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봉 白山峰(1904 ~ 1987)】 「상하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 참여 활동」
1904년 2월 26일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홍인면(洪仁面) 도랑리(都浪里)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벽암리(薜岩里)이다. 이명은 백적환(白迪煥)·기곡청(磯谷淸)·임철(林哲)·이제한(李濟翰) 등 다양한 이름을 썼다. 1916년 3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4월 영흥공립농업학교(永興公立農業學校)에 입학하여 1917년 3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영흥우편소(永興郵便所)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25년 6월 영흥우편소에서 원산우편국(元山郵便局)에 보내는 자금을 탈취하여 일본에 갔다. 도쿄부(東京府) 에바라군(荏原郡) 소재 일본비행학교에 입학하여 약 4개월간 수학하였다. 1926년 말 도쿄에서 부흥국(復興局) 시타야구출장소(下谷區出張所) 측량 조수(助手)로 근무하였다. 1927년 홋카이도(北海道) 유후츠군(勇沸郡) 소재 홋카이도항공사업연구소(北海道航空事業硏究所)에서 기계 조수로 근무하였다.
1926년 2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여 최종현(崔鍾鉉)과 협의한 후 그해 3월 광둥(廣東)으로 가서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입학하였다. 건강상 이유로 군관학교를 나와 같은 해 10월 도쿄로 이동하였다. 정확한 일자는 확인되지 않지만 이후에도 중국 상하이와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29년 4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상하이지부 정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정기대회에서 김대응(金大應)·윤호·성시백(成始伯) 등과 함께 위원에 선임되었고, 동방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동맹(反帝國主義同盟) 조직에 가맹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9년 말 상하이에서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0월 26일 조직된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은 상하이 재류 한인의 “반제국주의적 협동투쟁전선을 확립하기 위하여 분열·대립을 극복하고 투쟁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이다.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은 1930년 광주학생운동을 원조하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중국 단체들과 연대하여 반제국주의운동 시위를 주도하였다. 3·1운동과 6·10만세운동 기념일과 8·29국치기념일에 선언문과 전단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1930년 2월 구연흠(具然欽)·조봉암(曺奉岩) 등과 협의한 후 중국공산당(中國共產黨) 장쑤성위원회(江蘇省委員會) 법남구위원회(法南區委員會) 한인지부(韓人支部)에 참여하였다. 한편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기술원(技術員)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12월 초 상하이 프랑스 조계 자택에서 한인지부 정기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 9월 조봉암·홍남표(洪南杓) 등이 주도하여 조직된 상하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윤해(尹海)·박성근(朴成根)·문홍선(文善弘)·이규홍(李圭泓) 등과 함께 철성단(鐵聲團)을 조직하였다. 1932년 4월 21~22일 상하이 이규홍 집에서 철성단 비밀회의를 열고 중요기관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32년 12월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7월 종로경찰서 고등계에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그해 8월 9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겨졌다. 같은 해 8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을 받게 되었다. 1934년 6월 27일 예심이 종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이 개정되었다. 11월 12일 개정된 선고 공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25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36년 9월 4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