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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
대한민국 제5-8대 대통령 배우자 육영수 陸英修 | Yuk Young-soo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 |
출생 | 1925년 11월 29일 |
충청북도 옥천군옥천면 교동리 (現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향수길 119)[1] | |
사망 | 1974년 8월 15일(향년 48세)[2]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대통령묘소 |
활동기간 | 제5대대통령 배우자 |
1963년 12월 17일~1967년 6월 30일 | |
제6대대통령 배우자 | |
1967년 7월 1일~1971년 6월 30일 | |
제7대대통령 배우자 | |
1971년 7월 1일~1972년 12월 26일 | |
제8대대통령 배우자 | |
1972년 12월 27일~1974년 8월 15일 |
1.개요
대한민국의 제5~9대 박정희 대통령의 2번째 배우자.박정희 전 대통령의 배우자라 하면 일반적으로 육영수만을 떠올리는 편이지만, 박정희의 첫 배우자는김호남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호남 외에 이현란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사실혼)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이현란, 김호남과 이별한 이후 육군 장교 시절에 만난 여인이 육영수다.
박근혜 전 대통령·박근령·박지만 남매의어머니이기도 하다. 언니인 육인순과 여동생 육예수 소생의 자녀들에게는 이모가 된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기념식에서 재일교포2세문세광의 총탄에 피살됐으며, 대한민국 헌정사상 유일하게 피살된 대통령 배우자로 기록되고 있다.
2.생애
(1) 교동 작은 아씨
1925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대지주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 사이의 1남 3녀 중 셋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 육인순과 오빠 육인수, 아래로 여동생 육예수가 있다.박정희에게는 각각 처형, 손위처남, 처제다.
친정은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알아주던 지역유지 겸 전형적인 대지주 집안이었으며, 옥천의 2대 부호였던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은 주로 소작농으로 거둬들인 소작료를 통해 부를 쌓아 미곡도매상, 금광, 인삼가공업을 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뒷 뜰 역할을 하는과수원을 합치면 8천 평, 순수 대지가 3천 평이나 되는 99칸의 대저택에서 수십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살았다.
이 저택을 구경한 시인 박목월은 조선상류계급의 건축을 대표하는 비원의 연경당과 맞먹는 건물이라고 평했으며, 육영수가 태어나던 1920년대에 이미 전화기와 자동차까지 있을 정도로 굉장한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육종관은 본처 이경령 외에도 첩만 5명이었으며 그중에는 경기도 개성시 출신의 친자매도 있어서 각각 '큰 개성댁', '작은 개성댁'으로 구분해야 했다. 그 외에 옥천댁과 서울댁이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일본어가정교사로 들였던 일본 여성 노무라(野村)도 첩으로 삼아서 남촌댁이라고 불렀다. 재력이 있는 남성이 첩을 들이는 것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비교적 흔히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어느 사회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부유한 기혼 남성의 5%는 첩을 거느렸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일부일처제는 훗날 육영수의 남편 박정희가 집권 직후 축첩을 금지하고 축첩 공무원들을 해임하고 나서, 부터야 조금씩 확립되었다. 여기에 첩은 첩대로 있었고 잠시 만나는 애인은 또 따로였는데, 당시 여자를, 꼬시는 방법은 연애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악필이라서 편지 쓰는데 골머리를 앓던 육종관은 타자기가 들어오자마자 이걸 사서 그걸로 연애편지를 써서, 육종관이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기면 육종관의 방에서 타닥타닥 타자기 소리가 나곤 했다고 한다.
이렇게 복잡한 여자관계 때문에 육종관은 적자와 서자를 모두 합해 총 12남 10녀를 두었다. 의친왕, 윤영렬과 더불어 동시대에 가장 자녀를 많이 둔 인물로 손꼽힌다. 물론 밝혀진 인물만. 육종관은 이경령에게 왕비가 내명부를 관리하듯이 소실들을 관리할 권한을 주었고, 소실들이 적모인 이경령을 어머니로 부르면서 깎듯 하게 모시게 했다. 하지만 이경령은 남편의 축첩질에, 크게 가슴앓이를, 했는데 특히 육종관의 여동생이며 자신의, 시누이인 육재완의 자녀들이 자신에게 세배하고 소실들에게도 세배하는 걸 보며 매우 속상해했다고 한다.
육영수는 적녀로서 아버지의 축첩과 그를 보며 가슴앓이하던 어머니의 설움을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에, 결혼 후 남편 박정희의 여성 편력에 분노를 표출했다.
육영수는 옥천공립보통학교(현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경성부 배화고등여학교로 진학했다. 공교롭게도 모교 인근에는 훗날 육영수 본인이 직접 입주할 청와대가 세워지게 된다. 지금도 교문을 통과해 언덕을 올라 학교 건물까지 가다 보면 청와대가 보인다. 배화고녀는 1898년 미국인 선교사 조세핀 캠벨이 설립한 개신교(감리회)미션스쿨로, 전통 깊은 명문 여학교였다.
그런데 배화고등여학교 재학 당시 육영수의 거처는 다름아닌 '큰 개성댁'의 집이었다.
물론 집주인은 아버지 육종관 이었지만, 실세는 서울에 왔을 때나 가끔 머무는 육종관이 아니라 큰 개성댁이었고, 상경과 동시에 육영수는 신데렐라처지에 놓이게 된다.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서모(庶母)와 적녀(嫡女)의 사이는 좋을 래야 좋을 수가 없었고, 실제로 큰 개성댁은 친어머니 이경령이 서울에서 기숙 중인 육영수에게 보낸 물자를 중간에 가로채기도 했다. 하지만 육영수는 배화고녀 재학 4년간 부모에게 불만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육영수가 재학하던 당시 배화고등여학교에서는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육영수는 무척 가고 싶어 했지만 육종관이 "과년한 처녀가 여행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또한 육영수는 배화고녀 졸업 후 대학에도 가고 싶어 했지만, 졸업 1년 전에 아버지에게 말을 꺼냈을 때 육종관은 "여자애들이 공부하면 건방져진다," 면 서 딸들의 대학 진학을 반대했고, 아들들만 대학에 보내겠다고 했다. 이때 육영수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육종관은 매우 부자로서 한국에 유일하게, 일본에도 2대가 겨우 남아 있는, 95식 4륜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 후반기에 군용차를 민간이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때문에, 그가 딸의 수학여행과 대학 진학에 반대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워낙 보수적이고 남존여비가 심하던 시절이라, 여자가 집을 떠나 멀리 여행하거나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을 몹시 부정적으로 보던 당대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고등여학교까지 졸업한 것만 해도 당시로서는, 특히 여성으로서는 상당한 고학력이었다.
1942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졸업 후 육영수는 고향충청북도 옥천군으로 내려왔는데, 딸의 대학교육을 반대한 것과 별개로 육종관은 육영수를 매우 신임하여 육영수에게 곳간 열쇠를 맡기고 사실상의 비서, 경리로 두었다. 하루는 어머니 이경령이 육영수에게 "급히 돈을 쓸 일이 있으니, 곳간을 좀 열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육영수가 "아버지 허락이 없었어요. 제가 아니라 아버지께 부탁드려 보세요"라고 끝내 거절한 일이 있어, 육종관이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1945년 10월부터는 옥천여자전수학교에서 1년 3개월간 교사생활을 했다. 과목은 가사. 이는 학교 서무과장 송재만이 육영수와 이종 육촌 간이라서, 육영수를 추천하여 채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남교사들이 육영수에게 성희롱을 한 모양인데, 이 때문에 분노한 육영수는 그길로 학교에 사직서를 던지고 나와버렸다. 교장이 직접 찾아와 사과도 했지만, 자존심 강한 육영수는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3. <박정희와의 만남과 결혼>
- 결혼 전의 사연들
1950년 8월, 이종사촌인 송재천의 소개로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를 만났다.
박정희는 육영수와 만나기 전에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 1936년 김호남과 결혼하여 이듬해 박재옥이라는 딸까지 낳은 상태였다. 본래 박정희는 좀 더 나이를 먹은 후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길 원했으나, 집안 어른들, 특히 아버지인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아들이 결혼하는 것을 봐야 한다," 며 강권하여 당시 16세의 처녀였던 김호남과 억지로 결혼시켰다.
그래서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던 결혼 생활인지라 박정희는 김호남에게는 그다지 정이 없었다. 박정희는 김호남을 두고 이현란이라는 여대생과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동거하였으나, 박정희가 남로당소속인 것에 실망한 이현란이 떠나버려 한동안 큰 충격을 받아 방황하였다.
시간이 흘러 6.25 전쟁이 터져 군대에 복귀한 이후 육군본부를 따라 대구시와 부산시를 왔다 갔다, 하며 근무하고 있던 짝 없는 33살 박정희를 보고 후배들은 이현란을 잊으라고 성화를, 하였는데, 휘하 장교들 중, 하나가 대구사범 1기 후배인 송재천이다. 옥천 출신이던 그가 퍼뜩 떠올린 것은 자기 고향의 큰 부자인 육종관의 딸이었다. 마침 그 영감이 아내와 딸을 거느리고 부산 영도로 피란을 와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육영수와 박정희는 짬을 내 만났다. 정식 맞선은 아니었으나, 본인의 표현대로 '목이 길고 고상하게 생긴 처녀'에게 박정희는 대번 호감을 느꼈으나 눈이 높았던 박정희는 김재춘에게 "키는 나보다 큰 것 같고, 보기는 봤는데 다시 만나봐야지"라고 했으나 정작 육영수를 만나기 전에 긴장해서 소주를 몇 잔이나 마시고 갔다고 한다. 육영수도 박정희에게 호감을 느끼자 이경령은 육종관에게 두 사람 사이를 성사시켜 주자고 졸랐으나, 아버지 육종관은 군인인 박정희를 탐탁지 않아 했다.
옥천군에서 자신의 독립왕국의 왕처럼 살고 있어 자존심이 대단했던 육종관은 집안도 모르는 34세나 되는 노총각을 수상쩍게 여겼는데, 박정희는 육종관의 눈에 들기 위해 약간의 노력을 했다. 우선 인천 상륙 작전이후 옥천군이 수복되자 군용트럭을 징발해서 육종관 일가를 옥천에 보내주었고, 이경령은 이때 몰래 대구로 돌아와서 박정희와 육영수를 약혼시킨다.
이후 육종관은 박정희를 집에 불러서 만나봤는데, 이상하게도 박정희는 육종관을 상당히 불손하게 대했다. 예비 장인 앞에서 박정희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팔을 그 위로 늘어뜨린 자세로 육종관을 맞이했고, 육종관이 말하는 내내 지포 라이터를 딸깍거리며 육종관의 신경을 건드려서 육종관은 박정희가 돌아간 후에 뭐 저런 놈이 있냐고 길길이 날뛰었다. 또한 육종관에게 이경령이 박정희가 김호남과 결혼해서 딸(박재옥)까지 둔 사실을 숨겼음에도 육종관은 34세나 된 박정희가 총각인 걸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후 육종관은 예비 사위를 시험하기 위해 "인민군이 나의 닛산 트럭을 약탈해갔는데 그걸 찾아오라"고 요구했다. 이에 박정희는 수송부대를 동원해서 어디선가 고물이 된 닛산 트럭을 찾아서 육종관에게 그냥 던져주었는데, 그걸 본 육종관은 결혼할 성의가 있으면 수리를 해서 줬을 건데 뭐 이런 놈이 있냐고 또 분노했다.
육영수와 이경령은 육종관에게 박정희가 결혼해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기고 결혼식 날짜를 잡았으나, 육종관은 어찌저찌 박정희의 호적을 떼보고 그 사실을 알아냈는지 더욱 격렬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육종관은 "박정희의 집안도 모르겠고, 또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을 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며 결혼에 들뜬 육영수를 뜯어말렸으나 육영수는 단호히 거부했고, 평소에 고분고분하던 아내와 딸이 반항한다는 사실에 분노한 육종관은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쳤고 육영수의 여동생 육예수가 육영수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따라나서려 하자 "넌 오늘부터 내 딸도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다!"라고 화풀이했다. 육영수가 마지막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육종관은 거부하고 옥천군을 떠나서 대전시로 가버렸고, 이경령은 옥천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설득하려 했으나 육종관이 요지부동이자 대판 싸우고 남편 곁을 떠나서 육영수와 살게 된다.
- 우여곡절 과정을 극복 결혼에 성공 이 우여곡절 끝에 육영수와 박정희는 1950년 12월 1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나이는 박정희가 33세, 육영수가 25세. 결혼 사진을 보면 육영수의 얼굴이 부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육영수가 옥천에서 대구로 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로 심한 위경련을 겪어서 생긴 일시적인 후유증이라고 한다.
결혼식 때 주례를 섰던, 허억 대구시장이 두 사람의 이름 때문에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일화가 있다. 실제로 '정희'는 여자 이름, '영수'는 남자 이름에 쓰이다 보니 일어난 웃지 못할 해프닝, 이었다.
재밌는 점은 주례인 허억의 이름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헉비슷한 예로 방송에서 "육영수 여사"라고 해야 할 것을, "육영사 여수"라고 방송사고를 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방송사고가 난 건 방송에서 원체 수없이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 하다 보니 순간 실수한 거라고 하는데, 방송에서 수없이 육영수 여사라는 단어를 부를 시기, 바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벌어진 방송사고였다. 또 결혼식에 쓸 예물 반지를 가지고 있던 육영수의 사촌오빠가 결혼식 날 반지를 잃어버려 부랴부랴 반지를 싸 왔다.
하여튼 이렇게 친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머니 이경령과 육영수 자신의 고집 덕분에 결혼을 밀어붙였다. 이경령이 육영수의 사주를 무속인들에게 보이니 다들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산다," 고 풀이했다고도 한다. 이때 육종관이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살기는 하지만, 마지막에는 두 사람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것"이라는 점괘를 받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경령이 점괘를 받은 것은 증언에서 확인되지만 육종관도 점괘를 들었다는 문헌은 확인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육종관에게 이경령과 육영수는 박정희가 이혼남이라는 사실 자체를 숨겼고 육종관이 이혼남에게 시집보낼 수 없다고 반대했다는 증언 자체가 안 보인다.
4, <결혼 이후의 생활>
결혼 직후에는 노량진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군인 남편이 박봉이라 구멍가게도 잠시 운영했다. 부잣집에서 자란 사람이 스스로 어렵게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서는 그런 점에서 육영수를 고평가한다. 식구가 늘다 보니 6년 만에 신당동으로 이사했는데, 대문이 작아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던 박정희를 보고, "남자가 고개를 숙이면 기개가 꺾인다," 며 대문을 고쳤다고 한다. 혹자는 "이 집에 오시는 분은 다 귀하신 분인데, 어떻게 들어오시면서부터 고개를 숙이게 할 수 있는가," 하며 대문을 개조했다는 얘기도 있다.
1952년 2월 2일 박근혜가 태어날 즈음 아직 노량진에 살던 시절, 당시 김종필, 박영옥(박재옥에게는 사촌 언니) 내외의 신혼집에 얹혀살며 동덕여자고등학교를 다니던 전처의 딸 박재옥을 데려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양딸 뒷바라지도 해주었다. 훗날 박재옥을 박정희의 전속부관 한병기와 중매 해준 사람도 육영수였다. 박정희가 박재옥의 예비 신랑감을 집에 데려올 때면 육영수가 청주를 마련하고 족발을 삶아 내왔다고 한다.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에서는 1남 2녀(첫째박근혜, 둘째박근령, 셋째박지만)가 태어났다.
5.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 로서>
정부에 비교적 비판적 논조이던, 'TBC석간'의 진행자 봉두완의 회고가 있다. 봉두완은 40년 이상 소록도 한센병환자를 도와왔고, 육영수가 나환자들의 복지와 치료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인연이 있다. 2013년 모 방송 뉴스에서 "육영수가 대중탕에 갈 수 없는 나환자들을 위해 공중 목욕탕을 지어줬다," 고 증언한 바도 있었다.
회고에 따르면 TBC나 DBS 동아방송이 정부를 비판해 관련자들이 고생할 때마다 육영수가 옆에서 뜯어말리고 중재했다고 한다. 봉두완,박정희, 육영수가 3자 대면을 한 적도 있다고. 이런 부분은 연합통신/동아일보 출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에서도 교차 검증된다. 이렇게 남편을 다독이다 보니 그녀에게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한복차림을 자주 했고, 항상 매우 꼼꼼하고 소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로 들어오는 많은 민원 진정서나 편지들을 처리하면서 통치의 한 축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수는 많지 않지만 청와대 제2부속실의 스태프를 거느리며 민원 접수 등 고유 업무를 챙겼으며, 일부 고위직을 견제하는 등 눈에 안 보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 영친왕의 처인 이방자여사와 함께 고아원과 보육원 등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으며,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많이 신경 써준 인물이다.
1973년 한센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다과회를 열고 구호물자를 보냈다고 한다. 또한 1971년 전라남도 나주시의 한센인촌,1972년 전라북도 익산시의 한센인촌을 방문하는 등 한센인들의 인권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권위, 그리고 의사나 간호사 조차 꺼릴 정도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매우 좋지 않았던 인식을 생각했을 때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육영수의 행보는 대중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실제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에 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후 1974년 소록도 양로원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그해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날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기도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육영수를 대신하여 2000년대에 김대중대통령의 아내인 이희호가 대통령 배우자로서 소록도를 방문하게 된다.
육영수가 환자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한 점은 지금도 소록도에서 잊히지 않으며, 덕분에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텃밭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항상 민주당 초강세 지역인 전라도의 1,839개의 투표소 중 1,838개의 투표소가 문재인후보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였으나 유일하게 소록도에 있는 도양읍 제7투표소에서는 박근혜후보가 62.65%의 지지(득표수는 박근혜 270표, 문재인 158표)를 받는 등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전라도뿐만 아니라 경상도 등 전국 각지에서 온 환자들이 많은 것도 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때도 민주정의당 노태우가 평화민주당 김대중보다 표를 많이 얻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박정희에게 맞서 싸웠던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들도 육영수에 대한 비판은 자중하는 모양새다. 장녀인 박근혜가 정계에 들어온 후 박정희에 저항한 정치인이나 관련 단체들은 박정희와 관련하여 정치를 하는 부분에 비판을 쏟아냈지만, 육영수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었다.
과거 민주당에서 영남권 인사들을 영입할 적에 박근혜도 영입 대상에 있었다.1999년 5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잘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역사 속에서 재평가받게 해야 할 것. 형식은 민간 주도로 하고 예산은 민간 모금과 정부 재정 지원으로 해야 할 것. 기부금 모금을 허가하는 등 정부와 대통령이 앞장서면 국민 호응도 클 것이고 꼭 성공할 것"이라 말한 적도 있었다. 대신 육영수의 아들인, 박지만이 1997년 대선 때 김대중을 지지했다.
박근혜는 1998년 국회의원 재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입문하였다. 앞의 김대중의 발언은 이미 박근혜가 정치권에 입문한 직후의 이야기. 김대중은 1994년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시절 온건 보수 성향의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박정희에 대해서 과거와는 다르게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는 식의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고, DJP연합으로 집권한 이후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국가 예산으로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또한 1973년 육영수는 청계 피복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듣고,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뜻을 받들어 노동 교실을 설립하자 이를 적극 챙겨 지원하는 등, 노동자들의 권익에도 신경을 썼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천정환 교수는 2014년 경향신문에 올린 본인의 글에서 한국행정학회가 조사한 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육영수만 긍정적으로 나타났다고 언급하였다. 그도, 그럴게 프란체스카 도너는 너무 과거의 인물이고, 적극적인 사회운동에 나선 공덕귀와 소박하고 서민적이던 홍기는 부군의 재임기간이 너무 짧아서 존재감이 없었다. 이순자 부터는 비교적 최근이라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영부인의 평가에도 영향을 줬기 때문에 과거 영부인 중에 뚜렷한 존재감과 확실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육영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러한 평가는 당연한 것.
불우 청소년들의 직업 보도를 위해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고 만화잡지 보물섬을 발간한 것으로 유명한 육영재단이나 어린이회관을 짓는 등 아동복지와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당시 정수직업훈련원에서 직업훈련을 받던 학생들이 말하는 일화가 있다. 고된 직업훈련이 끝나고 밤에 기숙사에서 자다가 새벽에 잠깐 깼는데, 눈을 떠보니 캄캄한 기숙사 방 안에서 웬 말쑥한 차림의 부인이 학생들이 걷어찬 이불을 덮어주고 한명 한명 돌아보더니 조용히 나갔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기숙사 관리인에게 "어젯밤에 어떤 여자가 기숙사 방을 둘러보고 가던데 누구냐"고 묻자, "육영수 여사가 학생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러 왔었다," 는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이처럼 대통령인 남편을 보좌하며, 때로는 제동을 걸거나 중재를 하기도 하고, 어린아이들과 소외계층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행보로 인해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 중에는 아직도 육영수 여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육영재단은 손기정 전 선수의 메달을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저작년인 1973년 8월 8일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주범이 되어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에 격분하여 박정희대통령의 목숨을 노렸다고 한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의 저격으로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던 육영수는 향년 만 48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사인은 두부 관통상이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육영수 외에 합창단원으로 참가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도 총에 맞아 사망했다. 또한 육영수가 사망한 날은 서울 지하철 1호선(종로선) 개통일이기도 했는데, 원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는 광복절 기념식이 끝나고 종로선 개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무산되었고 종로선 개통식은 매우 침울한 분위기에서 개최되었다. 육영수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조문객 수만 200만에 달하는 인파가 몰렸다.
육영수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한국 국민들의 분노는 엄청났고, 문세광이 북한과 관련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의혹 속에 반공주의도 더욱 강해졌다. 또한 문세광이 재일교포였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곧 분노의 방향을 일본으로 돌리게 되는데, 국민적 여론은 물론 대한민국 정부도 문세광에게 일본인 명의 여권을 발급한 일본에도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해명을 요구했다.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일본 총리는 한국에 외교 특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일부 책임을 인정하는 사과 표시와 사건 수사에 적극 협조한다는 내용이 담긴 친필을 전했고, 한국의 여론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미국도 한일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중재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된다.
육영수의 국민장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의 시신이 담긴 영구차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청와대 철문을 붙잡고 눈물을 훔쳤는데, 당시의 모습은 사진 기록으로도 남아 있다. 저 시절까지만 해도 전통 장례 예법상 아내가 남편보다 먼저 죽은, 경우 남편은 집 대문 앞에서 아내의 관을 전송만 하고 장지까진 따라가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 회수된 6발의 총알 중 육영수의 머리에 맞은 총알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넘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탄환이 우뇌 깊은 곳에 박혀서 탄을 꺼내려면 시신 훼손이 심각해지기에 탄을 꺼내지 않고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탄환과 함께 묻혀있는 셈이다. 그러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 나온 육영수의 집도의에 따르면 사입구와 사출구가 있어 관통상으로 확인되었고 자신이 관통했음을 증언하였다고 인터뷰했다. 즉 이 인터뷰에 따르면 1발은 증발 된 상태다.
1975년, 제4공화국 박정희 정부에서는 육영수의 추모사진집을 만들어 학교에 배부하기도 했다.
육영수의 모교인 배화여자중학교·배화여자고등학교교정에는 그녀를 기리기 위한 '육영수 여사 기념관'이 세워졌고, 이어 배화여자실업전문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2/3년제 전문대학인 배화여자대학교로 개편되었고, 기념관은 배화여대의 대학 본부로 쓰이고 있다.
육영수가 사망한 후,프랑스에 유학하던 22살의 장녀 박근혜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퍼스트레이디 대행, 즉 대통령 배우자 역할을 대신했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어머니처럼 올림머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2016년 육영수가 암살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추모 공연인 <백목련>이 열렸다.
목련은 육영수가 생전에 좋아하던 꽃이며,한복을 입고 올림머리를 한 그녀의 모습을 당시 사람들이 목련에 비유했다고 한다. 배화여자대학교의 교화(校花)이기도 하며, 배화여대에는 목련관이라는 이름의 건물도 있다.
5. 여담
남편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임기 도중 저격 사건으로 인해 숨지면서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배우자 자리는 공석이였으며 그 자리는 당시 유학 중 이였던 장녀 박근혜가 대리하게 됐다.
키가 170cm로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중 가장 키가 크다. 2018년 기준 한국 성인 여성의 평균 신장은 161.4cm로, 지금도 여성이 170cm이면 상당한 장신으로 취급받는다. 1970년대 한국 여성의 평균 신장이 155cm였던 점을 감안 하면, 당시 170cm는 거인인 수준이었다.
이 당시 국가대표 여자 배구선수가 거의 이 정도 체격이었다. 남편인 박정희 보다도 키가 컸다. 하지만 자녀들은 육영수의 큰 키를 물려받지 못했다. 장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키는 162cm로 동년배 평균보다 조금 큰 편이고, 차녀 박근령은 158cm로 당시 평균 키였으며, 장남 박지만도 160cm대로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부가 같이 행사에 참석할 땐 행사 주최 측에서 육영수 쪽이 키를 조금이라도 작게 보이게 하려고 신경 썼다는 말이 있다. 다만 박정희 본인은 굳이 키를 크게 보이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서 굽이 높은 구두나 깔창을 쓰지 않았고, 어떤 자리에서는 주최 측이 박정희의 의자에 올려 놓은 두툼한 방석을 박정희가 던져버리기까지 하였다.
딱히 키에 대한, 생각이 없었거나, 되려 단신인 쪽이 정치적 이미지 메이킹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박정희는 키가 크고 얼굴형이 긴 여자가 이상형이었다고 한다. 근데 그걸 감안 해도 당시 육영수는 여자로서 거인이나 다름없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남성 평균인 164cm보다도 컸고, 나름 키가 크다는 이명박이 173cm였다. 참고로 이명박의 형인 이상득이나 이상은은 180cm를 한참 넘겼기에 육영수와 마찬가지로 당대 거인 취급받았을 것이다.
한때 "푸른 기와집에 정희와 영수가 사는데,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게? 대통령 부부가 싸우는 걸 3글자로 줄이면?" 같은 농담이 떠돌았다. 후자는 정답이 "육박전"이다. 이 농담을 맨 처음 고안해서 써먹은 전유성은 즉각 3개월 출연 정지를, 먹었고, 프로그램은 폐지되었으며, 담당 PD는 중정에 끌려가서 개 박살이 났다고 한다. 박정희 & 육영수 내외는 이 농담을 대통령 전용기의 스튜어디스 에게 들었다고 하는데, 프로그램과 PD에게 내려진 처우와는 달리 당사자들은 이 개그를, 듣고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박정희 본인 자체로만 놓고 보면 자기 앞에서만, 농담을 하면 어지간히 심해도 잘 받아주는 성격이라고 한다.
전유성이 가수 윤형주의 <0시의 다이얼>에 출연해 이 개그를 했었다. 근데 윤형주가 알던 누나인 최은자가 대통령 전용기의 스튜어디스 여서 그걸 박정희에게 말해줬고, 그 후 상술한 대로 탄압을 받았다.
훗날 전유성 본인은 그 사건이 자신에게 "세상은 참으로 치열한 육박전이구나!"라는 걸 알게 해줬다고 자신의 저서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에서 밝혔다. 당시 윤형주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방송사엔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조정관이 있어서 방송 멘트까지 일일이 검열했는데,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하다가 "제비가 박씨를 물고 갔다," 는 멘트가 나오자 "왜 박씨냐? 무슨 저의가 있는 것 아니냐?"라며 지적을 했다고 하는. 그런 시절이었으니 전유성도 당연히 출연 금지를, 먹을 수밖에.
노무현 전 대통령부인 권양숙의 법명도 육영수와 같은 '대덕화'이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배우자 중 가장 먼저 유명을 달리한 인물이다. 초대 대통령 배우자인프란체스카 도너는 1992년 3월 19일, 공덕귀(윤보선)는 1997년 11월 24일, 홍기(최규하)는 2004년 7월 20일, 그리고 이희호(김대중)가 가장 최근인 2019년 6월 10일 사망. 또한 역대 대통령 배우자들 중 가장 단명했으며, 가장 장수한 이희호(96세 사망)와 사망 당시 나이가 2배나 차이 난다. 남편 박정희도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단명했다.
이름이 남자 이름 같다.
철수와 마찬가지로 영수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남자 어린이의 대표적인 이름이다. 여자 어린이는 영희. 그러다 보니 결혼식 때 사회자가 신랑과 신부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실수를 했다. 게다가 정희는 여자 이름에 많이 쓰인다.
대통령 부인 집무실 및 접견실로 사용되던 청와대 본관 내 무궁화실 벽면에, 제5-8대 대통령 배우자로서 육영수 초상화가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