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시개요
- 전 시 명 : ‘길에서 다시 만나다’ 5.18 25주년기념미술전
- 전시주최 : 사단법인 민족미술인협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산민주공원
광주5.18재단
태백민예총
- 전시후원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 전시장소 및 기간 : 부산, 광주, 서울 4개 도시 순회전
(1) 부산 : 2005. 5. 17(화) ~ 5. 29 민주공원 기획전시실
(2) 광주 : 2005. 5. 31(화) ~ 6. 13 5․18기념재단 전시실
(3) 태백 : 2005. 6. 16(목) ~ 6. 26 태백문화예술회관 전시실
(4) 서울 : 2005. 7. 27(수) ~ 8. 9 공평아트센터 1층
- 전시구성 : 41여명의 대표적 민중미술 작가들이 5.18을 비롯한 민주항쟁들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전시. 회화, 조소,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 50여점을 전시하게 되는 이번 전시에는 지난 시절의 상징적인 민중미술작품 구작(30%)과 각 항쟁을 소주제로한 주제별 신작(70%)이 소개됨.
- 전시주제 및 참여작가 :
민중미술 구작 - 강요배, 오석훈, 신학철, 임옥상, 최민화, 주재환, 홍성담, 이기원
제주4.3항쟁 - 김수범, 박경훈, 오윤선, 정용성, 조성봉
반유신투쟁 - 박불똥, 박진화, 이인철, 이명복, 안성금, 성효숙
부마항쟁 - 박재열, 성백, 김경호, 박주현, 방정아, 오현숙, 박경효
광주5.18항쟁 - 조정태, 천현노, 최병진, 이준석, 이재칠
6월항쟁 - 김승범, 김서경, 김운성, 김천일, 박영균, 김미혜, 박은태, 김재석
민간인 학살 - 강경근, 김태완
- 전시 기획 :
공동준비위원장 이종률 (민주화기념사업회 본부팀장)
김윤기 (민미협전시위원장)
책임기획 박응주 (예술학. 홍익대 박사과정)
객원큐레이터 윤태건(전 카이스갤러리 큐레이터)
김태현(사진학, 외국어대 강사)
부산 큐레이터 배인석 (민족미술인협회 사무처장)
광주 큐레이터 조정태 (광주민예총 미술위원장)
어시스턴트 신원철 (예술학)
- 전시문의 : (사)민족미술인협회 2005 항쟁미술제 준비위원회
T. 02-738-0764 F. 02-738-0765
책임큐레이터 박응주
(011-211-5895 chaeum94@dreamwiz.com)
2. 전시내용
2005항쟁미술제 준비위원회가 기획한 5.18항쟁 25주년기념미술전 “길에서 다시 만나다”가 5월 17일부터 8월 9일까지 개최된다. 본 전시는 부산, 광주, 태백, 서울 등 4개 도시의 순회전으로 부산(5.17~5.29) ‘민주공원 기획전시실’에서 시작하여, 광주(5.31~6.13) ‘5.18기념재단 전시실’과 태백(6. 16~ 6.26) ‘태백문화예술회관 전시실’, 서울(7.27~8.9) ‘공평아트센터’에서 차례로 열린다.
o 다시 쓰는 민중의 역사 - 20세기 한국민주항쟁사 회고
‘길에서 다시 만나다’는 5.18을 비롯한 민주항쟁의 역사를 형상화한 작품들을 통해 민중미술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과거사를 조명하여 발전적 미래상 모색해보는 전시이다.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근대화 정책의 뒤안길에서 희생되었던 민중들의 역사를 그들의 미학을 대표하는 민중미술 작품 속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4.3항쟁, 부마항쟁, 5.18항쟁, 6월항쟁, 반유신투쟁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수많은 민주 항쟁들은 갈등과 치유의 과정을 겪으며 오늘날 사회와 민주의식에 비약적인 진보를 가능케 하였다. 본 전시는 이러한 민주항쟁의 역사를 형상화함으로써 지난 세기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회고하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천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우리 민족과 예술이 가야할 길을 점검해 보려는 것이다.
o 낮은 목소리로 하나되어, 길에서 만나다
1980년대 태동한 민족미술은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확산을 이루며 민족미학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당당히 주류미술의 한 장르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현실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자 비판인 민중미술은 동시대 역사의 생생한 증인으로서 지난 수십년간 치열하게 작업해왔다. 그러나 21세기 민주사회의 진입과 더불어 사회도 민중도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다. 이에 따라서 민중미술은 기존의 투쟁목표와 과격한 표현방법에서 벗어나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민중미학을 모색하고자 한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며 기획된 이번 전시에서는 역사와 현실을 이어주는 교량으로서 민중미술의 변함없는 역할이 검증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힘을 재발견하여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를 꿈꾸게 하는 활력소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름없는 민중들의 격렬한 고통과 상처의 흔적이 남아있는 길에서 오늘날의 민중들은 낮은 목소리로 평화적 힘의 시위를 펼치고 있다. 길 위에서, 항쟁의 현장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민중들이 만나고 미래의 발전적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길에서 만나다”전은 근대화 이후 촉발된 항쟁부터 2002년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관통해 이어지는 민중의 자발적인 의지들을 담고 주체적인 참여의식의 부각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이는 곧 한국 근현대사에서 소외되어 온 ‘사람들’의 발자취를 역사의 중심에 놓는 작업이다.
o 역사와 호흡하며 현실 속으로, 항쟁의 21세기형 패러다임 제시
이 전시가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집단의 발언이 아닌, 사회와 연결되어진 각 개인들의 역사이다. 또한 특정 예술가 집단의 미술이 아닌, 한 예술가 개인의 미술을 담으려 한다. 한국사회는 지난 세기의 집단적이고 획일화된 문화를 아직 떨쳐내지 못했지만, 사회 전반에 다원주의가 통용되며 개개의 다양하고 참신한 정서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 좌익 집단의 과격한 움직임으로 치부되곤 했던 민주항쟁들의 실체는 민중 개개인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몸짓이었다. 각종 사회부조리와 불합리를 목격하며, 최소한의 민주적 권리 보장을 바랬던 작지만 하나된 목소리가 모여 세상을 바꾸어 가고 있다. 따라서 본 전시는 희망의 주체로서 민중을 부각시키고 그들의 삶을 표현한 미술작품 속에서 민중의 발전적 힘을 모색해 보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한편 자신이 경험한 바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모더니즘이자 바로 민중미술이다. 이제 보다 힘차게 속력을 내야 할 때이다. 이번 전시는 민중미술의 모더니즘전이라 말할 수 있다.
o 5개 소주제로 다양한 장르의 50여점 출품, 대부분 신작으로 구성
출품작은 구작 30%, 신작 70%의 비율로 구성되며 회화, 조소, 영상, 설치 분야의 작품 50여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이 중 구작은 강요배, 오석훈, 신학철, 임옥상, 최민화, 이기원, 주재환, 홍성담 작가의 작품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외친 대표적인 민중미술 작품들이며, 신작은 5개 민주화 운동을 주재로 33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본 전시는 사단법인 민족미술인협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산민주공원, 광주5.18재단, 태백민예총이 주최하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후원한다.
3. 주요 전시작 이미지
그림 1)) 임옥상 <그대의 영전에> 215.5×147.5cm 캔버스에 아크릴릭 1990
그림 2)) 박진화 <길에서 다시 만나다> 270×231cm(2절×15점) 종이에 연필드로잉 2005 그림 2)) 박진화 <길에서 다시 만나다> 270×231cm(2절×15점) 종이에 연필드로잉 2005
4. 전시기획 의도
길에서 다시 만나다
이 전시는 당위의 수준에 대한 성찰로서 기획되었다. 예컨대 감각들의 수면아래에는 물질의 수준이 있음을, 방종에 가까운 21세기적 자유의 수면 하에는 항쟁들의 피어린 역사가 있음을 상정함이다.
전시는 그 당위를 다시 전복하려한다. 소위 순수냐 참여냐, 진보냐 반동이냐로 양분되는 흑백논리의 시대를 경유한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우리시대가 예술작품의 해석을 내용의 당위에만 위임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형식에의 요청이다. 언필칭, 내용은 온전히 내용으로서 ‘생짜로’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말이겠다. 그것은 구워지거나 쪄지거나 썩어서나 곪아져서 들어와야 한다는 또 다른 ‘표현’의 요청이다. ‘표현으로서의 형식’ 어디쯤일까...
하여, 그것은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한다. “이번 전시에는 피어린 항쟁들이 있습니다. 오셔서 역사의식들을 나누어 갖고 가세요.” 라거나 혹은 “이번 전시에는 항쟁을 예술로서 형상화한 것들로만 꾸몄습니다.” 라고 우수리 없이 초대의 변을 쓸 수 없는 우물쭈물함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머뭇거림을 전시에 내놓기로 한다. 하늘이 부여한 예술의 자율성이냐 당위로서의 사회비판이냐가 서로 경합을 벌이고 있는 현장을 전시하기로 한 것. 따라서 그것은 예술의 자율성에서 타율성까지 하나로 꿰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기괴함이나 잔혹성, 즉 보다 순수한 형식성을 창작방식으로 택한 한 편으로부터 이데올로기 쪽에 방점을 둔 한 편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껏 겨누어왔던 사회비판의 칼끝을 내려놓자는 말인 듯도 보이는 ‘방임’을 시사하는 이런 진술이 아무러한 차이도 상관없다는 식의 방관은 아니다. 그것은 ‘타율성의 계기’, 즉 역사라 이름 되는 것의 있고 없음이다. 이를 위해서는 민미협, 민중미술 얘기를 해야 한다. 혹자는 그 그룹에 대하여 ‘과격하다’ 혹은 ‘큰 얘기만 한다’는 등등의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오인이다. 그 핵심적 요체가 정치경제학이다. 한 인간의 사회적 삶, 혹은 문화적 삶, 혹은 정치적 삶을 따로따로 떼어놓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묶음의 유기적 총체로 파악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 각각들이 서로서로 관련되어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정치경제학이라면, 진실로 민중미술이야말로 ‘작은’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과격과는 거리가 먼 ‘삶 그 자체’의 직물을 드러내려했다는 것이 그 실체에 부합할 것이다. 그것은 과거나 미래에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설정하고 그 관점에서 현재를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을 직시하고 해부하여 고통으로 얼룩진 인간의 모습과 세계상을 그려내려 했다는 것이 더 옳은 진단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예술의 타율적 계기가 끊임없이 예술의 자율성을 유린하는 지점에 성찰의 시작점을 놓고 있다는 것.
그 타율성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울어져있는 삶을 기울어져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기울기마저 측정할 수 없는 무딘 이성이 저지를 수 있는 무지보다 더 과격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타율적 계기를 예술의 자율성으로 번안하기위해 내부로부터 폭파시키는 문제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모던해야한다’는 모더니즘의 정신에 필적한다. 그것은 사회비판의 칼끝을 내려놓지도 않고, 염치없는 반동도 아니며 전일한 미학으로 통일될 필요 또한 없다.
민족이나 민주주의나 민중 그 어느 것도 말하는 일 없이, 물질적이고 생물학적인 집단으로서의 민중, 그 살(肉)적인 부대낌들이 만나 부르는 합창을 그려내고자 한다. 그것은 김수영이 묘사한바 서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찬 ‘풀’들의 역사다. 풀들이 나고 지고 또 그 자리에서 잎을 맺고 열매지며 바람과 비와 이슬과 서리와 섞이는 길 위에서의 만남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철학에만 갇혀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어떤 필연적인 목적 속에 예속시키는 종교나 미신 같은 초월적인 것, 영원한 것과의 싸움터에서의 조우마저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전시는 민중미술의 모더니즘전이다. 전쟁과 사랑이 교차하는 곳, 사회와 이념이 혼융되는 곳, 혁명과 파종이 두벌갈이되는 삶의 텃밭, 그곳은 우리들의 최초의 성지이다.■ 박응주
4. 전시기획 序文
四月革命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잿님이 할아버지가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를 뿌린 다음에
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또 뿌리고
호박씨, 배추씨를 뿌린 다음에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는
夕陽에 비쳐 눈부신
일년 열두달 쉬는 법이 없는
걸찍한 강변밭 같기도 할 것이니
-김수영,「가다오 나가다오」부분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혁명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리하여 수립한 정치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자명한 물음들은 오래도록 물어져왔고, 언필칭 무덤의 수효만큼 답해져왔다. 그러나 그 ‘주인’들은 물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민주화 투쟁의 결과물들이 그리하여 고스란히 ‘누군가’의 몫으로 돌아가는 이유이다.
보자, 못된 자의 탄압과 폭정에 못이겨 ‘그들’이 결사하고 봉기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관차같은 마차를 타고 진군한다. 그들은 주인들이다. 그런데 ‘주인’의 마차에 무임승차한 이들이 보인다. 마차는 진군한다. 그런데 심지어 십리도 가지 않아 주인들은 모두 내렸는지 없고 다른 낯선 사람들만 타고 있다. 어찌된 일인가... 더욱 웃기는 건, 그들은 아직도 자신이 마차에 타고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이 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선결문제’로서 이미 앞서 모두 해명됐던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그걸 다시 묻는다는 것은 전체 판을 깨자는 것이며,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부도덕한 짓이 된다.
이는 완전한 민족국가로서의 부러움을 샀던 프랑스 혁명사가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거시이론에서 바라본 적과 아의 대결에서 적을 놓아주는 형국이 되리라는 우려일 것이다. 그러나 책임을 거론하면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 법, 자유를 말하면 책임을 수반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책임에게 위임해왔던 통치의 신념, 그 60년의 공과를 이제 자유의 스펙트럼에게 위임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동엽과 김수영의 차이,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을 외치던 역사적 인물들로부터 잿님이 할아버지와 경복이 할아버지, 두붓집 할아버지같은 이에게 역사의 바톤을 넘겨보자는 제안이다.
그들은 이제 선결문제를 해명할 것이다. 다시는 왜곡되지 않을 계급적 기초를 확인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모세혈관까지 침투해 들어와 우리의 의식내부에 자리 잡아 내면화되어있는 미시권력형식들마저 나란하게 줄 세워 낱알과 쭉정이를 구분하듯 명약관화하게 드러낼 것이라는 말이다.
민족이나 민주주의나 민중 그 어느 것도 말하는 일 없이, 물질적이고 생물학적인 집단으로서의 민중, 그 살(肉)적인 부대낌들이 만나 부르는 합창을 그려내고자 한다. 그것은 김수영이 묘사한바 서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찬 ‘풀’들의 역사다. 풀들이 나고 지고 또 그 자리에서 잎을 맺고 열매지며 바람과 비와 이슬과 서리와 섞이는 길 위에서의 만남이다. 길이 없으면 없는 까닭에, 길이 있으면 있는 까닭에 멈출 수 없는 그런 발길, 그 쉬어가면 안되는 존재의 부지런한 일상을 따라 가본다.
창작적 태도에 대하여
따라서 제주 4․3으로부터 유신치하의 부산마산항쟁, 4․19, 5․18항쟁, 6월항쟁 등으로 굽이치는 역사의 뿌리를 그려내는 시각적 형상화 작업들은 ‘시민적 주권’의 진주로, 고발이나 반추가 아닌 ‘시민계급론에 대한 고증’ 작업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전시는 이들 한국사를 현재진행형으로 바라보려는 시점을 한 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즉 항쟁미술제안에 항쟁미술은 없다고 말해볼 수도 있다. 항쟁의 회고를 통한 교육적 교훈이나 고발적 폭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역사를 두텁게 보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역사적 사건의 당대나 즉물적인 현상으로부터 이격시켜 그 이전과 그 이후로 이어진, 그리하여 오늘의 나에게로 다가오는 의미의 감염을 오히려 지켜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관(史觀)의 교정으로부터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
그 첫째는 한국사의 연대기를 현대화의 완성을 향해 기승전결의 경제사적 과정을 거쳐 온 것으로 묘사하는 경제주의사관이다. 예컨대 저임금의 노동들의 피땀이란 국가주의적 번영의 그늘쯤으로 현혹하는 논리일 테다. 그러한 경제사로서의 역사란 흔히 경제를 이끌어가는 ‘활력에 찬 신선한 에너지들’이라고 불리는 부르조아 지식인적 활력의 다른 이름일 뿐인 가상을 들이대어 최초의 배반을 분식하게 할 뿐이다. 특히 이는 예술창작에 있어 ‘인식적 지도그리기’의 어려움으로 창작자들을 괴롭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 괴로움이란 이데올로기의 교묘한 ‘수작’을 간파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형상화시키는데 있어서도 난점으로 등장하는 이중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흔히 외면해버리거나 손쉬운 이미지에로만 집착한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이 묘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무리가 아니며, 그것은 표현에 의해 사회적 상흔으로 나타난 <게르니카>와 같은 경우가 하나의 교범 같은 예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둘째는, 전지구화의 물결 속에 당당히 지분을 차지하는 독자적인 문화를 정립하자는 ‘독자적인 문화론’의 오류이다. 이질적 요소들의 동시공존이라는 다원성을 마당삼아 미증유의 겉멋든 파편적인 이론을 한국의 내재적인 동인인양 설파하려는 ‘독자적인 문화론’ 역시 모든 예술은 사회적임을 망각한 귀결, 해방이후로부터 면면히 흐르는 민중의 저류를 만나지 못한 소이인 것이다. 오늘날 다원성은 모던의 대서사에 대한 이유 있는 반론으로서 등장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거시적인 지표들, 예컨대 민주나 통일, 이념, 사회구성체 등의 인덱스들이 좀더 효과적인 투쟁목표를 위해 내걸었던 ‘플랭카드들’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는 한 그것은 유효할 뿐만 아니라 그 소중함은 퇴색되어질 수 없다. 예컨대 총체성은 ‘총체화’시키는 방식이 문제이지 ‘총체성’ 그 자체는 하등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심상용의 어법을 빌어 이렇게 얘기해보자.
“아버지(모던의 강령들, 예컨대 플라톤적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선(善)으로서의 미(美) 등등을 지칭)의 충고를 이젠 안받아도
될만큼 너 다 컸냐?”
“너 정말 이제부턴 애비 없어도 되느냐?”
이 물음에 진정 답해야 할 때라는 말로 요약해본다. 그것을 일러 ‘이미지의 윤리’라고나 할까. 혹은 ‘아부지’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마음 한켠에 늘 간직하면서도 “글쎄 아부지 이젠 나도 내 할일도 있대니까요!”라고 말하는 딸/아들의 홀로 선 고독이라고 할까. 다시 한번 심상용의 용어로 “예술 제국에 끼고 싶지 않은 빛나는 개인들”이 되어주시는 길이다.
전시는 그렇게 총체화시키는 본부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별동대처럼 전투를 벌이는 독자성이되, 잃어버린 통일성, 즉 멀리 떨어져있는 요소들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전체적 역사과정의 부분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사회적 총체성의 한 부품이다. 그것은 예술의 내재적 원리에서 예술의 근거를 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말이 예술바깥에 존재하는 사회의 한 기획이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사회에 대립적인 입장에 의해 사회적인 것이 되며, 자신의 단순한 현존에 의해 사회를 비판하는 자율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유전자의 같음을 밝혀내는 창작적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그 비밀 누설은 무의식적으로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무의식이라 함은 의식의 수면위로 올라와보지 못한 뒤틀린 전의식(前意識)과 같은 것, 언어의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야만을 목도한 감각의 초과분과도 같은 것일 테다. 예컨대 10월 유신의 캐리커쳐였던 그 명랑소년(신동우 만화)과 긴급조치의 야만이 함께 있었던 당대의 청년들에게 내면화된 상과 같은 것, 그리하여 우리안의 파시즘으로까지 자가 발전하는 병증까지를 포함한다. 우리는 그 내면화된 미시권력들까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듯 한 사회의 그 움직임과 모순은 단지 그림자처럼만 나타날 것이다.
그 그림자들이 겹쳐지고 포개지며 맞물려있고 밀쳐내며 뚝 단절되어있기도 한 제국, 일년 열두달 쉬는 법 없는 그 강변밭 대지위에 초목이 생멸을 거듭하듯 우리의 죽음은 그 삶으로부터 길어온다. 그 죽음으로부터 삶을 길어온다.
박응주 (항쟁미술전 책임기획) |
첫댓글 오래간만에 글남겨 주셨네요 이미지가 뜨질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