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다가/
화석에 갇힌 동물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굳어가는 뼛속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그 소리에 세뇌 당한 내가 화석에 갇히고 벗어난 그들이
활보하는 모습을 난 물끄러미 보고 있어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이를테면,
거대한 소금덩이 안에 갇혀 마르지 않은 바닷물에서
수세기 전의 미생물을 깨우듯
한 점 뉴클레오티드로 수세기 후에 나를 다시 깨울 수 있다면
그때,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태양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어
아마 땅 속에 사는 환형동물이거나
피부가 딱딱한 갑각류일지도, 그때에도
지금의 내 모습으로 깨어난다면
아마 어떤 미생물의 숙주로 연구 대상이 돼 있을지도 몰라
ET를 연구하듯
이런 상상을 하다 잠드는 날엔
죽어도 땅에 내리지 않는다는 새를 찾아
날개 없이도 막 날아다녀, 그런
아침이면 겨드랑이가 자꾸 무거워 푸드덕거리다
우듬지에 뾰족이 앉아 있어도
한참동안 내 몸은 자꾸만 하늘로 미끄러져
우체통 안에서 본다/
3층 식당 창가에서 대합실을 내려다본다
편지가 가득 담긴 우체통 같은 서울역사에
나는 한 장 수취인불명의 편지
앉아서 어디론가 떠날 시각을 기다린다
검은색 계통의 추위에 겉옷을 입은 사람들
또 밀려왔다 앉았다 빠져 나간다
생전 처음 와 본 곳에서 귀를 열고
본다. 하루 아침이 기적 울리며 저물 때
어룽이는 생의 그림자는 썰물처럼 길다
게걸음 치듯 벌벌 살아온 날들과
둥근 내 이름을 부르며 오는 뻘 같은 물결
저녁 물결이 흘러 연하게 깔린다
간절곶 빨간 우체통 안에서
비에 젖는 바다를 본 적 있다
대합실 무수한 발자국소리 그리운 날
높아서 더 외롭고 쓸쓸하게* 울리는 별처럼
처음 바다를 보았을 때 가슴으로
눈이 내려 쌓이는 한밤중이다
기억만큼 말랑말랑해진 어둠을 뚫고
어디론가 떠나는 열차 우체부
날 바라보는 별빛처럼 사람들의 정수리로
도둑눈 형광 불빛이 쌓이기 시작한다
줄을 서서 해후하지 못하고 기다리던 환(還)
바람 불면 맨 나중 기억 속으로 끌어다
한 줄 편지로 다시 출렁일 것이다
*백석 ㅡ "흰바람벽이 있어"에서 인용
북극곰*/
잘 죽지 않는 해파리들의 번식이 늘고
북극곰들은 서식처를 잃고
바다코끼리들도 떼죽음 당하는 바다
생태계의 혼돈이 나타나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있을 때
해독할 수 없는 언어와 울음소리가 벽을 뚫고 건너온 날
옆집에 북극곰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극곰은 더는 흰털을 지니지 않았고
팬더 눈을 하고 집 앞을 배회하는 날이 많아졌다
페로몬 냄새를 맡고 꽃나루공원으로 몰려드는 것처럼
점점 그 수가 늘어나는 북극곰들
낯선 유랑이 고단한 유빙 위에 위태로웠으나
마늘을 더 먹어야 했을까…
사람이 되지 못한 이름으로 목숨의 변방을 배회하는
저 순한 흰털
한 번쯤 바다 서식지에 영혼을 풀어놓으면 어떨까
* 북극곰은 코피노를 비유한 말로
코피노(Kopino)는 한국인(Korean)과 필리핀인(Filipino)의 합성어로,
한국 남성과 필리핀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말한다.
김치담그기/
나를 뿌리째 흔든 건 당신이지만
간을 친 건 나 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제맛이 아니더라도
강원도 어느 산골 고랭지 배추가 아님을 탓하지 않고
어느 지방 손맛 운운하지도 않는다
겉잎 같은 무성한 말 따윈 웃어넘기고
우리 사랑 이야기하나 쯤
양념으로 켜켜이 얹어
배춧잎처럼 몸 포개고 눕자
매운맛 쓴맛 고루 익혀
우리 옷고름 푸는 소리, 숨소리에
달빛이 눈을 질끈 감고
놀란 삽살이가 컹컹 짖어대는 소리마저
매우 사랑스러운 밤
익숙하게 숙성된 마지막 한젖가락까지 당신 입속으로 달려가
입맛 돋우는 사랑이고픈,
비 오는 날/
속엣것 게워내듯
이틀째 토란대 같은 초록비를 쏟아내는 날
프릴 달린 오렌지색 우산을 쓰고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이팝나무꽃 아래를 걷는다
방어동 주민자치센터 사거리, 동구당 열쇠집
살짝 열린 문 틈으로 습기를 머금은 실리카겔처럼 축축한 샹송이 흘러나온다
더 이상 사랑 여행은 떠날 수 없다*는
그의 목소리가 빗줄기처럼 발아래로 떨어진다
LP판이 긁혔는지
나의 마음은 감옥과도 같다고 헤메도는 노랫말
흐르지 못하고 비에 젖는다
*조르쥬 무스타키의 우편배달부라는 노래
칠월엔 비에서도 여름향기가 난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그의 여름 잠바를 머리에 함께 쓰고
시외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그가 옷을 내 쪽으로 더 내주었다
비에 젖은 실크블라우스처럼
그의 마음이 내 몸에 착 달라붙는다.
달려갈수록 정류장이 멀어졌으면
버스에 오르기 전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 이별, 처음으로 맞잡아 본
손, 그의 손에서 슬픔이 배어 나온다
돌아오는 길 천천히 비를 맞는다
흠뻑 젖으니 얼룩이 없다.
만추/
경추뼈가 삐뚤어져 여러 날 한의원을 찾습니다
잊을만하다가도 불쑥 도지는 첫사랑처럼 한참을 옳게 잡아야 할 모양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태화강 억새밭에 차를 세웠습니다
멀리 태화강 하구 바닷물이 뜰채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는 물고기와 같은 이름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봅니다
시간 밖으로 밀려난 그림자가 길게 누벼지고 있습니다
태화강 길머리에 억새가 가을 가득 침을 놓고 있습니다
온전치 못한 몸,
가슴부터 저리는 날 많았었나 봅니다
저무는 강가 억새가 석양빛을 받아 적고 있습니다
감을 깎다/
감을 갂아 먹기 좋게 썰다가 감씨가 반으로 잘렸습니다.
감씨는 그 딱딱한 씨앗 속에 감나무 한그루를 고이 품고 있었습니다.
문득, 우리가 모르고 지냈던 마음에도 씨가 있어
감씨처럼 미래의 나무를 품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씨앗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꽃을 피우는 것 같지만
우리 삶의 농 같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듯 마음씨에는
어쩌면 절망속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작은 희망을 꿈꾸는 행복나무 한그루를 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행복나무를 생각하니 슬몃 번지는 미소속에 스치는 얼굴이 있습니다.
오늘 나는 홧홧한 마음씨를 당신의 가슴속에 심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아니 우리의 미래가 행복해질 수 있는 행복나무 한그루를
겨울비/
3층, 밖을 내려다본다.
무슨 놈의 겨울비가
이리 거칠게 내린담.
한 밤 내내
일필휘지로 갈겨쓰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 적는 땅을 바라본다.
머물 수 없음에 스치듯 만나
나를 기억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저리 거칠게
나도 네 가슴을 후벼 팠으리.
설령 우리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하더라도
땅이 가슴 열어 저리 고이 품듯
지금은 순하게 너를 품으라고
겨울비가 나를 고쳐쓰고 있다
돌멩이에 한 획을 긋다/
약속 없이 무작정 들러도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약속다방.
그가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하회탈 같은 시인의 웃음이 내게서 일체의 경계를 해체시키고 만다.
여수에서 정선까지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는 그가
여수나 정선 어디쯤에서 직접 주었을 조그맣고 새까만 몽돌 하나를 내게 건네준다.
그의 손아귀에서 오랜시간 홧홧해졌을 돌멩이,
반들반들하고 낯선 사유가 고스란히 내게 전해지며 내 손바닥 안에 문득 강물 한 줄기 깊어지는 걸 본다.
어느 강가에서건 그는 *서쪽을 바라보았을 테고 그가 바라보는 서쪽이 늘 궁금하였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비록 손바닥 안이어도 그가 거쳐온 강을
따로 똑같이 건너려는 나는 아주 잠깐 구름이라도 되어 서쪽 하늘로 흘러가 본다.
그 풍경 속에 아직까지 일말의 기척이나 실낱같은 여분의 연민이라도 남아있다면 단단히 붙들어 반드시 한 획을 긋고 말거니.
*서쪽:문인수 시인의 '서쪽이 없다'에서 빌림.
부재/
문재사거리 꽃나루 공원
바다가 바람 냄새를 풍긴다.
휘청대는 바람 소리에 밤이 깊었다는 것을 안다.
공원 한귀퉁이 느티나무 삭정이에 얼기설기 처 놓은 거미줄
아무것도 걸려있지않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띄워주던 그네도 멈췄고
목줄 풀려 아무 데나 오줌을 갈기고 다니던 개 한 마리마저 보이지 않는다.
공원 맞은편 아파트 불빛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깊게 빨아 땡긴 담뱃불같은 별빛,
별빛 내린 풀 섶,
풀의 온기로 젖은 입술을 말린다.
꼬깃꼬깃 접힌 내 가슴도 정말 따뜻한 것이 필요한데
도대체 울리지 않는 전화기,
나와 말없이 앉아 있다
바다악어/
이상기온과 강풍주의 속보가 뜬다.
창문 너머로 훤히 내려다 보이는 바다
파도, 굶주린 악어떼처럼
갯바위를 물어 뜯는다, 물어 뜯으니
육각기둥의
주상절리
해탈/
한적한 바닷가 빈집 한 채 비바람을 맞고 있다.
그 집 앞 선착장에 폐선 한 척 묶여 있다.
만선의 꿈으로 설레던 적도 많았으나,
빈집을 향하고 있는 폐선 뱃머리.
서로 마주보며 무너지는...
나루에 메인 낡은 줄을 끊으며 늙은 어부가 수평선을 바라본다.
낙화/
청소부로 일하던 그녀가 잘렸다
늙은 그녀가 옷을 벗었다
그녀의 쪼글쪼글한 몸,
과부꽃이라 불리우는 목련, 고목나무 한 그루 시위중이다
만우절 날, 거짓말이 어수선한 뜨락에
목련꽃이 진다
삶/
백숙 먹으러 가창 숲 가든에 갔습니다.
계곡과 마당에 즐비하게 깔아놓은 평상엔 벌써 삼삼오오 사람들이 앉아 있네요
우리는 마당 마지막 지점 평상에 자릴 잡았습니다.
바로 옆 평상에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
상수리나뭇잎 갉아먹는 소리처럼 시끄럽더니
이리저리 모로 누워 무슨 애벌레 같더니
돌아눕고 또 돌아눕는 동작이 굼뜨더니
지금 산벚나무 가득 애매미가 요란하네요
한 쌍의 휴식/
물길 따라 해안도로 걷는 남녀가 자꾸
입술이 닿을 듯 고개 돌려 눈 맞춘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줄줄이 길게 늘어선 차들
며칠째 변비 걸린 아랫배처럼 갑갑하다
공연히 바람의 얼굴이 달아오를 때
여자는 오히려 반음을 높여 콧소리를 낸다
주린 배 달래며 홰나무 그늘은
강둑 지나 마당 한 귀퉁이 되돌아 나온다
물빛 반짝거리는 이파리에 붙어 있는 어스름
집 비운 저녁 물결처럼 눈에 띈다
앞선 남자의 은빛 머릿결, 저 물결 갈대 속,
빽빽한 대숲이 환호처럼 시퍼렇게 도열할 때
내 속엣것, 독한 시샘이 앙칼진 비명을 질렀는지
물 위에 원앙 한 쌍이 후다닥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