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 글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여덟 가지 주제로 읽기를 한
프랑스 작가 앙투안 콩파뇽의 글을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미로 같은 시간
예술에 있어 역사적인 사건은 새의 지저귐보다 덜 중요하다고 주장한 푸르스트는 사실주의 소설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1913년에 그의 책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독자들은 그것을 동시대에 일어난 일들을 다룬 소설로 간주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연대기를 읽으면서 그것을 푸르스트의 일생에 연결시킨다. ‘스완네 집 쪽으로’가 1880년대에서 1890년 대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시간이 흐른다. 줄거리는 거의 푸르스트의 일생의 연대기를 따라간다. 어떤 인물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이미 할머니였으며, 되찾은 시간에서는 상당한 년배로 나오는 하녀 프랑수아즈처럼 늙지 않는다.
푸르스트는 시간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글로 옮기기를 희망했다. 그의 소설 속에는 날짜들이나 지표들이 거의 없지만 여러 경험과 추억, 시대들이 병치되어 있으므로 그 희망은 성취된 셈이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그렇게 무질서하지 않다. ‘스완네 집 쪽으로’ 초반부터 화자는 자신의 추억에 남은 방들을 기억나는 순서대로, 그러니까 무질서하게 탐색하겠다고 알린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는 거의 연대기적 순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콩브레’는
어린 시절으, ‘꽃다운 소녀들의 그늘에’는 사춘기 시절을 다루고 있으며, 화자는 알베르틴과 함께 어른이 된다. 무작위적인 방들의 순서가 아니라. 주인공의 나이 들어감이 소설을 풀어나가는 실마리이다. ‘콩브레에서 뒤 이어나오는 ’스완의 사랑‘에서는 예외적으로 주인공의 탄생 이전시절, 즉 스완과 오데트가 사랑하던 시절로 돌아간다.
그들의 딸 질베르트가 주인공과 동시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삼인칭 시점으로 상세히 묘사되는데 소설의 나머지 부분에 비해 보다 상투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어서 오늘날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1913년 독자들에게도 비교적 덜 당항스러운 편이었다. ’콩브레는 우리에게 주인공의 기억, 즉 그의 신체 및 감각의 기억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이것은 프로이트와 동시대의 책이다. 유년기의 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은 프로이트의 작품과 나란히 20세기 내내 독자들을 확보했다. ‘콩브레’의 초반부터 등장하는 수음장면은 당시의 소설에서나 오늘날의 소설에서조차도 흔치 않은 일이다.
위와 같은 다중적인 시간처럼 화자 자신도 다중적이다. 독자들은 그가 아이일 때 만나 어른이 되었을 때 헤어진다. ‘나’는 여러 층을 지니고 있다. 1913년 ‘르 텅’지에 소개되어 있는 인터뮤에서 푸르스트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철학자 베르그송을 언급했다. 그는 베르그송과 거리를 두면서도 베르그송을 표방했다. 푸르스트는 자신이 한 작업 자체는 달랐을지라도 자신의 책이 베르그송을 연상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베르그송의 세계는 푸르스트나 프로이트 세계처럼 ‘나’의 복수성이 중심을 이룬다.
푸르스트의 소설이 문체 소설은 아니지만 푸르스트에게는 하나의 고정 관념이 있었다. 나는 여럿으로 분할되어 있고, 일관성이 없으며, 사회적 자아와 심층의 자아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작가는 이 ‘나’와 함께 쟉폼을 생산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두 개의 ‘나’ 또한 ’단속적인‘ 여러 층들로 만들어진다
자신의 책에 관해 이야가하기 위해 프루스트는 성당과 트레스라는 두 가지 비유를 들었다. 하나는 고귀한 것으로, 프루스트가 러스킨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한 이래 애착을 가져온 건축물의 비유이며, 다른 하나는 보다 수공업적인 것으로, 글쓰기를 수작업과 같은 부류에 연결시키는 비유이다. 프루스트는 노트에 글을 썼고, 그 노트에 의한 기억들로 둘러싸여 지낸다. 침대에 누운채로도 원고의 초안이 그 노트들 중에서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장인처럼 그것을 다시 찾아냈다. 푸르스트는 상세히 설명한다. 그는 우선 노트의 앞장에만 글을 쓰고 뒷장은 나중에 첨가할 부분을 위해 남겨두었다. 그리고 뒷장으로도 자리가 모자라면 노트의 가장자리에 썼다. 거정저라머조 꽉 차고 나면 노트의 앞장부터 별도의 종이를 풀로 붙였다. 아무 종이에나 휘갈겨 쓰고 그것을 필요한 곳에 붙였다. 타자기로 타이핑한 원고의 교정쇄는 주름이 잡힌 엄청난 종이 두르마리가 1미터도 넘게 펼쳐지기도 했다. 프루스트의 원고는 문학 창작의 본질을 예시하는 훌륭한 물건이다.
문학 창작은 엄청난 작업을 요구하지만 끝나고 나면 그 작업은 은폐되고 만다. 사람들은 푸르스트가 사교계의 인물이기 때문에 말을 하듯이 술술 원고를 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50년대에 초고가 출판되었 때, 사람들은 그가 일벌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화자는 시종일관 시간을 가지고 즐기며, 그 법칙들에 저항하고, 이 소설이 혼란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표면상의 이런 무질서 뒤에는 진정한 밑그림이 숨어 있다.
푸르스트에 따르면 글쓰기는 전적으로 옷을 짓는 일과 같다.
-되찾은 시간-
(*문학작품은 엄청난 작업을 요구하지만 끝나고 나면 작업은 은폐된다. 이 말은 독자는 작품만 읽지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얼마나 힘든 작업을 하였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글을 읽을 때는 은폐된 것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요즘 프루스트에 빠져있습니다. 좋은 정보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