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5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주께서는 파레시아 곧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히 10:35).
하지만 나는 담대함을 잘 몰랐습니다.
그저 나의 객기로 붙드는 나의 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의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의를 붙드는 참된 믿음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주님의 의를 붙드는 것조차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이었습니다.
나의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담대하게 붙들 수 있는 믿음의 근원을 선물로 주신 주님을 이 시간 온전히 바라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예수로 부요한 자 되기를 원합니다.
날 주의 것으로 장악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17:1-12
제목 : 하나님 아버지의 면류관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광의 빛으로 삼는 자.
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2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4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7 지나친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8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10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11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받으리라.
12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 나의 묵상
(1)마른 떡 한 조각으로 살지라도 화목한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낫다.
마른 떡은 가난과 질병, 여러 가지 상황적 고난이 닥쳤을 때를 말한다.
이 마른 떡의 상황은 때론 내 심령이 메마르고 뼛속까지 고통스러운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화목하고 평강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근거는 내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아들에게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
그와 같이 이제는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어 우리 안에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들어진 아담의 생명에서 위로부터 태어난 아들의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만물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넉넉히 초월하여 날마다 영원에 잇대어 살아갈 수 있는 근거이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날마다 말씀 묵상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이 계시는 그 나라, 창세전의 세계로 나아가는 자는 비록 마른 떡 하나만 있을지라도 그것이 그의 영혼과 삶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양식은 뭔가 다르기 때문이다.
육신은 비록 마른 떡을 먹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살이요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생명을 주는 영과 함께 날마다 먹고 기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먹을 것이 풍부하고 돈이 많고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할지라도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 삶은 날마다 다투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
현상적으로는 평안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으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평안이요, 위장된 평안이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옥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곳이 지옥인 것이다.
(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자신을 다 내어주는 다함이 없는 사랑이다.
나의 큰 아들 은수가 태어났을 때 그를 향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다치셔서 심하게 절뚝이는 장애인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자를 얻은 기쁨과 그 사랑은 당신의 장애를 뛰어 넘는 것이었다.
매일 뒷산에 있는 약수터에 올라가서 양쪽 손에 약수 두 통을 들고 오셔서 그 물로 손자 목욕을 시키셨다.
그 일은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1년 넘게 지속되었다.
외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그야말로 지순하면서도 다함이 없는 사랑 그 자체였다.
은수를 낳을 당시는 우리 부부가 과외와 학원을 할 때였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손자를 돌보셨다.
외할머니는 손자 돌보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하셨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할머니에게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을 받고 자란 손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의 섬김을 알지는 못하지만 영으로 느끼는 것 같다.
그 손자 역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특별한 정을 느끼며 남다르게 잘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으로 하나 된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면류관이요 영광이 되는 것이다.
손자와 노인의 관계나 아비와 자식의 관계는 꼭 물리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주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를 말한다.
일주일에 하루 예배 시간에만 도장을 찍고 삶에서 전혀 주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예배 시간에 전하는 설교 외에는 말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이런 이들은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된 자들이 아니다.
고난이 오면 말씀 앞으로 나아가 그 고난의 무덤 안에서 주님과 함께 성소를 짓기보다 오히려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참된 손자는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를 기뻐하는 자이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주님을 즐거워하는 자를 말한다.
말씀 속에서 영원에 잇대어 살아갈 때 비추어지는 영광의 빛을 보는 자이다.
이런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면류관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광의 빛으로 삼는 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면류관으로 살지 못하였다.
항상 숨어서 딴 짓을 하는 자였다.
그렇기에 사람에게는 칭찬을 받는 자일 수 있으나 하나님 아버지의 불꽃같은 눈은 피할 수 없는 자였다.
무엇보다 믿음이 무엇인지, 목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여 오해한 자였다.
그렇기에 교회의 부흥이 단지 숫자가 많아지는 것으로 생각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숫자를 늘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할 수만 있다면, 세상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고 가져다 사용하였다.
교회인지 세상의 기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분별하지도 못하였고 신앙은 혼돈 그 자체였다.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 천국에 가는 보장보험쯤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나의 삶에서 말씀이 실제가 되지 않고 항상 관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 성도들을 위로하는 말, 성도들이 은혜받도록 하기 위하여 세상의 유머를 사용하여 웃기려고 애쓰는 자였다.
한 마디로 설교는 쓰레기 잡탕이었다.
나는 그런 무익한 것을 설교라고 한 자였다.
그동안 나의 삶과 신앙, 그리고 지난 목회의 여정을 돌아보면 부끄럽기 그지없고 정말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중심의 목회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목회였기에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나는 하나님의 면류관이 될 수도, 주님이 나의 영광의 빛이 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참으신 주님은 그런 나에게 찾아 오셔서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주시고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다.
그리하여 관념적인 영생이 아니라 그 영생이 나의 삶에서 실재가 되게 하셨다.
날마다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 앞에 나아가게 하시고 말씀 묵상을 통하여 아들이 보았던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 하신다.
그것이 나의 기쁨이요 또한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시는 것이다.
새 언약의 백성은 남에게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큰 자나 작은 자나 각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이다.
새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가야 한다.
존재이신 말씀 앞에 나아가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것은 오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땅한 삶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면류관이요, 또한 주님을 영광의 빛으로 삼는 자의 마땅한 본분이다.
내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말로 다할 수 없다.
외할아버지가 손자인 은수에게 베푼 사랑은 실로 크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아들의 생명을 주신 것은 그에 비하면 비교불가이다.
이것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천하보다 큰 사랑이다.
이제 나는 그 아버지께 입이 만 개가 있으면 그 입으로 오직 주를 찬송하며 살기를 원한다.
나의 남은 인생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으로 살기 원한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면류관이요, 또한 주님을 나의 영광으로 삼는 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 때는 주님을 잘 몰라서 그저 그것이 비참한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비참해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나에게 평안은 물질이 가져다주는 부요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압니다.
참된 평안은 물질이 아니라 주님께 있음을 말입니다.
평안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날마다 주님의 존재 자체이신 말씀 앞에서 묵상하며 주님을 아는 것, 그것이 평안이요 기쁨이며 영생입니다.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이 있을 때 그것이 주님을 아는 것이며, 영생입니다.
그런 삶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스런 면류관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주님만을 나의 유일한 영광의 빛으로 삼게 하소서.
무지한 이 종을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