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6일(목)
* 시작 기도
주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지만 이를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땅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임을 증언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땅에 속한 본향을 찾지 않고 하늘에 속한 영원한 본향을 늘 사모하며 사는 자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 되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히 11:1-16).
나는 약속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받았고 나아가 그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도 바라보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선배들의 믿음에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이런 나는 주님의 심판 앞에서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공의로 심판하여 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오니 주님의 은혜로 나를 덮으사 덮으심의 은혜로 오늘 하루도 살게 하옵소서.
나의 의는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직 주님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하루도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우리 주님을 의지하오니 나를 장악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17:13-28
제목 : 나의 눈은 막연한 땅 끝이 아니라 내가 거할 영생의 거주지인 그곳에 있습니다.
13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14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15 악인을 의롭다하 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16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17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19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20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21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23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24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25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26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은 선하지 못하니라.
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28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 나의 묵상
(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사람이 즐거워하게 되는 요인은 실로 많다.
내가 원하는 일이 잘 풀렸을 때 즐겁다.
자녀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면 즐겁다.
자녀가 수능시험을 잘 치면 즐겁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즐겁다.
사업이 잘 돼서 돈을 많이 벌면 즐겁다.
좋은 신랑이나 좋은 신부를 만나서 결혼을 잘 하면 즐겁다.
로또를 샀는데 높은 등수에 당첨이 되면 즐겁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면 즐겁다.
이 외에도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참 많다.
이처럼 무엇을 통해서든지 마음이 즐거우면 기분이 좋고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엔돌핀이 솟아나게 만든다.
그 엔돌핀은 신체에도 영향을 주어 건강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신체에 양약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근심과 염려는 뼈를 마르게 한다.
사람을 근심하게 만드는 요인도 참으로 많다.
몸이 좀 안 좋으면 ‘혹시 내가 암이 아닌가?’ 하고 염려한다.
그 염려는 염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상하게 하고 만다.
자녀들의 문제는 어떤가?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과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을 때 부모의 근심거리가 된다.
자녀가 공부를 못 해도 걱정, 수능시험을 잘 못 쳐도 걱정,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가도 걱정이다.
결혼할 때가 됐는데 결혼할 상대가 없으면 근심과 걱정이다.
결혼을 했는데 서로 마음이 맞지 않거나 성격이 다르면 많이 부딪히기도 하고 그로 인하여 근심에 빠지기도 한다.
사업이 잘 되지 않을때 근심과 염려는 자신을 사로잡는다.
직장에 다니면서 중년이 되고, 명퇴의 대상이 되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언제 회사를 그만 두라고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심령을 근심하게 만드는 요인이 얼마나 많은가?
문제는 이런 것들이 단지 근심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뼈를 마르게 한다는 것이다.
뼈를 마르게 한다는 말은 근심이 뼛속 깊이 파고들어 생명까지 위협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은 암이 워낙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몸이 조금만 아파도 혹시 암이 아닐까 하면서 근심을 가불해서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근심은 결국 사람을 암환자로 만들고 만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나 근심하는 것의 요인들은 거의 대부분 만물 안에 속한 것들로 인하여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되시는 분으로 믿고 따르는 자가 아닌가?
그런 주님을 믿는 자가 세상 사람이 하는 근심도 똑같이 하고 그들이 하는 걱정거리도 똑같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 똑같이 좋아한다면 과연 신자와 불신자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라도 세상적 기쁨에 즐거워할 수 있지만, 그것에만 치심하면 진짜 우리의 신앙의 근거인 창세전 그 나라에서부터 오는 영원한 기쁨, 하늘의 기쁨은 맛볼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주님의 심령에는 육신의 기쁨을 초월하는 영원한 기쁨, 즉 생명의 생수가 샘솟는다.
이것이 바로 24절의 명철한 자의 모습이다.
(24)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우리도 마찬가지로 항상 주님이 누리셨던 그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그것은 지혜를 항상 내 얼굴 바로 앞에 두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지혜는 지혜로 체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곧 말씀이요, 말씀이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얼굴 바로 앞에 지혜를 두는 것은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 교제를 통해 아들이 보았던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기쁨은 잠시 후면 사라지지만,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그 기쁨과 즐거움은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넉넉히 상황을 초월하여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그 눈을 땅 끝에 둔다고 하였다.
여기서 ‘땅 끝’이란 ‘막연한 곳’으로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곳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금방 잡힐 것 같지만 잡히지 않는 무지개와 같다.
세속적인 욕심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욥의 세 친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욥에게 충고를 하지만, 그 충고의 중심에는 인본주의가 교묘하게 숨어 있으며, 철저한 보상신앙 안에서 충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이 땅에서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 범죄하면 만물 안에 있는 것들, 즉 재산과 자식들 이런 것들로 벌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외형적으로 보면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이 없는 것 같으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에 그들의 중심을 꿰뚫어보시고 철저한 보상신앙을 심판하신다.
나는 이와 같이 세상의 즐거움을 나의 기쁨으로 삼고 살던 자였다.
사실 하늘의 기쁨, 창세전 영원한 기쁨은 알지도 못하였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에게서 나오는 다시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맛보지도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신 그 무언가를 찾아 세상적인 즐거움, 즉 fun을 구하였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품속에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범죄하고 난 이후에 자신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와 사귐을 가져야 하는 존재인데,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되니까 하나님 외에 그 무언가와 또한 교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동산 나무 뒤에 숨어서 행하는 일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하늘의 영광과 기쁨 대신에 찾아 헤매는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은 바로 3A로써 남들 보기에 보란 듯해야 하고, 하는 일마다 성공해야 하며, 나의 삶이 안락하고 풍요롭고 윤택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품안에서 교제할 때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였지만, 품을 떠난 사람은 하나님 외에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3A인 것이다.
나는 이런 삶을 사는 자였다.
그러다가 이 복음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 품속에서 날마다 말씀으로 교제한다.
말씀이신 주님을 나의 얼굴 바로 앞에 모시고 그분을 바라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은 이 구속받지 못한 육신으로 인하여 세상의 욕망에 넘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일어나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그곳만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이 바로 나의 집이요, 내가 거주할 영생의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만들어진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을 얻으므로 이제는 아들과 같이 태어난 생명이 되었다.
이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즉 복음으로 된 것이다.
존 오웬의 말처럼 복음으로 나타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날마다 말씀으로 하나님과 사귀는 목적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날마다 말씀이신 주님과 교제를 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 육신이 자꾸만 게으름을 피우고 못 나가게 막으니 연약한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내 눈자락이 흐릿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 막연한 땅 끝에 두지 않게 하시고, 세상에 속한 보상신앙이나 인본주의 그리고 기복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늘 쳐서 깨어 있게 하소서.
정말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시어, 말씀 안에서 주님을 기뻐하는 영혼이 살아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잡히지도 않을 무지개를 잡는다고 헛된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날마다 말씀에 붙들려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자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나에게 아들의 생명으로 영생의 맛을 보게 하시고, 오늘도 그 삶을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오직 주님 때문에 살거나 죽기를 원하오니 죽는 것도 정말 유익합니다.
그러나 나로 인하여 증거될 복음의 사명이 남아 있다면 생명을 연장시키셔서 그 일에 쓰임받게 하옵소서.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질그릇이 토기장이에게 항변할 수 없듯, 나는 오직 주님의 하명에 복종하겠나이다.
오늘 나를 부르시고 이끄시며 보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