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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7 그분께서 머리털 한 오라기만한 하찮은 일로도 나를 이렇게 짓눌러 부수시고, 나도 모를 이유로 나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시는데,
9:18 숨돌릴 틈도 주시지 않고 쓰라림만 안겨 주시는데, 그분께서 내 간구를 들어 주실까?
9:19 강한 쪽이 그분이신데, 힘으로 겨룬다고 한들 어떻게 이기겠으며, 재판에 붙인다고 한들 누가 그분을 재판정으로 불러올 수 있겠느냐?
9:20 비록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내 입을 시켜서 나를 정죄하실 것이며,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나를 틀렸다고 하실 것이다.
9:21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고, 다만, 산다는 것이 싫을 뿐이다.
9:22 나에게는 모든 것이 한 가지로만 여겨진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께서는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한 가지로 심판하신다" 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9:23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다들 죽게 되었을 때에도, 죄 없는 자마저 재앙을 받는 것을 보시고 비웃으실 것이다.
9:24 세상이 악한 권세자의 손에 넘어가도, 주님께서 재판관의 눈을 가려서 제대로 판결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게 하는 이가 누구란 말이냐?
9:25 내 일생이 달리는 경주자보다 더 빨리 지나가므로, 좋은 세월을 누릴 겨를이 없습니다.
9:26 그 지나가는 것이 갈대 배와 같이 빠르고, 먹이를 덮치려고 내려오는 독수리처럼 빠릅니다.
9:27 온갖 불평도 잊어버리고, 슬픈 얼굴빛을 고쳐서 애써 명랑하게 보이려고 해도,
9:28 내가 겪는 이 모든 고통이 다만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것임을 압니다.
9:29 주님께서 나를 정죄하신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애써서 헛된 수고를 해야 합니까?
9:30 비록 내가 비누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닦아도,
9:31 주님께서 나를 다시 시궁창에 처넣으시니, 내 옷인들 나를 좋아하겠습니까?
9:32 하나님이 나와 같은 사람이기만 하여도 내가 그분께 말을 할 수 있으련만, 함께 법정에 서서 이 논쟁을 끝낼 수 있으련만,
9:33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
9:34 내게 소원이 있다면, 내가 더 두려워 떨지 않도록, 하나님이 채찍을 거두시는 것.
9:35 그렇게 되면 나는 두려움 없이 말하겠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그럴 수가 없는 줄을 알고 있다.
◈ 주해
1. 하나님을 경외하던 욥이 여러 달째의 고통으로 죽기만을 바라자 엘리바스는 회개하여 회복하라는 충고를 하였다.
1) 욥은 이 충고가 구역질나는 음식 같다며 거절하였으며 헤세드를 기대한 친구들에게 배신감을 느낀다고 하였다.
2) 욥이 하나님께 항변하자, 빌닷은 엘리바스와 같은 내용을 반복하며 욥을 잔인하게 훈계한다.
2. 빌닷의 충고에 욥은 “나도 다 알고 있다”며, 자신이 알고 믿는 바를 말한다.
1) 욥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이 없으며 논쟁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안다.
2) 욥은 이것을 다 알면서도 하나님께 불평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나도 너희들만큼 잘 알고 있다. 아니, 너희들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제발 옳은 말로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 달라. 나에게 필요한 것은 헤세드이지 그런 옳은 말이 아니다.”
3.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까닭 없이” 폭풍으로 치셨다면서 하소연한다.
9:17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새번역] 9:17 그분께서 머리털 한 오라기만한 하찮은 일로도 나를 이렇게 짓눌러 부수시고, 나도 모를 이유로 나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시는데,
1) 하나님은 2장 3절에서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
2) 이유가 있다면 “머리털 한 오라기만한 하찮은 죄나 문제다.” 이런 하찮은 일로 자신을 짓눌러 부수시니 “까닭 없이” 나를 치셨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4. 욥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지만 재판장에서 하나님과 논쟁하고, 묻고, 따지고 싶다.
1) 그러나 하나님을 재판정으로 소환할 수 없음을 토로한다.
“강한 쪽이 그분이신데, 힘으로 겨룬다고 한들 어떻게 이기겠으며, 재판에 부친다고 한들 누가 그분을 재판정으로 불러올 수 있겠느냐?”(19).
2) 자신은 크신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비록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내 입을 시켜서 나를 정죄하실 것이며,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나를 틀렸다고 하실 것이다”(20).
5. 까닭 없는 고난으로 인하여 욥은 더 이상 자신의 순전함을 지켜야 할 의미를 잃어버린다.
[새번역] 욥 9:21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고, 다만, 산다는 것이 싫을 뿐이다.
[공동번역] “나 비록 흠이 없다고 하지만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네. 살아 있다는 것이 구역질 날 뿐”
1) 욥이 볼 때, 하나님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차별 없이 심판하신다(21절).
2) 그렇다면 흠 없이 살려고 노력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 흠 없이 살려고 노력한 것도 헛되고, 다만 산다는 것이 싫어졌다. 살아 있다는 것이 구역질이 날 뿐이다. 그래서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6. 하나님이 의인이든 악인이든 심판하신다면, 의인과 죄인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1) 욥은 하나님의 공의에 회의를 품는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시다면 왜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가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이 악한 권세자의 손에 넘어가도, 주님께서 재판관의 눈을 가려서 제대로 판결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게 하는 이가 누구란 말이냐?”(24절).
2)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차별 없이 다 심판하신다면 굳이 의롭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7. 욥은 전에도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입술로 범죄하지 않으려 하였고, 하나님이 울타리로 보호하여 주었을 때는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하나님 앞에 따지지 않았다.
1) 그러나 자신이 이 부조리한 현실의 주인공이 되자, 하나님과 재판정에서 대면하고자 한다.
2) 잠언의 말씀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고, 잠언의 신앙대로 흠 없이 살려고 했지만 그 의미를 상실한다.
3) 자녀와 소유를 다 잃어버리고, 아내마저 떠나고, 친구마저 대적이 된 현실은 견뎠다. 그런 욥에게 가장 힘든 것은 “신앙생활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8. 하나님 앞에서 의로웠던 욥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시험은 바로 “자신의 신앙과 자신이 믿던 하나님에게 회의가 든 것”이다.
1)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고,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때는 자식이 한 날에 죽고, 아내가 비난하여도 견딜 수 있었다.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
2) 그런데 수개월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이 헛된 것” 같고, 까닭 없이 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3) 하나님이 정말 공의로 통치하시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한편으로는 이것저것 따지기도 싫고,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기에 그냥 죽고만 싶다.
9. 까닭 없는 욥의 고난은 “까닭 없는 아들의 십자가 고난”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1) 하나님의 아들이 받은 재판은 매우 불의하였고,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이 진행되는 것을 허락하셨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뜻을 위해 복종하는 아들을 거절하시고 버리셨다.
2) 거룩하신 분이 죄가 되셨고, 영원한 생명이 죽임을 당했다. 십자가 사건은 온통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사건이다.
3) 너무나 불의하고, 너무나 악독하고, 너무나 말도 않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나 불의한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구원의 문을 여셨고,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셨다.
10. 신실한 신앙생활에 의문이 들고, 하나님의 공의에 의문을 품는 욥기의 말씀은 신비하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의 말씀이다.
1) 까닭 너머에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는 말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이다.
2) 하나님은 욥이 일평생 입술로 범죄하지 않기 보다는, 자신의 밑바닥에 있는 것들을 알며, 이것들을 하나님께 쏟아내기를 원하셨다.
11. 9:25-35절에서는 자신의 의로움과 상관없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중재자가 없음을 탄식한다.
1) 친구들은 욥에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라고 하지만, 욥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든지 하나님이 그를 정죄할 것이라고 단정한다.
욥 9:27 온갖 불평도 잊어버리고, 슬픈 얼굴빛을 고쳐서 애써 명랑하게 보이려고 해도,
욥 9:28 내가 겪는 이 모든 고통이 다만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것임을 압니다.
욥 9:29 주님께서 나를 정죄하신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애써서 헛된 수고를 해야 합니까?
12. 친구들의 권면대로 하나님께 잘 보이려는 것도 무익하고, 자신을 결백하게 하려는 수고도 무익하다고 주장한다. 주님이 정죄하시기 때문에 그 모든 수고는 헛되다는 것이다.
1) 욥은 까닭 없이 자신을 치시고, 정죄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모든 방법이 무용지물이라고 주장한다.
2) 재판장에서 하나님과 변론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도 해결책은 아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을 질문하고 항변하지만 해결책은 없기 때문에 결국 “죽고 싶을 뿐이다.”
13. 욥이 더욱 절망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자신을 대변해줄 중재자가 없다는 것이다.
욥 9:32 하나님이 나와 같은 사람이기만 하여도 내가 그분께 말을 할 수 있으련만, 함께 법정에 서서 이 논쟁을 끝낼 수 있으련만,
욥 9:33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
1) 욥은 그런 중재자도 찾지 못하므로 이 상태에서 고난이 끝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고난을 멈출 수도 없다. 그래서 절망할 수밖에 없다.
14. 고통이 닥치자, 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하여 보았다.
1) 욥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정직하며 입술로 범죄하지 않음으로 믿음을 지켰다. 이것이 분명한 해결책이며,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잠언의 법칙은 통하지 않았다.
2) 그래서 하나님과 재판정에서 재판을 하고 싶었다. 그가 질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재판정에서 하나님과 변론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도 불가능하여 절망한다.
3) 욥은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할 수 없음을 알고 중재자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에게는 중재자에 대한 희망도 없다(딤전 6:16).
15. 그리스도는 욥이 그토록 찾고 찾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딤전 2:5, 새번역).
1) 욥처럼 간절히 중재자를 찾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있고, 그분이 “구원자”가 된다는 것은 복음 중의 복음이다.
2) 하나님은 욥이 그렇게 찾았던 중재자의 모형과 그림자로서 욥을 세운다.
- 까닭 없이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욥을 세우고 있다. 욥은 중재자를 찾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욥과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를 연합시켜 주신다.
3) 그뿐인가? 하나님은 욥을 중재자(아들)가 거하는 곳, 페리코레시스의 기쁨에 초대하신다.
-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이 영광가운데 교제하며 기뻐하며 사랑하는 그 곳에 있게 하신다.
4) 절망하는 욥, 도무지 방법이 없어 탄식하는 욥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깊고 높다.
◈ 나의 묵상
비참한 존재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 본 후에 찾아오는 절망, 그 모든 고난을 통과하였는데도 여전히 답이 없는 그 절망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욥처럼 나도 광야에서 모든 방법들을 시도해 보았다. 성령사역부터 복음학교까지 여러 곳을 찾아 다니며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다. 그뿐인가? 정신과, 상담, 안식년, 한의원, 기도원 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보았지만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특별히 자녀, 아내, 질병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 신앙에 대해 좌절하는 욥, 하나님에게 회의를 품는 욥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욥이 붙들고 확신했던 그 마지막 동아줄이 끊어진다. 이렇게 완벽하고 철저하게 절망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욥기를 통해서 절망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신다. 사람들은 신실한 신앙인은 절망하면 않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절망할 수 있다고 하신다. 사람들은 신앙인은 죽고 싶어 하면 않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죽고 싶을 수 있다고 하신다. 그래서 주님이 참 좋다.
2. 복음을 통하여 반복해서 생명을 주시다.
친구들은 욥의 절망과 불신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훈계하지만, 주님은 욥을 아시고 품으신다. 도리어 주님의 고난이 욥의 고난과 같다고 하신다. 주님의 절망이 욥의 절망이라고 하신다. 아버지께 버림받는 아들의 절망과 절규가 욥의 절망과 절규다. 욥의 그 처절한 절망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깝다. 행복하고 의롭고 큰 자였을 때의 욥보다 처절한 절망으로 죽기를 구하는 욥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깝다. 참 신비한 일이다.
나의 모든 방법이 실패하였으나, 주님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오직 주님은 나를 아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여 주신다. 회복에 매달렸던 어리석음을 내려놓는다. 회복 너머에 있는 하나님, 이성의 너머에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보기를 원한다. 꼭 건강을 회복하고, 행복을 회복하고, 열정과 열매를 회복하지 않아다, 여전히 주님은 인자하시고 신실하시다. 잠언에 매인 나의 신앙체계가 파괴되기를 원한다.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영으로 계시로 알기를 원한다. 만물 안의 법칙에 매이게 하는 쇠사슬이 끊어지고, 영원에서 주의 얼굴을 보기를 원한다. 다윗처럼 비참하던 영광스럽던 한 가지 소원을 가지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욥처럼 나는 방법을 모른다. 복음을 통해서 임을 알지만...동시에 아무것도 모른다. 모든 상황에서 선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말씀 앞에 나아갈 뿐이다. 이성을 넘어 계시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다가옮을 바랄 뿐이다. 욥이 그렇게 갈망했던 중재자가 이미 내 안에 계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에 감사를 드린다. 그 중재자로 인하여 내 안에 이루신 것만도 주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다. 주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내 권리로 여긴 죄를 회개한다. 그리고 까닭 없이 주어진 은혜 안에 거한다. 까닭 없는 무한한 은혜는 나를 용납하고 사랑하고도 남는다. 그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찬양한다.
◈ 묵상 기도
주님, 해답도 해결도 없는 욥기를 통하여 영원하신 하나님과 만물 위의 세계를 아는 눈이 열어지게 하옵소서. 까닭 없는 고난 앞에 무너졌기에, 까닭 없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아는 눈이 열어졌습니다. 주님을 까닭 있어 알았습니다. 인과율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과율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아는 눈이 열어지게 하옵소서. 십자가는 인과율을 넘어서는 영원한 사건입니다. 까닭 없이 주어진 십자가의 구원과 사랑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욥처럼 탄식할 수밖에 없는 영혼을 긍휼히 여기시고, 욥처럼 입술과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범죄한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합에게 주어진 은혜, 아합처럼 먹튀하지 아니하고, 그 사랑과 은혜를 아는 마음을 주옵소서. 각자 하나님을 알고 체험했던 청장년들이 그 은혜를 내것으로 여김으로 식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새마음과 새 영을 주사,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각 사람이 영으로 하나님을 알고, 영으로 생명을 얻게 하옵소서. 목요일이 수능입니다. 어진이와 소민이에게 지혜와 평안을 더하소서. 입시가 다음세대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통로가 되지 않도록 교육계를 주관하여 주옵소서. 다윗처럼 요셉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세대가 되게 하옵소서. 쉐마학당에서 선포되는 로드십이 생명이 되게 하옵소서. 임직자들에게 주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내년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모든 성도들에게 부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