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김문호
갈매기는 천지창조의 돌연변이 인지도 모른다. 가도 가도 바위섬 하나 없는 태평양 일부변경선 언저리의 갈매기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창세기 몇째 날, 새들에게 배정된 영역은 육지의 숲과 하늘이었지 바다와 창공은 아니었으리라.
세상 어디에도 둥지라곤 없는 새, 해면에서 잠을 자고 바다에서 살다가 바다로 돌아가는 새. 일망무제의 바다와 무한 창공을 자유 자재하는 갈매기의 유영은 말 그대로 완벽한 자유의 표상이다. 구름 속에 들었는가 하면 눈발처럼 휘날리고, 까마득한 창공에 깃발처럼 떴는가 싶으면 바람같이 해면을 내달린다. 그의 삶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다. 생명을 위협할 맹조류나 침입자도 없거니와 생존을 경쟁할 다른 종족들도 없다. 수평선으로 테두리 쳐진 거대한 궁륭은 그의 독차지다. 바다와 하늘은 그를 위한 축복이다.
갈매기의 원조(元祖)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필경 육지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바다로 이주해 온 것이리라. 숲 속의 뭇 새들 중에서 모험심과 날갯죽지의 근력이 왕성한 별종이었을 게다. 가시넝쿨과 짐승들로 번잡한 그곳보다는 광활하여 자유로운 신천지를 동경했던 선각의 새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역마살의 기질을 타고난 새였을까? 숲에서 강으로, 강을 따라 바다로, 해안을 떠나 대양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체형과 기능이 바다살이에 맞게 변형돼 갔을 것이다.
사실, 해안지방의 갈매기와 대양의 갈매기는 생김새부터 판이하다. 털빛조차 독수리처럼 검붉은 것이 양 날개의 길이는 어른의 두 팔보다 더 길게 생겼다. 그러면서 물고기보다 날렵한 자맥질, 무한 비상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죽지, 해면에서 잠을 자고 휴식하기 위한 물갈퀴 등의 기능이 보강되어 갔으리라. 장구한 세월 동안 각고의 변혁을 거친 다음에야 바다와 하늘 사이 광대한 공간은 그들만의 신세계였다. 그곳은 자유와 환희의 낙원이었다. 그러나 바다와 하늘 역시 무척이나 변덕스러워서 둘 사이에 평온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하늘이 구름 꽃을 피우면 바다는 태양빛의 명암으로 색조를 배합해 가고, 밤하늘의 별자리는 해면의 풀꽃으로 피어나서 그의 잠자리를 장식한다. 그는 첫 태양의 감격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섬광이 바다와 하늘을 선홍빛으로 흥건히 물들이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새 아침을 호흡한다.
그가 마시는 산소는 생성된 이래 어느 누구의 폐부도 거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것이다. 태양이 고도를 높이면서 수평선이 가지런해지면 창공을 날고 바다를 자맥질한다. 쪽빛 바닷속으로 살처럼 꽂혔다가 은빛 퍼덕이는 물고기 한 마리를 부리에 비껴 물고 시뻘건 노을 속으로 수직 솟구치는 모습은 장쾌한 생명의 찬란한 환희이다.
하늘이 먹장구름에 광풍을 몰아쳐 오면 바다는 물굽이를 솟구치며 대응한다. 잔잔하던 해면은 파도 준령들의 각축장으로 돌변하고 갈매기의 삶에는 원초적인 고난이 드리워진다. 언제나 한 끼 치의 양식이었던 어족들은 물 속 깊이 숨어 버리고 광란의 해면은 휴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파돗살에 나뒹구는 잔고기 하나 이삭 주우려고. 칼날처럼 비산하는 포말의 계곡을 달려들고 물러서는 갈매기의 생존이 긴박해진다.
생명의 아픔은 주린 창자와 지친 죽지로 고여 든다. 그래도 날갯짓을 멈출 수가 없다. 자꾸 빗물에 젖는 몸통마저 중력의 부담을 가중시키지만 쉼 없이 날아야 한다. 휴식의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공간보다 막막한 시간을 날갯죽지로 버텨야 한다. 바다와 하늘의 변덕 또한 그리 오래 가지는 않으리라는 가냘픈 믿음만을 간직한 채…, 그것은 바다살이에서 체득한 유일의 생존 지혜였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사멸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사투의 과정이었다. 어쩌다가 지나치는 상선이라도 한 척 만나게 되면 사막의 오아시스보다 더 반갑다. 가랑잎처럼 나부끼는 신체일망정 지친 날개를 쉬어 가기에 손색이 없었고, 선원들의 음식물 찌꺼기가 위장에 맞진 않아도 연명에는 긴요한 것이었다.
황천항해(荒天航海) 중인 배의 톱 브릿지(조타실 지붕 위의 공간)는 갈매기들의 보금자리로 변한다. 빈틈없이 모여 앉아 끼룩끼룩 울면서 암흑과 풍랑을 지새운다. 객지의 추녀 밑을 깃드는 나그네 같다. 종횡으로 뒹굴면서 불면을 몸부림치는 선원들의 둥지가 갈매기의 안식처로 되기도 하는 생존 사슬의 섭리가 처절하고 오묘하기 짝이 없다.
겨울바다의 맹추위 또한 힘겨운 고난이다. 유빙이 빈번한 북태평양 대권항로(大圈航路:지구표면 상의 두 지점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선, 평면 지도에는 포물 곡선으로 나타남) 상의 갈매기들은 송곳처럼 찔러오는 한파에 생명을 전율한다. 항행선(航行船)의 연돌을 맴돌면서 온기를 주워 모으는 발갛게 시린 발이 애처롭다.
유리창 너머로 바짝 다가와서 조타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는 갈매기의 눈망울이 일출의 섬광에 불그스레 물든다. 마치 술을 마신 방랑자의 눈빛 같다. 핏줄 아니면 유전자에나 남아 있을 옛 고향마을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안개가 자욱한 계곡, 햇살이 솔가지 사이로 부서져 내리면 뭇 새들이 소란스럽고 웅성이는 인기척 위로 종탑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고향마을의 아침을... .
겨울바다의 일출은 너무나 단조롭고 혹독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복잡한 숲속을 요령 있게 날아다닐 수도 없거니와 그의 자랑스러운 물갈퀴로는 가시 돋은 나뭇가지를 잡고 앉지도 못한다. 더구나 그의 위장은 이제 곡식 낱알이나 풀벌레를 소화하지 못한다.
그는 바다에서 일생을 마감한다. 폭풍의 날이 아니면 어느 평온한 날, 쇠잔해진 체력으로 물고기를 사냥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더 이상은 날 수 없는 순간의 자연 낙하가 바로 생명의 마감이 되는 것이다. 공격하는 갈매기는 물고기들의 공포였지만 낙과처럼 떨어지는 시신이야 그들의 성찬이 된다. 갈매기는 죽어서 물고기가 되고 물고기는 어느 날 갈매기로 환생하는 양도윤회(兩道輪回)의 현장이다.
항해 중인 상선의 후미진 장소가 갈매기의 임종의 터가 되기도 한다. 갑판 위에 적재된 화물 틈새나 한적한 구석에서 꼬박꼬박 졸던 갈매기는 이내 툭 쓰러진다. 물갈퀴가 오므라든 두 다리를 가지런히 뻗은 채 조용히 눈을 감은 모습이야 지극히 평온하다. 지나치던 선원이 시신을 바다에 수장 지낸다. 그러면서 중얼거린다.
“뱃놈의 사주(四柱), 갈매기 팔자(八字).” 젊었던 날, 설익은 객기와 호기심에 끌려서 바다로 나왔다가 항로의 풍파에 속절없이 늙어버린 노(老) 선원의 넋두리다.
항해는 언제나 약간의 흥분과 대부분의 고난이었다. 그러나 그곳 바다와 하늘은 언제나 저만치 서 태초의 모습 그대로 구름 꽃을 피우고 색조를 배합해 간다. 얄밉도록 가지런한 수평선에 맞붙어서 무심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