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건너 따스한 햇살을 간직한 고을, 광양에 왔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매화의 고장, 봄의 전령지로 불리는 이곳의 햇살은 나른했다. 밤새 내린 눈이 한낮의 볕에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은 것처럼 온통 하얀 비닐하우스가, 백운산에 둘러싸인 읍내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따스한 빛의 고을 광양의 첫 모습은 대강 이러했다.
지도 한 장을 꺼내어 펼쳤다. 금방 눈앞에 펼쳐진 광양 읍내 풍경이 지도에도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읍내 외곽에 있는 광양역을 벗어나려면 일단 벌판의 칼바람은 실컷 마실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멀리 산기슭을 가로지르는 남해고속도로 아래쪽으로 서천과 동천에 둘러싸인 광양 읍내를 걸을 요량인데, 어디를 먼저 가야할지 여간 고민스런 게 아니었다.
일단 광양읍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부터 가기로 했다. 하루 종일 걸을 생각이라면 가장 멀리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중간 중간 기웃거리다 역으로 돌아오는 방식이 맞을 것이다. 일단 백운산 쪽의 외곽은 아예 제쳐두고 읍내 주위를 물색했다. 걸을 수 있는 적당한 거리 중에서 매천 황현 생가와 매천역사공원이 역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
"아, 거기까지 걸어가보지 않아서요. 저 고속도로 너머에 있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걸어서는 힘들지 않을까요. 택시를 타시는 게…."
버스도 없었다. 광양역에서 읍내 방향으로 나가는 버스는 하루에 겨우 다섯 차례, 그마저도 읍내까지만 행선지로 나와 있었고 매천 황현 생가까지 가는 버스는 알 도리가 없었다. 역무원의 말대로 콜택시를 불렀다. 매화의 고장답게 콜택시 센터도 '매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윽고 비닐하우스 사이의 농로 같은 도로를 택시 한 대가 거침없이 달려왔다.
"글쎄요. 한 만 원쯤 나오지 않을까요."
이 정도면 계산 착오다. 기차요금보다 택시요금에 갑절의 돈이 더 들어가다니.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광양역을 떠난 택시는 멀리 읍내를 둘러싼 백운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 사이로 난 농로 같은 도로를 얼마간 달리자 다리 너머로 읍내가 나타났다. 광양불고기거리가 쭉 펼쳐지는 소읍을 서천과 동천이 좌우로 감싸며 흐르고 있었다.
"저기 삼대 불고기가 유명하지 않나요?" "그렇죠. 근데 삼대뿐이겠어요. 지금은 다 유명하고 다 맛있어요. 맛도 비슷하답니다. 그건 그렇고 길가에 나무가 전부 벚나무인디, 다음에 벚꽃 필 때 꼭 한번 오시오. 아니면 가을에 불고기 축제할 때 오시든가요. 이곳 서천에서 분수도 막 쏘아올리고 하여튼 대단합니다요."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니 햇살 넘치는 산자락에 안긴 작은 마을이 나왔다. 능선에 꽂힌 두 기의 철탑만 아니었다면 한없이 포근했을 마을 입구에 매천 황현 선생의 생가와 묘소를 알리는 갈색 푯말이 어지러운 전선줄 사이로 보였다. 다행히 요금은 6900원이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금이 만 원은 나오지 않겠냐며 조심스레 말했던 기사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 매천 황현 생가를 가다
마을 안쪽 골목길로 접어들자 중간쯤에 초가집 한 채가 보였다. 매천 황현 선생(1855~1910)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2002년에 광양시에서 지었다. 문간채를 들어서니 정면 5칸, 측면 3칸의 초가집이다. 건물이라고 해봐야 초가집과 대문채, 뒤뜰의 작은 초정이 전부였다. 그나마 옆에 바로 민가가 붙어 있어 공간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산속에 삼십 년 묻혀 살면서/ 덕을 키웠을 뿐 나무를 키우진 않았다네/ 감나무며 밤나무들은 저절로 자라나서/ 주렁주렁 가을 열매가 가득 열린다네
조선의 마지막 의로운 선비 매천 황현. 이건창·김택영과 더불어 '한말3재'로 불렸고, 문장가이자 시인·역사가로서 말기적 증세에 허덕이는 조선왕조를 통렬히 비판했던 꿋꿋한 선비, 1910년 한일강제병합 소식에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한 애국지사, 매천 황현 선생을 광양에서 제일 먼저 뵙기로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광양 땅을 밟는 여행자에게 꼭 거쳐야 하는 일종의 신고식인 셈이었다.
글을 아는 이,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안채 마루 벽에는 그의 <절명시>와 함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검게 칠한 목판에 붉게 새긴 글씨를 보니 절로 숙연해진다. "글을 아는 이,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라는 대목에 이르면 당시 그의 고뇌와 결기가 심장을 후벼 판다. 검소하지만 단아한 그의 초상에는 고고한 선비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매천 선생은 황희 정승의 15대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시문에 능하여 천재로 불렸다. 29세(고종 25, 1883년)에 특설보거과에 급제, 34세(1888년)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조정의 부패를 안타까이 여겨 낙향했다. 세속의 미련을 버린 매천은 서재 구안실을 마련하고 이후 구례로 옮겨가 호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진양성과 학문에 몰두했다.
1910년 8월, 나라를 잃자 망국의 한을 닮은 <절명시> 4수와 자제들에게 <유자제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몇 번이나 죽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대목에선 그의 인간적인 고뇌가 묻어나고 "글을 아는 이,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다"는 대목에 이르면 절로 숙연해진다. 생의 끝이 '윤곡'처럼 자결할 뿐, '진동'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는 자신이 못내 부끄럽다는 지조 높은 선비의 자책에선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는 죽을 마음이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 왔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지고 죽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아니한가" 하는 말로 장렬한 삶을 마친 우국지사, 문·사·철을 한 몸에 갖추고 현실을 직시하고 풍자한 문장가, 당대를 생생하고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가, 나라의 운명을 따라 당당하게 목숨을 던진 지조 높은 선비.
그의 고결한 삶은 지식인의 본분이 무엇이며, 지식인의 위엄은 어떠해야 하며, 지식인은 무엇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지식인이 가야할 길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의 비장한 <절명시> 한 구절을 보자.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사라졌구나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을 돌이켜보니 글을 아는 이,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생가에 들어섰을 때 안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느닷없이 사람이 나와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문화해설사였다. 주말에만 광양시 문화해설사들이 번갈아 근무한다고 했다.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매천 황현 선생과 망덕포구의 윤동주에 대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이 여겼다. 섬돌의 고무신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더니 옆집 할머니 신발이란다. 황현 선생의 후손인데 생가를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을 나와 묘소로 향했다. 골목 끝에 있는 우물에서 다시 마을을 돌아다보았다. 백운산의 문덕봉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예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인물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오던 서석마을은 바람 한 점 없이 따스했다.
묘소와 사당이 있는 매천역사공원은 말끔히 단장되어 있었다. 선생은 그가 태어난 백운산 문덕봉 아래의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묘소 앞으로 붓과 책의 형상에 새긴 그의 일대기가 눈에 띄었다. 사당 못 미처 언덕에는 문병란 시인이 쓴 시비가 있다. 한참이나 정자에 우두커니 앉아 시대정신과 지식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길은 더디고 더뎠다. 매천 황현 선생 묘소에서 3km 남짓 광양 읍내까지 내처 걸었더니 어느덧 장도박물관에 이르렀다. 선비들에게 혹은 여인들에게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장도를 이곳 절의의 고장 광양에서 만난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다.
"딸랑딸랑!"
박물관 문을 열자 방울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 소리를 듣고 안에서 여자가 나왔다. 잠시 관람 동선을 설명하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졌다. 깔끔한 실내공간에다 이젤을 받침대삼아 액자에 고이 넣어둔 장도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다. 얼핏 봐도 대단히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모두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박용기 장도장과 보유자 박종군(인간문화재)의 작품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장도의 칼날에는 "일편심"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브랜드디자인으로도 이미 개발돼 있었다. 흔히 장도는 여자들이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자결용으로 주로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남녀 모두가 호신용과 장신구 등으로 몸에 지니고 다녔다. 혹은 장도로 과일을 깎기도 하고 버들가지를 꺾어 버들피리를 다듬는 등 실생활에 널리 이용되는 문방구로써, 예물용·신분상징의 구실도 해왔다.
'장도(粧刀)'는 흔히 '칼집이 있는 칼'을 말한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하여 주머니칼을 뜻하는 '낭도', 허리춤에 차거나 옷고름에 찬다 하여 '패도'라고도 했다. 이러한 장도를 만드는 사람을 '장도장'이라 했다. 장도는 삼국시대부터 장식적인 칼을 만들었던 것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로 사절을 보낼 때 예단물목 안에 포함됐을 정도로 당시의 장도는 그 가치와 명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장도 하면 흔히 '은장도'를 많이 떠올리게 된다. 길이는 한 뼘 가량, 은으로 장식되어 노리개와 함께 옛 여인네들이 늘 품에 매달았던 칼로 소중한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마음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사랑에 대한 변하는 않을 굳은 의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선비의 기개가 작은 칼에 오롯이 담긴 것이다.
장도를 보고 있노라면 칼이라는 생각, 날카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 빼어난 아름다운 예술품은 보는 이의 마음을 쉽게 빼앗아 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장도는 주로 금·은·옥 등의 귀금속과 보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칼집과 손잡이에도 섬세한 세공을 하여 단순한 칼 이상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남자의 장도에는 문구와 산수·운학·박쥐·용 등을 새겼고, 여자의 장도에는 꽃나무·국화·매화·난 등을 새겼다. 한 뼘 남짓한 작은 칼에 눈부신 아름다움과 찬 서리처럼 매섭고 버선 끝처럼 날카로운 정신의 고결함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그래서 '장도장'은 칼에 숭고한 정신을 입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장도장이 두드리는 손끝에 장도에 담긴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장도박물관에서 시장 방향으로 길을 더듬고 있는데 눈앞에 육교가 나타났다. 내가 보기엔 육교라기보다는 마치 공상과학영화에 나올 법한, 사방에 긴 다리를 쭉 뻗고 있는 거대한 게처럼 보였다. 육교 층계를 오르니 더욱 가관, 둥근 원을 크게 그리며 앞뒤 좌우 방향으로 공중에서 여러 갈래로 정신없이 나뉜 길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미로 같은, 형이상학적인 육교는 나라 안에서도 찾기 힘들 듯하다.
저만치 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하고 육교를 내려오니 난간 아래로 듬성듬성 나무가 심겨진 제법 너른 공간과 낡은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서울대학교 남부학술림임을 알아차렸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백운산에 8021ha 규모의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의 부속기관인 남부연습림이 조성됐다. 최근 광양시로의 환수문제와 국립공원 지정문제로 떠들썩하다.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제국대학 남부연습림 안에 지은 직원관사는 현재 등록문화재 제223호로 지정돼 있다.
걸을수록 거리는 깔끔해졌다. 읍내 시가지로 들어선 것이다. 간판들이 하나같이 앙증맞다. 근데 여기도 저기도 다 똑같은 콘셉트다. 역시 관에서 주도한 간판인 모양이다. 간판 보느라 고개를 오른편으로 아예 젖힌 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이는가 싶더니 너른 공터가 나타났다. 순간 몇 십 년 전으로 흘러간 듯, 오래된 건물 한 채가 햇빛 아래로 길게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기름을 잔뜩 바른 윤기 나는 머리에 높은 옷깃의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양복을 깔끔히 걸친 군청 직원이 뛰어나오고, 돌출된 현관 포치에는 사각의 검은 승용차에서 군수가 근엄하게 내리는 장면이 언뜻언뜻 떠오르는 것이 마치 흑백필름이 눈앞에서 돌아가는 듯하다.
시간을 더듬어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는 옛 군청의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이 있었고, 소화 17년 8월 25일이라고 적힌 기공기념비가 유리관에 보관돼 있었다. 소화 17년이라면 1942년이니 이때 처음 건립됐다고 볼 수 있겠다. 원래 조선시대 육방들이 업무를 보던 작청이 있었던 곳에 광양군청사가 지어진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불이 나서 1951년 개보수를 하고 1968년 2층으로 증축하여 최근까지 읍사무소로 쓰이다 광양역사문화관으로 현재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외관과는 달리 안은 최신식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건 전시실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이다. 원래의 것(국보 제103호, 국립광주박물관)이 아님에도 국보의 위용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1951년 개보수 당시의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천장에서도 오랜 연륜이 느껴진다.
광양하면 으레 도선국사와 옥룡사지를 먼저 떠올리게 마련인데, 조금 관심 있는 이들은 불암산성과 중흥산성을, 매천 황현 선생과 호남 3걸로 불린 신재 최산두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이곳에선 패널과 설치물을 통해 광양의 유적과 역사, 관광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 역사문화관 내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원래의 것은 국보 제103호로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
전시실 끝 어두운 공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비록 모형 건물이지만 시인 윤동주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설치물, 윤동주 유고를 보존했던 망덕포구의 정병욱 가옥이었다. 이곳의 수고로움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시인 윤동주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기억 못하는 엄청난 불행을 맞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설전시실에서 옆으로 가면 기획전시실이 있다. 이곳에선 충·절·의를 자랑하는 광양을 그대로 담은 작품, 장도와 궁시(활과 화살)를 전시하고 있었다. 장도는 인근의 장도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궁시와 함께 특별전시를 하고 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박종군 장도장과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12호 김기 궁시장의 작품 2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아까 광양역의 지하보도에서도 광양의 여러 특산품과 함께 장도와 궁시를 전시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 건물을 한 바퀴 돌았다. 일제 강점기의 전형적인 관공서 건물인 역사문화관은 1942년부터 2007년(1942-1980년 광양군 청사, 1981-2007년에는 광양읍사무소)까지 65년 동안 광양군청과 광양읍사무소 등으로 쓰이면서 광양의 행정중심지 역할을 한 역사적인 공간이다.
일제가 남긴 잔재라는 단순한 인식보다는 우리가 영구히 돌이켜보아야 하는 반성의 공간으로 남겨야 한다는 걸,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한 부분임을 다시금 새기게 된다. 공간구성이 단순한 옛 광양군(광양읍사무소) 청사는 대지 2600㎡에 건물면적 700㎡, 'ㄴ' 형태의 벽돌조 단층 건물로 2009년 10월 등록문화재 제444호로 지정됐다.
잠시 다리쉼을 하고 곧장 시장으로 향했다. 마침 자전거를 탄 노인 두 분을 만났다. 오일장 가는 길을 물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한 노인은 곧장 가라고 했고 옆에 있던 검은 점퍼 차림의 노인은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며 왼편으로 돌아가서 골목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했다.
사이좋게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오던 두 노인은 결국 시장가는 길을 놓고 서로 언성을 높이게 됐다. 당황한 여행자가 급히 고맙다고 넙죽 인사를 하자 노인 두 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전거에 오르더니 주거니 받거니 서로 말을 건넨다. 얼추 보아도 이 두 노인의 관계는 아주 오랜 친구 사이임을 알 수 있었다.
오일장을 찾은 건, 매천 생가에서 만난 문화해설사가 오늘이 마침 광양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며 오후에 가도 보통 장과는 달리 북적댄다며 꼭 가보길 권해서였다. 시장 초입은 여느 오일장과 엇비슷했다. 길 양옆으로 길게 늘어진 좌판 하며, 연신 고함을 질러대는 장꾼들 하며, 양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이리저리 사람들 틈을 헤집는 아주머니 하며, 입에 주전부리를 물고 눈을 두리번거리는 아이 하며, 찾는 손님이 없자 하릴없이 분주히 손을 놀리는 난전의 상인들 하며, 거나하게 취해 눈이 반쯤 풀린 사내들 하며.
아주 오래된 풍경도 보인다. 낡은 간판으로 보아 이곳 시장거리도 꽤나 긴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광양 오일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2011년에 폐역이 된 광양역사에서 이곳까지 장터가 길게 이어졌다가 지금은 이곳에서만 열린다. 기차가 떠난 옛 광양역사엔 한때 오일장이 열렸음을 알리는 낡은 간판이 지금도 서 있다.
진상까지 했다는 광양의 명물 '김'은 간 데 없고...
광양 오일장을 돌다 보면 눈에 띄는 것 하나. 시장 한쪽 골목을 따라 길게 늘어선 김을 파는 점포들이다. 사실 광양은 오늘날 우리가 먹는 김을 처음 양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망덕포구 인근 태인에 가면 김 시식지가 있다. 김 시식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김 양식법을 개발한 김여익 공을 기리는 곳으로 '김'이라는 명칭도 김여익 공의 성씨를 본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 광양 읍내시장에선 김을 파는 상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즉석에서 김을 구워 파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잘 말린 김을 기계에 넣기만 하면 번지르르하게 윤이 나는 김으로 나온다.
근데 아쉽게도 광양에서 나는 김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궁중에 진상까지 했다는 광양 김, 광양은 한때 전국 최대의 김 생산지로 이름을 날렸지만 광양 제철소가 들어서고 태인도가 육지화 되면서 사라졌다. 지금은 멀리 충남 서천, 전북 부안, 전남 고흥, 완도, 해남, 강진 등지에서 김이 온단다. 이곳 상인들은 대개 광주 위판장에서 김을 도매로 사온다고 했다.
▲ 진상까지 했다는 광양의 명물 '김'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지역 김들이 차지하고 있다
1일과 6일에 열리는 광양 오일장의 중심은 거대한 철제 구조를 하고 있는 운동장 크기만 한 건물이다. 이쯤 되면 오일장이 아니라 무슨 대단위 도매시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정말 시쳇말로 시장 한번 징하고 허벌나게 크구먼.
그래도 장터하면 역시 국밥과 국수다. 이곳에도 너른 장터 한쪽으로 장터국밥과 장터국수, 어묵 등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몸도 녹일 겸 그중 한곳에 들어갔더니 이미 반쯤 술이 된 중년의 사내가 막걸리 한 잔을 권했다. 예전 같으면 두말없이 잔을 받았겠지만 술을 끊었으니 참는 수밖에. 어묵과 국물로 몸을 녹이고 나오니 시장 건물 저편으로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뻥'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가게 안쪽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뻥튀기 가게였다. 할아버지는 열심히 풍로를 돌리고 있고 대신 할머니가 뻥튀기 기사로 나섰다. 갓 튀겨 낸 쌀, 옥수수, 떡국 조각이 포대 가득 담겼고 여기저기 산탄처럼 곡식 알갱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다시 통에다 다음 곡물을 넣었다. 장날이면 볼 수 있는 이 풍경이 정겹기만 하다.
'뻥' 소리 사이사이로 이번에는 '땅 땅 땅' 하는 소리가 울린다. 대장간에서 연장 치는 소리다. 조금은 현대화 된 대장간이지만 그 추억만큼은 오래됐다. 장이 워낙 커서 둘러보는 데만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오일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광양읍내시장.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광양 여행의 참 재미를 느끼지 못할 뻔했다.
▲ 유당공원의 숲은 1528년 광양 현감 박세후가 동남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기 위해 조성한 방풍림이다.
육교를 건너 유당공원으로 향했다. 유당공원의 숲은 1528년 광양 현감 박세후가 동남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기 위해 조성한 방풍림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남쪽이 허하다 하여 이곳에 연못을 파고, 기를 보하기 위해 수양버들과 이팝나무, 팽나무를 함께 심었다고 전한다. 연못 주위로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이 장관이다. 천연기념물 제235호인 이팝나무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중 4번째로 크단다. 유당공원이란 이름은 못과 수양버들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근대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유당공원 골목길에서 옛 광양역으로 갔다. 철로를 다 걷어낸 옛 역사에는 빈 바람만 남았다. 그냥 광양을 떠나기가 아쉬워 잠시 그 유명한 광양불고기특화거리에 들르기로 했다. 쇠고기를 구리 석쇠에 놓아 참숯불에 구워먹는 이 재래식 고기구이는 이제 광양이라는 이름에 늘 따라붙는다.
1999년부터는 아예 광양불고기 이름으로 축제도 열린다. 예부터 "天下一味 馬老火炙"(馬老: 광양의 옛 지명)이라 했거늘. 광양에 와서 숯불구이를 먹어야만 광양을 다녀갔다는 말이 된다고 했으나 아쉽게도 기차시간이 다 되어 서천을 따라 불고기 거리를 걷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나의 광양 여행도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