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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유계흥(劉繼興)
동한(東漢)의 개국황제인 광무제 유수는 강인한 의지와 인간적 매력으로 천하의 군웅을 끌어모아 천하를 차지했다. 그는 일개 평민에서 역사에 빛나는 명군으로 성장한다. 그는 전투에서 아주 용감했는데, 이는 역대제왕중에서 드물게 보는 경우이다. 곤양전투에서는 유수가 솔선수범하여 13명을 이끌고 왕망(王莽)의 42만대군의 포위추격을 뚫는다. 포위망을 뚫으면서 병사하나 전마 하나 잃지 않았다. 나중에 3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왕망의 군대 측면으로 우회한 후 결국 2만명의 군대로 왕망의 42만군대를 물리치니, 중국 전투사상의 신화를 기록한다.
서한과 동한의 사이에는 여러 영웅이 나타난다. 역사상 유명한 난세였다. 유수의 적수로는 황제를 칭한 자만도 왕망, 왕랑, 유현, 유분자, 장보, 유영, 이헌, 팽총, 노방, 공손술등이 있었다. 이들 적대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유수는 여러해동안 전투를 벌였고, 여러번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는 전투에서 시기를 장악하는데 뛰어났다.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각개격파를 잘했다. 적의 강한 공격을 피하고 적의 허약한 부분을 공격했다. 정면전술과 기습전술을 병용했고, 계속하여 전술을 개량했다. 연속진격을 중시하고, 적군에게 숨을 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인화를 중시했고, 재능이 있으면 기용했다. 그리하여 휘하장수들이 충분히 능력을 발휘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결국 그는 천하를 평정한다. 이처럼 유수는 중국황제중 전투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원전6년, 서한황실의 후예인 유수는 낙양(하남 난고)에서 태어난다. 그는 한고조 유방의 9대손으로 한경제의 일맥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한경제는 밤에 그의 후궁인 정희(程姬)를 불렀는데, 정희가 가고싶지 않아서, 궁녀인 당아(唐兒)를 대신 보낸다. 한경제는 술에 취하여 몽롱한 가운데 그녀를 품는다. 그리하여 유수의 일맥이 나타난다. 세상사는 변한다. 유수의 선조의 지위는 날이갈수록 하락한다. 왕에서 후로 떨어지고, 그의 부친에 이르러서는 그저 낙양현령이라는 작은 관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기원후3년, 유수의 부친이 죽고, 그의 일가는 고향인 남양으로 되돌아간다. 그후로 평민으로 지낸다. 어린 유수에 있어서 황실의 후예라는 것은 그저 전설이었을 뿐이고 그 자신은 조금도 황실후예로서의 음덕을 누리지 못했다.'
이때, 비바람에 흔들이는 서한정권은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곤란으로 백성들이 살기가 힘들어져 사방에 원성이 자자했다. 외척인 왕망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기원후9년 결국 정권을 빼앗고 신(新)나라를 건립한다. 그런데, 왕망은 권모술수에는 능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제대로 하지 못하여, 세금을 올려서, 백성들로부터 더 많이 빼앗아 갔다. 법령은 더욱 가혹해졌고, 조석으로 법령이 바뀌었다. 왕망은 7년동안 4번이나 화폐개혁을 하는데, 화폐를 바꿀 때마다 백성들은 파산했다.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돈은 하루아침에 고철이 되어버렸다. 이로 인하여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갈등은 격화된다. 17년,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3개지역에서 발발한다: 지금의 호북 서북부에서 왕광, 왕봉이 이끄는 녹림군(綠林軍, 녹림산을 기지로 하여 얻은 명칭임)이 일어나고; 지금의 산동 동부와 강소북부에는 번숭등의 이끄는 적미군(赤眉軍, 눈썹을 붉게 물들여서 얻은 이름이다)이 일어나고, 지금의 하북성일대에는 크고 작은 십여갈래의 의거가 일어나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이 동마군(銅馬軍)이었다. 일시에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천하는 군웅할거의 국면을 이룬다.
<<후한서>>에는 유수에 대하여, "수염과 눈썹이 아름답고, 입이 크며, 코가 높고, 이미가 넓었다"라고 적고 있다. 고대 남자의 기준으로 본다면 미장부였다. 유수는 일찌기 농사를 열심히 지었고, 남은 곡식을 완성(지금의 남양)으로 가지고 가서 팔았다. 유수에게는 유연(劉演)이라는 형이 있었는데, 성격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그리하여 각지의 뜻있는 인사들과 교분이 있었다. 그는 시골에서 끝까지 지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유연은 자주 자신을 유방에 비유했고, 유수를 일을 열심히 한 유중(劉仲)에 비유했다. 형인 유연이 이끌어주어 유수도 천하에 뜻을 갖게 된다.
22년, 대기근이 남양군에 닥친다. 기아로 굶주린 사람이 사방에 널려 있고, 백성들은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반란군에 가담한다. 28살된 유수와 유연은 함께 이 기회를 빌어 종족세력을 모아서 거병하고, 남양으로 들어온 녹림군과 연합한다.
유수는 의거초기에 반란군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의 총명함은 곤양전투에서 드러난다. 23년, 녹림군은 이미 10만명으로 늘어났고, 한황실의 후손인 유현(劉玄)을 황제로 세우고, 연호를 경시(更始)라고 한다. 의거군은 주력으로 완성을 포위공격하고, 동시에 왕봉, 왕상, 유수등에게 2만의 군대를 보내어 북상시켜 곤양, 정릉, 언현을 함락시켜 대량의 물자를 확보하여, 완성의 포위공격에 보태게 한다. 왕망의 도성인 장안은 이로써 아주 위험한 지경에 처한다.
두려움에 빠진 왕망은 급히 왕읍, 왕심으로 하여금 각지의 정예병사 42만명을 모아서, 곤양으로 향하게 한다. 성을 지키던 녹림군은 8,9천명에 불과했다. 왕망의 부대가 새카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많은 장수들이 철수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때 적군을 피해서 도망치면, 마침 완성을 공격하던 주력부대가 적군의 앞에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위기의 순간에 영웅이 나타나는 법이다. 역사를 새로 쓰는 중요한 순간에, 유수는 냉정한 분석과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여러 장수를 설득하여 성을 지키면서, 지원군을 기다리도록 한다. 그 자신은 13기를 이끌고 밤에 성을 떠나, 언현, 정릉으로 가서 구원병을 모집한다. 왕읍, 왕심은 다수의 병력을 믿고, 부하로부터 완성의 포위를 푸는 것이 중요하니, 곤양의 수비군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자는 건의를 받지만 이를 따르지 않고, 곤양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곤양성은 작지만 견고했다. 하물며 막다른 골목에 몰린 맹수와도 같이 죽어라 저항했다. 왕읍, 왕심은 마음이 급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육월 초하루, 유수는 근 만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곤양으로 돌아온다. 선두부대의 1천여명은 왕망의 군대와 4,5리 떨어진 곳에 진을 펼친다. 왕심은 병력 수천명을 보내어 응전한다. 유수는 친히 칼을 들고 적진으로 뛰어든다. 수하들도 모두 용감하게 싸워서 천여명의 적을 죽이고 왕망의 군대를 물리친다.
이때 지모가 뛰어난 유수는 완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퍼트린다. 성안에도 보내고, 왕망의 군영에도 보낸다. 한편으로 성내의 수비병들에게 사수의 의지를 강화시키면서, 한편으로 왕망의 군대의 사기를 흔들었다. 이어서, 유수는 3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비밀리에 곤수를 건너, 왕망의 군대 측후방으로 우회한다. 그리고 왕심, 왕읍의 본진을 공격한다. 왕읍, 왕심은 원래 반란군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바로 각 부대에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고, 스스로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응전한다. 양군이 격전을 벌이는데, 유수가 이끄는 정예부대는 용맹하게 싸워서, 왕읍, 왕심의 군대가 혼란에 빠진다. 각 주군병은 왕읍이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므로,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여서 구원하러 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왕읍의 군대는 궤멸하고, 왕심은 전투중에 목숨을 잃는다. 곤양의 수비군은 이 틈을 타서 뚫고 나오니, 안팍에서 공격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왕망의 군대는 속속 도망을 친다. 그런데, 돌연 폭우가 내려서 강물이 불어나니, 왕망의 군대에서 물에 빠져죽은 자가 만명이 넘게 된다. 왕읍은 겨우 수천명을 데리고 낙양으로 도망친다. 이같이 하여 2만명으로 42만의 군대를 물리친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곤양전투는 형세를 역전시켰고, 왕망이 의지하던 군대의 주력을 섬멸시켰다. 대학자 왕부지는 나중에 이렇게 평가했다: "한번의 전투로 종묘를 온전하게 지키고, 곧이어 천하의 광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광무제는 정말 불세출의 인물이다." 모택동은 1936년 <<중국혁명의 전략문제>> 및 1938년의 <<논지구전>>에서 두번이나 남양에서 작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기고, 약한 병력으로 강한 병력을 이긴 곤양지전을 언급한다.
그러나, 곤양지전의 최대공신인 유수는 승진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위험에 처하게 된다. 원래 명망이 날로 높아가던 그의 형 유연이 경시제 유현의 질시와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마침 밖에서 군대를 이끌고 있던 유수는 스스로 세력이 고립됨을 느끼고, 비통함을 참고, 스스로 완성으로 가서 사죄한다. 그리고 인욕부중하며, 형의 장례도 지내지 않고, 오히려 오랫동안 서로 사랑하던 음려화(陰麗華)와 거창한 혼례를 치른다.
화촉동방의 밤을 보내고 그저 즐거운 모양을 한다. 유현은 그제서야 그에 대하여 안심을 하고, 유수는 그저 귀족자제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유수는 살신지화를 벗어난다. 화를 피한 유수는 낮에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하지만 밤에는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큰 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왕망정권이 무너진 후, 군웅이 서로 차리하려고 싸우는 바람에 천하는 어지럽게 된다. 인내하던 유수는 마침내 독립하여 발전할 기회를 찾는다. 유현은 유수에게 대사마(大司馬)의 신분으로 하북을 통치하게 한다. 당시 하북은 형세가 복잡했고 각종 무장세력이 있었다. 유수는 풍이(馮異)이 건의한 "원한을 풀어주고, 혜택을 베푸는 방식"과 등우(鄧禹)가 건의한 "영웅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얻는다"는 전략을 실시하여 백성들과 지방실력자의 지지를 얻어낸다. 그리하여 점차 정권을 건립할 기초를 마련한다. 그러나 유수가 하북에서 막 세력을 키우고 있을 때, 왕랑(王郞)이 한단에서 황제를 칭한다. 그의 세력은 전성기여서, 아직 병력이 약했던 유수는 사방으로 도망친다. 여러번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 그러나, 유수는 다시 시험을 견뎌낸다. 유수의 여러 행동에서 천하의 사람들은 희망을 보고, 각지의 영웅들이 속속 그의 아래에 모여든다. 이들은 하나하나 전투경험과 능력이 있고, 지모와 용기를 갖추고, 자신의 부대를 이끌어 유수에 충성을 다한다. 유수는 비로소 하북에서 자리를 확고히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는 힘을 모아서 왕랑의 세력을 제거하고, 하북을 점령하는데 가장 큰 장애를 제거한다.
25년 8월 5일, 고현의 남쪽에서 여러 장수들의 극력 추대하에 유수는 황제위에 오른다. 고현은 고읍현으로 개명하고, 정식으로 동한왕조가 시작된다. 이해에 그의 나이는 겨우 31살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유수의 곁에 있던 소수의 문신과 장수들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그가 십여년후에 천하를 통일하고 한왕조를 회복하고 다시 이백년이나 지속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당시 경시제 유현은 아직도 명의상의 천하공주(天下共主)였다. 황제를 칭하기 전에 유수도 그의 부하였다. 경시정권은 한때 전국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한다. 유수가 황제를 칭하기 전후하여 전국의 할거정권은 수도없이 많았다. 황제를 칭하고 왕을 칭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 왕망의 여강 연솔(지방관직) 이헌(李憲)은 회남왕을 칭하고, 나중에 스스로 천자를 칭한다.
- 한단에서 점을 보던 왕랑은 스스로 한성제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황제를 칭한다. 하북북부에서 요녕일대가 그를 따른다.
- 공손술(公孫述)은 한중, 파, 촉을 점령하고 '촉왕'이라 칭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스스로 천자를 칭한다.
- 종실인 양왕 유영은 수양(하남 상구)에서 황제를 칭한다. 지금의 하남동남부, 산동, 안휘일대를 장악한다.
- 장보(張步)는 산동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제왕(齊王)이라 칭했다.
- 적미군은 종실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세우고, 장안을 점거하여 경시정권을 대체한다.
- 외효는 천수, 농서일대를 장악하고 '서주상장군'을 칭한다.
- 두융(竇融)은 하서주랑을 할거하고 '하서상장군'을 칭한다.
- 노방(盧芳)은 삼수(감숙동북부 및 영하중부)에서 상장군, 서평왕을 칭하다가 나중에 흉노에 의해 황제에 옹립된다.
- 어양태수 팽총(彭寵)은 계성(지금의 북경)을 함락시키고 자칭 연왕이 된다.
- 남양일대에는 진풍(秦豊)이 초려왕을 칭했다.
- 한중에는 연금이 무안왕이라 칭하며 나중에 남양으로 진격한다.
황제를 칭하기 전에, 유수는 이미 왕랑과 하북의 여러 세력을 물리쳤다. 그러나 실제 지배하는 지역은 겨우 하북과 일부 인근지역이다. 병력이 가장 강하지도 않았고, 점거지역이 가장 넓지도 않았다.
건무원년(25년) 육월, 유수가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대군이 남하하여, 낙양을 포위한다. 낙양을 고수하던 주유는 유연을 살해하는데 가담했기 때문에 투항을 겁내고 있었다. 유수는 황하의 물로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자, 주유는 낙양성의 수비병사를 이끌고 유수에 투항한다. 유수는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낙양이 30만의 항복을 받아낸다. 낙양성을 점령한 후, 유수는 주유를 평적장군, 부구후에 봉한다.
유수는 낙양을 수도로 삼는다. 그후 수백년간, 낙양은 전국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된다. 건무2년(26년), 유수는 다시 낙양에 종묘를 건설한다. 종묘의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만든다. 유수는 적미군이 심복대환이라고 보고, 먼저 등우, 풍이를 파견하여 적미군과 싸우게 한다. 유분자가 백만을 이끌고 항복한다. 근심거리이던 적미군의 주력을 해결한 후, 유영을 토벌하고, 외휴도 멸망시키며, 공손술도 평정한다. 건무13년(37년)에는 중국전역을 통일한다.
유수가 강적이 즐비한 가운데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략이 정확하고 작전이 용감하고 지휘가 적절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책략을 중시하고 정치적인 안목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통일전쟁에서, 정치공세를 잘 활용한다. 노비석방, 수감자석방, 세금감면등을 선포하여 적군을 와해시키고,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그는 군기를 중시했다. 일찌기 경시정권의 장군으로 있을 때, 부하들의 군기를 강조했다. 이는 나중에 더 많은 지지를 얻어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선조 유방과 다른 점이라면, 유수는 공신을 죽이지 않았다. 그의 공신들에게 아주 후덕하게 대해주었다. 그들에게 풍성한 대우를 해준다. 공신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유수는 "공신을 물러나게 하고, 문신을 기용한다" 그리고 국가통치를 문신들에게 맡긴다.
전국통일후에도 광무제 유수는 여전히 성실하게 정무를 보았다. 매일 새벽에 조회에 나가고 해가 진후에 끝냈다. 여러번 신하 장군들을 불러서 경전의 이치를 논의하느라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가 실행한 여러 정책은 동한의 봉건통치를 보호하면서, 국가통일도 유지했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하고 사회경제발전을 촉진시켰다. 광무제는 만년에 도참을 미신하여, 도참을 천하에 선포하고, 직언하던 환담, 풍연등을 축출하는 등의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정무에 성실했다. 이는 봉건제왕중에서든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는 좋은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중은우시 선생 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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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광무제 유수(漢光武帝 劉秀, 기원전 6년 ~ 서기 57년)는 중국 후한의 초대 황제이다. 한 고조 유방의 9세손이며, 남양(南陽)의 채양현(蔡陽) 출신이다. 남둔현령(南頓県令)으로 남둔군에 추증된 유흠의 아들이다.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자는 문숙(文叔)이다.
신 건흥제 왕망(王莽)에 맞서 반란이 일어나자, 유수도 형 유인과 함께 봉기하였다. 23년에 곤양을 점령했는데 신군 43만 명이 곤양을 포위하였다. 이 때, 유수는 포위망을 뚫고 원군을 요청하러 갔는데,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원군 3천 명을 이끌고 돌아와 적장 왕심을 죽였다. 이렇게 되어 유수의 명성은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황제를 자칭하던 한 경시제 유현은 유인과 유수를 죽이려 했다. 이를 알아챈 유수는 유현에게 복종하는 척 했으며, 심지어 형 유인이 트집이 잡혀 죽었는데도 형을 위하여 상복을 입지 않았다. 이로 인해 유현은 유수에게 직책을 주어 그를 위로했다.
유수는 곧 유현에게서 떠나 하북에 정착했다. 그리고, 점점 세력을 넓혀 나라를 세우니 이가 후한(後漢)이다. 이때가 25년 6월 때의 일이다. 도읍은 낙양(洛陽)에 정하고 연호는 건무(建武)라 하였다.
유수는 적미군을 격파하고, 36년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시키고, 수리사업을 일으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57년 2월에 유수는 낙양의 남궁에서 붕어하였으니 그때 나이가 63세였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광무황제(光武皇帝)이다.
한글위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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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
후한의 1대 황제. 이름은 유수.
유씨가 낳은 희대의 먼치킨 그 두 번째 유비는 여기에 끼지 못하는가.(첫 번째는 한무제라고 보통 이야기 하는데, 실상을 살펴보면 의문스럽긴 하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한국에서 '중국사의 만능 군주'라고 하면 삼국지의 입김이 강해서인지 흔히 조조를 연상하곤 하지만 실은 이 광무제야말로 대단한 만능형 영웅이다. 특히 중국사의 위대한 황제로 손꼽히는 한무제는 물론 당태종이나 강희제도 후계자 문제나 말년의 실책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는데 광무제는 후계 문제도 잘 넘어갔고 창업 군주가 흔히 타는 토사구팽테크도 타지 않아서 크게 흠 잡을 만한 곳이 없다.[1]
2 일대기 ¶
본래 한미한 황족이며 전한의 방계 황족이다. 정확히는 경제의 막내아들이자 무제의 동생인 장사왕 유발의 후손이다. 하지만 행동이 신중하고 격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 전설에는 춘추전국시대 때 진나라 시황제의 조상 양공이 잡지 못한 숫꿩이 달아나다가 그의 고향 남양 근처에 앉았고 그 돌꿩을 그 일대 사람들이 사당에 모셨다. 나중에 그 덕분에 유수는 황제가 됐다고 한다.[2]
왕망의 신나라가 적미(赤眉)의 반란으로 붕괴위기에 처하고, 각지에서 군웅들이 일어서자 유수도 한나라의 회복을 명분으로 하여 형 유인과 함께 군대에 참가했다. 이때는 아직 지도자는 아니었고, 다른 황족들의 부하 정도의 위치였다.
왕망은 급히 왕읍, 왕심으로 하여금 각지의 정예병사 42만명을 모아서 곤양으로 향하게 한다. 성을 지키던 녹림군은 9천명에 불과했다. 왕망의 부대가 새카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많은 장수들이 철수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대 적군을 피해서 도망치면 마침 완성을 공격하던 주력부대가 적군의 앞에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위기의 순간에 영웅이 나타나는 법이다. 역사를 새로 쓰는 중요한 순간에 유수는 냉정한 분석과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여러 장수를 설득하여 성을 지키면서 지원군을 기다리도록 한다. 그 자신은 13기를 이끌고 밤에 성을 떠나 언현, 정릉으로 가서 구원병을 모집한다. 왕읍, 왕심은 다수의 병력을 믿고 부하로부터 완성의 포위를 푸는 것이 중요하니 곤양의 수비군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자는 건의를 받지만 이를 따르지 않고 곤양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곤양성은 작지만 견고했다. 하물며 막다른 골목에 몰린 맹수와도 같이 죽어라 저항했다. 왕읍, 왕심은 마음이 급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육월 초하루 유수는 근 만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곤양으로 돌아온다. 선두부대의 1천여명은 왕망의 군대와 4,5리 떨어진 곳에 진을 펼친다. 왕심은 병력 수천명을 보내어 응전한다. 유수는 친히 칼을 들고 적진으로 뛰어든다. 수하들도 모두 용감하게 싸워서 천여명의 적을 죽이고 왕마의 군대를 물리친다.
이 때 지모가 뛰어난 유수는 완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퍼트린다. 성안에도 보내고 왕망의 군영에도 보낸다. 한편으로 성내의 수비병들에게 사수의 의지를 강화시키면서 한편으로 왕망의 군대의 사기를 흔들었다. 이어서 유수는 3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비밀리에 곤수르르 건너 왕망의 군대 측후방으로 우회한다. 그리고 왕심, 왕읍의 본진을 강습한다. 왕읍, 왕심은 원래 반란군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바로 각 부대에 위치를 사수하게끔 명령하고 스스로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응전한다. 양군이 격전을 벌이는데 유수가 이쓰는 정예부대는 용맹하게 싸워서 왕읍, 왕심의 군대가 혼란에 빠진다. 각 주둔병은 왕읍이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므로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여서 구원하러 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왕읍의 군대는 궤멸하고 왕심은 전투중에 목숨을 잃는다. 곤양의 수비군은 이 틈을 타서 뚫고 나오니 안팍에서 공격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왕망의 군대는 속속 도망을 친다. 그런데 돌연 폭우가 내려서 강물이 불어나니 왕망의 군대에서 물에 빠져죽은 자가 만명이 넘게 된다. 왕읍은 겨우 수천명을 데리고낙양으로 도망친다. 이같이 하여 2만명으로 42만의 군대를 물리친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곤양대전은 형세를 역전시켰고 왕망이 의지하던 군대의 주력을 섬멸시켰다. 대학자 왕부지는 나중에 이렇게 평가했다.
"한번의 전투로 종묘를 온전하게 지키고 곧이어 천하의 광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광무제는 정말 불세출의 인물이다"
모택동은 1936년 <<중국 혁명의 전략 문제>> 및 1938년 <<논지구전>>에서 두번이나 남양에서 작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기고 약한 병력으로 강한 병력을 이긴 곤양대전을 언급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3]은 유인과 유수가 황제의 자리를 놓고 그와 쟁탈할 것이 염려되어 부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인을 죽일 구실을 찾아 결국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수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여 유현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즉시 완성(宛城, 현재의 허난성 난양시)으로 달려가 유현에게 죄를 청하고, 형 유인이 죽어 마땅할 죄를 지었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형이 죽었어도 그는 형 유인을 위해 상복을 입지도 않고 평소와 같이 늘 밥 먹고 술 마시며 유유자적하게 담소를 즐기면서 전혀 상심해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곤양대전의 상황을 물으면, 그는 그것이 모두 장수와 병사들이 힘써 싸운 결과이지 자신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는 이불 속에 누워서 형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무자비한 유현을 원망하였다. 이러한 유수를 제거할 구실을 찾지 못한 유현은 하는 수 없이 그를 중용하지는 않고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에 임명하였다.
왕망이 망하고, 다시 유씨가 집권하여 한나라가 세워졌으나(후한) 유수는 그 명성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위험 인물로 취급되어 당시 다른 군벌인 왕랑이 황제를 자칭하고 있던 화북 지방을 평정하도록 보내진다.
사실상 사지로 보내려는 조정의 의도였지만, 유수는 동마, 청독, 대동, 우래, 녹림 등의 세력과 여러 차례의 싸움 끝에 화북지방을 평정하여 자신의 기반을 다지고 아직 반란을 계속하고 있던 적미(赤眉)군과 회담하여 그들을 복속시켜 자신의 군대에 편입했다. 그리고 뤄양을 근거로 삼아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거병한지 10여년 만에 각지의 군벌들을 모두 격파하고 천하를 평정했다.
3 후세의 평가 ¶
훗날 제갈량은 조식과 논쟁하면서 쓴 글에서, "한나라 고조의 개국공신들은 흔히 광무제의 개국공신들보다 능력이 높다는 평가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광무제가 너무나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에 공신들의 능력은 부족하지 않지만 능력이 부각될 만한 위기상황이 적었던 것 뿐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광무제의 공신 중 대표적인 인물을 들라면 베트남을 원정한 마원. 이 사람은 '노익장' 고사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또한 '운대 28장'이라 하여 훗날 당태종의 능연각 24공신처럼 광무제를 도와 나라를 세운 28명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 놓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광무제의 명참모인 등우와 동료들과 공적 다툼을 할 때마다 큰 나무 뒤로 숨어버려서 '큰 나무 장군(대수장군)'이라는 별명이 있었던 풍이가 있다. 하지만 마원은 운대 28장에 들어가지 않는데 이유는 광무제의 며느리 마황후가 공신들이 득세할 것을 염려해서 황제한테 부탁해서 그런 것.[4]
일설에는 초한지나 삼국지에 비해서 광무제가 별로 부각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너무 엄친아이라서 비현실적이므로라는 설이 있다.(…) 동한연의라는 소설이 있기는 한데 별로 유명하진 않다.
다른 황제들이 수득도 없는데 쫀심 때문에 무식하게 유지했던 요동군 등 조선의 주둔병력들을 계속 골을 썩이느니 포기하는게 좋다고 해체한것을 보면 대인배+현실적인 군주이다.[5]
4 관련 일화들 ¶
젊은 시절 황제의 행렬 앞에서 화려한 집금오[6]를 보고,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라고 했다. 후에 황제가 되고 이름난 미녀였던 음려화를 아내로 얻었다.
하지만 음려화가 아들을 낳지 못했으므로 음려화의 양보로 곽씨가 황후가 된다. 하지만 광무제는 음려화를 전쟁터에 데리고 다닐 정도로 총애를 했고, 후에 음려화가 아들을 낳고(훗날 명제, 광무제한테는 4번째 아들이 된다, 장남과 차남은 곽폐황후 소생) 곽폐황후가 이를 질투하자 이를 구실로 황후를 음려화로 교체했다. 이 때 태자도 장남에서 음려화의 아들로 바뀌었다.
촉 지역에서 황제를 자칭하며 저항하고 있던 최후의 적 공손술을 격파하기 전에, 뤄양의 후한 황궁에는 아직 황제의 집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광무제는 집기를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이미 청두에 모두 만들어져 있으니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청두는 촉 지역의 중심지[7]로 공손술이 황궁을 짓고 있었으니 공손술을 격파하고 모두 빼앗아 오면 된다는 의미다. 이 때 유수가 한 말이 득롱망촉(得壟望蜀). '농 땅을 이미 얻었는데 촉 땅을 바라고 있다' 라는 말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표현한 고사성어가 되었다. 물론 말만 그렇게 하고 이듬해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뤘다.
후에 황제가 되었을 때 과거 글공부 같이 하던 친구인 엄자릉을 찾아서 후하게 대접하고 옛날 얘기를 같이 했는데, 그가 옛날에 하던 것처럼 자신을 막대하고 자면서 다리를 올리고 레슬링 기술을 걸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중에 웬 떠돌이 별이 황제의 별을 범하는 것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온 점성관에게 "친구인 엄자릉이 내 배 위에 다리를 올리고 자서 그렇다."하고 허허 웃고 돌려보냈다. 함석헌은 이것을 보고 엄자릉에게 권력에 주눅들지 않는 들사람(야인野人...)의 기개가 있다고 평했지만 옛 인연을 잊지 않고 한결같이 대한 광무제의 대인배스러움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광무제의 누님인 호양공주의 일화도 유명하다. 공주는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황제의 총신인 송홍이라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공주가 광무제를 졸라서 송홍하고 다리 좀 놔 달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송홍은 이미 품절남유부남이었다. 결국 누님의 보챔에 못 이긴 광무제가 송홍을 불렀는데 이 자리에서 광무제는 공주를 병풍 뒤에 숨겨 놓았다. 광무제가 송홍에게 "사람 신분이 높아지고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꾸는 것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던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라고 넌지시 떠 보자 송홍은 "옛부터 가난할 때 사귄 친구를 잊어서는 안 되고 가난할 때 함께 고생을 한 아내는 버려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8] 신이 벼슬이 올라 부귀를 누린다고 해서 술지게미와 쌀겨를 함께 씹어먹던 아내를 어찌 내치겠나이까?"라고 말하자 광무제가 슬쩍 누님을 돌아보며 "안되겠네요 누님"이라고 허탈히 소근거렸다는 유명한 옛날 이야기 한 토막. 여기서 그 유명한 고사성어인 '조강지처(糟糠之妻)'라는 말이 유래했다.
자식은 모두 11남 5녀.
곽폐황후는 5남 3녀를 낳았고, 음려화는 5남 1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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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당대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서한말기가 오면 각지에 호족세력들이 힘을키우기 시작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체제가 만들어 지기 시작하는데 중앙정부는 이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광무제 역시 이런 호족집안중에 하나로 이후 그가 세운 동한정권이 호족연합체적 성격을 갖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가 세력을 일으킨 남양지역은 비옥한 토지로 인해 많은 호족들이 성장하고 있었고 대부분 서한시기에 중앙권력에서 밀려나거나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세력을 키운 대토지소유 호족들로 등우, 경감, 두무등이 이런 남양호족을 대표하는 공신들이었다. 온건한 정책으로 인해 통일이후에도 광무제는 이런 공신들을 우대했으며 이후 동한이 외척들의 과도한 개입으로 인한 정권붕괴의 빌미를 제공했다.(초기 황제들 대부분의 정실부인은 이 운대28장들 후손이었다.) 유능하고 훌륭한 군주임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먼치킨적 군주라곤 하기엔 이후 동한 역사 자체가 매우 안습하게 흘러가게 만든 책임이 있긴하다.(이 모든 책임을 광무제에게 전가하긴 힘들지만 그는 공신우대책으로 호족들을 거의 숙청하지 않았다.)
[2] 암꿩과 숫꿩이 한 쌍으로 있었는데 양공은 암꿩을 잡자 돌꿩으로 변했다. 어떤 사람이 돌꿩 한 쌍중에서 암꿩을 잡으면 천하의 패권을 잡고 숫꿩을 잡으면 황제나 왕이 된다고 했는데 양공이 암돌꿩을 잡아 사당에 모시고 나중에 후손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예언이 적중되었다. 숫돌꿩도 남양 근처의 사람들에게 잡혀 사당에 모셔졌고 후에 그 지방 황족 유수가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
[3] 신나라와 후한 사이의 과도기의 황제로 신나라가 무너지자 유수와 그의 형 유인이 세운 황제다. 하지만 나중에 유인을 모살하고 유수가 떠난 뒤 결국 장안에 들어온 적미군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경시제와 광무제 모두 장사왕 유발의 후손이다. 유현이 황제로 추대된것은 같은 장사왕 후손이긴 하지만 유현이 유수, 유인형제보다 큰집이었기 때문이었다.(유현은 후작을 계승한 융릉대후 유웅거의 후손이고 광무제는 유웅거의 동생인 울림태수 유외의 후손이었다.)
[4] 이외에도, 마원이 사후에 그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이들의 모함으로 작위가 잠깐 추탈된 일이 있던 것도 작용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5] 근데 한사군은 재장악했다. 정확히는, 당시 태수가 중앙에 반기를 들고 독립하려들자 현지인들이, 안 그래도 그 놈이 그놈(양쪽 모두 식민통치하러 온 타인)인데 괜히 불똥만 튈까봐 나서서 먼저 때려잡고는 뒤늦게 도착한 진압군에게 순응한 것.
[6] 한나라 때 대궐문을 지키던 벼슬
[7] 현재 쓰촨성의 성도
[8] 貧賤之交不可忘,糟糠之妻不下當(빈천지교불가망,조강지처불하당)
엔하위키 펌
첫댓글 득농망촉의 고사는, 당시 옹주(농서라 불림)에 할거하던 외효를 물리친 다음, 농(서)을 얻었지만, 촉이 있으니 그 또한 얻고 싶다, 라고 했던데서 나온 고사로 알고 있습니다.
옙 당시 농서를 얻었던 광무제는 촉을 공격해서 당시 공손술이 지 황제랍시고 만들어놓은 제기와 각종 잡물들을 뺏어와서 쓰자고하면서 만들지를 안았지요 ㅡㅡ;; 결국 공손술을 쳐부수고 천하통일 .더군다나 득롱망촉 말고도 조강지처라는 고사를 탄생시킨 사건의 주역이기도. 했지요
유수 하앍 왕망은 대체 정치를 어찌한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