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원의 「離騷」를 읽다 / 이 승 하 (시인)
시를 묻는 임보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저는 올해 3월부터 4개월 동안 북경대학에서 공부하고 오신 선생님으로부터 중국의 전국시대(기원전 475년~기원전 211년) 때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몇 편의 시를 공부했습니다. 한문을 잘 모르는 저로서는 선생님이 일일이 해석해주고 설명해주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지만, 중국 최초의 시인 굴원의 시심에 흠뻑 젖어 지낸 값진 4개월이었습니다.
굴원의 생애는 ‘波瀾萬丈’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왕실의 후예로 태어나 높은 벼슬까지 오른 그가 정적의 모함으로 하게 된 두 번의 귀양살이는 그 시대에 다반사였을 테니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칩시다. 강국 진나라의 침략 앞에 국운이 풍전등화가 된 것은 간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인 회왕과 경양왕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으니, 우국지사인 굴원으로서는 울화 앙앙할 수밖에 없었지요. 진나라의 군대가 나날이 접근해 오는데도 여전히 간신배가 판을 치는 나라꼴을 보면서 굴원은 울분을 참지 못해 큰 돌을 껴안고 멱라강에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그는 야윈 몸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유배지의 강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렸고, 그것을 붓으로 펼쳐내어 후세에 전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離騷」는 370여 개 구문에 3500여 자에 달하는 장시인데, 신비와 신선과 신화가 어우러진 기막힌 작품입니다. 자신의 태생에서부터 시작하여 펼칠 길 없는 애국심과 주군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 대한 고뇌가 절절히 담겨 있습니다. 복받치는 울분과 설움을 폭포수처럼 쏟아낸 열정이 얼마나 고결하고 간절했는지, 중국에서는 지금도 5월 5일 단오절에는 그를 기념하고 있다고 합니다. 찹쌀을 댓잎이나 갈잎에 싼 후 쪄서 만든 쫑즈(粽子)를 강물에 던지는 것은 굴원의 시신으로부터 물고기들을 떼어놓기 위함이라고 하지요. 이날 행하는 용선(龍船) 경주도 물에 빠진 굴원을 구하려는 뜻을 담은 주술적인 행사라고 합니다.
굴원은 「離騷」 외에도 신과 인간이 어울려 한바탕 해한의 굿풀이를 하는 「九歌」, 님을 향한 그리움과 억울함에 대한 하소연 등을 비교적 짧은 9편의 시에 담은 「九章」, 우주 만물에 대해 170여 개의 질문을 던진 「天問」,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추모하는 노래 「國殤」, 무속에서 하는 초혼가의 형식을 빌려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백성들에 대한 연민을 노래한 「招魂」 등을 남겼습니다. 서한(西漢)의 유향(劉向)은 굴원과 그의 제자 송옥(宋玉)의 작품을 모아 楚辭라고 이름을 붙인 책을 엮었고, 그 이후 이들의 시는 ‘초사’라는 일종의 문학 양식으로 일컬어지게 됩니다. 4언을 위주로 하는 북방의 가요 詩經의 시와는 달리 초사는 일반적으로 편폭(篇幅)이 길고, 시구마다 글자수가 다르고, 구법(句法)도 다양합니다. 초사의 7언구는 詩經의 단조로운 4언체에 비해 생동감이 뚜렷하지요.
시인은 비록 나이 일흔을 못 채우고 울분에 차 자살했지만 중국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를 ‘위대한 애국시인’ 혹은 ‘시신(詩神)’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 소월도 “혼이여 돌아오라!(魂兮歸來)”고 거듭 외치며 전개되는 시 「招魂」을 읽었을 것입니다.
임보 선생님!
기원전 278년 음력 5월 5일에 투신자살한 굴원은 울분을 말로써만 터뜨리지 않고 시를 썼기에 2280년의 세월이 흐른 현세의 저와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굴원은 그냥 시를 쓴 것이 아니라 한 글자 한 글자 심혈을 기울여 썼기에 그 긴 세월 동안 잊혀지지 않고 ‘시인’이었습니다. 김수영의 말마따나 시는 온몸으로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시대에 오히려 시는 더 쉽게 씌어지고 더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만 심금을 울리는 명작과의 만남은 얼마나 드문 일입니까. 매월 매 계절 문예지의 범람 속에서 저 역시도 형편없는 시를 발표하면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종이가 아깝지 않은 시를 저는 언제쯤이나 쓸 수 있을까요.
저는 올 3월에 백 년 후에 읽고 싶은 백 편의 시라는 시 해설서를 냈습니다. 그런 제목으로 책을 내면서 백 년 후에 남을 이승하의 시는 단 한 편도 없으리라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얼마나 느꼈는지 모릅니다.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詩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한 윤동주의 「쉽게 씨워진 詩」가 요즘 들어 더욱 좋아지고,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선생님이 쓰신 7연 137행에 이르는 긴 시 「天竺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시는 평론가도 언급하지 않았고 매스컴에서도 주목하지 않았지요? 그 시의 한 부분을 여기에 적어봅니다. 제가 구태여 ‘뛰어난 시’, ‘훌륭한 시’라는 수사를 붙일 필요가 없을 터인데, 시를 아는 독자라면 분명히 그렇게 느낄 것이기 때문이지요.
눈을 뜨면 세상은 열리고
눈을 감으면 세상은 닫힌다고
그렇게 이르던 자 누구인가
耳目口鼻
저 五蘊의 門이여
그것이 세상을 빚고
그것이 세상을 허무는구나
있고 없음은 밖에 있지 않고
시작과 끝도 다 안에 있거늘
내 무슨 망령의 미혹에 홀려
한 송이 매화에 가슴을 앗기고
한 과의 舍利에 마음을 잃어
천의 밤낮을 그렇게 뒤챘단 말인가
내 무슨 미망의 헛된 꿈에 사로잡혀
부처의 땅을 밟겠다고
西方淨土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천만의 山河를 그렇게 넘었단 말인가.
‘慧超의 길’을 부제로 했으므로 이 시는 往五天竺國傳을 쓴 신라의 승려 혜초(704~787)의 여행길을 시로써 재현해본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혜초는 인도까지는 배로 갔습니다만 도보로 석가모니의 발자취를 찾아 인도 전역을 순례하였고, 카슈미르․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 일대를 역시 걸어서 여행하면서 당나라로 돌아왔습니다. 혜초는 그 기행문에다 다섯 편의 시를 남겼는데, 저는 그 시를 읽고 얼마나 좋았던지 느낀 바를 현대시학의 ‘새로 읽는 권두 고전’ 난에 발표한 적이 있었지요. 혜초는 다섯 편의 시에 고향 떠난 외로움과 여행객의 괴로움을 고스란히 담아놓았기에 제게 있어 그는 승려가 아니라 시인입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뜨겁게 느끼는 시인, 생과 사의 의미를 골똘히 성찰해보는 시인, 인간의 깊이와 우주의 넓이를 헤아릴 줄 아는 시인, 언어의 연금술사이며 세공사인 시인. 굴원도 혜초도 윤동주도 다 참된 ‘시인’이었습니다.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이 시를 썼던 것처럼 저도 지금부터는 명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혼신의 열정으로 시를 써야 하겠습니다.
임보 선생님! 저도 그런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절대로 될 수 없겠지만, 그런 시인이 되고자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출발선상에 서 있는 마라토너처럼 긴장이 되고 앞으로 달려야 될 길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는 날까지 바른 시인, 곧은 시인이고 싶습니다. 이것이 저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월간『牛耳詩』 제171호)
**********************
離騷 [이소] ①근심을 만남 ②초(楚)나라 屈原(굴원)이 지은 부(賦)의 이름. 굴원이 반대파(反對派)의 참소(讖訴)에 의(依)해 조정(朝廷)에서 쫓겨나 임금을 만날 기회(機會)를 잃은 시름을 읊은 서정적(敍情的) 대서사시(大敍事詩). 초사(楚辭)의 기초(基礎)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