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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華의 지름길
이성계는 왕씨 천하의 고려를 완전히 차지하긴 했지만 그래도 민심의 격동
을 피하기 위하여 나라 이름을 여전히 고려 그대로 두고 송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 태조의 묘(廟)를 경기도 마전(麻田)에 건설함과 동
시에 왕씨 후예를 우대할 것을 천명(闡明)하였다.
그래서 국내는 전일과 같이 안온해졌다.
그러나 등극한지 2년되는 해 곧 태조 2년 계유(癸酉=AD 1,393년) 2월에 이
르러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개칭하고 서울을 공주 계룡산(公州 鷄
龍山)으로 정하려다 하윤(河崙)의 말을 듣고 동년 3월에 한양(漢陽=오늘의
서울)으로 결정하고 여기에 묘사(廟社)와 궁궐(宮闕=경북궁과 청덕궁)을
건조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씨 신왕조의 기업이 완전히 세워지기 시
작했다.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개국공신의 한사람이 된 정도전(鄭道傳)은
어느날 대낮에 역시 공신의 한 사람인 남은(南誾)의 첩의 집으로 갔다.
남은은 정도전에게 있어서 없지 못할 동지였다. 남은은 대낮부터 술상을
차리게 하고 피차 세상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삼봉(三奉=정도전의 호)! 오늘은 퍽 심심하시었던 모양이시군요!"
"왜요?"
"이렇게 대낮에 찾아주시니..."
"그런 것이 아니요. 한참 동안 의성군(宜城君) 대감을 보지 못해서..."
'잘 오셨소. 나도 낮잠이나 잘까 하고 있었는데 의관도 다 벗고 술이나
마시면서 얘기나 합시다."
두사람은 남은의 사랑으로 들어가 멋대로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였다. 이
와같이 하고 있는 사이에 술상이 나왔다.
"삼봉, 어젯밤엔 안 주무셨소? 웬 잠을 눕기가 무섭게 주무시오? 일어
나시오. 술상이 나왔소."
남은이 이렇게 말하자 정도전은 몹시 곤한 듯이 기지개를 키면서
"사실 어젯밤은 잠도 잘 자지 못한데다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어서 잠이
온 것 같소."
도전은 새삼스레 양치를 하고 술상 앞으로 다가 앉았다.
"오늘 안주는 골고루 잘 차렸는데 안어사(남의 첩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
음식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어!
"오늘은 웬 칭찬을 이리 하시오! 그만하고 술이나 먹읍시다. 이 술은 보
통 술이 아니고 천일주(千日酒)란 술이요. 삼봉을 위하여 벌써부터 준비
해 두었던 것이요."
남은이 대답했다.
도전은
"그러면 오늘은 술도 좋고 안주도 좋으니 양껏 먹겠소. 대단히 고맙소.
대단히 고마워... "
하면서 자기가 먼저 한잔을 비웠다.
"술맛이 어떻소? 내 말이 틀림없지 않소?"
"참 좋은데... 그런데 대감! 안어사께서도 술 자실 줄 알지?"
"좀 먹는 체하지만..."
"그러면 안어사도 참석케 합시다. 생각이 어떠하시우?"
"상관없소. 참석케 하리라."
그리하여 남은의 제2부인도 술자리에 참석하였다.
이때 정도전은 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가지고 남은의 첩에게
"내 술 한잔 들어보십시오." 권했다.
그러나 남은의 애첩은
"제가 이 좌석에 참가한 것은 술을 먹으려는 것이 아니옵고, 정정승 대감
께 약주를 쳐 올리고자 함입니다. 이를 살피시고 술은 권하지 마십시오."
술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도전은 이말 저말로 대꾸를 하면서 권하였기 때문에 첫잔 한잔만
마시었다. 그러나 물러나지 않고 술을 치면서 권했다.
"그런데 안어사, 상감(이성계)의 정실부인이었던 한씨 부인을 생전에 본
일이 있었소?"
정도전은 이와 같은 말로 입을 열었다.
"저같은 것이 어떻게 그런 어른을 뵙는단 말씀입니까? 그 어른을 뵈온 일
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정도전은 잔 둘에다 각각 술을 가득히 부어 가지고 한잔은 남은에게 다른
한잔은 남은의 애첩 박씨에게 권하였다. 박씨는 여전히 거절하려 하였지
만 도전의 강권에 못 견디어 또 한잔을 비웠다.
도전은 이와같이 술을 권한 후 다시 말을 이어
"그러면 한씨 부인이 어떠한 부인이란 말도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까?"
"항간에 도는 말은 들었고 또 우리 대감으로부터도 들은 일이 있었지요."
"그래 어떠한 여인이라고 말들을 합디까?"
"아주 현숙하시고 씩씩한 부인이었다고 말들을 하더군요."
"그리고 한씨 부인이 상감이 왕업을 성취하기전 55세를 일기로 조사(早死)
하신 것도 알고 있소?"
"그 어른이 별세하신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어른이 몇 살에 돌아가신 것은
모릅니다."
도전과 박씨 사이에 이와 같은 문답이 있게 되자 남은은 술만 마시고 있다
가
"이젠 돌아간 한씨 부인에 대해선 그만 말하고 삼봉을 친정 오라버니처럼
믿고 있는 오늘의 왕비(王妃)마마에 대하여 한 번 물어 보시우?"
하고 말문을 열었다.
도전은 더 이상 묻지를 않고 남은과 함께 박씨가 쳐주는 술을 받아 먹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안어사께서는, 왕비마마에 대해서도 들은 일이 있나요?"
"들은 일은 있어요."
"오늘의 왕비께서 상감의 후취였다고 알고 있나요?"
"아마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러면요?"
"부실(副室)로 들어오셨던 어른이 아닌가요?"
"그런 모양이요. 그런데 그 어른의 성씨(姓氏)를 아오?"
"성씨는 강씨(康氏)라 하더군요."
"집안은 어떠한 집안이랍디까?"
"해주 사람으로 서민(庶民)의 딸이었다고 말하던데요."
"그리고 사람은?"
"아주 꽃같이 예쁘고 달같이 시원한데다가 여자로서의 숙덕(淑德)을 겸전
한 여인이라고 전합디다."
"그리고 왕비마마계서 상감을 몇 살 때에 만나게 된 것도 아오?"
"그건 분명히 모릅니다. 그러나 20전후였던 모양이어요."
"또 상감의 나이는 몇 살 때였던가요?"
"글세요? 나이 40에 귀가 달렸던 때인 것 같아요."
"그때의 상감은 어떠한 지위에 있었던가요?"
"대신 지위에 계시면서 대장군에 계셨죠."
도전은 박씨를 상대로 이렇게 문답을 하고 남은을 상대로 술을 계속해서
먹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안어사, 돌아간 한씨 부인의 소생이 몇분이나 되는 줄 아오?"
"그것도 들어서 알지요. 아드님이 여섯 분이고 따님이 두 분이죠."
"잘 대답했소이다. 그리고 오늘의 왕비 강씨의 소생은?"
"강씨의 소생은 아드님이 두 분 따님이 한 분이지요."
"참 잘도 아십니다."
".... "
"그런데 한씨 부인이 살아 계시었더라면 누가 왕비가 되었을까요?"
"그러야 한씨 부인이 되셨겠지요."
"그러면 오늘의 왕비는 무엇이 되었을까요?"
"오늘의 강씨를 운수가 티인 유복한 분으로 보시오?"
"그렇구 말구요. 아무리 천하일색으로 태어났을지라도 일개 서민의 딸로
서 왕비까지 되시었으니 대복지인(大福之人)으로 볼 수 있지요. 강씨는
도무지 한이 없을 것입니다."
박씨가 이와같이 대답하자 도전은 박씨의 총명에 감동하여 술 한잔을 다시
들어 그녀에게 권하였다. 박씨는 역시 강권에 못 이겨 그 술 한잔도 마시
고 말았다.
"삼봉! 이젠 취하셨소?"
"좀 취한 것 같으이."
"그러면 우리 얘기는 집어 취우고 한 잠 자기로 할까?"
"무슨 술을 많이 먹었다고 자고 말고 한단 말요? 또 얘기나 계속시켜 봅
시다. 이번엔 대감이 얘기를 해보시오. 응수할 테니..."
도전이 이렇게 말하자 남은은
"그런데 삼봉! 강씨에 대한 상감의 태도를 어떻다 보시오."
"매우 좋다고 보오. 상감은 왕비를 정말 미(美)의 여왕, 색향(色香)의 여
왕으로 보는 것 같습디다."
"그러면 상감이 강씨를 천하에 없는 미인중의 미인으로 보고 강씨의 미
(美)와 색향에 반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게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봉은 왕비 강씨에게서 무슨 기색을 못 보셨소?"
"내 눈에는 아무것도 뜨이지 않습디다."
"세자책봉(世子冊封)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한 눈치를 보이지
않던가 말이요."
"그러면 왕비가 세자책봉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이군."
"글쎄, 그런 것도 같애."
"왕비가 자기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세워 보려는 야심을 갖고 있는 모양인
가?"
"글쎄, 왕비의 맘대로 자기 소생의 왕자가 세워질 수 있을는지?"
"세워질 수도 있을 것이요. 상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강씨의 청치고 안
들어 준 게 없다니깐..."
"그러나 자기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봉해 달라는 청만은 들어 주지 않을
것같이 생각되는데 어떻소?"
"그러나 나는 들어 줄 것으로 생각되오."
"어디 두고 봅시다."
"두고 볼 것도 없어. 강씨의 소원이 성취될 테니깐... 오늘의 상감이 누
구를 믿고 사는 줄 모르오?"
"......................."
"강씨 하나야. 강씨가 세상을 떠나면 상감도 아마 세상을 떠나려 하리
다."
남은은 도전의 말을 듣고 새삼스러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나는 지금까지도 태조가 강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런 정도에까지 이른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대감! 보시오 내 말이 틀림없이 들어맞을테니까."
"나도 그렇게 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요. 한씨 부인의 소생이 엄연
히 있는데다 제5왕자 방원(芳遠)이 노리고 있으니까 말이요."
"그러나 자기 아버지의 하는 일을 어찌하겠소? "
"아무리 무서운 아버지일지라도 방원 왕자의 협조한 공이 켰음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어디 두고 봅시다. 상감이 왕비 강씨의 미와 색향에만 사로잡히지 않으
면 세자책봉이 올바르게 낙찰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왕비의 소원이 성취
될 것 같소. 남자란 아무리 잘난 체해도 여자의 미와 교태에는 투구를 벗
는 것 같습디다. 대감, 형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좀 말해 보시
오."
"나 역시 남자니깐 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삼봉은 방원 왕자를 얼마만한
남자로 보시오."
"자기 아버지를 닮아서 수월치 않은 남자로 보고 있지요."
"나는 어느 점으로 보아서는 부친 이상의 결단력을 가진 의지(意志)의 인
(人)으로 보고 있소이다."
도전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가
"글쎄? 그런 경향도 있어?"
"삼봉, 잘 들어보시우. 상감도 왕업을 이룩하려는 꿈을 단단히 품고 있었
지만 방원 왕자는 꿈만 꾸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힘으로 또는 행동으로 이
것의 실현을 위하여 달려들었소. 삼봉도 이를 아실 게요. 오늘의 방원 왕
자는 자기가 바로 부친의 뒤를 이을 왕자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요. 그런
데 강씨의 소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다면 맘 편히 방관만 하고 있을 것입
니까?"
"나도 대감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상감도 이젠 늙
어서 마음도 좀 약해지고 마음이 강씨에게로만 더욱 쏠리는데다 또 막내
왕자가 더욱 귀여워 보일 것이요. 따라서 상감의 마음이 정실 소생의 왕자
나 또는 방원 왕자에게로는 잘 가지 않을 것이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세자 책봉이 강씨의 소원대로 성취될 것 같소. 조
정의 모든 사람은 대감이나 나를 왕비 강씨편으로 보고 있으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왕비를 도와야 하겠소. 그렇게 하는 수밖엔 별 도리가 없
으니까 말이요..."
어느덧 바깥은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
이때 도전은
"형이 고단하시겠소. 이 얘기 저 얘기가 하도 길어저서... 이젠 그만 돌
아가겠소."
일어서려 하였다.
"가시는게 뭐요. 아직도 해가 좀 남은 것 같은데... 우리 세잔갱작(洗盞
更酌)을 해봅시다."
남은이 이와같은 말로 도전을 만류하였다. 그리하여 도전은 또다시 주저
앉아서 지금까지 해오던 세자책봉 문제를 놓고 얘기를 계속시켰다.
"대감! 왕비 강씨를 어떠한 여인으로 보시오?"
"매우 총명하고 입이 무거운 분으로 봅니다."
"나도 동감이요."
"또 무슨...?"
"그리고 눈치도 빠르고 경하지도 않은 분이니까 세자책봉 문제도 자기가
먼저 내놓지는 않으리다."
"글쎄 그럴 것 같애. 그래야만 안 될 일도 될 수 있지!"
"이런 문제를 자기가 먼저 내놓고 달려들면 도리어 동정을 잃을 테니까...
나도 그만치 현명한 분임을 알고 있소."
"그러니까 우리가 협조자로 되기에도 좋지 않겠소?"
"물론이지요. 하여간 왕비 강씨는 아름답고 유덕하고 현명한 품이 왕업을
성취한 임금의 아내됨직한 분이야. 두 분이 잘 만난 셈이지!."
남은은 이와같이 말하고 또 박씨를 불러 술을 권하게 하였다.
도전은 박씨가 주는 잔을 받아 들고
"이젠 서산에 걸렸던 해도 떨어진 것 같소. 그만 먹고 그만 지껄이고 돌아
가야 하겠소. 너무 오랫동안 폐를 끼쳐서 할 말이 없소이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감,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먹고 마음껏 놀다 돌아가오. 일간 우리 집
에서 한잔 나누기로 합시다. 그러나 우리집엔 천일주가 없어서 걱정되는
데... 하여간 일간 만납시다."
도전은 이와같은 말을 남겨 놓고 남은의 집을 등졌다.
남은은 도전을 보낸 후 새삼스럽게 술기가 돌아 자기 사랑에서 쓰러져 자
고 말았다. 한 밤중쯤 되어서 잠을 깬 그는 냉수를 찾으면서 내실로 들어
왔다.
제2부인 박씨는 벌써부터 준비해 놓은 냉수를 내놓으면서
"어서 들어오세요. 여기 냉수가 있어요."
하며 반겼다.
남은은 냉수를 두어 대접 들이킨 후 정신을 차리고 아랫목으로 자리를 잡
고 또 누웠다.
박씨는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 앉으며
"저녁진지는..."
하고 물었다.
"저녁 생각이 없소."
"그러면 굶고 주무시겠어요?"
"글세.... 있다 봐서..."
"그런데 대감! 아까 정대감께서 한씨 부인, 강씨부인에 대하여 알알 샅샅
이 물으시니 웬 까닭이예요?"
"웬 까닭은 뭣이 웬 까닭이야, 우리 남자의 생각과 여자의 생각이 어떠한
가 해서 물어본 것이지."
"무슨 딴 의미가 있어서 물은 것이 아니란 말씀이죠?"
"그럼."
"첩은 너무도 이것 저것 별 것을 다 물으시기 때문에 겁이 났어요."
박씨는 이렇게 말한 후 다시 말을 이어
"대감, 피곤하신데 미안합니다만 첩하고도 얘기를 좀 해보세요."
"무슨 얘기를?"
"낮에 정대감과 주고 받고 하시던 얘기 말씀예요."
"응? 세자책봉 얘기?"
"그래요. 그 얘기 말예요."
"그건 뭣에 소용되어서?"
"그저 알고 싶어서요."
남은은 이 말을 듣고 또 냉수 한 대접을 들이킨 후
"그러면 물어 가면서 얘기를 할 테니 잘 들어 보오."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세자(世子)란 뭣을 말하는 것인줄 아오?"
" 세자란 임금의 아들로서 부왕의 뒤를 이을 왕자가 아네요?"
"그래 맞았소. 그러나 왕자라고 다 아버지 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정실 부인 소생의 아들로서 여럿이 있게 되면 그 중에
서 장자를 세자로 결정하는 법이야. 그런데 본궁(본비)에게는 아드님이 없
고 후궁에게 아드님이 있으면 그 중에서 역시 장자를 세자로 세우는 거야.
알겠어?"
"그런데 우리 상감께서는 아드님이 없나요?"
"웬걸. 돌아간 본부인 한씨가 낳으신 아드님으로 지금 살아계신 분이 넷
이나 있고 또 왕비이신 강씨의 소생도 두 분이나 있는데......"
"그런데 왜 세자책봉 문제를 내놓고 이말 저말들을 하세요?"
남은은 이 질문을 받고 잠깐 뭣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그대는 한씨 강씨 두 부인의 소생중 어느 부인의 아드님이 세자로 결정되
는 게 좋을 것으로 생각하오?"
남은의 물음에 대하여 박씨는 잠깐 대답을 멈추고 있다가
"한씨 부인이 정실 부인이었죠?"
"그래 한씨가 정실 부인이었어!"
"그러면 한씨 소생의 아드님중에서 세자가 결정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상감은 왕비 강씨와 강씨의 소생인 왕자만을 귀엽게 보고 마음이
이리 저리 흔들리는 모양이야."
"그러면 말썽이 날 것 같은데요. 오늘의 상감은 이 나라에선 다시 얻오보
기 어려운 대영길이시라고 말들을 하는데, 그런 어른이 일을 어찌 그렇게
처리하시려 할까요?"
"글쎄, 여자의 요염과 교태에는 왕후장상(王侯將相)도 별 수 없는 모양이
지."
"글쎄요? 천하를 정벌하시던 상감께서 일개 여자에게 정벌을 받고 투구를
벗으려 하시니 딱한 일이올시다. 이젠 두 분이 주고 받고 하시던 얘기 내
용을 잘 알겠어요. 저녁 진지나 잡수세요."
박씨는 이와같이 말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남은은 저녁밥을 밤중에야 먹은 후 다시 박씨를 자기 앞으로 불러 앉히고
"좀 더 얘기할 말이 있는데 들어 보겠소?"
말을 걸었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아까 얘기에 계속되는 것이야."
"그러면 또 들어 보겠어요."
"잘 들어봐. 아까도 얘기한바와 같이 세자를 책봉하는데는 첫째 적자(嫡
子)중에서 발탁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적자가 아닐지라도 발탁할 수가 있단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들어 봐!"
"..............."
"이제 말한 것은 평상시의 경우를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야. 난시(亂時)에
있어서는 달라!"
"어떻게 달라요?"
"난시에 있어서는 평시에 있어서와 같이 적서(嫡庶)를 가리지 않고 공(功)
이 있는 왕자를 택하여 그로 하여금 세자가 되게 한단 말야."
"그러면 우리 왕자님 중 난시에 공을 세운 분이 계신가요?"
"계시고 말고!"
"어느 왕자세요?"
"한씨 부인의 소생 중 제5왕자로 계신 방원(芳遠)왕자야."
박씨는 이 말을 듣고 저으기 놀라서
"제5왕자이신 분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공을 세웠던가요?"
이때 남은은 새삼스레 박씨를 주시하면서
"상감이 왕업을 성취한 것이 모두 다 제5왕자이신 방원왕자의 공이야. 이
왕자가 선두에 서서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상감은 오늘의 성공이 있을 수
가 없었을 거야."
"그러면 상감은 제5왕자 덕에 소원이 성취된 셈이군요."
"그럼, 그러니깐 제5왕장는 당당한 적자인데다 건국(建國)에 공을 많이 세
웠으므로 상감도 제5왕자의 존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 아냐? 그런데 상
감의 태도가 선명치 못해서 모든 사람은 세자책봉에 대하여 이말 저말을
해가면서 의심음 품고 있는 것 같애! 이런 점에서 생각하면 왕비 강씨 소
생의 왕자는 세자로 책봉 받을 권리가 없을 게 아냐? 그런데 그대의 생각
은?"
"글쎄요. 제 생각 같아서는 강씨의 소생을 상감이 세자로 봉하려 하실지
라도 강씨가 받아들이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신다면 한씨 부
인 소생의 여러 적자들도 왕비 강씨를 성스런 어른으로 우러러 볼 것이고
또 나라도 안온해질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박씨는 이와같이 대답한 후 잠자리를 펴기 시작하였다. 밤은 이미 깊어져
삼경(三更)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