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작명론
곽 흥 렬
이름자에 받침이 들어가 있으면 부르기가 어렵다. 한 글자에만 그럴 때보다는 두 글자에서 그럴 때가 더 어렵고, 두 글자보다는 세 글자, 세 글자보다는 모든 글자에 다 받침이 들어가 있는 경우는 더욱더 어렵다.
비단 부르기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쓰기도 복잡할뿐더러 읽는 데도 힘이 든다. 그러다 보니 남들로부터 잘못 불리거나, 혹은 틀리게 쓰이고 혹은 틀리게 읽힐 개연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나는 평소 ‘흥렬’이라는 내 이름에 영 만족을 못 하고 지낸다. ‘흥렬’을 ‘홍렬’로 잘못 부른다든지, 틀리게 적거나 틀리게 읽는 사람들이 심심찮기 때문이다. ‘흥렬’과 ‘홍렬’, 사실 이 둘은 활자화해 놓았을 때 비교적 괜찮은 시력의 소유자조차 돋보기안경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는 구별이 쉽지 않다.
아마도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평소 나를 잘 모르는 이들 가운데는 “곽홍렬 씨” 아니면 “곽홍렬님” 하고 부르는 수가 허다하다. 그럴 때면 나는 어째서 남의 소중한 이름을 제멋대로 바꾸어 버리느냐며 그들의 세심치 못한 태도에 혼잣소리로 불평을 쏟아내곤 한다. 물론 애당초 변별키 힘들도록 지어 놓은 조상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못하겠다.
내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사람을 만나는 날이면,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도대체 왜 걸핏하면 이런 불유쾌한 일이 일어날까 하고 그 연유를 곰곰이 헤아려 보게 된다. 짧은 소견으로, 아마도 이홍렬이라는 코미디언의 영향이 크게 작용치 않나 하는 의아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딴따라라며 천시받던 연예인의 인기가 근래 들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다 보니, 그들에 대한 선망 같은 것이 생겨나서 은연중 그들의 이름이 대중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시금 찬찬히 곱씹어 본 결과, 필시 그런 연유는 아닌 게 분명하다. 지난날 한국인의 애창 가곡인 <바우고개>를 지은 작곡가 이흥렬 선생도 있었고, 요즘 프로축구로 한창 몸값을 높여가는 손흥민 선수도 있지 않은가. 주위에서 그들의 이름을 ‘이홍렬’이라거나 ‘손홍민’으로 바꿔 부르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이로 미루어 살피건대, 흔히 ‘흥’이 ‘홍’으로 잘못 호칭 되는 까닭을 딱히 이거다 하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흥∼” 이런 식으로 꼬리를 살짝 추켜올림과 동시에 급히 끝을 닫듯 발음을 해보면, 뭔가 아니꼽거나 못마땅해서 픽 내뱉을 때의 그 콧방귀 날리는 소리가 난다. 그래, 내가 이 소리를 듣기 싫어할까 봐 그들이 일부러 ‘흥’ 자를 ‘홍’ 자로 고쳐서 불러 주는 건지는 모르겠다. 만일 그런 배려에서라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거기에 설마 그렇게까지 깊은 속내가 숨어 있기야 하려고.
어쩌다 참 특이하다 싶은 이름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땐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궁금해지면서 그 이름을 지은 당사자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리고 어떤 의미를 담으려고 저런 식의 작명을 다 했을까 괴이쩍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곤 한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정신세계가 무척 의아스럽게 다가온다.
여러 해 전의 일이다. 전국 지방선거 때 K시의 시장에 출마한 ‘최길갈’이라는 후보가 있었다.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너무나 색다른 이름이어서 머릿속에 금방 입력이 되었다. 성씨는 일단 제쳐두고 이름만 놓고 살펴보면, ‘길갈’ 두 음절 다 초성에는 안울림소리인 ‘ㄱ’이 들어갔고, 종성이 울림소리인 ‘ㄹ’로 똑같으며, 중성은 모음체계에서 가나다의 앞뒤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처음 접하는 순간, 어쩐지 “갈갈” “갈갈”대며 우는 개구리 소리처럼 채신없이 들리기도 하고, 마치 나팔바지를 펄럭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모습같이 엉뚱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여 피식 웃음이 났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타인의 고유한 이름을 두고 마음대로 해석해서 우스갯거리로 만든 것이 순전히 내 무지의 소치임을 깨닫고는 스스로의 가벼웠음을 크게 뉘우쳤다. ‘길갈’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요단강 기슭에 있다는, 그리스도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땅 이름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빌려왔을 법한 ‘길갈교회’라는 명칭의 예배당이 적지 않고, ‘길갈하우스’며 ‘길갈자동차종합검사소’, ‘길갈축산’ 같은 이름도 보인다. 심지어는 장삿집 가운데도 ‘길갈베이커리’니 ‘길갈비빔국수전문점’이니 하는 등속의 상호들이 있고 보면, 아마 이 최길갈 또한 그 지명을 따서 짓지 않았을까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길거릴 스쳐 지나치다 차림차리가 별난 사람을 만났을 때 자꾸 곁눈질로 힐끗거리게 되는 심리 같은 것이라고 할까. 입 안에 든 박하사탕을 굴리듯 ‘최길갈, 최길갈, 최길갈……’ 하면서 머릿속으로 되풀이 궁굴려 본다. 그러고 있노라니 ‘최길갈’ 대신 차라리 ‘최갈길’이라고 지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어 좀이 쑤신다. 대관절 이 무슨 요사스러운 심사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나마 최 씨였으니 망정이지, 만일 설 씨나 길 씨 혹은 갈 씨처럼 ㄹ 받침이 들어간 성씨였다면 더더욱 부르기가 어색하였을 것이라는 오지랖 넓은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이런 생각 역시 남의 귀한 이름을 제멋대로 바꿔버리는 이들의 경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것 같아서 적이 민망해지기도 한다.
학부 시절의 동기생 가운데 ‘진갑곤’이라는 이름을 가진 벗이 있었다. 당시 그는 자기 이름을 부를 때 한 자 한 자씩 또박또박 끊어서 발음해 달라고 학우들에게 특별히 당부하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석 자 모두 초성이 안울림소리인 데다 하나같이 받침까지 붙은 탓에 연속적으로 발음을 하면 음절 조합상 글자들끼리 충돌이 일어나 불가피하게 혀가 꼬이게끔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자연 부르기도 어렵거니와 정확히 알아듣기도 힘이 든다. 하지만 그의 당부를 곧이곧대로 좇아 한 자 한 자씩 스타카토로 불러 주기에는 아무래도 퍽 군색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우스갯소리로 환갑 뒤에 이어서 오는 해인 진갑 년을 떠올리며 먼저 짧게 “진갑” 해놓고, 한 박자 늦추어 고무공 튕기듯 “곤~” 이렇게 소리를 내어야 할 판이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하고 또 얼마나 거북살스러운 노릇이겠는가.
지금 세상에는 음양오행성명학이니 수리성명학이니 소리성명학이니 곡획성명학이니 하는 등속의 갖가지 작명법이 생겨나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 제각기 나름의 논리로 주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다들 너무 혼란스러우면서 난해하기까지 하여 그 방면에 문외한인 나 같은 무지렁이로선 아예 접근해 볼 마음조차 먹지 못한다. 그러기에 나는 단지 받침이 들어가지 않은 이름이어야 무조건 좋은 이름이라는 나름의 개똥작명론만을 무슨 종교 교리처럼 고집스럽게 신봉할 따름이다.
이름에 받침이 없을 때 그만큼 부르기가 쉽고 듣기에도 귀를 편하게 해준다는 사실은, 비록 작명가나 명리학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거의 상식에 속하는 문제일 터이다. 그렇다면 그런 이름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이, 최, 조, 우, 고, 서, 나, 구, 기, 노 씨들처럼 일차적으로 성씨에 받침이 들어가 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인들 어감이 좋은 성씨를 물려받고 싶은 바람이 왜 없으랴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의지 밖의 일 아닌가. 조상을 바꾸지는 못하는 노릇이고 보면, 다만 이름자만이라도 받침 가진 글자로 짓지 말아야 그래도 그나마 힘을 덜 들이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누가 뭐라 한대도 작명법에 대한 평소의 소신에는 추호의 흔들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조상이 지어준 이름을 함부로 갈아치우는 것 또한 능사는 아니다 싶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간단없이 이어졌다. 강산이 바뀌어도 대여섯 번이나 바뀌었을 나날을 두 가치가 마음속에서 시시때때로 힘겨루기를 벌인 끝에 비로소 승패가 갈렸다. 내 개똥작명론이 조상의 위세에 눌려 결국 기가 꺾이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부르거나 듣거나 읽거나 쓰는 사람들에게 본의 아닌 실수를 유발케 만드는 본래 이름 ‘흥렬’이 여태껏 살아남아 나라는 존재자를 대신해 왔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내내 성에 차지 않아 당장이라도 고물상으로 갖다줘 버렸으면 싶은 마음이 고래 아니면 굴뚝같지만, 그래도 세상 구경 나온 이래 미우나 고우나 이날 이때까지 동고동락해 온 그놈의 정 때문에 선뜻 팽개칠 용기를 내지 못하겠다.
아, 그깟 이름 하나가 대체 뭐라고 하고많은 세월 동안 거기에 꺼둘리어 갈팡질팡하는 이 애증의 심사여!
첫댓글 ㅎㅎ나도 나이드니 돋보기를 쓰고 보아도
흥. 홍. 구별이 잘 안됩니다.
곽흥렬님. 조상님이 지어주신 소중한 성함.
잘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눈이 어두침침해져서 세상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게 되어서 좋고, 귀가 어두워져서 세상의 추한 소리를 듣지 않게 되어서 좋다는 말이 있지요.
세상 모든 일은 다 생각하기 나름인가 봅니다.
곽흥렬 수필가님의 성명에 관한 글,
그에 따른 작명에 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 일을 티를 잡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좋은 느낌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로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곽흥렬, 세글자가 모두 받침이 들어서
좀 딱딱하게 발음 되는 점이 있긴 합니다만,
남의 이름을 정중하게 부르는 느낌도 있습니다.
받침이 없는 이름에는, 가벼운 느낌도 들고
어린시절에는 좋겠지요.
하지만, 세상살이가 친구하고만 만나지는 않지요.
상대가 이름에 정신을 넣어 또박또박 불러주는 것이
좋은 일면도 있습니다.
곽흥렬님은 수필가로써 세상에 알려진 이름입니다.
글 속에서처럼 저는 저의 이름이 썩 마음에 차지 않아서 당장이라도 갖다 버렸으면 싶은 마음이 고래 아니면 굴뚝 같은데, 콩꽃님의 이 글을 보면서 작은 자부심 같은 것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받침이 없는 이름에는 어딘가 가벼운 느낌이 든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듣고 보니 그도 그렇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