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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2. 묵상글 ( 대림 제2주간 화요일. - 우리도 길 잃은 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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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2. 대림 제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도 길 잃은 양
대림 2주 화요일-2016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도 역시 대림 시기에 왜 이 복음을 읽는지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복음을 대림 시기와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거지요.
제 생각에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고,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뜻에서 읽는 거겠지요.
그래서 오늘의 전례는 독서로 다음의 이사야서를 읽습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루카 복음에서는 한 마리 양이 <잃은 양>인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오 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입니다.
작은 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차이가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왜냐면 <잃은 양>은 목자가 잃은 것이고,
<길 잃은 양>은 양이 실수로 또는 일부러 길을 이탈한 것이니까요.
아무튼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입니다.
그러니까 양이 실수로 또는 일부러 목자를 따라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길 잃은 양입니까, 아닙니까?
길을 잃곤 한다면 어째서 길을 잃습니까?
실수로 길을 잃습니까, 일부러 길을 이탈합니까?
우리 신자들의 경우 점쟁이한테 가는 신자가 적지 않습니다.
점쟁이한테 가지는 않아도 유혹을 느끼는 분은 더 많겠지요.
이런 경우 우리는 길을 잃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복음의 가르침 따르지 않고 정치가의 선동에 따라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얘기해주면 그분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제시하는 교회를 오히려 정치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돈이나 권력을 쫓는 분들도 있는데 이분들도 길 잃은 양들이지요.
이런 분들은 돈이나 권력을 쫓다가 주님의 길을 잃는 것은 물론
요즘 잘 볼 수 있듯이 패가망신하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 지금 저의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는
제가 앞에서 열거한 그런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꽤 있을 겁니다.
집안에 시련이나 우환과 같은 큰일이 닥치면
하느님께서 계시는 건지, 나와 함께 계시기는 하는 건지,
나의 고통을 알아주시고 나의 말을 듣고 계시기는 하는 건지,
이런 의심을 하게 되고 우리는 신앙적인 방황을 하게 되지요.
현세의 고통 때문에 하느님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고,
믿음이 굳건치 못한 분들은 결국 하느님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의의 길을 가지 않고
사랑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도 사실은 길 잃은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아닌 사람이 사실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이었거나
현재 <길 잃은 한 마리 양>이거나
미래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일 것입니다.
그러니 목자인 주님께서는 한 마리가 아니라 모두를 찾아 나서시는 것이고
아흔아홉을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김 양을, 다음은 정 양을, 그다음은 박 양을 찾아 나서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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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2.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참 묘한 일입니다. 나무들은 걸치던 옷들을 다 벗고서 겨울을 나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옷을 겹겹이 덧입고서 겨울을 납니다. 겨울나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채웁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자신을 그렇게 채우는 바람에 그분이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도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요? 비워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인류라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이 비유는 “목자의 기쁨”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마태 18,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비록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버지의 기쁨’ 입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정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을 행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목숨을 바쳐 ‘이 사랑’을 행하셨고, 바로 그 일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자이신 ‘당신의 소명’이요,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제 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음성,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에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먼저’ 찾아 나서고, ‘먼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보다 우리 ‘자신의 뜻’과 ‘자기 기쁨’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어디에서 기쁨을 찿고 있는가?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의 뜻”(마태 18,14)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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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2.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나가 소중하다
한 생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골치 아픈 사람을 만나서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다 못된 사람은 아닙니다. 그도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 사랑받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깊고 넓지 않고서는 화병이 나기도 합니다. 마음을 키워서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어야 하겠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치 아픈 사람이든 그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고, 더더욱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見利忘義’(견리망의)랍니다. “이익에 취해 의로움을 잊었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각자의 이익을 더 생각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정당화되는 현실입니다. 분양사기, 전세사기, 보이스피싱 등 신뢰가 무너지고 미래가 불확실해 졌습니다. 이득을 생각하면 한 마리 양이야 버려지면 어떻습니까? 아흔아홉이 있는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셈법은 우리의 셈법과 다릅니다. 한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 졸이고 속을 태웁니까. 누군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의로움은 언제나 지켜져야 합니다.
골치 아픈 사람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의 관심이 요구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좌절하고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골치덩이는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그 사람은 나에게 더 큰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줍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놈 매 한 번 더 때리랬다.”는 옛 말을 기억하며 더 큰 사랑의 요구를 일깨웁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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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2.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번 서울에 갔을 때, 동창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도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번 LA 신문 홍보 갔을 때는 교우 분 댁에서 ‘미생’이라는 만화책을 읽었습니다. 예전에 넷플렉스에서 드라마로 본 적이 있었는데 다시 읽으니 감동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미생이라는 말은 바둑용어인데 아직 완전하게 두 집이 나지 않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살아 있지만 곧 죽을 수도 있고, 완전하게 두 집을 내고 살 수도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인에게 지금의 삶은 어쩌면 ‘미생(未生)’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간다면 부활의 삶, 완생(完生)이 되는 것입니다. 미생에서 완생이 되려면 최소한 두 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려는 삶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은총이 없는 삶의 내용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삶의 내용이 없는 은총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따뜻한 햇볕이 있다고 모두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햇볕을 받아 꽃을 피우려는 뿌리의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꽃이 피는 것입니다.
바둑은 판 위에 돌을 놓는 것입니다. 판 위에 돌을 놓을 때는 ‘의도(意圖)’가 있어야 합니다. 실리를 챙기려는 의도, 세력을 키우려는 의도, 상대의 돌을 공격하려는 의도, 나의 돌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의도가 없는 돌을 ‘사석(死石)’이라고 합니다. 가치가 없는 돌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놓은 돌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의중(意中)’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돌을 놓은 의중을 알면 알맞게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도와 의중이 잘 어울리면 멋진 한판의 바둑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LA에 온 의도는 신문홍보를 위해서입니다. 저의 의중을 잘 알았던 본당 신부님은 제가 신문홍보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봉사자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매 미사 때마다 저보다 더 열심히 신문홍보를 해 주었습니다. 미사 후에는 ‘구독과 신청은 사랑입니다.’라며 교우들에게 구독을 권면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도움으로 저는 구독신청과 후원을 받았습니다. 의도와 의중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는데 ‘정치인’들입니다. 국민들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정책을 마련하는 정치인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성공할 것입니다. 국민들의 의중을 모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정치인은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미주 지역에 ‘가톨릭평화신문’의 구독자 수는 1,500명가량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앞으로 미주 지역 ‘가톨릭평화신문’의 구독자 수가 15,000명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주일미사의 참례 수는 10% 대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이미사 참례 수가 적어도 50%는 될 수 있도록 본당 공동체가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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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2.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참으로 힘든 말씀입니다.
산에서 양 백마리 중에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여러분은 산에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겠습니까? 아니면 한 마리는 아흔아홉 마리를 위한 제물로 바쳤다고 생각하고 아흔아홉 마리를 잘 챙겨서 집으로 돌아오시겠습니까?
저는 아흔아홉 마리를 잘 챙겨서 내려올 것 같습니다. 한 마리 정도 없어도 아흔아홉 마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마리만 잃어버린 것에 안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의 밑에는 사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말에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열 손가락 모두 소중하고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눈에는 아흔아홉 마리는 한 마리처럼 소중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도 한 마리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은 그 숫자에 비례하지 않고 한 마리에 대한 사랑은 백마리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떨 것인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만약 크기와 규모에 따라 사랑한다면,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을 하느님께서 더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은 벌써 균형을 잃은 사랑이며 동시에 사랑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변질된 사랑일 것입니다.
내 모습이 세상이 보기에 못났더라도, 왜소하더라도, 보잘것없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을 느끼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아흔아홉 마리 안에 있는 양일 때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픈 손가락 아닐까요.
그 한마디만으로도….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그림 같은 예쁜 카페를 발견했습니다.
겨울이라 주변이 모두 앙상한데
그곳의 내면은 들어서기 전에 이미
따뜻함이 묻어 나왔습니다.
미닫이문을 스르륵 여는데
네모났고 하얀 얼굴이 반겨줍니다.
그 얼굴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대의 미소는 보석입니다.’
그곳이 따뜻해서인지….
네모난 얼굴의 글씨가 따뜻해서인지….
그곳에 있는 모든 시간이
저를 미소 짓게 하고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대의 미소는 보석입니다. 오늘도,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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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2.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시간 계속 반복되면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변화를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변하는 일은 없다고 단정 짓기도 합니다.
어떤 형제님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직장 동료 중에 도저히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 앞에서는 착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딴생각을 품고 힘들게 일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고, 사랑을 실천하자고 매일 마음 먹으면서도 점점 미워하는 자기 모습에 우울과 절망을 체험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싫은 이유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불안과 미숙함을 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반성하고 성찰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나면 먼저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는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그 자체에 큰 기쁨을 가질 수 있었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 변화된 나와 다르게 보이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이야기를 하십니다. 양 백 마리중에서 한 마리가 길을 잃게 되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내가 싫어하는 사람 한 명이라고 묵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은 정말로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즉, 그 수는 늘 적은 숫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이 자기 무리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잘 되었다. 그런 사람은 없어져야 해.”
이것이 과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들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내가 변하고, 너가 변하고, 우리가 모두 변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 보다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이다(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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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2.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기쁜 소식
“잃은 사람을 찾는 하느님”
-늘 깨어 실천적 회개로 하느님께 화답(和答)하는 삶-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복음 환호송)
아마 거의 20년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매월 두 딸 가정과 한 아들 가정, 그리고 부부가정을 위해 매달 꼭꼭 미사를 봉헌하는 분입니다. 처음에는 다 미혼의 자녀들이었는데 지금은 다 결혼하여 손주들도 많습니다. 그중 “남궁우주”, 한 손녀의 이름을 잊지 못합니다. “우주”같이 크고 귀하다하여 “우주”라 작명한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는 자녀 하나하나가 우주보(宇宙寶)요 세상이듯 하느님께도 우리 하나하나가 그러합니다. 오늘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물으면서 비유를 시작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어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을, 하느님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백마리 양중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둔 채 잃은 양 하나를 집요히, 끝까지, 마지막까지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주님의 마음을 피력합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말씀중에 반드시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잃은 사람, 하나를 찾았을 때의 기쁨이요, 작은 이들 누구 하나라도 잃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라는 말마디는 오늘 복음 앞에도 분명히 언급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심판” 일화에서 주님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관심사이자 기쁨은 “잃은 한 사람”에게 있음을 환기시킵니다. 우리 주변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임은 물론 자신을 돌아볼 것을 촉구합니다. 비유에서는 99마리 양중 길잃는 양은 하나인데, 실제 오늘의 인간 현실을 보면 100중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잃은 양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길 잃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길을, 희망을, 빛을, 자기를 잃고 방황합니다. 심각한 것은 아예 잃은 양같은 자기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존재 망각의 비극보다 큰 비극도 없습니다. 아예 주님을 찾지도 않고 자포자기 절망으로 주님 찾기를 포기하고 지내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물음은 우리 하나하나의 독자를 향합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길잃은 존재입니까? 또는 주님의 공동체 안에, 주님 안에 몸담아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까? 부단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자성과 더불어 더욱 열렬히, 항구히, 한결같이 희망이자 빛이자 길이신 주님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단히 찾아 오시는 주님께만 맡기는 무책임한 자세가 아닌 우리 역시 주님께 화답하여 주님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이 잃은 양같은 우리를 찾아오셔도 우리가 주님을 찾지 않으면 결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대림시기의 주제는 온통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께 집중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요 빛이자 길이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희망과 꿈을, 빛이자 길을 잃을 때 병든 사람, 병든 공동체, 병든 사회, 병든 나라는 필연입니다. 대림시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꿈을 주시고자, 빛이자 길이 되시고자 찾아 오십니다.
그러니 대림시기야말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잃은 양들 같이 희망과 꿈, 빛과 길을 잃은 무기력한 무감각한, 무의욕적 삶이었다면 이 은총의 대림시기 심기일전, 회개와 더불어 날마다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찾아 오시는 희망이자 꿈이요, 빛이자 길이신 주님을 마음 활짝 열고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도 강조했다시피 대림시기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은 우리 안에 희망과 꿈을 팍팍 심어주시고 친히 빛과 길이 되어 주십니다. 이사야서 다음 말씀이 우리를 더욱 하느님께 집중케 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모두가 사라져가는 덧없는 세상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하느님의 말씀에 희망의 닻을 내리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빛과 생명이 충만한 영원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이사야서 말씀이 삶의 광야에서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께 적극적으로 화답할 것을 촉구합니다. 적극적 행동으로, 삶으로 회개의 실천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광야에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과 함께 내 삶의 광야 안팎을 부단히 갈고 닦고 가꾸고 돌보아 평정케 하여 주님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찾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사람을 찾는 겸손한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요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다음 이사야서 말씀도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말고 소리를 높여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끌고 오신다.”
우리 모두 시온이, 예루살렘이 되어 주님 오심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착한목자 주님을 영접하는 대림시기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동안 참 많이 나눴던 “하늘을 담자”라는 제 자작 애송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바로 고요한 호수가 되어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늘이신 주님을 담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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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2.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뜻>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오 18,14)
하나가 있어
하나입니다
하나가 있어
둘입니다
하나가 있어
열입니다
하나가 있어
백입니다
하나가 있어
만입니다
하나가 있어
모두입니다
그리하여
하나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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