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으면서, 십자가의 뜻과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
인생의 생애를 돌아보면, 우리의 삶 속에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을 하지만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행해지는 억지가 때론 인생의 길에 필요하며 유익을 줄 때가 있다.
인간은 독립성과 자주성을 가졌기에 누구나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따른 자기 주관 하에
모든 일을 하고자 한다. 그래서 어떤 강제성을 띄거나 타율에 의해 강요되는 일에 대해서는
반감을 나타내거나 손끝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련된,
마태복음 27장과 시편 126편을 읽어보면, 구레네 시몬에게는 억지였지만,
그 억지로라도 진 십자가가 있었기에 그리스도의 인류 구속사업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이 억지는 때로 필요하고 꼭 있어야만 하기도 하다.
미국의 세계적인 육상선수인 ‘칼 루이스’가 달리기 선수가 된 것은
억지로 된 것이었다고 간증했다.
그는 교통지옥 때문에 언제나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녔는데
어느 날 도둑이 그의 발이나 마찬가지인 모터사이클을 훔쳐갔다.
그래서 자전거를 샀는데 그것마저 몇 일 후 또 도둑맞았다.
그는 화가 나서 다시는 사지 않겠다고 다짐하여 12Km를 뛰어다녔다.
그는 “어느 도둑도 달리기만은 훔쳐 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출퇴근 합하여 하루 24Km를 매일 달렸다.
모터사이클을 도둑맞고 자전거마저 잃어버리자,
억지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 그를 세계적인 선수로 만들었던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원하는 일만 하면 좋으련만, 왜 때론 억지가 필요할까?
그 이유를 가만이 생각해 보면 인간에게는 몇 가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지식의 한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다.
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짓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는 사랑의 한계이다. 마음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과
다른 이에 대한 무관심으로 누가 죽음에 처하는 것을 보고도 손 하나 까딱치 않으면,
억지라도 사람을 관심을 가지고 사회통념은 권하고 있다.
현행 형법에서는 ‘자살 방조죄’를 두어 자살을 방조하면 처벌하고 있다.
셋째는 의지의 한계이다. 우리는 때론 선을 행하려는 마음은 있으나,
이것을 실천할 의지가 부족해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도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이 없노라”(롬 7:18)고 고백했다.
구레네 시몬도 스스로 자원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자기 의사와는 반하게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 그런데 구레네 시몬 뿐만
아니라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왜 이런 억지가 필요할까?
먼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다.
다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입으라”(벧전 4:1)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자에게는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막 15:21)이라고 말씀하신데,
마가복음이 읽히던 신앙공동체에선 알렉산더와 루포는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먼저 인간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헐 것이요”(신 30:15~16)
인간 스스로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선택할 자유를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악을 선택했다.
그래서 이젠 선을 행할 수도 없이 악에 고착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때로 은혜에 따라 강권적으로 이끄신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라고 말했다.
우리는 억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하나님의 일에는 억지가 따른다고 본다.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한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다. 때로 우리에게 원치 않는 십자가가 주어져도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날에 상급으로 돌아올 것을 믿고, 믿음으로 감당해 보면,
정녕 주께서 갚아주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번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으면서, 우리들의 신앙의 고백이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