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론에서 선으로
달마의 침묵은 그때까지 왕의 교화 수단과 기복신앙의 대상에 머물러 있던 불교의 편향을 시정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달마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마침내는 달마를 초조로 하는 실천불교의 새로운 종교운동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경론(經論)이 아니라 선(禪)을 표방하였고, 따라서 경을 설하는 승려들에게 비판을 가하는 것을 기본입장으로 정했다. 선승들이 강경(講經)과 조사(造寺)를 주로하는 승려들을 비난하자 강경 조사인들은 선승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낙양가람기』 승진사조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으나 염라대왕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고 다시 현세로 환생(還生)하는 승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염라대왕은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스님을 바라보았다.
“스님께서는 제가 인간 세상에 보냈던 사자(使者)들의 실수로 이곳에 붙들려 오게 되었습니다. 내가 잡아다가 지옥으로 보내려고 하는 중은 스님처럼 좌선수행과 경전독경을 했던 분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중들이 지옥에 보내지게 됩니까?”
“경을 강의하여 대중을 끄는 자나 경전과 불상을 조성하는 자, 절을 짓고 의례(儀禮)를 주로 하는 자들 입니다.”
“어째서 그들이 지옥에 보내지는 것입니까?”
“경을 강하는 승려는 마음속에 너와 나의 분별을 품고 교만하게 욕보이는 자들입니다. 비구로서는 가장 저급하고 조악한 행위를 하는 것임으로 그 죄를 물어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
“경전과 불상을 조성하는 것은 다른 재물에 의해 탐심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삼독심(三毒心)을 없애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경 조상하는 승려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절을 짓고 의례를 행하는 승려는 백성의 물건을 겁탈하여 중생들을 괴롭힌 죄가 큼으로 그들도 지옥에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
“스님을 다시 환생시켜 드릴 테니 경을 강하거나 경전과 불상을 조성하고 절을 짓는 자들에게 공덕을 쌓으려면 좌선수행과 경전독경에 정진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강경과 조사인들을 비판하는 선승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위 이야기는 당시의 중국 불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여긴다.
북위 불교의 전성은 강경과 조사의 공덕에 의해 유지 발전 된 것이었다. 새로운 종교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역의 천불동이나 낙양의 탑과 가람의 그림자에 가려서 볼 수 없었던 범죄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기에 달마대사가 보리류지와 같이 역경에 몰두했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다가 독살되었다는 설이 나오게 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달마를 중심으로 한 초기 교단에 보리류지를 도와 역경사업에 매진했던 담림(曇林)이라는 사람이 교의학을 등지고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담림은 필수자(筆受者)였다. 필수자란 서방에서 온 삼장이 불전의 대의를 구두로 번역하여 들려주면 그것을 한문으로 정리하여 필사하는 사람으로서 번역가인 동시에 편집자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어학에 남다른 재주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며,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재질이 있어야 필수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담림은 매우 우수한 필수자였을 뿐만 아니라 『승만경』의 연구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대표적인 간경인이었다. 그런 그가 어떤 경로로 보리류지파를 떠나 진검(眞劍)으로 도를 구하고자 했던 달마교단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문헌적 기록은 없다. 다만 경전연구와 보급만으로는 불법을 얻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기에 ‘경론에서 선으로’ 진로를 바꾸었을 것이라 사료될 뿐이다.
달마의 제자가 된 담림은 스승의 어록을 정리하여 역사에 남겼다. 담림이 남긴 달마의 말은 극히 간결하며, 교설 역시 단순명료한 것이 특색이다. 달마는 상대의 물음에 따라 가장 구체적인 행동양식을 설한다. 아니 필담(筆談)으로 알려준 것을 담림이 말로 바꾸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권위적인 교의가 없으며 인용경전도 『유마경』 정도다.
후대에 선문에서 달마가 『능가경』을 존중했다고 말해지고 있으나, 당시에는 그 경에 대한 인용도 볼 수 없고, 그럴 듯한 취지와 문구도 없다. 오히려 『능가경』의 기본인 자정청정심, 이른바 필경정(畢竟淨)의 의미로 본다면 달마는 그런 교의적 체계나 경문훈고의 전통과는 다른 면에서 이 경전의 핵심을 정곡으로 찔렀다고 여겨진다.
소승에 대한 대승의 우위가 남천축국의 철탑에 기록된 고전의 재발견이라는 설화에서 가탁되었듯이 영녕사 화재이후 수집된 것으로 보이는 달마 어록은 말법시대의 불교도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지침서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거나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한다. 달마와 놀기 위해서도 달마 교단이 형성되던 초기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당시 불교의 가장 큰 폐단은 양녕사같은 거대 가람을 짓고, 거창한 역경(譯經)불사 같은 것을 진행한데 있다. 간경조사(刊經造寺) 불사는 그것이 거창한 것일수록 깨달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폐헤가 일반인들에게 까지 미친다. 불사에 무수한 양민이 동원되어 생업이 난관에 봉착하고 비싼 도지를 내고 불양답(佛養畓)을 부쳐 겨우 연명할 정도까지 되었으니 불교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도탄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숭유억불의 정책이 5백년 동안 계속되었던 조선조 말엽 우리나라의 불교 피폐상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거기다가 일제에 의해 36년 동안 수탈되고 6.25 전란을 거치는 동안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탄생된 찬란했던 국보급 불교 문화재는 모두가 유실되다 싶히 하였다.
문화재는 그만두고 가람의 위용을 제대로 갖춘 곳이 없을 정도였다. 천년 고찰임에도 대웅전에 비가 새는 곳이 부지기수여서 동족상잔의 포성이 멎은 후부터 화급하게 대웅전에 기와를 갈고 쓰러져가는 법당의 기둥을 다시 세우는 불사를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기를 십수년 만에 각 본사급 사찰의 위용은 장대해졌다. 그러나 가람이 위용을 갖춘 것과는 반비례하여 절에 수행을 제대로 한 큰스님이 계시지 는, 속빈 강정이 된 감이 없지 않다. 절의 규모는 몇 백명의 학인들을 수용할만큼 번뜻해졌는데 큰스님은 커녕 겨우 십여명의 납자들이 살고 있는 정도다.
해우소를 현대식으로 바꾸었고, 목욕시설까지 훌륭하게 갖춘 좋은 가람에서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정진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스님네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어느 때 보다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런 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서 모두 내 절 만들 궁리만 하고 있는 것 같다.
수도 정진하기 위해서 불문에 귀의한 납자가 초심은 어디로 보내버리고 내 절 내 절 하고 있으니 대관절 내 절이 왜 필요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오직 조사(造寺)하는 것만이 원력의 전부인 것 같다. 촌음을 아껴 공부를 해도 금생에 깨우칠둥 말둥인데, 대들보나 기와에다 식구 수대로 이름을 새겨 올려야 복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불자들을 선동하며 현혹시키고 있다.
그들을 보면 달마대사께서 간경조사에 진력하는 무리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수양하기 부족함이 없는 절이 텅비어 있는데, 내 절 만든답시고 온갖 죄업을 저지르는 것인지도 모르고, 불사 독촉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것이 죄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머리를 갂고 집착을 버리는 공부를 했다고 하지만, 그런 지독한 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는 속인들 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선을 말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강경하거나 조사하는 일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 달마대사가 제일 싫어한 것이 그런 것을 통해 불교가 신통묘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부풀리는 것이었다. 달마와 한철만이라도 제대로 놀아 보려면 진검 승부를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에 앞서 우선 생각을 달마와 같이 해야 하는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머물다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행복하소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평상심,일상생활,상식...이 道
감사합니다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모두 성불하십시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