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예수 성심의 뜨거운 사랑은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해 거듭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호세아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당신의 우리를 향한 절절한 사랑, 활활 불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잘 표현하고 계십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친히 보잘것없는 내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나를 당신 품에 꼭 끌어안고 나와 눈을 마주칩니다.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내 볼에 당신 얼굴을 비비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십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나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시며, 뒤뚱뒤뚱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박수를 쳐주십니다.
결국 우리의 주님은 세상 자상한 아버지 같으신 분, 우리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따뜻한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 생각만 하면 주님 마음은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배신과 반역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옆길로 자꾸 새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든 되돌이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인내와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요한 복음사가 역시 우리 인간을 향한 정말이지 기가 막힌 사랑, 바보같은 사랑의 마음, 곧 예수님의 마음을 잘 소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악행과 반역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분을 한갓 인간들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악행에 그 어떤 보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마음만 한번 바꿔먹으시면,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의 그 참혹한 현장을 순식간에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끝까지 침묵하시며 묵묵히 인간의 사악함과 무지막지함을 견뎌내십니다.
십자가에 매단 것도 모자라 인간들은 운명하신 그분의 옆구리에 창을 찔렀습니다. 심장까지 관통한 창으로 인해 그분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돌아가시면서까지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흘리신 피와 물을 통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 제정을 통해 우리를 단 한 번, 혹은 일정 기간만이 아니라 세세대대로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겠다는 뚜렷한 징표를 하나 남겨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주님의 애끓는 사랑, 예수 성심의 뜨거운 사랑은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해 거듭 표현되고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우리는 언제 마음의 안식을 얻는가?>
복음: 요한 19,31-37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기도 하고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으로 살도록 기도하는 날이고 사제들은 그렇게 결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는 일은 바로 ‘행복’에 의해서입니다. 누구나 행복한 것을 선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고통당하러 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흘리실 때의 기분은 이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무언가 이루시려고 그토록 애쓰신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신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양심이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때부터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셨기에 빚진 존재로서 아버지께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은 그냥 눈 한 번 감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누구나 죽음 뒤에 올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양심이 그렇게 만듭니다.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없는데 우리는 이 지상에서 생명을 받고 수십 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게 만드시기 위해 아드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브라질에서 한 유기견이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아직 탯줄도 잘리지 않은 신생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개는 신생아를 물고 가장 가까운 집으로 달려가 문을 긁으며 짖고 사람을 불러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기를 보고 병원에 데려가자 개는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신생아는 살아났고 몸에는 이빨 자국 하나 없었습니다.
이 개는 왜 아기를 인간에게 돌려주었을까요? 분명 유기견이 되기 전에 사람에게 길러졌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받았기 때문에 양심상 신생아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양심은 이렇듯 받았으면 주어야 하는 정의 시스템입니다. 받았는데도 주지 못할 때 양심이 만들어내는 불안함은 죽음보다 고통스럽습니다.
인도에서 다쉬라트 만지히는 22년간 혼자 산 하나를 깎아서 길을 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산을 넘어가면 2km밖에 안 되는 거리를 아픈 아내를 데리고 60km나 돌아가야 해서 결국 아내가 병원에서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지히는 이웃 사랑으로 그런 일을 한 게 아닙니다. 아내에 대해 미안함을 없애려고 평생을 그렇게 바친 것입니다. 양심의 평화가 죽음과 같은 고통보다 평화롭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을 바라보며 고통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성심을 내어주는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안식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설암에 걸려 돌아가신 얼굴이 환한 미소를 띤 아르헨티나의 마리아 세실리아 가르멜 수녀님의 환한 미소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분은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마지막으로 글로 썼습니다. 예수 성심의 고통과 안식에 참여하는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난 매우 만족스럽다. 고통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와 나를 위해 기도하는 많은 이들로 인해 놀랍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9,31-37: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초기 교회에서부터 예수성심에 대해 언급되었었는데 이는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루는 한 구성요소로서였다. 예수성심은 예수의 심장만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생의 신비와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 설정 등을 통하여 보여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참조: 마태 11,29).
특히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을 사랑과 은총의 샘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상에서 군인의 창에 찔리어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요한 19,34) 천상 보화의 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에 비유하였다. 즉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은 영혼을 깨끗이 씻고 초자연적 생명을 부여하는 성세성사를 상징하며, 피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는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13세기 이래로 독일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아 성심 공경이 성하였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회칙에서 “구세주의 상한 성심에서 구원의 성혈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탄생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원의와 인식, 사랑과 정서, 감정의 중추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근원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동시에 인간 사랑의 응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원의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한 것은 이 축일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13세기 이래로 예수성심의 공경이 성하였지만, 1673년 12월 27일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성심공경과 성심축일의 제정을 요청하시게 되어,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공적으로 세상에 전파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에서 돌아가신 후에 그 죽음을 확인하려고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것을 전하고 있다. 그 군인의 행위는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사도 요한은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장면을 통하여 요한은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교회의 탄생을 읽고 있다. 피는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성체성사와 당신의 죽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물은 성령의 상징으로써 세례의 표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으로 교회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잠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그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셨듯이, 십자가에 잠드신 새로운 아담의 옆구리에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였다고 교부들은 말하고 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분의 성심을 위로해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예전에 유행했던 영화 대사가 생각납니다.
“나 이대 나온 사람이야.”
자기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책에서 ‘지식인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크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식의 축적을 자기 일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책임지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보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안정적인 미래를 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겨우 안정적인 미래라는 세속적인 이유로 지식을 축적하고 있음이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이 오히려 세상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인도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자랑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교회 내 직책을 자랑하는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을 알리기 위한 것도, 또 안정적인 미래를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곧바로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자신의 체중으로 횡격막을 압박하여 질식할 때까지 고통과 충격을 느껴야 하는 잔인한 로마 시대의 사형 집행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다음 날이 안식일이었기에 사람들은 안식일 전에 모든 것을 처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다리를 부러뜨리는데, 그렇게 되면 체중을 지탱하던 다리에 더 이상 힘을 주지 못하여 더 빨리 질식하여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숨을 거두셨기에, 죽음을 확인하려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에 옆구리를 찔렀고 그곳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옵니다.
피와 물이 흘러나왔음은 곧 예수님께서 실제로 돌아가셨음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죽음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봉헌하신 주님의 사랑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이 주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요? 세속적인 편안함과 물질적인 풍요만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철저히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결국 삶이란 여러분이 되고자 했던 완벽한 인격체로 거듭나는 것이다(오프라 윈프리).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앎은
나도 모르게 사랑하는 그 사람들에게 가게 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해 고통받는 사람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절규를
귀담아 듣게 됩니다.
하느님을 대신해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해 등을 다독거려 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로 위로를 건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할 줄 아는 게 사제의 삶입니다.
그게 진짜 사제가 뭔지 아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앎은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앎은
내 삶을 양들을 위해서 살 때 비로소 생겨나는 법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얘기하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복음말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31-37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