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옛 하이텔 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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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속의...김호,김정남
오늘은 70년대 초중반에 우리 대표팀 수비의 대명사였던 김호, 김정남 두 콤
비에 대한 한담을 올려볼까 합니다.
70년대가 시작되면서, 우리 축구는 동남아에서 최강의 위치를 회복하기에 이
른다. 당시 동남아시아의 버어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등과 우리는 매우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지금 우리팀만 아는 분들은 이 무신 망발이냐고 할
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실력이 그 정도 였다.
이 당시만해도 상기의 국가들은 말레이지아의 메르데카배 축구대회를 중심으
로,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 대회(?), 신설된 태국의 킹스컵으로 각기 자국
의 축구진흥에 힘을 쏟을때였다.
이에 우리도 당시 축구협회장인 장덕진씨가 국제 축구대회를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박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 일명 박스컵(PARK'S CUP)이었다.
우리의 위대하고 위대하고 또 위대하시어 이가 갈릴 정도로 위대하신 박정희
가 하사한 사발 따먹기 국제대회였다. 주로 동남아시아의 태국, 버어마,말련,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캄보디아, 라오스등이 참가했고, 일본은 시건방을 떨
어 어쩌다 가물에 콩나듯이 참가했다가 우리헌테 박살이나곤했다.
장덕진씨는 박통의 조카사위인가 이다. 막강 빽이었다. 이 또한 지금은 우리
축구에 치명적 원죄가 되었지만 말이다.
이 박스컵을 개최하여 아시아 축구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이름의 박스컵은 그 이후 정치적 격랑에
휘몰려 전두환이때는 대통령배가 되는등 이름이 몇번을 바뀌다가 지금은 코
리아 컵으로 정착되었다.
이당시 동남아는 버어마가 가장 강한팀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선수들 이
름이 몽몽틴, 몽에몽, 몽윈몽...등 열한명 죄다 "몽"씨로 시작되어 무식했던
당시 나는 이나라는 몽씨가 이리도 많나고 생각했다. 현대의 왕회장인 정주영
씨가 자식을 버어마에도 잔뜩 생산해 낸거 아닌가 싶다.
정몽준의 형제? 몬 씨나락 까먹는 소리리여~
알고보니, 총각들 한테는 이름 앞에 '몽'자를 붙인데나 어쩐대나..
이중에서 몽 윈몽, 즉 총각 윈몽은 정말 대단한 선수였다. 우리의 회택이하고
쌍벽을 이룰 정도 였으니... 서울 운동장(현 동대문)에서 본 그의 플레이에
대한 느낌은 "칼날" "독사" 그 자체였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매서웠다.
그 다음으로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말레이지아....
뮌헨 올림픽 예선에서 우리에게 통한의 패배를 안겨주었던, 중1인었던 나로
하여금, 축구보고 운다고 놀릴까봐 소리도 못내고, 방바닥에 엎드려 한시간
은 족히 통한의 눈물, 콧물을 뿌리게 했던 팀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
운 일이지만... 흐~~~
아무르감 골키퍼, 소친온, 찬드란, 스코르 살레, 목타르 다하리, 그리고...
우리의 3만 관중을 침묵으로 빠뜨렸던 공격수 '사에드 아마드'...
우리가 무대뽀, 맛대가리 없는 축구였다면 이 팀은 그야말로 축구의 맛을 알
고하는 팀 이었다.
엄청 슬로템포로 경기를 이끌어, 이 페이스에 우리가 말릴 시점이 되면, 표
범 같은 속도로 템포를 빨리해, 역습 한방에 우리를 녹다운 시키는 식이었으
니까... 그들의 슬로 템포를 보고있노라면 졸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슬로슬로
하다가 퀵! 하면... 가슴이 철~렁할 지경이었다.
우리팀 서른 번 슈팅에 무득점, 말레이지아는 한번 슛팅에 1득점, 게임 끝...
이러고 나면 우리 언론의 논조는 지금과 동일하다. "문전처리 미숙.. 죽여라!"
미치고 환장하게 만드는 팀... 지금도 노란색 유니폼을 보면 나는 기분이 나
쁘다.
그 다음, 인도네시아...
그야말로 숏다리의 무서움을 알리는 팀이었다.
이스와디, 스짚토, ... 음... 생각이 안나는군... 160이 채안되는 공격수들
이 빠르기는 12.F를 전후로 하니... 오토바이 그 자체였다.
강력한 윙 플레이로 우리를 참으로 힘들게 했던 팀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팀을 제압하기 위해, 기존의 양지팀( 요즘 안기부 건물을 비출때,
사훈 같이 나오는 문장이 있지요.."음지에서... 양지를...". 여기에서 양지
란 이름을 딴 것 같습니다.)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2원화된 상비군 체제
로 돌입한다. 소속팀을 도외시하고 주야장창 합숙 훈련에 돌입하는 방식으
로, 당시에는 상당한 재미를 보았는데, 지금은 이것이 축구발전의 걸림돌이
되었지요. 이름하여 1진인 청룡, 2진인 백호. 하여튼 동물이름을 엄청 선호
하는 민족이라니깐...
이 청룡팀은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이태리의 가데나치오를 능가하는 수비력
(!)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청룡팀의 무실점 우승을 가능케 했으니.....
하여튼 우리팀이 동남아 팀과 대전시 1점을 넣으면 우리는... 승리를 거의
거머 쥐었다.
2점,3점을 넣으면... 시셋말로 "아저씨! (끝)났어요!!" 이었다.
그 막강 수비력의 핵심에 김정남과 김호가 있었다.
4-2-4 포메이션에서 수비 4인중 가운데 두사람이 김호 김정남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론, 이 김호 김정남 콤비가 사상 최강의 콤비가 아니었을까 한
다. 김정남의 자리를 김호곤(현 연세대 감독)이 이어 받았나 할거다 아마..
그뒤를 이어 우리의 히프(!) 조영증과 박성화 콤비가 있었는데, 내 기억엔 김
호,김정남 콤비가 더 강력하게 이미지 되어있다. (조영증은 차후에 시간이 나
면 기술할것임. 별명 히프! )
다 아시다 시피 김정남은 얼마전까지 축협 전무로 있었다. 예스 맨이라고 축
구인들과 팬들에게 엄청 욕을 먹었는데, 기실 그는 성격 자체가 거칠지가 않
았고 부대끼는 것이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것 같다.
외환은행에서 선수생활을 마쳤는데, 당시 무슨 대회에선가 우승을 차지해,
감독을 행가래 치는데, 뒤에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김정남의 모습은 정
말 여성스러울 정도였다.
지금으로 치면 스위퍼 역할을 했고, 간간히 그의 탁월한 개인기로 공격 일선
까지 치고 올라오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유연성이 뛰
어나고, 침착하고 냉정한 수비력, 매우 영리한 두뇌 플레이어로 기억되며
우리팀의 최후방을 담당했다. 대표팀에서 등번호 5번이었는데, 대표팀 주장
을 상당히 오래 했었다.
그는 고려대 재학중엔 아마 공격수였다지요 아마... (확실하지가 않네요..)
그런 연고로 개인기가 출중했다. 현 수원 삼성 감독인 김호가 상대방 스트라
이커를 타이트하게 마크하여 무력화 시키고, 그래도 흐르는 공은 김정남이
다 요리 했다. 그러고도 흘르는 공은 우리의 골키퍼 이세연이 덤블링으로 다
처리했다. 그냥 공만 차낸것이 아니라 그의 출중한 개인기를 바탕으로
안정되게 공을 처리한 선수로 기억 한다. 그의 두 동생 김강남, 성남 쌍동이
형제가 그의 뒤를 이어 국가 대표팀이었고 막내 동생인 김경남(?) 역시 축구
선수였다. 형제중 김정남의 형 한분만 빼고 4형제가 축구 선수였고 그 중 3
명이 대표 선수였을 정도로 축구에 미친(죄숑!) 집안인데, 큰 형님도 조기
축구팀 선수였대나?... FAMILY가 ALL SOCCER PLAYER이라는 말임. 하하..
부천SK의 전신인 유공 코끼리팀에서 감독을 하면서 우승도 했었고, 대표팀
코치, 감독도 역임하고, 86년 멕시코 월드컵을 통과한 유능한 지도자였다.
김호는 그 당시 그 실력에 대학을 나오지 않은 아주 희귀한 존재였다.
동래고를 나오고 해병대인가(?)를 거쳐 한일은행에서 축구선수생활을 한것으
로 기억한다. 그는 상대방 스트라이커를 아주 확실하게 마크하는 수비수였다.
당시엔 신장도 크고, 당당한 몸매 였다. 그는 동래고, 한일은행에서 지도자
생활때도 그랬지만 축구만 아는 사람인것 같다. 외골수라고나 할까?
한일은행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때, 그의 공간 축구는 아주 선풍을 일으켰었
다. 이론적면에 투철하고, 틈만 나면 유럽등 선진 축구를 접하곤 했었다.
그런 치열함이, 학연이 중요한 축구계에서 살아 남은 요인이었던것 같다.
다 아시다 시피, 미국 월드컵 감독이었지요.
지금... 한분은 중국 프로팀 감독, 한분은 수원팀 감독... 두분다 필드에서
뛰고 있군요. 모쪼록 좋은 성적들을 내시기를...
끝으로 ...
그 당시 최고 권위있는 축구대회는 말레이지아의 메르데카배였는데, 이를 라
디오로 중계하는데, KBS에서 이광재라는 아나운서가 주로 담당했었다.
이분은 상당히 흥분된 목소리로 중계를 하는 특성이 있는데,
주로 시작은 이런 말로 시작했다.
"고국에 계시는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상하(항상 여름이란 뜻임)
의 나라 말레이지아의 수도 쿠알라룸프르, 메르데카 경기장입니다! "
헌데 이게 입에 붙어서인지, 국내에서 열리는 경기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나오
는 말이... "고국에 계시는 동포 여러분... " 이었다.
이광재 아나운서는 지금 미국으로 이민갔는데, 거기서도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만, 희미한 기억속의 선수들... 잡담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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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 속의.. 김재한
김재한 선수...
70년대 초(72년? 3년)부터 중반(75,6,7년?)까지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걸
로 기억한다. 70년대 전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축구선수 공격수 중에
신장이 170센티를 넘어가면 장신(!)에 속할 때였다. 농구선수들이 180센
티 내외 였고 188정도만 되면 장신에 속했을 때였으니까. 현재 고대 농
구감독 박한씨가 190센티였던 걸로 아는데, 그 당시 엄청난 장신으로,
사람같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해도 그리 큰 뻥은 아닐것이다. 육척
장신이던 시절.. 근근이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고 사는 사람들이 태반인
세월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이라 신장이 클 리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
유였다고 보며, 축구에서 공격수라하면 몸이 잽싸고, 다부진 것이 자연
스러웠을 때인지라 더욱 그리했던 것 같다. 그런 축구환경에서 김재한의
등장은 참으로 황당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 축구에서 그 이후 장신도 축구를 잘 할 수 있다는, 인식의 지
평을 넓혀놓은 장본인이 아닐까한다. 그 뒤에는 물론 민병대라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슴을 나는 기억한다.
지금 부터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1971년 늦여름, 초가을로 기억 된다. 당시 무슨 실업축구 선수권대회 결
승전 이었던 것 같다. 내가 입학한 중학교가 효창구장 근처인지라, 방과
후나 토요일,일요일의 경기는 매우 자주 구경갔던 걸로 기억한다.
입장료? 돈? 그런것이 있을리가 있었겠나. 그돈이면 뻔데기 사먹는게 더
효과적이었겠지.. 흐~ 나의 경기장 진입은 개찰구가 아니라 개찰담(!)이
주로였었다. 지금도 효창구장을 정문을 바라보고, 우측 담을 따라 난 길
을 따라가다, 전광판이 설치된 담쯤에 오게되면, 화장실이 하나있다. 여
기가 나의 1차 입장담이다. 화장실 위로 기어 올라가서 담치기..
이부근에는 김구 선생님 묘소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지금도 그 근처를
가면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김구 선생님과 의열단원들의 묘가 있는 곳.
민족의 정기가 있는 곳.. 효창공원.. 그곳에.. 축구의 메카가 있다..
거기서 조금 더 돌아가면 테니스장이 있는 데, 과거에는 여기의 담이 참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왕모래로 만든 벽돌이 낡아 떨어져가던 그 담이
나의 2차입장 담(!)이었다. 잘못하면.. 시멘트에 긁힌 팔꿈치에 피멍이..
하여튼 입장을 했다.
본부석쪽 스탠드에서 앉아서 당시 내가 좋아하는 정강지 선수가 있는 신
탁은(현 서울은행전신)과 어느팀(주택은?)의 경기를 보고있었다. 그런데
한사람 건너 윗줄 옆에 키가 엄청 큰 아저씨가 앉아 경기를 보면서 갖은
욕설을 다 토해내는 것이었다. "ssi바알노므샤끼들.. 개샤끼들... 잘처먹
고 저 것밖에는 못뛰냐..ssi발..." 말끝마다 ㅆ, ㅈ, ㄱ 욕이 붙었다. 정
말 가련한 한 마리 노루 같은 이 중학생은 경기보랴 아저씨 욕에 주눅이
들랴..
그러나 어찌하랴... 고기가 명당인지라함부로 자리를 옮기지도 못하니..
그곳에는 멋진 카우보이 벨트에 당시에는 엄청 귀한 고급 청바지를 입은
박병주(현 안양감독) 선수도 있었고, 숏다리 박수일선수도 있었고... 하
여튼 그 키가 엄청 큰 아저씨는 욕을 계속 해댔다. 그 욕 속에는 한없는
시기심과 질투.. 자기가 갖지 못한 환경을 그네들이 가지고 있는데 대한
욕구와 분노의 분출이 있었으니.. 나는 그 아저씨에 대한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세월이 지나, 그 다음해인가.. 그가 제일모직 소속의 공격
수 김재한 선수임을 알았다. 고향이 대구던가? 하여튼 경상도일 것이다.
김재한. 제일모직 팀의 무명 선수, 그후 얼마안가 해체를 한 그 팀의 선
수였으니, 얼마나 장래가 불안 했었겠는가. 그의 질투심이 담긴 욕지거
리를 이해한 것은 내가 철이 든 후였다. 한이 담긴, 무명선수의 악에 바
친 욕.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주력 기업이었다. 대구에 본사가 있었던
기억. 잔디 구장도 소유했었던 기억. 그러나 삼성은 일모(제일모직의 약
칭)의 축구팀을 해체했다. 나는 그 이후로 삼성을 별로 좋게 안본다. 축
구팀을 해체하다니.. 삼성이 축구를 쭉정이로 취급하는 것은 이 때부터
이리라.. 지금도 삼성 그룹은 골프, 경마, 럭비, 야구등을 그룹 권장 스
포츠로 하고있슴을 나는 알고 있다.. 축구는 삼성제일 정신을 대표할 스
포츠가 아니랜다..
김재한은 그후 그의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주택은행으로 옮기고 나서로
기억한다. 그의 뛰는 모습은 참으로 엉성했다. 그 당시 190이 넘는 사람
은 농구의 한기범 처럼 체중이 별로인, 촛대같은 체형을 하고 순발력이
빵점인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는 균형잡힌 몸매를 자랑했다. 그러나 뛰
는 것은 오리를 연상할 정도로 뒤뚱거렸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위력을
상쇄하지는 못했다. 그의 헤딩은 거짓말 보태서 성공율 100퍼센트 였다.
코너킥한 공은 거의 그의 차지였으며, 걸리면 골이었다. 당연히 관중들
은 그의 기형적 축구 기능에 조소를 보냈다. "와하하... 쟤도 공을 모네..
어쩔씨구리.. 와하하.. 꺽다리.. 웃기는군!" 그러나 그의 악다구는 그런
조롱을 다 감내하고 물리쳤다. 나는 그의 그 오기를 존경한다..
그런 와중에 그는 민병대 국가 대표팀 감독의 전격적 발탁으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는다. 반론도 많았으리라. 축구를 머리로만 하는 선수를 대
표팀에 집어넣어? 이런 미쳤군!!! 머리빼면 시체를? 축구는 발로하는 것
아닌가!
대표팀의 전술은 아주 간결했다. 미들에서 페널티 에리어 중간으로 높게
올려라! 김재한의 머리에 공을 맞춰라! 그리고서는 개때처럼 돌진하라!.
차범근이는 오른쪽 사이드를 질풍처럼 치고올라 무조건 올려라. 김재한의
머리에 맞게... 서른번 올려 하나 성공하면 되는것 아닌가!
이 간결하고 한심한(!) 전술은.. 그러나 숏다리 천국의 아시아에선 돌풍
이었다. 그의 위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강 대표팀의 선수들에게
주눅이 들지않고, 그는 엉성한 오리풍(!)의 발재간을 막무가내로 실천에
옮겼다. 이제는 발로도 골을 넣게 되었다. 그래도 관중들은 그가 발로
골을 넣는 것에 조소를 보냈다. "와하하! 김재한이도 발로 골을 넣네!!"
심지어 아나운서도, 해설자도 그를 희화화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축구에 대한 집념을 꺽지는 못했으니.. 그의 악에바
친 축구인생에 찬사를 보낸다. 아니 나는 그의 불굴에 정신에 박수를 보
낸다. 대표팀에서 막말로 뜨고나서, 인터뷰할 때의 그의 표정과 언동은
오래전에 내가 효창구장 스탠드에서 보아온 그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공
손하고, 수줍음을 타는.. 순박함 그 자체의 모습도 그였슴을 나는 기억
한다. 세월과, 세속적 성취가 사람을 그렇게 성숙하게 만들었을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 70년대 후반부로 들어선가 그는 대표팀에서 용도 폐기된
다.
그러나 그를 분기점으로, 우리 축구에는 장신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있
었다. 김재한에대한 강한 인상은 그 후로 오석재라는 또다른 장신선수로
맥을 이어나갔다. 59년생,곱슬머리, 검은 얼굴, 이국적이지만 곳잘 생긴
외모, 경신고교, 건국대 출신, 188정도이던가.. 오석재는 김재한과 달
리 스피드도 있고, 몸도 훨씬 유연하고, 물론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균형
잡힌 몸매, 드리블, 볼 콘트롤 모두 선배 김재한을 뛰어넘은 수준급이었
다. 그러나 오석재는 허리 디스크로 굴곡많은 축구인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후 할렐루야 팀에서 뛰었던 기억... 음... 또 삼천포로 빠지는군,,,
김재한은 그후 홍콩세미프로로(해봉팀?) 진출을 해서 몇 년간을 뛰고는
다시 주택은행으로 복귀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2류로 시작한 축구인생을 1류로 끝냈다. 뿐만이 아니라 홍콩이지만,
우리보다 앞선 시스템인 홍콩 세미프로의 물도 먹었다. 이 모두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는 그의 불굴의 정신, 투혼의 정신, 끈기가 밑바침이 되었
으리라 나는 예단한다. 그가 기술적으로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리하여
기라성 같은 축구선수는 아니었었지만, 우리 축구사에 다른 의미에서 굵
은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축구정신에 투철했던 결과가 아니었
을까 자문해본다.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 투혼의 정신, 끈질긴 도전의 정신,
바로 축구에서 배운 그 정신으로 그는 은퇴후 은행원으로 변신에 성공한
다. 지금은 김포인가 인천인가에서 주택은행 지점장으로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다. 주택은행 지점장 김재한의 성공을 기원한다.
생각나는 대로.. 쓴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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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 이야기
송기룡 (skr0814 )
차범근 이야기(상) 08/01 21:44 117 line
얼마전에 최광돈 님이 올린 글을 보니 차범근이나 허정무같은 왕년의
스타들에 대해 아시고 싶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유럽 진출할 때의
과정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셨구요.
그래서 이들 전설적(?) 스타들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중,고등
학생 회원들을 위해 기억나는 대로 한번 써볼께요.
오늘은 먼저 한국축구의 상징, 불세출의 스타라고 불리는 차범근 편.
차범근은 1953년생으로 경기도 화성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강인한 체력과 성실함은 평생 농사일을 해온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
았으며(아버지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키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였다. 씨름대회에서 황소를 여러마리 탔다고 한다), 향토색 짙은(?)
얼굴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60년대 시골에서 자란 소년들이 으례 그러하듯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그 시절에 축구는 최고의 오락이자 스포츠였다. 차범근도 예외는 아니
었다. 시쳇말로 밥만 먹으면 공차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나 차범근이 다니던 국민학교에는 축구부는 없고 육상부만 있었기에
달리기라면 따를 자가 없었던 소년 차범근은 당연히 육상선수가 되었다.
각종 육상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던 차범근이 달리기를 계속했더
라면 어쩌면 칼 루이스같은 세계적 육상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차범근의 달리기 재능을 높이 평가한 학교 교사들과 서울의 축구
코치들의 주선으로 그의 일생은 바뀌기 시작했다.
서울의 명문 축구학교인 경신중학교에서 그를 스카우트한 것이었다. 경신
중학교에서 축구 선수로서의 기초를 닦은 차는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해
마침내 초고교급 선수로서 화려한 신고를 하게 된다. 당시 경신고교에는
한해 선배로 김진국이 있었고, 한해 후배로 김성남,강남 형제 등이 포진
한데다 장운수(후에 대우 프로팀 감독)라는 탁월한 지도자가 있어 고교
무대를 석권했다.
발군의 스피드와 슈팅력으로 고교축구를 휘어잡던 차는 당연히 청소년
대표에 뽑혀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모든 고교축구 선수의 꿈
인 고려대학에 진학해 붉은 얼룩무늬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대학 1학년때인 72년에 국가대표팀에 뽑힌 차는 대통령배 국제대회(일
명 박스컵)와 이듬해 열린 서독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서 국민적인 스
타로 떠오른다. 특히 이스라엘과의 서울 홈경기 연장전에서 터뜨린
차범근의 결승골은 올드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치마 내려오는
줄도 모르고 함성을 지르던 어느 여성팬 이야기는 두고두고 입에 오르
내렸다)
이회택,박이천 등 당시까지 한국대표팀의 공격수는 작고 기민한 선수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우람한 체격에 스피드, 슈팅력까지 겸비한 라이트
윙의 출현은 축구팬들을 열광케 하였다. 그가 공을 툭 차놓고 상대
선수를 따돌리며 오른쪽 터치라인을 따라 질풍같이 달릴 때면
TV 앞의 온 국민이 함성을 질러댔다.
당시 골목 조무래기들 사이에는 '떴다 떴다 비행기' 노래에 맞춰 '떴다
떴다 차범근'하는 노래가 유행할 정도였다.
76년 봄 고려대를 졸업한 차범근은 한국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인
'무소속 선수'로 몇달간 지내걀 나기도 하였다.
오은미 씨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차범근이 현대 감독 시절
출전 선수 뽑는데 오은미 씨의 입김이 엄청나게 작용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로 남편 하나는 꽉 잡고 사는 모양이다.
비록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지만 장신의 스트라
이커 김재한과 투톱을 이룬 77~78년 이즈음 차범근의 기량은 절정에
다다랐고 국제대회가 끝날 때마다 '차범근을 인간문화재로!'라는
구호가 축구팬들 사이에 떠돌았다.
77년인가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개막전에서 숙적 말레이시아와 대결
했는데 어이없이 골을 먹기 시작해 경기 끝나기 7분전까지 4:1로
지는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관중들조차 열받아 말레이시아를 응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차범근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 6분동안 혼자서
무려 세골을 넣고 4;4로 비기는 그야말로 기적적인 장면을 연출하였다.
이 기록 역시 한국축구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알고 있다.
70년대 당시엔 <주간 스포츠>라고 하는 국내 유일의 스포츠 주간지가
있었는데, 표지에 누가 등장하느냐에 따라 인기와 비중을 가늠할 수
있었다. 1년에 50회 정도가 발행된다고 하면 거짓말 안보태고 3분의
1정도가 차범근이 표지였다. 그 다음이 홍수환, 유제두, 염동균 같은
권투선수들이었다.(야구 선수는 이만수같은 고교야구 스타가 어쩌다가
한번씩 등장)
차범근의 인기는 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촌스런(!)외모 때문이기도
했다.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아시다시피 장발이 세계적
으로 유행하고 있을 때였다. 더구나 축구선수들은 질주할 때 머리를
날리면 멋있어 보이므로 너도나도 머리를 길렀다.
허정무, 조광래, 박성화같은 선수들은 여자처럼 머리를 길러 TV 중계
때면 동네 어른들이 "저 놈들은 장발 단속에도 안걸리나?"면서 욕을
해댔다. 그러나 오직 차범근만은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스포츠형
머리를 고집했는데 박정희 독재 아래의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
하에서는 당연히 차범근같은 멋낼줄 모르는 촌스러운 선수, 우직한
선수가 더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 김병지가 나타났다면?
'아시아의 표범'이란 별명답게 차범근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스타였다. 지금도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국가에서부터 이란,
쿠웨이트같은 나라에 가면 택시기사들이 차범근 선수 잘있느냐는 말을
할 정도라고 한다.
이제 아시아에선 당할 자가 없다는 것이 확실시 되던 1978년 무렵 차범
근을 유럽 무대에 보내자는 이야기들이 조심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차범근도 그런 욕심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가능하면 서독에 가서 뛰어
보고 싶다는 말을 인터뷰를 통해 내비췄다. 당시 세계축구의 엘도라도는
서독의 분데스리가였다. 알란 시몬센, 케빈 키건, 토니 우드콕 등 최고
의 명성을 가진 국제스타들은 전부 분데스리가에 몰려 있었다.
기회는 찾아왔다. 78년에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가 가을에 열렸는데
마침 이 대회에 서독 프랑크푸르트의 아마추어팀이 참가했다.
이 팀의 감독은 슐츠인가 하는 사람이었는데 차범근의 플레이를 보고는
'이런 선수를 아시아의 구석나라에서 썩힌다는 것은 세계축구의 수치'
라며 자기가 책임지고 분데스리가에 데뷰시키겠노라고 흥분했다.
축구협회도 적극 협조할 뜻을 밝혔다.
그해 겨울 태국에서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다른 선수들은 모두 귀국행
비행기를 탔지만 차범근만은 홀로 서독행 비행기를 탔다.
슐츠 감독의 주선으로 차범근은 <다름슈타트>라는 1부리그 최하위팀의
임대 선수로 뛸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단 한경기만.
왜냐하면 공군 복무중이었기 때문에 며칠간은 휴가형식으로 외국에
있을 수 있지만 더 이상은 법적으로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차범근은 기뻤다. 한 경기를 통해서라도 실력을 보여주면 나중에
기회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상대팀은 보쿰(작년까지 김주성이
속해있던 팀).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관중들로부터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을 정도로 썩 훌륭한 경기를 펼쳤다.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데뷔전 아닌 데뷔전은 이렇게 끝나고 그는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하편에 계속됩니다.
송기룡 (skr0814 )
차범근 이야기(하) 08/01 21:47 144 line
1979년이 밝았다. 서독 진출을 노리는 차범근은 국가대표마저
포기했다. 차범근이 빠진 한국대표팀은 3월 도꾜에서 열린
일본과의 정기전에서 2:1의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차범근을 대표팀에 복귀시키라'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차범근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5월이 되자 드디어 2년6개월의 군복무가 끝났다. 모든 굴레는
끝났다.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도르트문트 등 분데스리가의
명문팀들이 어서빨리 테스트에 응하라고 편지를 보내기 시작
했다. 차범근은 6월말에 출국하겠노라고 응답했다.
6월 중순 동대문운동장에서는 <차범근 서독진출 환송경기>가
열렸다. 마지막 떠나는 차범근을 한번이라도 보러 3만 관중이
운집했다. 고려대 OB팀과 연세대 OB팀의 대결이었는데 차는
정들었던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날의 스타는 박성화(전 유공감독)이었다.
고려대 OB팀이 3 : 2로 이겼는데 고려대의 세골을 모두 박성화가
넣었다. 그런데 그 경기 하루전에는 한일 대표팀의 정기전이
열렸는데 한국이 4:1로 이겼다. 그 경기에서도 박성화는 세골을
혼자 넣었다. 같은 경기장에서 이틀 연속 해트트릭.
도저히 깨지기 힘든 기록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뒤 차범근은 트랙을 한바퀴 돌며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1979년 7월. 가장 스카우트에 적극성을 보인 프랑크푸르트팀에서
첫 연습경기를 치뤘다.胎>의 축구담당 기자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시차를 생각
치도 않고(우리 시간으론 새벽) 걸려온 전화에 담당 기자가 정신없이
신문사로 달려가 기사 썼다는 이야기가 가십으로 전해진다.
(당연히 그날의 톱기사는 '차범근 두골!,오쿠데라 누르다'였다)
10.26사건 후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그 즈음에도 축구팬
들의 관심은 차범근에게 쏠려 있었다. 이에 따라 분데스리가를 매주
월요일 밤 방송하던 MBC는 차범근의 경기 필름이 들어왔다하면 바로
방송하는 바람에 시청자들은 보통 1주일만에 차범근의 활약을 직접
지켜볼 수 있었다. 물론 시청률은 최고였다.
이에 질세라 KBS는 프랑크푸르트팀이 출전하는 UEFA컵 경기를 녹화로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어느 팀과의 경기에서 차범근이 페널티 에리어
부근에서 때린 발리슛이 골크로스바를 맞고 나왔는데 이 슛이 어찌나
강했던지 약 5초 동안 골대가 흔들흔들할 정도였다.
난 그때 식구들과 저녁을 먹으며 이 장면을 보고 있었는데 숫가락을 떨
어뜨리고 말았다.
80년 봄 차범근의 프랑크푸르트팀은 창단 이후 최초로 UEFA컵 우승에
도전했다. 공교롭게도 그해의 UEFA컵 4강에는 서독의 4팀이 모두 진출
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준결승에서 프랑크푸르트는 루메니게,브라이트너
등이 소속된 바이에른 뮌헨을 힘겹게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으며,
보루시아 뮌헨글라드바하(약칭 보루시아 MG)는 샬케04를 누르고 결승에
진출하였다.
보루시아 MG는 보그츠(현 독일 감독), 시몬센(덴마크 출신으로 77년 유럽
최우수 선수), 본호프(74,78 독일대표) 등이 소속된 70년대 유럽의
최고 강팀이었다.
첫경기는 보루시아의 홈경기장에서 열렸다. 갈색의 폭격기 차붐을 막는
것이 보루시아의 최고 과제였는데 감독은 20세의 신참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불과 20세 나이에 서독 대표팀에 뽑혀 화제가 된 이 작은 몸의
신참의 이름은 '로타르 마테우스'였다.
'게르만의 혼'답게 마테우스는 전후반내내 차범근을 찰거머리처럼 따라붙
으며 꼼짝 못하게 막았다.(당시 일본 사커 매거진에 실린 차범근과 마테
우스의 어깨싸움 사진은 압권이다.)
결과는 보루시아의 3:2 역전승.
프랑크푸르트의 패인은 공조차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차붐의 부진이었다.
결승 2차전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다. 이번에도 마테우스는 차범근을
밀착 마크했다. 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좌우로 위치를
바꾸어 가며 찬스를 노리는 차붐의 노련함에 마테우스는 점점 말려들기
시작했고, 후반전이 되자 오른쪽 사이드는 완전히 차붐의 독무대였다.
드디어 후반 중반, 마테우스를 따돌리며 오른쪽을 파고든 차범근이 날
카로운 센터링을 올리고 이 공을 프랑크푸르트의 교체선수가 밀어넣어
결승점이 되었다. 1:0으로 프랑크푸르트의 승리이자, 원정경기 득점
우선 원칙에 따라 프랑크푸르트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UEFA컵을 안게
되었다.
동시에 차붐은 이제 서독내의 스타가 아닌 전 유럽이 알아주는 세계적
스타로 발돋음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차범근은 UEFA컵과 인연이 있었는지 1988년 레버쿠젠
소속으로 또다시 UEFA컵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1989년 은퇴하기전까지 실로 차범근의 영광의 나날들은 한국축구를
세계에 알린 시기였다. 차범근을 통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다는 독일 국민들, 그들은 그냥 한국이라고 부르지 않고 "차붐의
나라 한국"이라고 한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도 차범근이 독일에 가면 독일 TV방송국에서 인터뷰하려고 난리를
친다고 하고,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같은 도시에서는 할머니들까지
차범근을 알아본다고 하니 그가 10년 동안 서독 국민들에게 심어놓은
이미지가 얼마나 강렬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차범근, 그는 한국축구가 있는한 언제까지 사라지지 않을, 그야말로
불세출의 스타임이 분명하다.
송기룡 (skr0814 )
[죄송] 차범근 이야기 중 빠진 대목 08/02 21:03 57 line
점검 삼아 어제 제가 올린 차범근 이야기를 읽어 보니까...
이런! 글이 중간에 끊어진 대목이 있네요.
갑자기 오은미 씨 이야기가 나오고, 하여튼 문서편집기가 말을
잘 안듣는 바람에 여러사람 고생하게 만드는 군요.
빠진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2017번 글 중에서)
차범근은 76년 봄 고려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축구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 될 법한 '
'무소속 선수'로 몇달간 지내게 된다.
신탁은행과 기업은행이 차범근을 스카우트 하려고 혈투(!)를 벌이는
바람에 일이 크게 벌어진 것인데, 결국 두 은행은 서로 포기하기로
신사협정을 맺게 되고 본의 아니게 차범근은 무소속 선수가 되어
그해 겨울 공군팀에 입대하기까지 지내게 된다.
공군팀에 입단하자마자 대학,실업,군팀이 모두 출전하는 전국선수권대회
가 열렸는데 당시까지 약체를 면치 못하던 공군팀은 차범근이 입대하자
갑자기 전력이 급상승, 축구팬의 예상을 뒤엎고 결승에서 호화멤버의
고려대학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공군과 고려대학의 결승전은 동대문 운동장에서 야간 경기로 열렸는데
축구동 회원들은 놀라지 마시라, 3만 관중이 운동장을 꽉꽉 채웠다.
이듬해 봄(77년) 차범근은 연세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오은미 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만 24살의 비교적 이른 나이였다.
결혼식이 열린 그날 스포츠 뉴스를 본 기억이 나는데, 톱 뉴스가 차범
근 결혼이었다.
한국 최고의 스타와 결혼을 했지만 오은미 씨는 살길이 막막했다.
차범근이 받는 돈이래야 공군에서 주는 월급 몇천원(요즘은 얼마로 올
랐어요?)과 대표팀 수당 몇만원이 전부였다.
이러다보니 오은미 씨는 할수없이 동네 아이들을 불러다 피아노 과외를
하면서 연명(?)을 하였다.
이런 딱한 소식이 전해지자 어느 독지가가 '한국의 보물'이 이렇게
살아서야 되느냐면서 매달 생활비를 부쳐주기로 했다. 그후부터 생활이
조금은 펴서 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오은미 씨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차범근이 현대 감독시절 출전
선수를 뽑는데.....(이하는 2017번과 같음).
이건 쓰려고 생각했으나 빠뜨린 대목.
차범근과의 맞대결에서 참패한 일본의 오쿠데라는 자신감을 상실했는지
그후로 부진한 플레이를 거듭했는데, 이렇게 되자 쾰른팀의 명감독
바이스바일러는 오쿠데라의 컨디션이 안좋던 어느 경기에서 이 선수를
기용하기 시작했다.
오매불망 출장을 기다리던 약관 19세의 이 미소년 선수는 오쿠데라와
교체되자마자 놀라운 개인기를 선보이며 적진을 헤집고 다녀서 서독의
축구팬들은 과연 저 귀여운 꼬마가 누구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오쿠데라의 대타로 들어가서 진가를 발휘하며 세계적 축구스타로 발돋음
한 이 선수는 과연 누구일까요?
1) 칼 하인츠 루메니게 2) 베른트 슈스터
3) 한지 뮐러 4) 피에르 리트바르스키
정답은 4번!
(차범근이 오쿠데라를 누르지 않았다면 리트바르스키는 어떻게 되었을까)
유영춘 (everyou )
[잡담] 차범근에대한 추억.. 01/18 16:35 143 line
차범근에 대한 기억
오늘은 제가 아주 어린시절 내마음을 사로잡은 '축구'라는 경기와 항상 '='
라는 등식으로 내기억에 남아있는 '차범근'이 우리나라 축구를 또다른 의미에서
걸머지고, 우리앞에 나타나는 첫날입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저도 축구를 수십년간 보아오면서 가슴에 담아두고,
우상으로서, 마치 소중한 그무엇인것 처럼, 그렇게 생각했던 선수들이 있는데
차범근이 저한테는 그런 존재중의 하나 입니다.
( 왜 그런 거 있죠.. 밥먹다가 차범근이 tv 에 나온다면 밥그릇 들고 tv앞에가,
밥그릇 들고 tv를 보는건지 밥을 먹는건지 하다가 어머니 한테
죽~살나게 야단 맞는 그런 중학생 ... )
그런 연유로 제 기억속의 차범근을 회상해 볼까합니다.
차범근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된것이 제가 당시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으로 기억됩니다. ( 중학교 1학년 땐가? 아무튼 그무렵 ..)
그가 경신고등학교 2학년때 일겁니다.
그당시에 '월간축구'라는 축구잡지가 있었는데, 이걸 어머니가 종로서적에서
사다 주시곤 했죠.
가죽으로 된 점박이 축구공을 가진다는게 초등학교 통털어서 1, 2명 있을 시절..
(저는 다니던 국민학교는 서강대학교 근처였으니 시골은 아니지요..)
공을 학교에 가져가면 학우들이 줄을 서 따라다닐 시절에 제가 어찌어찌해서
기름 냄새 지독한 가죽축구공을 얻게 되었었죠.
공에 흙이 묻으면 솔로 다 털어서 이불속에 안고 잘 정도로 좋아했던 저인지라
어머니 심부름을 도맞아하는 대가로 월간축구 사달라고 하도 졸라대니까
안쓰러워 사주던 잡지였습니다.
A4지 갱지로로 만들어진 잡지, 거기다 흑백사진 몇장만 고급양장지로 된잡지 ...
읽고 또 읽고 셀수도 없이 읽어 걸레가 될정도로 읽던 그잡지를 첫번째 구입하던
그 속에 차범근이 실렸었습니다. ( 70 년? 71 년 ? )
축구 유망주를 소개하는 란이 한페이지에 전재되었는데, 한편에 그의 전신사진
이 흑백으로 실렸었죠. 머리는 빠짝 깍은 스포츠형, 전봇대 처럼 깡마른 몸매,
사진을 찍는다니까 으래 그렇듯이 어색하게 '김치~~'하면서 찍은 듯한 미소,
폼 잡느라고 약간 옆으로 비스듬하게 잡은 포즈, 경신고등학교 특유의 반반이
색상이 틀린 유니폼..
기사내용은 그가 고 1땐가 2때 경기에 나가 4골을 넣었는데 3골을 헤딩으로
넣어 '헤딩의 명수... , 100 미터 기록이 11초 7 ( 그후 성장해선 11초 4였죠)
인 준족, 너무 유순하다.. 신장 178인 장신...등이 였던걸로 기억합니다.
아뭇튼, 그잡지를 첫번째 구입했던거라 정신없이 많이 읽은 내용중에서도 왜그런지
차범근은 유독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뒤 경희대에 진학할려다 여차지차해서 빽좋은 고려대학에 진학과 국가대표발탁..
계속이어지는 그의 위대한 업적과 독일로 향한 그의 도전은 축동내에 여러군데
올라와 있으니 생략...
아! 이이야기는 해야겠군요.... 하나는,
그가 독일에 갈때, 우리 축구계에선 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는것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가서 개망신이나 안당하면 ..' '한국축구에서 통하는게 유럽에서도 통할줄아나..'
'건방지게 무슨 유럽행이냐...' ...
현재도 그렇지만 한국축구를 폄하하는 그런 냉소적인 기류가 상당했던걸로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유럽에서도 우뚝 선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하나는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사연인데...
그는 기독교계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기독교인은 아닌걸로 알고 있습니다.
몇년도인지는 생각이 안나는데...,
그가 고등학교땐가 대학교때 무릎무상을 당했었다고 합니다.
헌데 그가 공군에 입대해서 무릎에 좁쌀같은게 생겨 통증을 호소한바 , 진단을
받아보니 무릎에 칼을 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합니다.
축구선수가 무릎에 칼을 댄다는것이 그당시에는 사형선고와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물리치료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는데 별무 효과였답니다.
그래서 마지막 방법으로 기독교의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 동료인 기도하는 사마귀, 기동력의 화신 이영무 선수-이랜드 감독-와
집사람 오은미씨의 권유로.. )
당시 차범근의 말로는 "발바닥으로 불같은것이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안수기도시 옆에 있던 사람들말로는 "차범근이 뭐라고 말하는데 하나도 못알아
듣는 말을 하더라... 이것을 안수기도시에 하는 방언이다... "
하여튼 그이후 사진을 찍어봐도 흔적조차 안남고 나았다는,
저같은 무신론자는 황당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해서 보도되었죠..
하여튼 저는 그가 나을때가 되서 나았든, 주님의 불기둥으로 나았든 그가 다시
건강한 몸으로 뛸수 있어서 기뻐했었죠.
그이후 그는 독일 축구계에서도 놀랄 정도의 독실한 원단(?) 기독교인이 되었고,
또하나 놀라운 것은 무지무지한 눌변이었던 그가 ( 축협의 김정남 전무는 유도
아니었죠!) 부흥회에 간증자로 다닐정도로 말을 조리있게 잘한다는 겁니다.
참.. 세상살이는 오묘한 겁니다 !!! 헐헐!!
차범근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종종 한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한국선수중애서 나처럼 축구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고
그 결과로 성공한 사람도 없다...
나는 축구로 조국에 봉사할 의무가 있다... " ( 저를 감격케한 말임..)
< 노블리스 오블리제 : Noblesse Oblige >
옆으로 약간 새서 .... ( 저의 개똥 철학.. )
우리 민족이 20세기 들어와 겪는 역사의 소용돌이와,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이
몸부림을 치면서 얻어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가요?
근대화, 자주화.....
하여튼 그것을 이루는 수단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배우는 모델이 있다면
그것은 '서구화'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서구화? 이무신 시대착오적이며 사대적 생각이냐?
우리는 근 100년을 넘게 서구문명과 그정신이 무었인지를 탐구하고 있고,
그 정신을 우리에게 접목시키거나, 흡수, 동화시키려고 하여왔다고 봅니다.
그것이 근대화의 요체입니다. ( 일본, 중국... 도 마찮가지라고 봅니다.)
서구문명과 정신을 말할때 기독교와 그리스 로마 문명은 반드시 들어갑니다.
그중 로마를 말할때, 꼭 언급되는 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서구의 리더
정신이 아닐까요...
고귀한 신분이면 거기에 따르는 많은 의무가 있다...
법적인 의무가 아닌 도덕적인, 사회적, 정신적인 의무 ...
돈이 많으면 자선사업도 많이할 의무가 있다 (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써라)..
권력이 있는 사람은 저 밑에서 눈물 짓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약자의
눈물을 닥아 줄 의무가 있는것 이리라... (요새 정치,사회를 보면 제 속이
끓습니다..... 아 ! 참자 ...)
축구로 명예와 부를 얻으면 축구를 위해 져야할 의무를 기꺼이 진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차범근은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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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길로 들어와서..
차범근은 그의 선수시절 기술적인면 뿐만아니라 성실성, 겸손함, 근면함등에서
서구인들도 놀랄 정도로 그의 심신을 연마해온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현대 호랑이팀을 '울산' 팀으로 바꾸기 위해 그의 삶의
터전을 울산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프로팀 감독으로서는 아직 우승이라는 업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울산을 축구의 도시로 이미지화 하는 큰 물줄기를 만든 첫번째
공로자라 생각합니다.
이는 장기적 축구발전의 정방향 측면에서는 우승을 몇번씩 한 팀보다 훨씬 더
값진 일을 한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유소년 축구라는 한세대를 담보하는 일종의 도박을 단행한 첫번째 인물입
니다. 우리나라 어느 분야에서 1 GENERAION 을 바라보고 일을 합니까?
차범근은 선수 시절엔 독일로의 모험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은퇴후엔 유소년 축구의 가녀린 첫 씨앗을 뿌렸습니다.
또한 지역을 근거로한 축구발전의 정공법을 시도한 장본인 입니다.
이제 지도자로서도 그가 성공 하기를 바랍니다.
어린시절의 아름다움을 회고할때 부르는 노래로 '나의 살던 고향'이 있지요.
"나의 살던 고향은... 복숭아 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저는 저의 어린 시절을 회고할때 축구하고 놀던 생각이 납니다.
차범근은 그런 제 아름다운 추억속의 왕자님중의 한명입니다.
이제 노르웨이와 경기할 시간이군요..
이번 이벤트의 승부에 너무 집착하지 맙시다!!!
그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 복이 한국축구 앞날에 함께 하기를 ...
'봉근이와 그일당들'에게 축복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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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붐에 대한 소고 ( 서동렬)
먼저 저에게 있어 영원한 영웅 중 한명인 차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죠.
(차붐은 저의 영웅이며, 장종훈과 홍명보는 저의 라이벌임....
뭐, 개인적으로.. 후후)
차붐의 과거 명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들이 상세히 아실겁니다.
한 번 더 언급하자면, 지금 미국서 방방 뜨는 박찬호를 능가할 만큼
한국 축구의 독보적인 존재임은 물론, 아시아에서 지금껏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형 선수이며,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유명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세계적인 선수입니다.
예를 들어, 크리마스 또는 기타 세계적인 축구 이벤트 후에 열리곤 했던
남미 올스타와 유럽 올스타간의 월드 올스타전이 열릴 때면
어김없이 차붐이 유럽 올스타 팀에 뽑혔습니다.
지역적 안배 차원에서 아시아권 선수가 필요했기 때문에 뽑혔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하지요.
그가 레버쿠젠에 있을 때, 팀 창단 최초로 유럽 챔피언에 올린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클럽 하우스에는 차붐의대형 사진이 걸려 있으며
지금도 차붐이 레버쿠젠 구장을 찾으면,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 멘트와
함께 전 관중이 기립박수를 보낸다는군요.
또 외국인 선수로는 유일하게 분데스리가에서 은퇴경기를 열어준 일화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큰 선수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붐이 제게 영웅으로 자리잡은 것은 그러한 과거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가장 차붐을 높이 평가하는 점은, 제가 어린시절의 한 영웅이
나이 3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변함 없이 축구의 중심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고 정돈된 사생활은 물론, 끄때나 지금이나 한국축구의 중심에서
여전히 축구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며, 또 그 때 우리 대표팀의
핵으로서 팀을 반석에 이끌었던것 처럼 지금은 지도자로서 팀을 최강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스타로서 자만하거나 문란해 지지 않고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기에 나이 30을 바라보는 지금도 제게는 소중한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 저에게 또 한명의 영웅이었던 권투선수 홍수환씨는 차붐과 매우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지난 번 TV에서는 소위 차범근의 X 화일로 알려진 그의 노트북에 있는
데이타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 노트북에 있는 것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갖춘 첨단 소프트웨어도
아니고 화려한 데이타 분석 도구도 아니었습니다.
화면에 비친 것은 그저 평범한 한글(아래아) 워드프로세서 였습니다.
그런데, 그 화면에 비친 내용들을 보면
차붐이 일일이 입력한(즉, 워드 프로세서로 하나하나 편집한)
각 선수의프로필 및 개인적인 체크 포인트,
상대팀 선수들에 대한 정보,
상대팀의 전술 도식, 포메이션 등등
실로 방대한 내용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단순한 워드프로세서를 가지고 그만큼의 데이타를 입력 및
관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되고 많은 시간과 정성을 요구하는지
상상이 가십니까?
아마도 차붐은 선수들 훈련 및 미팅, 각종 경기 참석 및 회의 참석 등의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남는 시간은 모조리 거기에 투자하는 듯 합니다.
그것은 실로 광범위한 작업이며 수많은 노가다를 필요로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어느 지도자가 그처럼 공을 들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팀을 위해, 또 나라와 이 나라의 축구를 위해
노력을 했습니까?
그런 노력의 결과가 조금이나마 나타난 것이 이번 최종 예선이 아닌가
합니다. 대표팀 감독은, 어차피 우리나라에서는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는 빈약한 선수층과 기량 또한 어느 한계를 넘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승리를 일구어야 합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고분분투한 노력이 그 노트북에 역력히 베어 있더군요.
그가 축구의 신동이고 누구보다도 감각과 예측력이 뛰어나고,
축구의 모든 것을 동물적으로 감지하는 능력이 있어서 오늘 그 자리에
선 것은 아닙니다.
그 뒤에는, 차붐의 노트북에 나타난 것 처럼,
한 없이 고된 작업을 묵묵히 해낸 그의 노력과 성실성,
그리고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과 애정으로 오늘의 차붐이 탄생한 것입니다.
경기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또 그 경기의 일차적인 책임은 의당 감독이 지게 됩니다.
지난 한일전의 경우 납득하기 힘든 전술도 잇었고, 차붐의 실수나
안이함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차붐을 믿습니다.
그의 자질은 둘째치고라도, 그의 성실함과 축구를 향한 한없는 애정,
그리고 그의 노트북에 베어 있는 차붐의 땀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끊임 없이 제게 기쁨과 희망을 준 사람이 바로 차붐이며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저에게는 차붐이 영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변함 없이 저는 앞으로도 차붐을 굳게 믿을겁니다.
김지현 (Kunst )
[인터뷰] 오늘의 독일/차범근감독 10/07 09:15 121 line
다음 글은 독일문화원에서 얻은 DEUTSCHLAND AKTUELL 지에 실린 차범
근 감독님의 인터뷰입니다. 동호회 회원 여러분들께서도 한번 읽어보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올립니다. 97년6월 호니까 한참 전에 나온겁니다. 제가 이
것을 독일문화원에서 보게 된 것이 8월이구요...그리고서도 제가 게으른 탓으로
이제서야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원래 독일어로 나오고 한국어로 번역을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어색하
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군요.
독일어의 O 움라우트는 oe로...U 움라우트는 ue로 표기했습니다.
차범근 감독과의 인터뷰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차범근 씨는 1979년부터 1989년까지 독일에서 활
약하였다. 그의 이름은 축구에 관심이 있는 독일사람, 그러니까 거의 모든 사
람의 뇌리에 아직도 생생하다. Eintracht Frankfurt und Bayer Leverkusen
축구팀에서 그는 세계 제1의 리가로 알려진 분데스리가의 가장 성공적인 공격
수였다. 1989년 Bayer Leverkusen팀에서 유럽컵 수상은 가장 영광스러운 업적
이다. "도이치란트"誌가 차범근 감독을 인터뷰했다.
차 감독님, 귀하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사람입니다. 아직도 독일과 연락
이 있으신지요?
차: 우리 부부는 해마다 한두번은 독일에 다녀옵니다.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
고보니 바빠서 올해는 유감스럽게도 한번밖에 다녀 올 수 없겠습니다. 친구들
을 다 방문할 수 없어서 매우 아쉽습니다. 이 친구들이야말로 독일과의 연결점
이고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요. 저는 1974년도 세계챔피언으로 오랫동안
Eintracht Frankfurt팀의 감독이었던 Hoelzenbein, Bayer Leverkusen 의 메니
저인 Rainer Calmund, 1990년도 세계챔피언 Thomas Berthold나 Hertha BSC
Berlin팀의 감독 Juergen Rober와 활발한 교류를 지속합니다. 특별히 좋은 추
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저의 Frankfurt 시절부터 시작된 긴밀한 관계를 잘 유지
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비교해서 한국에서 축구는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요?
차: 한국에서 축구 국가대표팀은 독일에서와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온 국민
이 경기를 주시하고 선수나 특히 감독이 항상 관중의 스타가 됩니다. 그러나
팀 차원에서는 사정이 독일과는 좀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야구가 관심의 전면
에 부각되고 축구는 그만큼 중요하지는 않지요. 저는 이점에 개선의 여지가 있
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이나 영국에서는 대를 이어 팬을 확보하는 전통과 출신
지방의 기반이 있는데 비해서 한국팀의 경우에는 그런 면이 취약하지요.
귀하는 올해 초 국가대표감독이 되셨습니다. 이 중요한 임무에 어떻게 대비하
시는지요?
차: 시기적으로 아직 이르다는 생각에서 국가대표 감독이 될 생각은 없었습니
다만 이제 국가 대표팀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책임을 떠안기로 작정했습
니다. 2002년에 있을 월드컵을 목표로 장기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활동할 가능성
을 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감독은 어떤 훈련을 거칩니까?
차: 한국에는 제대로 된 감독학교가 없어요. 교육과정도 너무 짧고 체계적인 교
육이 없어요. 쾰른 스포츠대학의 철저한 감독교육과정을 모범으로 삼으면 좋
겠습니다.
한국과 독일의 축구훈련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차: 한국에서는 훈련이 지나쳐요.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무슨 말인지 설명
을 드려 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매일 여러 시간 훈련을 하지요. 그래서
각 선수에게는 감독의 설명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 강도 높은 훈련이 지속되는
긴 하루를 체력적으로 견디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선수들이 대개
아주 좋은 신체조건을 가지나 경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생겨요. 이
점에서 우리는 악착같이 일에 매달리려는 우리의 의식에서 벗어나 유럽체제를
지향해야 합니다. 독일에서 같으면 유명한 선수의 경우에는 놀라운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감독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한국도 이
런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모범으로 삼는 감독이 있다면 누구를 꼽습니까?
차: 어떤 한 감독을 정해 놓고 그를 본 받으려 한다는 의미에서는 모범이 없다
고 하겠습니다. 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Rinus Michels, Friedel Rausch, Erich
Ribbeck 등을 높이 평가합니다. 위 감독들이 제 축구경기와 축구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지요.
축구학교도 경영하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 2002년 월드컵에 귀교 학생이 참가하
게 될까요?
차: 참가하리라 생각됩니다. 아직 너무들 어려서 21세이하의 선수로 구성된 청
소년 국가대표팀경기에나 참가하겠지요. 축구학교는 제가 각별히 정성을 쏟는
곳입니다. 20명의 감독과 열광적인 여러 젊은이들과 더불어 저는 한국축구의
위상을 세계 정상급으로 부상시킬 유능한 선수의 풀을 육성할 생각입니다.
청소년 활동에 있어서 독일과 한국축구의 차이는 어떤 것이지요?
차: 독일에서는 어린이들이 여섯살만 되면 팀이나 리가에 드어가서 축구를 합
니다. 그들은 매주 상대를 바꾸어가며 경기를 하고 경기의 실제 경험을 축적합
니다. 한국에서 어린이들은 토너먼트에서만 경기를 하게 되므로 경기 경험이
부족합니다. KO체계때문에 몇몇 선수단에서는 한번 경기를 하고 나서는 여러
주일에 걸쳐 훈련만 하게되는 경우도 나옵니다. 이 훈련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
시킵니다.제 학교에서 저는 동료들에 비해서 훈련보다는 경기의 실제 경험에
역점을 두려 합니다.
귀하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국제적 명성을 얻은 축구선수가 한국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차: 제 성공의 원인은 제가 독일 리가에서 경기를 한데 있습니다. 이 리가는 전
이나 지금이나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리가 중 하나입니다. 이 리가에서 성공하
면 세계적으로 유명해 집니다. 저는 독일에서 현지적응에 성공했습니다. 내 의
식구조가 큰 도움이 되었지요.
저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고 조용한 삶을 좋아합니다. 그렇게해서 저
는 경기에 전심전력할 수 있었고 불필요한 분산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서는 선수 공동의 외출, 공동의 여가보내기 등에 가치를 두니까 저같은 의식구
조는 오히려 단점이 됩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그 점이 오히려 좋게 작용했습
니다. 부상을 당한다든지 해서 힘든 순간에는 신앙에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위에 든 제 개인적인 이유 외에 오늘날 한국 선수들에게는 자신의 팀을 떠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한국 구단은 선수들이 자발적인 팀 이탈을 허용하지 않습니
다. 팀이 새 계약체결에 동의하는 경우에만 팀을 떠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팀
을 떠나려 할 때, 계약을 해지할 가능성이 선수편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필요한
국제적 교류에 장애가 되면 그래서 우리 선수단이 천편일률적이 되는 원인이기
도 합니다. 위대한 선수는 집단에서만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유로운
발전의 여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국가대표 감독이 되기 전부터
이 체제의 종료를 주장했습니다. 저는 능력이 있으면 아무나 대표팀에 들어 올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소속팀이 한국이건, 독일이건 상관없습니다.
독일에서 고향 생각이 나게 한 일과 반대로 한국에서 독일이 그리운 점은 무엇
입니까?
차: 독일에서는 선수 상호간의 유대감이 그리웠습니다. 한국에서는 합숙이 끝나
면 같이 외출하고 개인적으로도 환히 알고 서로 잘 만나고는 합니다. 독일에선
그런 일이 없습니다. 직업선수로서 자동적으로 동료들과 유대관계를 맺게 되지
는 않습니다. 독일에서는 전문적 활동에 제일 비중을 두고 한국에서는 인간관
계에 비중을 둡니다. 저는 선수들에게 "외국으로 갈 때는 가족과 함께 가야 성
공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가정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뒷받침이며 특히
외국에서는 가정의 뒷받침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일하면서부터 독일식 휴가 생각이 간절합니다. 독일에서는 경기 기
간 중 힘들게 일하지만 그 후 두주 가량의 휴가와 기분전환을 만끽할 수 있습
니다. 한국에선 그냥 일에 매달리는 겁니다. 기력을 회복하고 재충전해서 돌아
오면 훨씬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거든요.
차 감독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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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 이야기
송기룡 (skr0814 )
허정무 이야기(상) 09/11 14:45 162 line
중,고등학생 회원들을 위한 왕년의 스타 소개.
오늘은 허 정무 편입니다.
허정무는 1954년생이야. 우리나이로 올해 마흔둘이 되었지.
별명은 '진돗개'인데 그가 태어난 곳이 진돗개의 원산지인
전라남도 진도인데다, 영리하고 끈질긴 승부근성이 있어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아.
허정무의 아버지는 교육자로, 허정무가 태어날 때부터 진도의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을 하고 계셨대.
어릴때부터 허정무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서 '교장선생님네 똑똑
한 아들'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해. 한마디로 진도에서 제일 잘나가는
얘였던거지.
특히 축구 시합만 했다하면 펄펄 날아서 군민 체육대회같은 것이 열리면
동네 노인네들이 하나같이 "저 놈 누군고?" 했다고 그래.
얼마나 잘했는지 국민학생인데도 고등학교 형들 시합에 스카우트되어(?)
뛸 정도였다니까 말다했지 뭐.
이렇게 진도 시골바닥에서 날고 기던 '꼬마 스타'에게 예정된 운명의
순간이 드디어 다가왔어. 허정무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지.
서울에 사는 허정무의 삼촌이 진도로 내려왔어. 이 삼촌 이름은 허 윤정
이라고 아마 니네들은 잘 모를거야. 60년대에 국가대표 선수까지 지낸
축구선수 출신이야. 70년대 후반에는 KBS에서 잠시 축구해설을 하기도 한
사람이지.
교장선생님 아버지에 축구선수 삼촌이라... 웬지 어울리진 않지만 어쨋든
허정무가 축구를 잘한 것도 이런 핏줄이 있었 최고다 하는 말들이 축구계의 공통적인
평가였거든.
그래서 은연중에 한국 축구의 양대 라이벌이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차범근의 비중에 대한 연세대 동문들의 질투심도 조금 작용했겠지?
그래서 한때는 차범근과 허정무는 사이가 나빠 패스도 서로 안한다
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어. 둘이 유럽에 진출했을때는 일부러
만나지도 않는다고도 했고.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
대표팀의 확실한 공격수였던 허정무에게도 좌절은 있었어. 1976년 가을
에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한국은 1진은 화랑, 2진은 충무
이렇게 출전했는데 허정무는 그만 2진에 뽑힌거야. 얼마전에 열린
메르데카 대회에서 극도의 부진을 보였었거든.
차세대 선두주자가 2진으로 떨어졌으니 자존심이 엄청나게 구겨졌겠지?
그래서 그런지 이 대회에서 허정무는 심기일전, 2진 충무팀에서 펄펄
날았어. 물론 충무팀이 브라질에 져서 결승전 진출은 못했지만 '역시
허정무는 1진에 갔어야 돼'라는 평가를 받아냈지.
이때 허정무랑 같이 충무팀에서 활약하던 박창선,조영증도 곧바로 1진
으로 합류해 스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허정무가 대표 1진 화랑팀으로 뛰던 1976~78년 이 시기는 비록 아르헨티
나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는 했지만 역대 한국 대표팀
사상 최강의 전력과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였어.
78년이던가 메르데카 대회에서는 7전 전승에다가 무실점(!)으로 우승함
으로써 아시아에서는 더 이상 한국을 당할 나라가 없게 만들었고
붉은 유니폼의 한국 축구는 아시아 선수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었지.
78년 여름,대표팀의 평가전이 내가 살던 대구에서 열려 나도 구경을 갔었
는데 말이야. 대표팀이 워낙 시원시원한 경기를 벌이자 운동장에 모였던
3만 관중 중 경기가 끝나자, 거짓말 안보태고 1만명이 넘는 대구관중들이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와서 선수들을 덮쳤어(?).
완전히 난리가 난 거지. 선수들 얼굴을 가까이 보려고, 손이라도 잡아
보려고 뛰어든건데 이 바람에 차범근은 1백미터 11초의 주력으로 운동장
을 가로질러 도망가고, 허정무는 유니폼 찢겨 이리저리 붙잡혀 다니고,
김재한은 그 큰 키에 아저씨들한테 잡혀 움직이지를 못하더라구.
난 차범근이 주력이 좋다는 얘기 말로만 들었는데 그 경기 끝나고 도망가
는거 보니까 정말 빠르대...
( TO BE CONTINUED...)
송기룡 (skr0814 )
허정무 이야기(하) 09/11 14:49 169 line
내 개인적 생각으로 허정무가 절정의 기량을 보인 것은 1979~80년이 아닌
가 해. 1979년이면 차범근이 서독으로 진출한 해인데, 이빨이 빠지면 잇몸
이라고(비유가 맞나?) 허정무가 단연 발군의 실력을 보이기 시작했어.
한마디로 노련함과 탁월한 개인기가 물이 오를대로 올랐다고나 할까.
특히 이해 가을에 열린 뉴욕 코스모스팀과의 서울 경기는 허정무가 유럽에
진출해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경기였어.
당시 미국은 축구붐을 조성하기 위해 세계 축구의 노장스타들을 대거 영입
했는데 그 대표적인 팀이 뉴욕 코스모스팀이야.
코스모스에는 베켄바우어, 요한 니스켄스(크루이프의 후계자로 74,78년
네덜란드 대표), 알베르트(70년 월드컵 브라질 대표팀 주장), 마징요(브라
질 대표 출신) 등 초호화 멤버가 포진하고 있었어.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대표팀은 예상을 뒤엎고 3대2로 이겼는데
이 경기의 최고 스타는 베켄바우어도 니스켄스도 아닌 허정무였던거야.
선제골을 넣고 결승골 어시스트에다 코스모스팀 문전을 마구 헤집고 다녔지.
스위퍼 역할을 하던 그라운드의 신사 베켄바우어가 이때문에 화가 났는지
일부러 공을 밖으로 차내 관중들로부터 엄청 욕을 먹기도 했어.
차범근의 서독 진출이 성공적으로 전개되자 유럽의 클럽들은 한국에 또다른
좋은 선수가 없나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다음 주자는
허정무로 점 찍어졌지.
서독 분데스리가의 빌레펠트, 뒤스부르크, 네덜란드의 필립스 아인트호벤이
특히 관심을 보였는데 허정무의 해군 복무가 80년 5월 끝나자 본격적으로
접촉이 시작되었어.
80년 6월하면 전두환의 야만적인 쿠데타가 있고 난 뒤라 전국민이 벌벌 떨며
지내던 시기라는 건 제군들도 잘 알고 있을거야.
이런 어수선한 시기에 차범근 귀국 환영 겸 소속팀인 프랑크푸르트팀 초청
경기가 서울, 부산, 인천에서 열려 국민들은 어디가서 소리도 못지르는
울분을 축구장에서 풀었지.(당시 신문만평이 기억나는데 만화 주인공이
축구장에서 이유도 없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게 실렸어. 어떻게 검열을
통과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만평이 나왔더라구)
거기에다 이 경기는 허정무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경기이기도 했어.
기대대로 허정무는 우리 대표팀 중에는 최고의 실력을 보였고 골도 몇골
넣었던 걸로 기억이 나. 유럽 클럽 관계자들이 확신을 하게끔 만들었지.
우스운 것은 이때 조광래도 '나라고 차범근처럼 유럽에서 못뛰라는 법
있나'하면서 프랑크푸르트팀 초청경기에 대비해서 유럽 축구관계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 아이구 그만 너무 연습을 무리하게
하다가 다리를 다쳐 아예 경기에 뛰지도 못한, 조금 쪽팔리는 일도 있었어.
이리하야 80년 7월 허정무는 조건이 좋은 네덜란드의 필립스 아인트호벤
팀과 입단계약을 맺고 출국을 했던거야.
아,참 빠뜨렸다. 허정무는 네덜란드 출국에 앞서 결혼식을 올렸어.
허정무는 원래 대학시절 이화여대생과 사귀고 있는 걸로 알려졌는데,
내가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았느냐 하면 어느해던가 일본 대표와의
경기에서 허정무가 결정적인 슛을 쐈는데 그만 실축을 한거야.
그런데 며칠뒤 <월간 축구>에 그때 슛장면과 함께 이런 설명이 있더라구.
"4천만 국민의 탄식을 자아내게 했던 허정무의 슛 실축 모습. 그러나
이화여대에 다니는 모 여학생보다 더 슬퍼할 사람이 또 있었을까?"
연유야 어찌됐던 허정무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고 그 여자는 당대 최고의
인기 MC 최미나였어. 너희들은 최미나 잘 모르지? 요즘도 가끔 TV프로에
나오기는 하던데. 이삿짐 센터 광고에도 나오더구만.
최미나 하면 70년대 중,후반기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MC이자 개그우먼
이었어. 요즘으로 치면 그 누구냐, 허수경 박미선 정도라고나 할까.
아니다, 인기로 치면 요즘 이매리 님 정도로 폭발적이었다고 할수 있지.
(아부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최미나가 그때 한창 개그하던 전유성, 임성훈, 송영길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서
다녔는데... 내가 어디 잡지에서 본 기억에 의하면 MC 임성훈이 최미나와
허정무를 연결시켜 주었대. 아는지 모르겠지만 임성훈은 허정무의 연세대
선배로 학교 다닐때는 '아카라카'(연대 응원단 이름) 단장을 했었어.
그런 인연으로 둘은 만나 결혼을 했는데 두 집안에서 엄청 반대했다고 하더만
.
허정무 집안에선 "어디 여자가 없어 딴따라 연예인과 결혼하느냐?"
최미나 집안에선 "어디 남자가 없어 빤스 입고 공차는 운동선수와
결혼하느냐?" 이랬다고 해.
하여튼 80년 7월 둘은 결혼을 했는데 스포츠계 톱 스타와 연예계 톱스타의
결혼이라 스포츠 신문은 물론이고 <선데이 서울>, <주간 경향> 같은 주간지
의 표지 사진을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 도배를 했었다는 거 아니니.
허정무가 속한 필립스 아인트호벤은 세계적인 전자회사인 필립스에서 운영
하는 팀으로 아인트호벤이라는 조그만 도시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어.
아약스와 함께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팀이었는데 몇년전에는 로마리오도 이
팀에서 뛰었지 아마?
당시에는 네덜란드 대표선수로 쌍둥이 선수인 케르코프 형제가 있었고,
78년 월드컵 준우승의 주역인 포르트 폴리에트, 어니 브란츠, 그리고
우리나라 현대팀에서 잠시 뛰던 란스베르겐같은 선수가 있었지.
허정무는 데뷔전부터 미드필더로 출전했는데 1, 2차전엔 별 신통한 경기를
펼치지 못하다가 3차전에 가서야 주목할 만한 경기를 펼쳐 주간 베스트 11
에 처음 뽑히는 영광을 안았어.
'후 융'붐을 일으키는 순간이었지. 네덜라드인들은 허정무의 영문 표기를
자기 식대로 읽어 HUH JUNG을 '후 융'이라고 불렀던 거야.
그후로 허정무는 쭉 미드필더로 활약을 했었는데, 한번도 경기하는 모습을
TV로 보여주지 않아서(물론 간간히 경기장면을 보여주긴 했지만 전체
경기 녹화는 한번도 없었음) 나도 얼마나 잘했는지는 모르겠어.
내 기억으로 첫시즌인 80/81 시즌에 주간 베스트 11에 5번 정도 뽑힌 것으로
알고 있고, 골은 3골 정도.
그후 83/84시즌 마지막으로 뛸때까지 대략 평균 그 정도 성적이었던 것 같아
.
2,3년째 시즌에는 부상을 당해 벤치를 지켰던 기간이 더 많았고, 이때문에
주전 자리에서 거의 밀려 났던 걸로 기억을 해.
아무래도 차범근만한 활약은 없었다고 봐야겠지.
아약스 팀과 경기할때면 요한 크루이프의 전담 마크맨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경기에서는 요한 크루이프가 허정무의 태클을 받고 실려나갔다고
하는 소식이 신문에 나기도 했지..
TV에서 워낙 허정무에 관한 소식이 없길래 81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
다니던 나는 일본 축구 잡지에서 필립스팀 주소를 알아내 허정무에게
처음으로 팬레터라는 것을 보내 근황을 물어보기도 했어.
내 평생 팬레터 보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는데 답장은 안오더만...
81년 겨울이던가 드디어 KBS에서 약 20분 정도 다큐멘터리식으로 허정무
탐방 프로를 했었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난 아직도 그 순간을 못잊어..
허정무가 영어를 그렇게 유창하게 구사하는 줄 그때 첨 알았지.
(지금도 라데 선수와는 영어로 대화한다잖니 글쎄..)
부상에다 컨디션 난조로 벤치 지키는 일이 잦아질 무렵 허정무는 귀국을
결심했어. 84년 시즌이 끝나고였지.
이어 국내 프로팀 현대에 입단을 했어. 아까 말한 란스베르겐, 가나 출신
의 알 하산 등과 함께 현대팀의 폭발적인 공격력을 이끌었지.
그리고 85년에는 대표팀의 일원으로 86년 월드컵 예선전에 뛰었고,
다들 본 적이 있겠지만 월드컵 진출의 최종 관문이었던 잠실에서의
일본과의 경기에서 최순호의 슛이 골대 맞고 나온 것을 그대로 차넣어
골인! 32년만의 월드컵 진출을 알리는 골을 성공시켰고..
문제 하나 낼께. 우리나라 축구선수 중에 은퇴하기전, 그러니까 선수
시절에 TV에서 축구해설을 했던 유일한 사람이 누구게?
바로 허정무야. 86년 봄 그해 월드컵을 앞두고 TV에서 출전 각국의
경기를 보여주는데 네덜란드팀의 경기를 보여주는 날, 해설자로
허정무가 나오더라구. 난 참 별일이다 했는데 꽤 잘하던데.
뭐 몇년간 그 나라에서 뛰었으니 웬만한 전문가보다 나은게 당연하지.
예를 들어 "지금 슛한 시몬 타마타 선수는 수리남 출신으로 나이는
몇살, 언제 입단했고, 저와 같이 경기할 때는 미드필더였는데.."
이런 식으로 해설을 하더라구.
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첫 경기는 허정무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는 치욕의 경기였을 거야.
원래 마라도나는 박경훈이나 김평석이 맡기로 했는데, 전반전에 마라도나를
번번히 놓치자 김정남 감독이 노련하고 투지가 좋은 허정무에게 마라도나
마크의 임무를 맡겼어.
그래서 허정무가 어느 정도 막긴 막았는데 너무 투지가 좋았는지 마라도나가
나가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어. 마라도나가 다리를 움켜쥐고 쓰러지는
모습 엄청나게 자주 나왔지.
어쩔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세계 축구팬이 지켜보는 마당에 조금 심했지.
축구황제 펠레는 그 경기를 보고 난뒤 전 세계 신문에 실리는 그의 특별
칼럼을 통해 "한국 선수들은 그들의 태권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하며 비아냥 거렸으니...
세번째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음으로써 허정무는 다소 위안을
받았을 거야.
이어 그해 가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허정무가 이끄는 대표팀은 우승을
했고 허정무는 명예로운 은퇴를 하게 되었어. 그때 나이 32.
축구선수로서 해볼만한 것은 다해 보고 은퇴한 거지 뭐.
다만 차범근에 가려 언제난 2인자였다는 사실 하나만 빼면...
은퇴후에는 축구계에 몸담지 않고 한때 사업을 했었어. 플라스틱 제조업
체 사장을 했는데, 계속 축구에 종사하라는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회사에
불이 났었어(도둑이 들었다고 했던가).
아무튼 안좋은 일이 있고 난뒤 실의에 젖어 있는데 선배 축구인들의 권유
도 있고 해서 다시 지도자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지.
그후로는 너희들이 더 잘 알테고....
그만 쓸란다. 주절주절 이야기는 많이 했는데 나도 뭘 말했는지
잘 모르겠다. 쓰잘데 없는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고...
너희들의 후배들이 요즘 선수들 이야기 들려달라고 하면 잘 해줘..
그럴려면, 윤정환, 최용수 애인이 누구인지 알아봐야겠지?
그럼 이만...
첫댓글 박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