 있는 눈’과 ‘그물 안에 있는 물고기 중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고를 수 있는 분별력’을 갖도록 요청하신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우리는 끊임 없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선택은 나에게 더 가치 있고 소중하며 좋은 것들을 고르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눈과 올바른 가치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털어버려야 할 것들로 나와 내 삶을 채우며 정작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은 밖으로 내던져 버리는 어리석고 안타까운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듣고 그 말씀을 간직하는 신앙인은, 밭에 숨겨져 있는 것처럼 내 삶 안에 숨어 있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을 찾을 수 있게 되며, 또한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구별하여 내게 불필요하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피하고 정리하여 내 밖으로 던져버리고, 그곳에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들을 채워감으로써 풍요로워지며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솔로몬이 하느님께 청하였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분별력을 청하도록 합시다.
주님, 당신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힘으로 저희가 이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아, 지금 이 시간 안에서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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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배하정 다니엘 신부님]
<우리에게 보물과 좋은 진주는 무엇일까?>
연중 17주일 복음 말씀은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과 같아 그는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살 것이 고,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아서 그 역시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살 것이라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보물과 진주'도 그것의 가치를 아는 이 만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물과 진주'가 개나 돼지에게 주는 보석과 다름없습니다.
예수님께 밭에 숨겨진 보물은 무엇이었을까요? 좋은 진주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사람이고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사람이 보물이고 진주였기에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느님이신 분께서 기꺼이 사람이 되셨고, 사람 가운데 오시고, 사람과 함께 사셨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맡겨진 사람 어느 하나도 잃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앞날의 삶이 어떠할지 알면서도 사람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결과는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했던 사람들이 은전 서른 개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외면했습니다. 결국 사람들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너무 귀한 보물을 찾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사람과 같아지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사람이, 그리고 세상이 가장 귀한 보물이고 좋은 진주였습니다.
예수님께 사람과 세상이 보물이고 좋은 진주였기에 사람 사이에 오셨고 사람과 함께 사셨는데 그 삶 안에서 얼마나 많이 사람을 통해 아프셨을까요? 사람 때문에 세상에 오시고 사람을 위해 헌신하고 투신하며 사셨음에도 사람들에게 상처받으시고 아파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늘 우리 손을 잡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귀하게 여기시고 좋은 진주를 조심히 다루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사람이, 세상이 보물이고 좋은 진주라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는 무엇이 보물이고 좋은 진주일까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사람과 함께 살면서 사람에게서 상처받고, 아파하고, 실망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러 셨듯 우리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함께 호흡하고 함께 걷고 함께 움직이며 살면서 보물을 조심히 다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한 보물들 사이에 머무셨듯이 우리도 사람 사이에 머물러야 하고, 좋은 진주를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통하여 사람과 함께 사람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우리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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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인간의 내면 생태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욕구와 의도 등 각기 다른 것들이 함께 공존하니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호 모순된 감정 때문에 마음이 찢기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헤어나지 못한 때도 있고,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어.’라고 탄식을 쏟아 낼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그 무엇을 향한 우리의 내적 궤적은 한 단계로 직진하며 나아가는 단선적 발달이 아니라 끝없이 돌고 도는 나선적 발달 과정입니다. 나란 존재가 변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앎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더 뚜렷하게 깊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이런 과정은 끊임없이 부단하게 나의 내면을 보려는(=시각, 관점) 행위에 매달린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기에, 자기 내면을 직시하려는 행위를 어떤 이는 ’마음 오디세이아‘라고 표현하더군요.
코로나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난달 몇 년 만에 저는 중국 실크로드 여행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짧은 여행이든 긴 여행이든, 도시든 사막이든 여행하고 돌아오면 생각이나 느낌이 참 많아집니다. 예전 베트남에서 되돌아왔을 때도 지금과 아주 다른 내적 갈등과 심각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관구 봉사자 소임을 끝내고 안식년 1년, 안성 성요셉병원에서 원목으로 3년 그리고 벳남에서 3년간 생활하고서, 무려 7년 동안 공동체 외부에서 생활하고 공동체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빠르게 변한 것처럼 수도 생활도 참으로 빨리 변했더군요. 그때 저는 변화된 현실의 높은 장벽에 갇힌 듯싶었고,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어 갇힌 듯 답답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오늘 복음의 좋은 진주를 찾은 상인이 부럽게 느껴졌었습니다. 보물과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처분하고 과감하게 자신이 찾은 것에 몰입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부러웠습니다. 그 까닭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는 저 자신이 답답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분명 좋은 진주, 곧 하늘나라와 그 가치를 살고자 하는 열망이,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오늘 복음은 저에게 좋은 진주를 찾을 곳이 어디인지 묻지 말고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찾도록 저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어제 찾은 것에 집착하지 말고 어제와 다른 더 좋은 진주를 찾고 발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도록 호출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찾고 발견한다면 더 이상 미련이나 후회하지 말고 과감히 가진 것을 다 처분해서 사도록 촉구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13, 44~46) 오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를 가르쳐 주는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물을 우연히 발견하든 또는 진주를 애써 찾다가 얻었든 귀중한 것을 발견한 이들은 한결같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구매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보물이나 진주가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다 처분해서 매입해야 할 만큼 투자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처분함으로써 여러 가지 불편하고 어려운 점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자신들이 찾길 원하던 귀한 것을 획득했다는 기쁨이 더 컸기에 그런 결단을 내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 귀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별로 소중하거나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는 마치 보물과 진주를 발견하고 귀하게 여겼기에, 모든 것을 다 매각하고 구매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나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하늘나라를 발견했을 때, ‘발견하고 찾은 기쁨’이 너무 행복했기에 기꺼이 자신의 전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물과 진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 바로 하늘나라의 놀라운 가치를 대면한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가치에 압도되어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적합한 삶을 살아가고자 전 존재를 바쳐 투신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고귀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 3, 8)
저는 낚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낚시하러 갔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물을 쳐 본 적은 한 차례도 없을뿐더러, 어떻게 그물을 던질지도 모릅니다. 벳남에 살 때 무이네 바닷가에 가서 어부들이 그물로 고기를 잡는 광경을 가끔 보긴 하였습니다. 무이네 어부들은 ‘통버이’라는 대나무로 엮어 만든 바구니 배로 연안으로부터 수백 미터 이상을 나아가 물고기와 게나 새우 등을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집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떠 있는 수많은 통버이의 모습은 아침 햇살과 더불어 참으로 볼만한 장관입니다. 물고기를 잡은 통버이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모래밭으로 끌어올리고, 그런 다음 가족들이 함께 잡은 물고기나 다른 것들을 선별하고 분류해서 팝니다. 아직도 그때 보았던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13,47)고 예수님께서는 표현하십니다. 하늘나라가 그물과 같다고 하니 여러분들은 이해되시고 ‘깨달으셨습니까?’(13, 51) 어쩌면 그물의 비유를 깨달아야 만이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가 되고,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3,52참조)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인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4, 19)하고 부르셨으며, 그러자 그들은 즉각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하늘나라란 고기를 잡는 그물질과 유사합니다. 바다는 마치 세상과 같은 개념이며, 이 바다에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도 그리고 아직 하느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도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도, 희망으로 넘친 사람도 절망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봅니다. 그런 바다는 때론 잔잔할 때도 있고 엄청난 파도가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런 여건에서 하늘나라의 그물질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일단 세상이란 바다에 그물을 던져 그물에 잡힌 고기를 모래사장에 끌어올릴 것입니다. 그 그물 안에는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죄인도 의인도 함께 걸려드리라 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던진 그물에는 흡사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마태 5,45)듯이 모든 종류, 즉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 비싼 어종魚種과 값싼 어종들이 그물에 걸려 올라오리라 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물을 쳐서 잡아 올린 고기들을 뭍의 모래밭으로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크고 좋은 고기들은 그릇에 담고 작고 나쁜 고기들은 밖으로 던져 버리는 일은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들의 일이라고 봅니다. 교회 안에 다양한 소임과 직책이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다 함께 사람 낚는 어부들입니다. 좋은 고기인지 나쁜 고기인지 선별하는 식별작업을 위해 교회 공동체 지체인 우리는 영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식별력은 우리 시대에 정말 중요하고 막중한 능력이며 책무이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힘은 아무래도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학자(=여기서 학자란 좁은 의미에서 성직자에 국한한 것이 아님)만이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런 식별력은 끊임없는 기도 생활을 바탕으로 신학적인 지식과 함께 풍부한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이 적합하리라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13, 51) 하고 물으십니다. 비유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그 가치를 살아가는 제자들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는 모름지기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13, 52)과 같아지기 위해서는, 오늘 독서의 솔로몬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과 선과 악을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는 마음”(1열3, 9)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진정 하늘나라의 곳간지기는 머리를 잘 굴릴 수 있는 능력이 아니고, 마음을 잘 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며 이런 사람은 어느 때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어떤 문제를 만나든 늘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시선에서 문제를 바라보기에 적절한 지혜로 대처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닫힌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 열려있고, 더욱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에 누구에게 상처를 주거나 누구를 희생하는 편협된 지혜가 아닐 것입니다. 이 지혜는 타인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마음이기에, 타인을 자유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나라의 곳간지기는 언제나 현명한 솔로몬처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나이다.” (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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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의 보물 제1호>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 무엇일까?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에 대해 기대하는 만큼 중하게 지키고 보호하고 간수 하려 애쓰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일입니다. 여러분의 보물 제1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그리고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을 보면 무엇을 보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값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그보다 못한 것을 처분함은 당연합니다.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큰 것을 얻기 위해 그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은 희생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를 소유하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모두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천상의 하늘을 희망하면서도 세상을 꼭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보물을 발견한 기쁨이 크면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물은 그 보물 앞에서 빛을 잃어버립니다. 억제할 수 없는 기쁨 때문에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하잘 것이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야말로 보물 1호는 양보할 수 없는 첫 자리입니다.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보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오로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피3,8)
그리고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리피1,21)
바오로에게 있어서 주님을 얻게 되는 것은 모두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오로의 진정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10장 17절 이하를 보면 ‘부자 청년의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어떤 사람에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결국 그는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면서도 자기의 소유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정한 보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애쓰지 않는 사람이 보물을 발견하거나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보물을 얻으려는 사람은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수 있는 희생적인 투신이 꼭 필요합니다. 그야말로 ‘봄에 씨를 뿌려야 가을에 거둘 것이 있는 법’입니다. 시편에는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 라는 보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보물을 발견한 장소가 “밭”입니다. 농경사회에서 밭은 일상의 문화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찾는 보물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루카17,21) 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21,3) 그러므로 진정한 보물을 아는 사람은 그만한 기쁨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보물은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주어졌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보물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1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보물로 얻은 사람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기쁨은 그 어느 것하고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값진 것을 발견했으면 지금까지 귀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늘나라를 위해 투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또한 주님을 비추는 이웃의 보물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진정한 보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 내가 다른 사람의 보물이 되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가기 때문입니다.’(마태7,21) 값진 진주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에 진주, 보물은 많지만 모든 재산의 가치보다 귀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 신앙은 또한 더없이 값진 보물입니다.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은 손을 잘라도 도박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손이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손이 크다.’ ‘손버릇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음이 그렇다는 얘깁니다. 아무리 고운 손이라도 나쁜 짓을 하는 손은 고운 손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친 손이라도 선한 일을 하면 고운 손이 됩니다. 손의 주인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감옥을 갈 때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만 죄를 지은 마음은 손으로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 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천상, 하느님 나라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 외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주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흩뜨리지 말며 무엇 때문에 놀라지도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차지한 자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하느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보물 1호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값진 보물로 첫 자리에 계시길 기도드리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그분의 이름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나라의 보물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삶의 자리에 있고, 이웃 안에 있습니다. 보물을 잘 찾는 한 주간 되시길 바라며 꼭 천상의 행복을 차지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여러분 자신이 이웃의 소중한 보물이라는 것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보물을 보물로 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천상목적지는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천상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방황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순례의 길을 걷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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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중화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알려진 비수민 작가가 한 대학교에서 강연했습니다. 감동적인 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어 물었습니다.
“선생님, 삶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러자 비수민 작가는 별 표정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산다는 건 원래 아무 의미 없어요.”
작가의 대답에 학생들은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강의 내용 자체가 삶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작가는 곧바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 삶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죠.”
공감이 가는 대답입니다. 삶의 의미는 내 인생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미 자체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죽음의 수용소라 불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의미를 부여했던 사람만 살았다는 사실처럼, 우리 역시 계속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만이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아무 의미 없이 보내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큰 의미가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데 힘을 쏟는 것, 그리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랑의 삶이 어떻게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기에 의미 없어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비유를 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살아 있는 사람 중에는 그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나라이기에, 우리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가야 할 나라임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에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이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삽니다. 바로 하늘 나라가 밭에 숨겨진 보물이고, 상인이 찾는 좋은 진주라는 것이지요. 그 의미를 발견한 사람만이 하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모든 힘과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물의 비유 말씀도 해주십니다. 바다에 던져진 그물에는 온갖 종류의 고기가 걸리는데, 그물을 끌어 올린 뒤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눌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때가 세상 종말 때라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의미를 찾아야 지금을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충실히 살 수 있게 됩니다. 세상 종말에 주님으로부터 선택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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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 하늘나라가 되다>
마태오 13,44-46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 비유를 끝맺는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사람이 하늘나라가 되다>
기꺼이 길을 걷고픈 사람이
오직 길을 걸음으로써
길이 되다
기꺼이 믿고픈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써
믿음이 되다
기꺼이 희망하고픈 사람이
오직 희망함으로써
희망이 되다
기꺼이 사랑하고픈 사람이
오직 사랑함으로써
사랑이 되다
기꺼이 참되고픈 사람이
오직 참됨으로써
참이 되다
기꺼이 착하고픈 사람이
오직 착함으로써
착함이 되다
기꺼이 아름답고픈 사람이
오직 아름다움으로써
아름다움이 되다
기꺼이 함께하고픈 사람이
오직 함께함으로써
함께가 되다
기꺼이 나누고픈 사람이
오직 나눔으로써
나눔이 되다
기꺼이 섬기고픈 사람이
오직 섬김으로써
섬김이 되다
기꺼이 살리고픈 사람이
오직 살림으로써
살림이 되다
기꺼이 하늘나라를 찾고픈 사람이
오직 하늘나라를 찾아 나섬으로써
하늘나라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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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거룩한 교환(Sacrum Commercium)>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아우를 때 연중 제17주일의 주제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독서는 솔로몬이 지혜를 청해서 소유하는 자가 되었음을 얘기하고, 복음은 보물이 묻힌 밭을 모든 것을 팔아 소유하는 자에 대해 얘기합니다.
결론적으로 지혜란 비우고 채우는 능력이요, 버리고 얻는 능력이며, 팔고 사는 능력입니다.
부연하면 무엇을 비우고 무엇으로 채울지 아는 능력이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지 아는 능력이며, 무엇을 팔아 무엇을 살지 아는 능력입니다.
부연하면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아는 곧 식별하는 능력이요, 알고 식별할 줄 알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부귀와 장수를 청하지 않고, 지혜를 청하되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청합니다. 복음의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걸 팔아 보물이 묻힌 밭을 삽니다. 그런데 모든 걸 팔아 사야 할 보물이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돈보다 건강이 중요하고, 장수보다 하느님 나라가 중요함을 알기에 평생 모은 재산을 팔아도 아깝거나 슬프지 않고 기쁘게 모든 걸 팔아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클라라 성녀는 이것을 거룩한 교환(Sacrum Commercium)이라고 했습니다. 이 지상 것을 팔아 천상 것을 사는 그런 교환의 삶을 우리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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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보물찾기 인생 여정>
- 참보물이자 참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23,1)
착한 목자 주님은 우리의 참 보물임을 고백하는 시편입니다. 부자들의 천국이 여기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이야말로 살아 있는 보물 창고입니다.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살아 있는 참보물입니다. 마음의 눈만, 지혜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살아 있는 주님의 선물들이자 보물들입니다. 보물을 찾을 때 누구나 부자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말그대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눈이 닫혀 있어 무지의 어리석음에 보물을 곁에 놔두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보물 찾아 어리석게 밖으로 찾아나갈 것은 없습니다. 바로 지혜의 눈만 열리면 내 삶의 꽃자리 바로 여기 공동체가, 우리 각자의 마음밭이 보물이 숨겨져 있는 보물밭입니다. 누가 저에게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살아가느냐 묻는 다면 저는 단연코 하루하루 날마다 보물찾는 기쁨으로 살아간다 말하겠습니다.
날마다 한밤중 일어나 보물찾는 설레는 기쁨으로 쓰는 강론입니다. 저에게는 하루하루가 새 하늘, 새 땅, 새 날의 선물이자 참보물입니다. ‘보물찾기’하면 생각나는 것이 초등학교 시절 봄, 가을 소풍때 소풍이 끝날 무렵 실시되었던 보물찾기 시간입니다. 예전 시골은 정말 살아있었습니다. 시골에서 50년대 초등학교 시절중 가장 설렜던 시간은 청백팀 경기로 이뤄진 가을 운동회와 봄, 가을 두 차례의 소풍이었습니다. 전날부터 밤잠을 설칠만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 소풍이요 운동회날이었습니다.
소풍의 절정은 소풍이 끝날 무렵 보물찾기 놀이였습니다. 보물을 찾을때의 설레는 마음, 보물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또 때로 보물을 찾지 못했을 때 보물을 찾는 동무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쓸쓸해 하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보물이래야 숨겨진 종이 쪽지에 쓰여진 보잘 것 없는 상품들인데 그때는 정말 보물들처럼 여겨졌습니다.
보물찾기 놀이! 참 기막히게도 보물찾기 인생을 상징합니다. 보물찾기 인생인데 평생 보물을 찾지 못한 인생이라면 그 인생 참 쓸쓸하고 한없이 허무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어제 저는 우리 수도형제들이 참보물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아니 눈만 열리면 이웃 형제 하나하나가 대체 불가능한 주님의 유일무이한 선물이자 보물이요 신의 한 수 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수도공동체에서의 감격스러웠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수도형제들이 마르꼬 수사의 ‘무용담武勇談(?)’을 듣느라 온통 귀를 기울였습니다. 무려 8시간 동안 물이 나오지 않으니 공동체에 비상이었습니다.
제가 피정지도 하느라 온종일 형이상학形而上學의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던 시간에 마르꼬 수사와 인부 3명은 포크레인, 조정시스카이 붕대차를 동원하여 8시간 동안 형이하학形而下學 땅속의 일에 몰두했던 것입니다. 알고보니 20년전 심은, 이제 거목이 된 대왕참나무의 잔뿌리가 수도관 이음매의 빈틈으로 스며들어 커다란 뿌리로 자라나 수도관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 큰나무를 베어내고 뿌리를 살펴보다 발견했다 합니다. 수도관을 막고 자라난 뿌리는 길고 굵기가 큰 구렁이를 보는 듯 징그럽기까지 했습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상호보완되는 공동생활의 귀한 진리를 깨달은 복된 지혜의 체험이었습니다. 수도원 경내에 관상수(觀賞樹)와 더불어 유실수(有實樹)도 있어야 하듯 공동체 역시 형이상학의 관상가와 더불어 필히 형이하학의 활동가도 있어야 합니다. 새삼 마르꼬 수사님을 비롯해 함께 일에 참여했던 경륜과 지혜를 겸비했던 일꾼들이 정말 참보물처럼 느껴졌습니다. 마르코 수사님에게 전한 감사와 위로, 격려의 메시지입니다.
“사람으로 하면 8시간 동안의 대외과 수술후 암을 제거한 쾌거快擧나 마찬가지로 정말 큰 수술 성공적으로 마치노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수도원이 아무리 전통 좋고, 환경이 좋아도 주님의 참보물이자 참선물인 수도자들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문닫아야 합니다. 아무리 거금을 주고도 스카웃 할 수 없는 주님의 참선물이자 참보물인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참보물 수도자들이 모인 수도원은 부자들의 천국입니다. 참보물이자 참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되어 살기에 참보물, 참지혜가 되어 살아가는 수도자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을 닮아갈수록 참지혜의 보물이 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되어 사셨던 바오로 사도야말로 우리 교회의 참보물이자 참지혜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참행복의 참부자는, 참자유인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참 보물이자 참 지혜이신 주님과 함께 하기에 저절로 세상 것들로부터의 이탈이요 초연한 자유입니다. 이런 참보물인 주님을 발견했기에 세상 탐욕들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바오로의 다음 고백에서 우리는 지혜의 절정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모두 주님을 닮은 참 보물로, 참 지혜로 불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터져나온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의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목자,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보물,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당신을 놔두고 어디로 무엇을 찾아가겠나이까?
하루하루 살아 있음이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지금까지 내용들을 참고하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 나오는 솔로몬의 일화도, 복음의 하늘 나라 세 비유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겸손히 하느님의 지혜를 청한 하느님의 종 솔로몬은 참 지혜로웠습니다. 솔로몬의 청에 한없이 흡족해 하시는 주님은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보물이라고 다 보물이 아닙니다. 세상에 무지의 탐욕에 눈먼 이들은 얼마나 많이 가짜 보물을 참 보물로 착각하여 내적 공허의 껍데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요! 솔로몬의 선택이 얼마나 기막힌 선택이었는지 주님은 지체없이 응답하십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이제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참 보물인 참 지혜는 그대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최고의 참 보물, 참 지혜의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하늘 나라의 두 비유, 보물비유와 진주장사꾼 비유중 보물이, 진주가 상징하는 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대로 참 보물이자 참 진주인 주님을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에 온 우리들을 상징하는 비유처럼 들립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참 보물은, 참 진주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이 보물을 발견한 기쁨에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사도들이요 제자들이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인성녀들이요 우리들입니다. 참 보물이신 주님을 발견하여 모셨을 때 비로소 무지와 허무로부터의 해방이요 텅빈충만의 기쁨에 행복입니다. 결국 인간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은 참 보물을 찾는 갈망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그물의 비유도 참으로 심오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물을 걷어 올리는 날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그물망안에 있는 인생임을 깨닫는 다면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지혜롭고 착하게 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물으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깨달았느냐?”
참 보물, 참 지혜가 그리스도 예수님, 바로 당신임을 깨달았느냐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이들은 참으로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매사 자유자재, 능수능란한 자들임을 확언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보물찾기 인생,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찾아 발견해야할 참 보물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참 보물찾기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 보물인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 모두 참보물 주님을 모시고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어 자유자재한 자유인이 되어 참 지혜롭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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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마태13,51)
<내가 만들어 가는 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마태13,44-52)은 '비유 설교의 끝 말씀'입니다. 마태오 복음 13장 전체의 말씀은 '비유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7개의 비유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 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 -를 들어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가 만들어 가는 나라'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조건이 충족될 때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고 부단히 노력할 때 주어지는 은총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7개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생 주어진 화두는 '부활'입니다. '이제와 영원한 부활, 곧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이요 죽음 저 너머에서의 영원한 부활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사람들, 지금 여기에서 성령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제1독서(1열왕3,5-6.7-12)는 솔로몬이 주님께 지혜를 청하는 모습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한밤중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솔로몬은 이에 자신을 위해 장수와 부와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 않고, 잘 듣는 지혜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 곧 분별력을 청합니다.
"루카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느님 말씀 안에 보물이 숨겨져 있으니, 말씀을 잘 깨닫는 지혜와 말씀 안에 숨겨진 보물을 잘 찾아내는 지혜를 청합시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말씀(로마8,28)처럼, '모든 것은 함께 작용해서 선을 이룬다.'는 이 말씀 안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잘 찾아내서 실행하는 지혜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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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b0sq_7nm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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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태 13, 44)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
밭에
있습니다.
우리들 밭에서
보물이 나옵니다.
여행은
가 보지 않고서는
모르고
삶은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삶은
보물같이
숨겨져 있기에
신비롭습니다.
하늘 나라는
삶이라는 밭에
숨겨진 나라입니다.
보물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은
보물이 됩니다.
우리 삶속에 있는
하늘 나라입니다.
보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살 그 마음으로
삶을
살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하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아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에 집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보물입니다.
하늘 나라는
온전히
하느님께
집중하는 충만한
나라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할 때
더욱 아름다운
우리들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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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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