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
이사 58,9-14; 루카 5,27-32 /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2025.3.8.
여러분은 주일, 주님의 날을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나의 거룩한 날을 짓밟지 말라.”(이사 58,13)는 하느님의 말씀을 엄중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선행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거룩한 날’을 존귀하게 보내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로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하느님께서 해방시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를 잊지 않도록 토요일마다 안식일로 지내면서 노동을 쉬는 한편 하느님께 예배를 드려 찬양하라고 십계명의 셋째 계명으로 정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원 전 5세기 경에 이르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야 할 정신과 의무감이 희박해지는 바람에, 이사야 예언자가 오늘 독서에서 전해주듯이, 안식일 관행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경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두 왕조 즉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이 멸망당하고 백성과 지도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70여 년 간이나 유배살이를 하고 나서 고향 땅에 다시 돌아오기는 했는데, 다시 5백여 년이 흘러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안식일 관행을 매우 형식적으로만 지키려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일체의 생업에서 손을 떼고 예배에 참석하는 행위로만 안식일 계명을 판단하려고 들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가서 함께 잔치를 베풀고 하느님께로 돌아온 세리를 축하해 주는, 그러니까 본연의 안식일 관행을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사실 이 문제는 단지 주일 미사에 참석하느냐 혹은 빠지느냐의 문제만이 아니요, 일요일을 누구랑 어떻게 지내느냐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백성으소서 우리 천주교인들이 지닌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민한 사람이어서 세리 일로 돈도 꽤 벌었지만 세상에서는 기피인물로 낙인 찍혀서 고민도 많았던 마태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평소에 그를 눈여겨보셨던지 처음으로 대면하는 것 같은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그리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ㄴ). 아마 그분은 마태오의 영민함과 마음속 갈등을 마음으로 읽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께서 초면에 부르실 리가 없고, 또 마태오 역시 부르심을 받자마자 그분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큰 잔치를 베풀어 동료 세리들과 지인들을 몽땅 초대했습니다. 여러 모로 파격적이고 화끈한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사사건건 감시하다가 수틀리면 트집을 잡곤 하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이 모습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항의했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마태 5,30ㄴ). 모처럼 열린 잔치 분위기에 재를 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초대받아 온 손님들을 죄다 죄인 취급하고 있는 그 잘난 바리사이들에게, 또 당사자인 당신에게는 차마 대들지 못하고 애꿎게도 제자들에게 타박하려던 그 불평꾼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반어법으로 대꾸하셨습니다. 이 대꾸의 말씀을 제 나름으로 각색해서 들려드리면 이렇습니다: “귀하들처럼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지 모르지만, 그대들이 영적으로 병든 죄인이라고 낙인 찍은 이들에게는 나 같은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그대들처럼 자칭 의인으로 자처하는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죄인으로 낙인 찍힐 만큼 못난 사람들을 위로하고 또 회개시키러 왔습니다.”(마태 5,32)
오늘 독서에서, 이미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기는 했으나 그 소명의식이 아주 많이 해이해져 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쓴 소리를 했었습니다. 그는 메스를 든 의사처럼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병리현상을 도려내는 날카로운 언어로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해부하듯 쓴 소리를 쏟아냈습니다.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 이는 사회적 행동을 촉구하는 쓴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종교적 행동에 관한 쓴 소리입니다: “삼가 나의 거룩한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너 자신의 일에 몰두하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며 존중한다면,” 이런 조건들을 채우고 나서야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조건절 예언에 담긴 조건들은 크게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려야 하는 관계 개선 행위와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어야 하는 애덕 실천 활동이라는 사회적 행동뿐만 아니라 이 행위와 활동의 사회적 행동을 바로 주님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지낼 수 있도록 회개해야 한다는 종교적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의 쓴 소리를 구분하자면, 인간관계를 개선하는 행위와 애덕을 실천하는 활동을 합한 사회적 행동이야말로 자기와 자기 가족들만을 위하는 일을 멈추는 대신에 해야 하는 주님의 일이요 종교적 행동의 열매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는 자기희생이 없으면 천주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믿지 않는 이들 앞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어렵고, 공동선을 알고도 자기 일에만 매몰되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사회적 불의와 이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당해야 하는 고생을 못 본 척하면서 주일에조차 그들을 위한 공동선에 나서기는 커녕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우리네 종교 현실도 이사야로부터 쓴 소리를 들어 마땅한 세태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고생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자 하셨고, 굶주린 이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을 내려 주셨으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살아갈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도 이를 실천하신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회심하려는 레위 출신의 세리 마태오도 부르시어 제자로 삼아주신 것도 그렇고, 이 부르심에 크게 기뻐하면서 동료 세리들은 물론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제사 삶의 희망을 찾은 이들까지 불러 모아 큰 잔치를 베푼 마태오 역시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3년 간의 사태가 끝난 지금에도 성당마다 훵 하니 생겨난 빈 자리가 좀처럼 채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이, 메시아 백성이 되고자 회개하려는 이들이 나서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십시오. 우선 미사에 참여하여 거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성체를 영한 다음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사회적 행동을 하십시오. 가능하면 가족이 함께, 더 바람직하기로는 교우들 가족이 다 함께 선한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기쁘게 잔치하듯이 소박한 공동 식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그동안 쉬던 교우들이 하나씩 둘씩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종교적 행동을 멈추었던 이들에게, 또 주일미사에 나오기는 하되 사회적 행동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던 이들에게 이사야가 해 줄 법한 쓴 소리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날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사에 참여하며 영성체하려는 지향이 바로 이 사회적 행동을 촉구하는 종교적 행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