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게 이겼네요. 외국인 선발투수의 호투가 겹쳐 기쁨이 두배고요.
오늘 경기를 본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1] 선발의 눈부신 호투가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이다
[2] 1회 김태균의 선제 2타점으로 출발한 것이 아주 좋았다
[3] 두산의 수비 실수를 틈타 대승을 거뒀다
네 맞습니다. 오늘 경기는 이렇게 3가지 포인트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거고 저도 그렇게 봅니다. 이 글도 아마 저 내용을 중점적으로 쓰겠죠. 그런데 하나 더 있습니다. 저는 오늘 경기의 매우 중요한 포인트 하나가 경기 초반에 숨어 있다고 봅니다. 그게 어디였을까요? 기억의 추를 잠시 1회로 돌려 봅시다.
두산은 오늘 장민재가 올라오기 전까지 제대로 된 타구를 하나도 못 만들었습니다. 우리 선발의 투구가 너무 완벽했죠. 그런데 1회에는 안 그랬습니다. 채드벨은 선두 타자에게도, 그리고 두번째 타자에게도 계속 높은 볼만 던졌죠. 허경민에게 2B-1S에서 '밀려치기' 안타를 맞아 기분 나쁜 출루를 허용했고, 2번 정수빈에게는 3구 연속 볼을 던졌습니다. 출발이 안 좋았죠. 가운데 스트라이크 하나를 꽂아 볼카운트 3B-1S가 됐지만 아쉽게도 그 다음 공이, 그러니까 오늘의 9구 역시 높은 볼이었습니다. 무사 1-2루에 몰릴 위기. 아찔한 상황이었네요.
그런데 여기서 기적(?)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정수빈이 그 공을 건드려 파울플라이로 물러났죠. 가만히 서 있기만 했으면 주자가 2명으로 늘어났을거고, 개막전 타격감이 가장 좋았던 박건우와 어려운 승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낯선 나라에서의 첫 실전 등판, 추운 날씨, 어색한 스트라이크존...여러 변수가 복합적으로 얽혀 채드벨에게 매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됐을 수도 있죠.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합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죠. 결과적으로 박건우와 김재환에게 좋은 공을 던졌고 이후 8회까지 완벽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수빈이 출루 했어도 결국 실점을 최소화하고 호투했을거라는 예상도 가능하죠. 하지만 야구를 하다 보면, 때로는 아주 작은 틈새 하나로 큰 구멍이 열리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7회 두산의 엉성한 수비 이후에 봇물 터지듯 터졌던 우리 타선처럼 말입니다. 그런 큰 위기가 1회부터 올 뻔 했는데, 정수빈이 <나쁜 공에 방망이를 내주면서> 우리를 도왔습니다. 물론, 채드밸이 운빨로 잘 던졌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초반에 크게 흔들릴 위기에서 상대의 실수를 딛고 일어 선 부분이 있다는 뜻이죠.
"나쁜볼을 건드리지 말고 치기 좋은 공만 골라 쳐라!"
이 세상의 모든 타코들이 하는 얘기고, 유니폼 입고 뛰는 모든 타자들이 그걸 하려고 노력하는데 사실 잘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트라이크를 잘 던지면 훌륭한 투수고, (원하는 코스로) 볼을 잘 던질줄 알면 위대한 투수가 된다>고 하죠. 투수는 적당한 코스의 볼을 잘 던져야 하고, 타자는 그 볼을 안 쳐야 하는데 우리 투수는 결과적으로 그걸 했고 상대 타자는 못한겁니다. 앞으로도 우리팀 투수들이 나쁜볼은 던지지 않기를, 타자들은 나쁜 공에 섣불리 방망이를 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채드벨 얘기를 해보죠.
저는 좋은 커브의 조건을 대략 3가지로 봅니다.
[1] 낙차가 큰 커브
[2] 속도가 빨라서 속구와 구분하기 어려운 커브
[3] 존 아래쪽으로 떨어져 스트라이크 콜을 받을 수 있는 커브
채드벨은 저 3가지 커브를 다 던졌습니다. 낙폭이 커서 마치 체인지업처럼 보이는 구종도 있었고, 백도어처럼 빠르게 들어오는 변화구도 있었고, 낙폭을 조절해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얻어낸 공도 있었죠. 커브를 던질 때 폼이 달라지는 느낌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타자들이 아무도 공략을 못 했습니다. KBO 첫 등판이라 상대 타자들이 낯가림을 했을거라는 예상도 가능하지만, 작년에 처음 장착해 아직 완성도가 100%는 아닐거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성공적인 투구였죠. 게다가 원래 자주 사용하는 구종은 속구와 슬라이더라고 했으니 적당히 섞어 던지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고려할 것은 있습니다. 오늘 전체적으로 존이 좀 후했죠. 좌투수가 아웃코스 잘 잡아주는 주심 만나면 당연히 언터처블이 됩니다. 작년 휠러 첫 경기도 그랬죠. 최주환과 양의지가 없는 타선이라 작년 기준으로 생각하기도 좀 어려워서 "두산한테 잘 던졌으니까 더 볼 것도 없어!"하고 신나 하기에는 아직 좀 이릅니다. 하지만, 뭐가 어찌 됐든 선발이 8이닝 1안타 8K 무실점 했으면 그건 무조건 M.O.M이죠. 그러나 여긴 축구장이 아니고 야구장이니까 M.V.P라고 합시다. 오늘 채드벨은 MVP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공을 던져주면 좋겠네요. 로저스의 임팩트 정도를 빼면, 최근 외국인 투수 중에서 첫 경기부터 이렇게 잘 던져준 선수는 없었는데, 오늘 투구를 보니 많이 기대가 됩니다.
11:1로 이겼으니까 결과만 보면 대승인데, 사실 게임 내용은 아주 팽팽했죠. 이용찬은 1-2회에 공략하지 않으면 6회까지는 점수 못 낸다고 봐야 하는데, 다행히 첫 찬스에서 2점을 냈습니다. (정수빈과 달리) 낮은 공을 기가 막히게 골라낸 정근우, 존으로 오는 공을 제대로 잡아당긴 호잉, 가장 필요한 순간에 아주 정확한 타격으로 주자 2명을 불러들인 김태균이 승리의 초석을 쌓았네요. 결국 올 시즌 득점은 저 3명에 송광민 이성열이 잘 받쳐줘야 되는데, 이 5명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지가 가장 큰 숙제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강한 2번'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잘 치는 선수들을 한곳에 모아두는 것>이라고 보는데요, 저 5명은 그냥 1~5번으로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순서야 뭐, 어떻게든 짜면 되겠죠. 어차피 야잘잘이니까요.
개인적으로 "김태균이 작년과 비교해서 어떤지" 매우 궁금한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괜찮아 보였습니다. 선구안은 많이 살아난 것 같고, 마지막 타석 타구도 오재원의 위치가 워낙 이상(?)한 곳에 있어서 그랬지, 누가봐도 중전 안타였거든요. 김태균은 컨디션이 좋을때 타구가 왼쪽으로 높이 떠서 멀리 가거나 오른쪽 라이너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볼을 안 치죠. 아직 타구가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안 날아가서 판단이 잘 안 서기는 합니다. 하지만 볼 고르는 모습 보면 컨디션이 비교적 괜찮은 것 같고, 일반적으로 타구가 중견수에게 가는 건 타자의 컨디션이 나쁘지 않다는 얘기니까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변노유 트리오가 잘해야 되고, 정근우가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줘야 되고, 호잉 이성열 송광민이 중심을 잡아줘야 하며, 하주석 정은원 최재훈이 모두 성장해야 하지만, 김태균의 생산력이 회복되는 것이 아직은 가장 중요한 숙제니까요.
두산한테 영봉승 거둔지 6년 가까이 됐고, 한화 좌완선발이 완봉승을 한 것도 5년이 넘었더군요. 그래서 오늘 채드벨이 9회까지 던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들 하셨을겁니다. 저도 했고요. 하지만 아직 날씨도 춥고, 이제 시즌 첫 경기고, 커리어 내내 주로 불펜에서 던지던 선수가 투구수도 95개쯤 찍었으면 바꾸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상황에 이태양이나 정우람을 내보낸다든지, 아니면 어제 던진 투수를 또 쓰면 그건 문제인데, 장민재 내보내서 1이닝 막으려던 선택은 괜찮았죠. 문제는 장민재의 투구가 깔끔하지 않았고, 대타나 구원으로 내보낸 선수가 제 역할을 못하면 그 타이밍에 굳이 그 선수 콕 찍어 기용한 감독에게도 책임이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큰 점수차에 나와서 1점 정도 주는 건 언제든 생길 수 있는 일이죠. 대신, 장민재는 다음에는 그런 공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개막 2연전을 비교적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올 시즌에는 선수들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본인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해주면 좋겠네요. 그러다 보면 또 작년같은 좋은 날, 어쩌면 작년보다 더 좋은 날도 오겠죠.
첫댓글 오늘 경기는 팽팽했지만 투수를 많이 쓰지 않으면서 그리고 선발을 무리 하지 않으면서 이긴게 가장 큰 수확같네요. 그리고 하주석도 심적 부담을 이겨낼수 있는 2루타가 나와서 앞으로 더 잘 풀릴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정근우 송광민 호잉 김태균 이성열 이 다섯명은 잘 해야하고 잘 할거라 봅니다. 최소 저 5명은 상수가 되야 계산이 서는것도 있고요.
그렇다면 저 5명을 이어받을 다른 타자가 한명 더 있었으면 하네요. 코칭 스텝은 하주석을 바라보고 있는듯 하며, 팬심으로도 이왕이면 장타력 있는 하주석이 '개안'좀 했으면 좋겠네요. 정은원, 최재훈, 좌익수 중에서도 누군가 터졌으면 금상첨화겠지만, 하주석에겐 무슨 마성의 매력이 있는건지 매해 기대하게 되네요.
하주석은 오늘 상대 실책이었건 운이좋았건 뭐건 암튼 물꼬는 틀었으니 이제 뭔가 안정적인 생산력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잘읽었습니다~ 예리하고 논리적인 관전평 항상 고맙구요^^
1번선발님의 [오늘경기잡담]이 올라오는거 보니 시즌이 시작된거 맞네요. 항상 글 잘보고 있습니다 ^^
오늘 그야말로 이상적인 경기였습니다.
2번에 장진혁을 두어 다소 약해보이지만, 6번 하주석일때보단 6번 이성열이 있으니 찬스 때 좀 더 위압감이 있네요
특히 어제 오늘 최재훈의 타격감 또한 매우 좋아 보입니다. 특히 이용찬의 유인구를 골라서 만루를 만든 건 어제 동점타 못지 않은 큰 역할이었습니다.
작년 빈타에 허덕이던 이글스를 호잉이 멱살을 잡고 있었다면, 올해는 태균이가 딱 중심을 잡아줍니다.
태균아~ 우승한번 하고 은퇴하자!!
👍
심판 판정이 후한점이 있지만 어쨋든 구석구석 파고 드는 제구가 너무 좋았네요. 두산 타자들이 스탠딩 삼진 당할때마다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 섞인 표정을 지을때 짜릿하더군요 ㅎㅎ
같은 생각입니다..
저도 어제 우리팀 승리 수훈선수로 1회 정수빈을...ㅋ
1정근우 2 ㅇㅇㅇ 3송광민 4 호잉 5 김태균 6 이성렬 7 최재훈 8 하주석 9 정은원
2번 타자가 비어 있네요 김민하 양성우 강경학 최진행
좋은글 감사합니다. 님 말씀대로 오늘 눈부신호투 속에는 좌타자 바깥쪽 후한 스트라이크존도 한목 했다고 봅니다. 첫날 경기 강모 주심처첨 스트존이 오락가락하거나 바깥쪽이 짜면 고전할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작년 휠러 보다는 훨씬 좋다는건 사실이내요^^
이 정도 벌어진 경기에 (권혁) 송창식,이태양 정우람 나올 일 없다는 당연한 생각이 이제 당연하게 느껴지네요. 글을 읽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게 전혀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