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개인적으로 힘든일이 좀 많이 겹쳐
여러 가지로 심란하고 잠도 안와서
간밤에...
오랜만에 한번 밤새...조선왕조실록을 좀 뒤져보았습니다
물론 홈페이지에서
원래 관심을 갖고 있던 부분인지라
조선왕조실록에서 "계모" 란 단어로 검색을 한번 해본겁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시대는 콩쥐팥쥐나 장화홍련같은...진짜 사악한 계모의
동화의 배경이기도 한 시대...
그러니...만약 그 시절에 그만한 범죄사건이 있었다면
분명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리지 않았을까 하는 그냥 막연한 생각에
* 참고로 저도 처음 안 사실인데 혼동을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계모란 뜻의 단어가 두개 나옵니다 실록에...새엄마를 뜻하는 계모(繼母)외에
아마...계책,모의 같은걸 의미하는 계모(計謀)란 단어가 있다. 주로 역모사건
같은게 터졌을때 저 계모(計謀)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건 혼동하면 안되고요
어쨌든 그 계책을 의미하는 계모 말구...새엄마를 뜻하는 계모(繼母)로 검색해본
결과
...............................
실록에 나오는 계모에 관한 사건은 대개 세가지 유형입니다
그 첫째는 양반중 계모의 상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고 처벌받은 경우
둘째는 계모에게도 친어머니처럼 효성을 다했다고 하여 효자라 칭송받아
왕이 상을 내린 경우
그리고 또 하나는...뜻밖에도
계모와 간통하다 처벌 받은 사건이 한 열건 가까이 있습니다 ... 500년동안.
그리고 장화홍련이나 콩쥐팥쥐 이야기처럼 사악한 계모가 처벌받은 사건은
500년 통털어 딱 하나 있습니다.
딸인데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바람이 나서 화딱지나 친정으로 돌아
왔는데
계모가 귀찮았는지 출가외인이 왜 돌아왔냐며 도로 매정하게 쫏아내버렸고
딸이 억울함을 하소연하여 결국 친정아버지,계모 그리고 남편까지 모두 처벌받았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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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조선왕조실록만을 놓고 살펴본 조선시대의 계모 또는 계모문화(?)라고 해야하나...적절한 표현이 생각 안 나네요
하지만 일단 이와같은 기록으로 미루어봤을때의 조선시대 계모에 대한 대접(?)은
대개는 그랬던거 같네요...계모라도 친모와 다름없이 효성으로 받들어야 하는게 그 당시 사회윤리였고 이건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 당시에도 계모가 친자식처럼 보살핀 경우가 더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 그럼 대체 장화홍련이나 콩쥐팥쥐 같은 설화는 어디서 유래가 된걸까요...분명 그와같은 이야기가 생긴 곡절도 있을터인즉...
그리고 진짜 눈길가는 사건은
무려 계모와의 간통사건이 열건 정도에 달한다는겁니다.
물론 이 사건의 당사자들은 모두 십중팔구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허나 어쨌든 이 사건이 500년 통털어 열건 남짓인 것이니 평균 50년마다 한번은
일어났다는 이야기입이다.
그렇다면...
실록에 밝혀진 사건이 이 정도면 과연 밝혀지지 않은 사건은..........
어쨌든 막상 조선왕조실록을 펼쳐보니
조선시대 계모의 이미지는 우리가 알던 장화홍련이나 콩쥐팥쥐 같은 이야기에서
만난
그런 계모들의 이야기완 많이 다르다는것을 느꼈습니다
첫댓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아버지의 첩과 아들이 간통하는 사건이 가끔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계모와의 간통 사건이 발생했던 것도 예측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아들 입장에서는 친모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아버지의 첩과 계모는 별 차이가 없었을 터이니.../
사실 계모와 전처의 자식간의 갈등은 어느 사회에서나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 내에 있을 때에는 반드시 권력이나 경제력에 의한 갈등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인간관계에 의한 갈등도 생길 수 있겠지요. 계모와 전처 자식 간의 갈등이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다는 한 사례는 <고려사> 악지에 신라의 음악으로 나오는(사실 고려의 음악일 지도 모르는) '목지가' 의 배경 설화입니다. 계모의 모함으로 처녀가 집에서 쫓겨나 산 속에 들어갔다가 결혼하여 부자가 된 뒤 가난한 친정 부모를 데려와 모셨지만 계모의 모함으로 아버지가 딸의 정성을 받아주지 않자 한탄하며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계모 악인 이미지에서 한 가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는데 왜 계모만이냐는 겁니다. '재혼' 이라는 것이 오로지 부인이 죽은 뒤 남편이 새장가가는 한 가지 유형만 있는 것이 아닌데 계모만이 문제되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의 경우라면 이혼의 예도 심심치 않게 있었고, 이혼 후 아이 딸린 여자가 재혼을 하는 사례도 많았으며 조선 초기까지 우리나라의 결혼 풍습이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사는 행태' 이기 때문에 이혼 후에 재혼하는 경우에는 (아비를 중심으로) 계모와 전처 자식이 동거하기보다는 (어미를 중심으로) 계부와 전남편 자식이 동거했을 가능성이 꽤 높았을 겁니다. 조선 초기에 과부의
재가(2번째 결혼)를 금지하네, 삼가(3번째 결혼)를 금지하네 하는 이야기들이 꽤 나왔던 것처럼 자식 딸린 과부의 재혼 사례도 상당히 많았는데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계모 악인 이미지는 여성의 지위가 추락하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