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투입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잇따라 나오면서 민주노총 임원, 산별연맹 대표자, 서울지역 병원노조 간부들, 학생들이 '당번' 조합원들과 함께 파업 현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찰 투입이 임박했다는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에 비해 분위기는 오히려 차분했다. 이미 잠든 조합원들도 있고,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이들도 보인다.
"겁 하나도 안 납니다. 소화기 분말가루, 물대포로 얼굴을 맞아 보셨나요?" 100일 파업을 벌이면서 서너 번의 폭력 사태를 겪은 경희의료원 조합원들은 '충돌'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진 느낌이다. "얼굴 뻔히 알고 있는 직원과 싸우는 게 더 가슴 아프지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경찰인데…. 설마 소화기, 물대포를 쏘는 건 아니겠죠? 정말 악만 남았습니다." 14년 경력의 간호사 이아무개 조합원은 '충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공권력 투입이라는 정부의 '행태'에 더 기가 차다는 반응이었다.
"정부가 장기파업 사태를 해결하는 마지막 방법이 공권력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얼마나 잘 이겨내는지 똑똑히 보여줄 겁니다. (공권력 투입되면)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재집결해 2차 파업을 이어갈 겁니다." 옆에 앉아있는 후배 간호사도 말을 잇는다.
"정말 울화통이 터집니다. 파업 99일 만에 처음으로 차관이라는 사람들이 와서 삐죽 얼굴 내비치고 갔어요. 노동자 출신이라는 노동자 장관이 이곳에 한번이라도 온 줄 아십니까? 자기도 노동자였으면서 왜 이렇게 우리 입장을 몰라주는 건지 너무 속상해요."
이날 조간신문에 방용석 노동부 장관이 '의사들은 개인이 아니라 회사 이익을 위해 파업을 했지만, 노조원들의 파업은 회사를 위한 파업이 아니어서 의사 파업 때와 달리 무노동무임금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 보도되면서 조합원들은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며 치를 떨었다.
간호사들 건너편에는 40, 50대 '아줌마' 조합원들이 모여 있다. '공권력 두렵…'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벌써 20년 넘게 급식과에서 일한다던 '아줌마' 조합원들은 가슴에 담아 두었던 것을 토해냈다.
"우리가 배우진 못했어도 뭐가 옳고 그른지 다 알아요. 공권력 투입이요? 우리가 범법자입니까? 정당한 파업이에요. 돈 몇 푼 올리려고 파업했다면 어제 정년 퇴임식한 선배들이 왜 끝까지 남았겠습니까? 노조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그 동안 맘 편하게 일할 수 있게 지켜줬던 '우리 노조' 지키려고 어깨, 허리 아파도 '꾹' 참고 시멘트 바닥에서 자는 겁니다."
정치인도 대통령도 히딩크처럼 수입해야 한다. 이번 월급 명세표에 60원이 찍혔는데 의료원이 약올리려고 그랬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병원 비리만 수십 가지다. 의료원장은 우리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폭력 사태 일어났을 때 자신에게 물대포를 쏜 직원이 친구 남편이다…. 100일 파업은 이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긴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공권력이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공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정부, 병원, 경찰의 생각입니다. 노동자는 동의 한적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권력으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그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나이 든 급식과 한 '아줌마' 조합원은 오늘 집을 나서면서 다른 날보다 조금 더 큰 냄비에 국을 끊였다고 한다. 공권력이 투입되면 48시간 경찰서에 있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이들 국은 먹여야죠."
농성장인 병원로비를 나선 때가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는데도 비는 계속 내렸다. 병원 로비 유리창 너머로 잠든 조합원들의 평온한 얼굴이 눈에 가득차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