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으로 인기있고 명성있는
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역사소설가들도
단군한국의 마지막 임금을 기준이라고 떠들어 댄다
민족사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한
우리 학생들과 국민대중은 그대로 믿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얼빠진 주장이
스스로 일제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그대로 학생들과 국민대중에게 주입한다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그들 스스로가 민족사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단군한국의 서쪽지역을 통치한
단군한국의 제후 수준에 불과한 기준을 단군한국의
마지막 임금으로 전제하면 일개 한나라 장수에 불과한
위만집단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단군한국은 형편없는 나라였다는
반증이니 우리 민족 스스로가 형편없는 후손들이라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게 바로 일제 식민사관과 중국 동북공정이 노리는
역사날조를 통한 민족정기 죽이기라는
사실을 왜 모른다는 말인가?
고로 똑바로 알아야 한다
중국세력이나 위만집단에 의해서
중앙국가인 단군한국이 망한 적은 없다
단지, 중앙국가인 진한국의 마지막 단군임금인
고열가 단군천왕이 사임을 하니
고열가 단군천왕의 친척인 해모수가
황통을 이어 받아 부여를 개국한 것 뿐이다
그 부여를 고추모의 고구려가 계승하여
단군한국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겠다는
다물을 국시로 삼았고, 결국 광개토태왕 시대에
단군한국의 옛영토를 모두 회복한 것이다.
위만의 망명이니 기준의 망명이니 하는 사건들은
모두 단군한국의 서쪽 변방지역인
요서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고구려 호동왕자가 옥저로 유람을 갔다. 거기에는 낙랑국 왕인 최리도 와 있었는데, 호동왕자의 출중한 외모와 함께 비범함에 매료되어 사위로 삼고자 하였다.
최리는 딸인 낙랑이라는 공주가 있었는데, 평소에 낙랑공주도 잘 생기고 똑똑하고 용맹하다는 고구려 호동왕자의 소문을 듣고 마음 속으로 깊이 사모하던 차에 아버지가 사위로 삼고 싶다고 하니 가슴이 설레어 있었고, 마침내 호동왕자가 낙랑국을 국빈 방문하여 낙랑공주를 보게 되고, 두 사람은 급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어찌하랴! 단군한국(부여)의 장자국가인 고구려라는 나라는 단군한국의 모든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다물을 국시로 삼고 있었고, 호동왕자 역시 그러한 고구려의 국시를 중시하였음으로 요하를 건너 중국 한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요하 건너 서쪽 지역의 단군한국 옛 영토를 회복해야 하는 장기적인 국가전략을 가지고 있던 고구려로서는 고구려 주변의 옛 단군한국의 유민국가들을 속히 통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낙랑국도 그 중에 하나에 속해 있었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에게 사랑을 맹세하고 낙랑국을 떠나면서 낙랑공주에게 외침이 있을 때 자동으로 울려 준다는 낙랑국의 '자명고'를 찢어 버리면 혼인을 하겠다며 요구한다. 이미 호동왕자에게 마음을 준 낙랑공주는 나라라도 바칠 수 있는 마음으로 변해 있었다.
마침내 낙랑공주는 자명고를 찢어 버리고, 그 사실을 비밀리에 고구려의 호동왕자에 편지로 알리게 되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낙랑국을 급습하게 된다. 낙랑국왕 최리는 나라를 배반한 낙랑공주를 살해하고,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항복한다.
낙랑국은 고구려에 항복은 했으나, 이후 낙랑국 유민들은 중국의 후한 광무제와 손잡고 국권회복에 나서게 되어 평양지역에 자연스럽게 낙랑군을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회복하게 되는 고구려 미천왕 때까지 후한의 낙랑군은 존재하게 된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이 후한의 낙랑군을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한4군의 낙랑군으로 오인하고 단군한국의 마지막 수도가 마치 현재 북한의 평양이고, 마지막 단군한국의 임금이 위만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기준 단군인양 가르치고 있으니 얼빠진 민족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낙랑공주의 나라인 최리의 낙랑국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사학계에서는 최리의 낙랑국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못하고 하나의 전설 정도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허위를 정당화 하다보니 내용이 사리(事理)에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최리의 낙랑국은 AD 37년에 고구려로 통합됩니다만,
한반도 북부 평양지역의 이 최리의 낙랑국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BC 169년에 번조선의 유민 최숭(崔崇)이 북부여(北夫餘) 왕실(海城:요동반도 북부)에 곡식 300가마를 바친 기록이 나오고, 또 BC 195년에는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땅으로 옮긴 기록이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나온다.
이 때가 위만이 기준을 축출하여(BC 194) 기준이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한반도지역/어떤 정신나간 자들은 중국지역으로 설정하는데, 당시 기준왕이 망명한 한반도지역을 기록한 후한서-한전도 안 읽어 본 어불성설 코메디논리다)으로 도망갈 때이며, 우리 고조선의 말기, 북부여 때다. 시대상으로 볼 때 북중국의 낙랑지역이나 기준의 번조선지역에 살던 최씨 일족이 위만집단의 학정을 피하여 바다 건너 현재의 평양지역으로 옮겨와서 낙랑국의 유래가 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 때는 소위. 한군현이 설치되기 87년 전이다. 기준이 BC 194년에 쫓겨 났는데, 최숭은 그보다 1년 전에 보물을 싣고 마한으로 갔다면 기준의 도피행각과도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낙랑이라는 나라이름을 따와서 살게 된 것이며, 그 때 마한지역은 단군한국 말기, 고구려의 태동기로서 통치력이 미약하던 시대적 상황이었던 만큼 평양지역에 낙랑(국)이라는 최씨들의 영지(領地)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번한국의 낙랑국, 최숭의 낙랑국
낙랑국의 위치는 본래 조백하(패수)를 건넌 위만집단이 요서지역의 번한국을 찬탈해 다스렸던 왕험성王儉城(번한국=기자조선 말기의 수도로 지금의 하북성 창려昌黎) 지역이다. 따라서 본래 평양 일대에 있었던 낙랑국은 단군한국의 삼한 중 번한番韓국의 유민인 최숭이 세운 ‘최씨 낙랑국’이며, 위만조선이 망한 후에 요서지역에 설치한 한나라의 낙랑군과는 무관한 낙랑이다. 현재의 평양지역을 한나라의 낙랑군으로 보는 인식은 당나라 이후에 생겼으며, 그 전에는 요서에 있었다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윤복현
첫댓글 마한진한변한을 한반도에 짜깁기한것이 대단히멍청한 식민지발상이요.=왜냐? 어떻게당시 한반도땅에거 20만~50만병력이나온단말인가?1910년에 500만이던땅에......역사학적으로 이해가 안되는발상!!!ㅋㅋ
또한 고구려.신라.백제또한 그병력이 안나온다,,,,,,ㅋ고구려100만대군이라..황당하다!
또-신라의 경주가 50만호라..1980년대에 간신히 20만넘어서 읍에서 시로 승격된도시인데...모냐?ㅎㅎㅎ
역사를 과학적,수학적,물리학적,으로 따져야지.....친일파 후예들이 뭐? 실증적?ㅋㅋㅋ웃기는개들~~~!!그러니 일본.미국록펠러에서 돈을 대주지...
고구려.백제 영토가 한반도에만 존재했나?최치원이 말한 고구려.백제 강병 100만이라 함은 중국동해안 지역의 조선유민까지 합세한 군대라 봐야지...그리고 한반도는 고인돌 천국이다..수십.수백톤의 고인돌 하나 만드는데 인원이 수백 수천명이 동원되야 한다...한반도지역은 고대부터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인거 모르나? 인구가 차고 넘치니까 만주로 이주하고 유라시아와 아메리카까지 이주하여 한문명을 건설한 것이고..상위 게시내용은 문헌-고고학을 종합하여 강단-재야의 문제를 모두 보완한 객관성에 부합한 내용이다...역사학이 제멋대로 뻥튀기 장난인 줄 알아?
@대한만국 답답하네.....그건 노아의방주 이전의 역사.홍산문명,흑피옥문명이전...15000~8,900년전이다.즉 마고문명의 시대를 말한다. 전지구에 8만여개의 고인돌중 5만개가 한반도에 있다. 2만개는 현중국동해안을 따라있고 그외엔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라인...중동라인...기타지역에 존재한다.
식민지시절 책만들여다보고잇으면 그것밖에안보인다. 고로 공부를해야된다. 식미지교육책을 안보면 보인다.!!
@바카스 너도 인정하쟎아..한반도 중심으로(그것도 마문명지역인 호남중심의 서남해를 중심으로) 전 세계 해안에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홍산문명은 기원전 7천년까지 올라가....그 이전은 서남해 마문명이야..알겠어?
혁거세왕의 묘지는 강소성 양주에 있습니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의 묘지는 경북 경주 탑리 5능(五陵) 남쪽이라 했다. 그러나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를 살펴보면 담암사는 경북 경주 탐리 오능 남쪽이 아니라 楊山村(양산촌)에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거서간혁거세의 무덤은 虎丘山(호구산)의 雲岩寺(운암사) 남쪽 4里(리)에 있다. 고 기록돼있습니다.
곧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墓地(묘지)는 중국 강소성 吳縣(오현)의 虎丘山(호구산)에 있습니다
1936년 경주의 인구는 19,748명이었다
[아래의 글은 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차순철 자문위원의 글입니다.] 경주가 관광도시로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이지만 지금 당시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지난 2004년 불국사 성보박물관 부지를 발굴조사한 경주대학교 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건립된 불국사 철도관광호텔터를 확인하였고 건물의 규모를 밝히고 각종 생활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호텔은 불국사 복원정비사업에 의해서 1973년에 철거되었지만 지난날 경주지역의 관광사업과 관련된 <근대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경주읍의 전체 인구를 살펴보면 한국인(조선인)은 18,846명으로 남자 9,300명,
먼저 경주읍의 전체 인구를 살펴보면 한국인(조선인)은 18,846명으로 남자 9,300명, 여자 9,545명에 호구 수는 3,827호이며, 일본인(내지인)은 1,008명으로 남자 513명, 여자 495명에 호구 수는 252호이다.외국인은 국적이 표시되지 않았지만 총 36명으로 남자 28명, 여자 8명에 11호였다. 따라서 당시 [일제식민지 때] 경주읍의 인구는 19,748명임을 알 수 있는데, 일본인이 차치하는 비율은 전체 가구 수의 6.58%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