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6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국학원 단기연호 학술회의에서 발표하는 임채우 교수(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국학과)는 10월 26일 국학원이 주최한 제24회 학술회의 ‘단기연호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단군영정과 단기연호를 중심으로 해방 후 단군인식의 변화와 문제점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
임 교수는 “단군은 고대로부터 국조로서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일본 강점기와 같은 혼란한 시대에는 민족을 지켜주는 위난극복의 구심점으로 작용했다.”며 60~70년대 단기연호와 표준 국조영정 제정 등에 대한 정부의 조치, 80~90년대 단군성전 및 국조단군상 건립 문제 및 최근 개천절 요일지정제 등을 둘러싸고 빚어졌던 사회적 갈등을 통해 단군관의 변화에 대해 지적했다.
임채우 교수는 “『태백일사』에 서기 전 591년 불한세가 57대 아갑 임금이 ‘환웅과 치우와 단군 왕검 세 분의 상을 반포하여 관청에서 봉숭하게 했다.’는 것이 단군영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며 신라의 천재화가 솔거의 단군영정 제작과 고려 말 대학자 이규보가 “고개 밖 집집마다 명공의 작품으로 단군 상을 모셨다.”는 글을 소개했다.
어깨와 허리에 쑥과 마늘 등 풀과 나무를 두른 대종교의 국조단군 영정
단군영정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거의 없다가 한말, 솔거가 그린 유일본이 대종교를 중광한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선생께 전해져 1910년 국치일 전일 단군영정을 봉안하고 세상에 공개하였다. 대종교는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정부는 1949년 국회의 동의를 받아 대종교 총본사의 단군상을 국조성상 표준본으로 공인하고 1976년 유일한 표준성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1977년 현정회의 단군영정을 공인함으로써 단군 표준영정은 두 가지가 되었으며 북한에서도 표준 단군영정을 지정 유포해 혼재된 상태이다.
대종교 영정과 현정회 영정의 가장 큰 차이는 대종교 단군영정에는 어깨와 허리에 초의목상(草衣木裳, 풀과 나무 옷)이 있다는 것이다. 종합토론시간 임채우 교수는 “쑥과 마늘을 형상화 한 것일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박성수 명예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은 “당시 주식으로 채식생활을 했으며, 풀은 약초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주제발표에서 임 교수는 “단군기원을 기록한 문헌으로 고려의 『삼국유사』『제왕운기』 조선의 『세종실록』『동국통감』등에서 각기 20년~50년의 차이가 있었다. 이와 같은 연대를 종합 정리하여 서거정의 『동국통감』(1485년)에서 단군의 개국년을 당요 25년 무진년(서기전 2333년)으로 확정하여 서술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임채우 교수는 “1985년 서울시가 자라나는 세대의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단군성전 건립계획, 1987년 국사교과서의 단군 기술문제에 일부 기독교계가 반대운동에 부딪혔다. 또한 1999년 시민운동단체인 홍익문화연합이 주축이 되어 전국에 건립한 ‘통일기원 국조단군상’에 대한 일부 기독교계의 급진적 원리주의 종교인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정부가 개천절을 어린이날, 현충일과 함께 요일지정제로 검토하면서 국경일이 아닌 공휴일로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냈다.”고 했다.
그는 “해방 후 당연시 되던 국조 단군에 대한 존숭의식이 서구 중심의 근대화화 급격한 경제 개발 속에서 점점 협소해졌다.”고 지적하며 “단군영정, 단기연호 문제는 개별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국조 존숭이란 민족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조에 대한 인식이 왜곡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