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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
 
 
 
카페 게시글
한국고대사 토론 게시판 ...강단사학이든 재야사학이나 헤갈리고 정리못하는 기준.위만.낙랑군.낙랑국 문제...
넌내사랑 추천 0 조회 431 14.12.02 22:42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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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12.06 01:24

    첫댓글 마한진한변한을 한반도에 짜깁기한것이 대단히멍청한 식민지발상이요.=왜냐? 어떻게당시 한반도땅에거 20만~50만병력이나온단말인가?1910년에 500만이던땅에......역사학적으로 이해가 안되는발상!!!ㅋㅋ
    또한 고구려.신라.백제또한 그병력이 안나온다,,,,,,ㅋ고구려100만대군이라..황당하다!
    또-신라의 경주가 50만호라..1980년대에 간신히 20만넘어서 읍에서 시로 승격된도시인데...모냐?ㅎㅎㅎ
    역사를 과학적,수학적,물리학적,으로 따져야지.....친일파 후예들이 뭐? 실증적?ㅋㅋㅋ웃기는개들~~~!!그러니 일본.미국록펠러에서 돈을 대주지...

  • 14.12.11 21:57

    고구려.백제 영토가 한반도에만 존재했나?최치원이 말한 고구려.백제 강병 100만이라 함은 중국동해안 지역의 조선유민까지 합세한 군대라 봐야지...그리고 한반도는 고인돌 천국이다..수십.수백톤의 고인돌 하나 만드는데 인원이 수백 수천명이 동원되야 한다...한반도지역은 고대부터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인거 모르나? 인구가 차고 넘치니까 만주로 이주하고 유라시아와 아메리카까지 이주하여 한문명을 건설한 것이고..상위 게시내용은 문헌-고고학을 종합하여 강단-재야의 문제를 모두 보완한 객관성에 부합한 내용이다...역사학이 제멋대로 뻥튀기 장난인 줄 알아?

  • 14.12.12 21:20

    @대한만국 답답하네.....그건 노아의방주 이전의 역사.홍산문명,흑피옥문명이전...15000~8,900년전이다.즉 마고문명의 시대를 말한다. 전지구에 8만여개의 고인돌중 5만개가 한반도에 있다. 2만개는 현중국동해안을 따라있고 그외엔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라인...중동라인...기타지역에 존재한다.
    식민지시절 책만들여다보고잇으면 그것밖에안보인다. 고로 공부를해야된다. 식미지교육책을 안보면 보인다.!!

  • 14.12.13 08:07

    @바카스 너도 인정하쟎아..한반도 중심으로(그것도 마문명지역인 호남중심의 서남해를 중심으로) 전 세계 해안에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홍산문명은 기원전 7천년까지 올라가....그 이전은 서남해 마문명이야..알겠어?

  • 14.12.12 21:21

    혁거세왕의 묘지는 강소성 양주에 있습니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의 묘지는 경북 경주 탑리 5능(五陵) 남쪽이라 했다. 그러나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를 살펴보면 담암사는 경북 경주 탐리 오능 남쪽이 아니라 楊山村(양산촌)에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거서간혁거세의 무덤은 虎丘山(호구산)의 雲岩寺(운암사) 남쪽 4里(리)에 있다. 고 기록돼있습니다.
    곧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墓地(묘지)는 중국 강소성 吳縣(오현)의 虎丘山(호구산)에 있습니다

  • 14.12.12 21:22

    1936년 경주의 인구는 19,748명이었다

    [아래의 글은 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차순철 자문위원의 글입니다.] 경주가 관광도시로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이지만 지금 당시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지난 2004년 불국사 성보박물관 부지를 발굴조사한 경주대학교 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건립된 불국사 철도관광호텔터를 확인하였고 건물의 규모를 밝히고 각종 생활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호텔은 불국사 복원정비사업에 의해서 1973년에 철거되었지만 지난날 경주지역의 관광사업과 관련된 <근대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경주읍의 전체 인구를 살펴보면 한국인(조선인)은 18,846명으로 남자 9,300명,

  • 14.12.12 21:22

    먼저 경주읍의 전체 인구를 살펴보면 한국인(조선인)은 18,846명으로 남자 9,300명, 여자 9,545명에 호구 수는 3,827호이며, 일본인(내지인)은 1,008명으로 남자 513명, 여자 495명에 호구 수는 252호이다.외국인은 국적이 표시되지 않았지만 총 36명으로 남자 28명, 여자 8명에 11호였다. 따라서 당시 [일제식민지 때] 경주읍의 인구는 19,748명임을 알 수 있는데, 일본인이 차치하는 비율은 전체 가구 수의 6.58%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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