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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31기 한국전력고급경영자과정(KEPSA31) 원문보기 글쓴이: John
서유럽여행 네 번째 나라는 이탈리아이다.
서유럽여행에서 가장 많은 기간을 체류하는 나라가 바로 이탈리아인데 이곳에서 3박 4일간을 머물면서 밀라노, 피사, 로마, 피렌체, 베니스 등 주요 도시를 관광한다. 그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될 거리만 1,570Km(예상 소요시간 18시간)이나 된다고 하니 이태리는 생각보다 그리 작은 나라는 아닌 것 같다.
6.12(수) 날씨 맑음, 기온 Hot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오후 3시경에 출발한 버스는 알프스산맥을 넘는 310Km를 달려 밀라노에 도착했다. 도중에 도로공사 때문에 지체되어 예상보다 조금 더 걸려 7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는데도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김정수 가이드(J)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버스안에서 고대 서유럽사와 함께 산과 호수, 固城 등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해 주었다.
밀라노는 북쪽으로 알프스 남쪽사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광활한 평야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이탈리아 북부의 포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데 롬바르디아지방 州都이다. 동시에 이곳은 이태리 최대의 주식시장과 주요 은행의 본점이 있으며 세계적인 브랜드인 아르마니와 구찌 등의 본사가 있는 최대의 경제도시이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카톨릭교를 공인한 ‘밀라노칙령’을 발표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성 스포르체스코성 근처였는데 이곳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나 城으로 갔었는데 개방시간이 지나 입장은 못하고 城입구에서 간단히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城은 밀라노 대공 프란체스코 스포르체스코가 세운 것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이 건축에 관여한 근대 성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어 현재의 건물은 그 후 개축한 것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간 곳은 라 스칼라 극장이다. 세계적인 오페라 하우스 스칼라 극장은 음악계의 거장들이 거쳐간 곳으로 유명한데 지휘자로 토스카니니와 리카르노 무티가, 오페라 작곡가로 베르디, 푸치니, 로시니 등이 그리고 오페라 가수로 마리아 칼라스, 엔리코 카루소,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이 이곳에서 활동했었다.
객석 수용규모가 2,800명이 넘는 6층의 초대형극장이라고 해서 외관이 무척 화려한 줄 알았는데 예상밖으로 소박했다. 오페라 공연은 매년 12월 7일 밀라노의 성인 암브로쇼 축일에 시작하여 다음해 5월말까지 하고, 여름이면 콘서트 및 발레 등을 공연한다고 했다. 우리가 갔을 때는 공연을 하지 않아 내부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극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레오나르도 다빈치像이 있어 기념 사진을 함께 찍었다.
이어서 비토리아 엠마누엘 2세 회랑으로 갔다. 이곳은 1865년부터 1877년에 걸쳐 지어졌다는데 이탈리아 통일 영웅 비토리오 엠마누엘 2세때 축조한 것이다. 거대한 아케이드 형식의 철골에 유리로 장식된 높은 돔형의 천장과 모자이크로 장식된 바닥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어 마치 최근에 지은 현대식건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날 마지막으로 간 곳은 두오모 성당이다. 두오모(Duomo)란 뜻은 반원형의 둥근 천장을 의미하는데 그 지역 대주교가 직접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이라고 한다. 이 곳은 이탈리아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인 그 길이가 157m, 폭 92m, 높이 108m으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성당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규모의 성당이란다.
하늘을 향해 솟은 고딕양식의 뾰죽한 첨탑들은 장엄하면서도 화려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첨탑 꼭대기에는 황금의 성모마리아 상을 비롯하여 약3,000여 개의 사도와 성인들의 조각상이 만들어져 있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이곳 역시 시간이 없어 자세히 보지 못하고 사진 몇 장 찍는것으로 대신해야만 했다.
두오모 성당은 1386년에 착공후 1812년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하는 나폴레옹 지시로 겨우 성당의 외관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착공후 수세기에 걸쳐 아치들과 첨탑들, 벽면의 조각상들이 순차적으로 설치되고 대성당의 마지막 세부 장식등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완성이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1965년에 출입문 낙성식을 가졌다고 한다. 성당 하나를 건축하는데 장장 약 500년이 이상 걸렸다고 하니 우리들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밀라노 시내 구경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시외곽에 있는 한식당으로 갔다. 식당에 도착하니 밤 9시 30분, 이 날 저녁메뉴는 숯불갈비다. 부부동반으로 자리를 잡아 여섯 명씩 앉았는데 어쩌다 우리부부가 테이블 가운데가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고기 굽는 것은 우리네 몫이 되어 아내가 가위와 집게를 잡고 굽기 시작했다.
난 이성을 잃을 때가 가끔 있는데 만취했을 때와 배가 고플 때다 바로 그 때이다.
이날도 너무 시장해서 고기가 익자마다 누가 먼저 먹을까봐 냉큼 집어 먹어 아내가 미처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난 공기를 다 비우고 말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식사 하는 것을 멍하니 보기도 민망하고 해서 식당홀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예의도 없이 다른 분들 식사중에 나갔다고 밤늦게 숙소에서 아내에게 엄청 혼이 났다)
만찬을 끝마치고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10시 30분이 지났다.
배정된 방으로 가서 여장을 푸니 11시쯤 되었다. 이날 호텔은 이전보다 조금 못 했는데 이태리 경제가 영국, 프랑스, 스위스 보다는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했다. 호텔 바로 곁에 차량들이 많이 다니는 큰 도로가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방음시설이 잘 되어 있어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아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6.13(목) 날씨 맑음, 기온 Hot & Hot
피사까지 이동(350Km, 4시간)→ 피사 관광(오찬)→ 로마까지 이동(340Km, 3.5시간), 만찬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뷔페)를 먹고 피사를 향해 Go!!
현지 가이드가 간단한 이탈리아 인사말를 알려 준다.
아침 인사 ‘본 조르노(Good morning)’, 감사합니다 ‘그라찌애(Thank you)’, 천만에요 ‘쁘레고(your're welcome)’ 외워 두었다가 써 먹어야지 하며 입속으로 되된다.
본 조르노, 그라찌애, 쁘레고....
밀라노에서 나온 현지 가이드는 여행 안내가 조금 서툴러 보였는데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부업으로 가이드 일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피사이동중 들었던 이태리 이야기 : 은행서비스 낙후, 정치 후진성, 노동자 천국
이태리에서는 계좌개설 은행지점(주거래 은행)에서만 자기가 저축한 돈을 찾을 수 있고, 다른 지점에서 돈을 찾으려면 절차가 매우 까다롭다고 한다. 그래서 이사를 하게 되면 기존 통장계좌는 폐쇄하고 이사한 지역 가까운 지점에 신규계좌를 개설한단다. 또한 은행에 돈을 맡겨도 이자가 低利이고 계좌관리비는 엄청 많다고 한다.
은행서비스가 이렇게 후진데도 G7 선진국 이라는 것이 신기하다.
이태리 정치후진의 중심인물은 3번에 걸쳐 11년간 총리직을 역임한 베를루스코니로 2011년에 경제위기와 각종 부패혐의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가 총리직을 세 번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은 막대한 재력을 통한 불법적 정치활동과 자신 소유의 방송 채널을 이용한 여론조작 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지난달 이태리법원은 그에게 미성년자 성매매와 권력남용 혐의로 7년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이태리는 공산당과 사회당 등 親노동 정당들에 대한 국민적 지지율이 상당히 높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노동자들은 법률적으로 충분한 보호를 받고 있으며 노조 등을 통해 사내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사측에 시정을 요구 할 수 있단다. 부당노동행위는 생각할 수도 없고 언제나 정시출근 정시퇴근이 가능한 나라가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피사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 피사 주의 州都이다. 이곳은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출생지로서 아직도 대주교관구이며, 전통 깊은 명문 피사대학교가 있다. 철도가 교차하는 교통요지이기도 한데 경공업이 발달해 있으며 인구 9만명 정도의 중소도시로 우리나라 성인중 넘어질 듯 기우뚱한 ‘피사의 사탑’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드디어 피사에 도착하니 정오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대지를 불 태우고 있었다.
본격적인 관광에 앞서 오찬을 즐겼다. 메뉴는 홍합탕, 해물스파케티로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레스토랑은 피사에서도 맛 좋기로 유명해 세계 각지에서 크루즈를 타고 오는 단체 손님들이 주로 찾는 집이란다. 이태리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반도라서 그런지 음식맛이 우리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곳에서 구경할 것은 피사 두오모 성당과 세례당, 피사 사탑 3곳인데 먼저 피사 사탑으로 갔다. 이 탑은 1174년에 착공하여 10m 높이에 이르렀을 때 지반이 내려 앉아 공사를 중단했다가 다시 계속 건설하여 1350년에 8층 탑으로 완공했다고 한다. 현재 기울기 5。30′로 매년 1mm씩 기울고 있다는 이 사탑은 지상으로부터 54.5m이다. 그 유명한 갈릴레이가 낙하실험을 했다는 바로 여기다.
탑 내부에 294개의 계단이 있어 정상에 오르면 피사 시가지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데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 입장을 포기하고 두오모 성당으로 갔다. 이곳 역시 표를 구입해야 들어 갈 수 있어 아내와 함께 잔디밭에 앉아 쉬면서 여행객들 모습을 지켜봤다. 이곳에서는 피사탑을 일으켜 세우는 기념사진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우리커플도 한 컷 찍었다.
피사탑 구경을 마치니 오후 4시가 지났다. 그곳에서 현지가이드와 작별인사를 하고 우린 다시 로마를 향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라는 말도 있고 ‘All roads lead to Rome!(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警句도 있다.
로마는 단지 지도상의 도시이름이 아니고 로마의 역사는 곧 유럽의 역사이고 서양 문명의 역사이며 全인류의 역사이다.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후 서기 476년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할 때 까지 약 1,000년동안의 로마인들은 세계역사에 빛나는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를 연출했다. 고대 로마는 기원전 510년에 이미 왕이 아닌 시민이 주인인 공화제를 도입하였다는 데 이 때 벌써 국가란 그 무엇도 아닌 주민공동체이며 따라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니 부럽고도 놀라울뿐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가 보편제국을 건설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민족의 차이, 문화의 차이,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과감하게 이민족을 포용하는 동화정책에서 찾는다. 정복자와 被정복자를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똑같이 대하며 심지어 황제자리까지 로마가 아닌 스페인이나 프랑스 지역 출신 또는 북아프리카나 시리아 출신지역에서도 나왔다고 하니 오늘날에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로마는 갈리아, 브르타뉴, 에스파냐, 아프리카, 이집트, 동방, 그리스을 하나로 묶는 하나의 대제국을 건설하여 법률과 제도, 문학과 언어 등 그들의 선진 문화가 유럽 전지역에 전파되었다. 서양역사에서 로마이후 그 어떤 나라도 로마만큼 커다란 땅덩어리와 제국을 이룩하지 못했다.
기원전 312년에 시작한 로마가도의 부설은 기원전 1세기 공화정시대에 이탈리아 全지역에 그리고 제정시대에 들어서는 유럽, 중근동, 북아프리카에 걸친 제국전역을 망라해 나간다. 그 결과 주요 간선도로 전체길이만 8만 킬로미터를 넘었다고 하는데 이 사통팔달의 넓은 도로를 통하여 사람과 물자들이 활발히 교류되면서 지역 발전이 촉진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이동중 차창밖의 이국풍경을 즐기고 잇는데 가이드가 영화 한 편을 틀어 주면서 다음날 로마시내 관광때 이 영화 배경으로 나오는 곳을 갈 예정이니 잘 보고 기억해 두라고 한다.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주연하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이었는데 이 영화 한편으로 오드리 헵번은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일약 세계적인 톱스타로 각광을 받게 된다.
줄거리는 로마를 방문한 어느 나라의 공주(오드리 헵번)가 꽉 짜인 스케줄로 질려 밤에 숙소인 대사관을 몰래 빠져 나갔다가 궁정의사가 놓아 준 진정제 주사로 해서 길가 벤치에서 깜박 잠들고 만다. 그 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게 된 미국인 기자 조(그레고리 펙)가 그녀를 발견하고 자신의 하숙집으로 옮겨 편히 자게 하는데 이튿날 신문을 통해 그녀가 공주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조는 특종 취재를 위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그녀와 함께 꿈같은 하루동안의 로마시내 관광을 하게 되면서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공주는 다시 대사관으로 돌아가고 그곳에 기자회견을 하고 회견말미에 “내가 살아있는 한 나의 기억 중에서, 이곳 로마의 방문을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라며 조와 함께한 시간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하면서 둘은 아쉬운 작별을 한다는 얘기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 저녁 8시가 넘어 식사를 예약해 둔 식당으로 곧장 갔는데 브루스케타, 고기요리, 셀러드가 나왔는데 맛은 그저 그랬다. 이 레스토랑에서 서빙하시는 할아버지(주인)가 너무 연로하셨어 혹여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집사람은 주인 할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음식을 다 먹겠다고 하면서 호기를 부리더니 성공하지 못하고 조금 남겼다.
저녁식사후 호텔에 도착하니 9시 30분 가량 되었다. 숙소는 세계적인 체인업체인 매리어트 호텔이었는데 건물 상태는 별로였지만 침실이 아늑하고 깨끗했으며 무엇보다 고층이라 주변 경관을 굽어 볼 수 있어 좋았다.
6.14(금) 햇볕 쨍쨍
오전 바티칸시국 관광 : 바티칸 박물관(시스티나예배당) & 성 베드로 성당
오후 로마시내 투어 : 개선문, 콜로세움, 포로로마노, 트레비 분수 등
바티칸시국은 로마의 서중부 쪽에 흐르는 테베레 강 서쪽 바티칸 언덕 위에 있는데 면적이 0.44㎢에 불과하며 인구는 1.000명도 되지 않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주권국이다. 그러나 이 소국은 세계 캐톨릭의 수장이신 교황이 지배하는 독립국으로 교황의 집무실이 있고 첫 교황인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곳(베드로 성당)이기도 하다. 현지 가이드 말이 최근 266대 교황으로 취임한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체스코 1세가 탈권위적인 겸손한 행보로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바티칸박물관 - 시스티나예배당 - 성 베드로 성당 順 관람
바티칸박물관은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박물관으로 이미 두 곳을 갔다 왔으므로 이곳만 구경하면 유럽의 주요박물관을 다 다녀온 셈이다.
박물관내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라오콘상과 태양의 신 아폴로상, 곡물의 신 키레스, 전쟁의 여신 아테나, 술의 신 디오니소스 등 올림프스신들들의 조각상들이 가득했다. 폭군황제로 알려진 네로황제의 욕조도 있고 박물관 천장은 평면 그림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입체감이 느껴졌다.
이어서 시스티나예배당으로 갔는데 이곳은 교황궐위시 추기경들이 모여 후임자를 선출하는 콘크라베 선거가 실시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천장에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벽면에는 ‘최후의 심판’ 그림이 있다. 좁은 지역안에 관광객들로 가득했는데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유감스럽게도 사진을 찍지 못했다.
성 베드로성당은 베드로의 무덤위에 세워진 낡은 콘스탄티노성당을 대체하기 위해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건립하기 시작해 교황 파울루스 5세 때인 1615년에 완성되었단다. 이 성당 축조에 당대최고 미술가인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마테르노, 베르니니 등의 손을 거치면서 예술성과 완성도가 더욱 높아 졌다고 한다.
성당을 들어서면 오른쪽편엔 미켈란젤로가 24세때 조각했다는 ‘피에타像’이 있었는데 강화유리로 쌓여져 있어 사진을 찍기에는 다소 불편했다. 성당 벽면의 캐톨릭 성인들의 조각상과 그림들에 압도되어 눈만 크게 뜨고 지켜볼 뿐이다. 입을 맞추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베드로 청동상의 오른발이 닳아서 반짝이고 있었는데 난 손으로 슬쩍 만치는 것으로 만족했다.
성당 구경을 마치고 약속 장소에 일행들이 모이고 우린 오찬 장소로 이동했다. 점심식사는 현지식인 이태리 해물요리 전문집에서 했다.
오후는 로마시내 관광이다. 도보로 걸으면 날도 덥고 해서 몇 곳을 보지 못한다고 여행사에서 벤츠차로 장소 이동을 해 준다고 했으니 적잖이 기대가 되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콜로세움이다. 수십 세기가 지난 지금도 로마의 상징이자 세계 각국의 관람객들이 감탄하는 콜로세움은 서기 70~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 때 100일간의 경기가 포함된 제전을 위해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가 8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최상층을 덧붙여 공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지름 최대 187미터, 최소 155미터, 4층 건물의 최소 높이 50미터로 최대 6만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장엄한 타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海戰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연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입장할 수 있었지만 사회신분에 따라 출입구와 좌석이 엄격히 구분되어 “포디움”이라고 불리우는 중앙 좌석 7열은 황제석 외에 원로원 의원들과 고관들의 전용석이었다고 한다.
로마제국 말기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여 크게 파손되었으며 중세에는 공동묘지로, 자재야적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대리석 건축붐이 일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건물벽이 뜨겨나가는 큰 수난을 당했단다. 눈앞의 잔해속에서 2,000년전 검투사들의 칼 부딪히는 소리와 관중들의 환호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다음으로 간 곳은 포로로마노다. 이곳은 나에겐 생소한 지명인데 가이드가 여행중 몇 번이나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이야기를 해서 어떤 곳인지 궁금증이 일었던 곳이다.
이곳은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293년에 걸쳐 로마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티투스개선문에서 세베로 개선문까지 신성한 길(Via sacra)를 좌우로 여러 신전과 공회장, 원로원 회의장(쿠리아)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2,000년 세월의 무게앞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훼손되고 현재 복구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원로원 회의장과 안토니우스황제(파우스티나 황후) 신전만이 그 형태를 유지하면서 화려했던 시절을 얘기해 주는 듯 했다.
특이하게 건축물 유적들 사이에 건축물이 아닌 시저 화장터가 있어 ‘진정 로마를 사랑한 사람은 시저이다’라고 로마시민과 이태리 국민 모두가 생각하지 않을까 짐작해 봤다. 시저 시해사건을 두고 부르투스와 안토니우스가 연설을 했다는 쿠리아는 상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포로로마노 다음으로 간 곳은 캄피돌리오 광장이다. 이 곳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광장으로 고대 로마정부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로마시청이 자리잡고 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철학자이자 명상록의 저자이며 오현제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다음 벤츠를 타고 영화 ‘벤허’의 촬영지 유명한 대전차경기장을 찾았는데 푸른잔디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어서 영화속 오드리 헵번의 깜짝 놀란 얼굴이 떠오르는 ‘진실의 입’이 있는 성당에도 갔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어 밖에서 사진 한 컷 찍고 나왔다.
이어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측근인 아그리파가 설계하였다는 모든 신들의 신전 이라는 판테온신전을 찾았다. 신전 내부는 원형으로 지름과 높이가 같은 반구형 건물로 천장 중앙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 여기서 들어오는 자연채광으로 실내조명을 했다. 지금은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내부에 르네상스 시대의 또 다른 거장 라파엘로의 무덤과 이탈리아 사보이 왕실의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었다.
이후 시내관광은 영화 ‘로마의 휴일’ 촬영지를 둘러 보는 것이었다.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로마에 또 한 번 오게되고 두 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트레비 분수도 보고나서, 오드리 헵번이 먹어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본 젤라또 가게에 들려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 또 스페인 광장 계단에서는 부부가 로마의 휴일 흉내를 내며 커플끼리 기념사진도 찍었다.
로마시내 투어를 마친후 저녁까지 해결하고 숙소에 도착하니 아홉시가 훨씬 지났다. 여행후 처음으로 김부장과 임부장 커플을 우리 룸으로 초대해서 폭탄주를 마셨더니 정신이 가물가물 몸은 흐믈흐믈 해지며 異國에서의 밤은 깊어만 갔다.
6.15(토) 날씨 더 할 나위 없이 쾌청
서울을 떠나 온지 벌써 일주가 지났으니 이번 여행도 후반이다.
이날 일정은 로마에서 피렌체까지 300Km 버스 이동후 관광, 다시 베니스(파도바)까지 270Km를 이동(예상 이동시간 7시간 반)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인 토스카나 지방에 위치하고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메디치가의 후원에 힘입어 르네상스를 꽃피운 도시이다. 이곳은 1982년 유네스코에 의해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로마, 베니치아와 함께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이태리를 대표적인 관광도시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두오모 광장 주변의 두오모 성당, 산 지오바니 세례당과 지오또의 종탑이, 시뇨리아 광장 주변의 베키오 궁전, 넵듄 분수, 사비니 여인의 강탈 조각 상 등이 있고 소설 神曲의 저자 단테의 생가도 이곳에 있다.
피렌체는 분지에 형성된 도시로 여름무더위로 유명한 곳이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보다 조금 일러 시내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는 미켈란젤로광장으로 갔다. 언덕아래에 붉은색 지붕의 집들 사이로 베키오궁전과 두오모, 산타 크로체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오찬을 하고 시뇨리아 광장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이곳 수도원에서 만드는 크림이 좋다고 소문이 났다며 가이드 J와 장 처장님 두분이 구매사절단으로 선발되어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끼리 시내 구경을 나섰다.
광장 중앙엔 메디치가문에 배출된 첫 번째 왕 코시모 1세의 청동 기마상이 있고 그 곁에 넵튠의 분수가 물을 뿜어 내고 있었다. 베키오궁 앞 회랑에는 로마인과 사비니 부족, 그리고 사비니 여인이 뒤엉켜 있는 유명한 조반니 볼로냐의 ‘사비니 여인의 강탈’ 조각像이 있다.
르네상스는 메디치가문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설이 있는데 수익의 3분의 2를 학예와 예술발전에 투자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다. 베키오 궁전을 지나면 로렌초 메디치, 코시모 메디치 등 메디치가 인물들과 함께 그들이 후원했던 인물상들이 서 있다. 니콜라 피사노, 지오토, 도나텔로, 아메리고 베스푸치, 보카치오, 프란세스코 페트라르카, 단테 조각상이 보았는데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 인물상은 찾지를 못했다.
다음으로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 기념관을 찾았다. 담벽에 청동 인물상이 있고 길 바닥에도 누군인가 단테상을 조각해 놓았는데 많이 닮아 놀랐다. 좁은 골목길안에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났다는 자그마한 성당이 있어 들어가서 기념사진을 몇 장 찍었다.
마지막 코스인 두오모 광장으로 이동! 피렌체 두오모는 로마의 베드로성당과 밀라노 두오모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것으로 꽃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 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이 곳은 피렌체 공화국과 길드가 함께 지은 것으로 1292년에 착공하여 1446년에 완공된 피렌체의 대표적 상징물이란다.
성당내부 관람을 위해서는 별도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고 해서 들어가지 않고 건물외곽 사진만 찍었다. 그 바로 곁에 산 지오바니 세례당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어 가서 봤더니 미켈란젤로가 감탄했다는 기베르티 제작의 ‘천국의 문’ 부조상이 있었다. 가이드가 산 지오바이(세례자 요한, 피렌체 수호 성인)의 손가락이 이 곳에 있다고 했다.
유적 관광을 마치고 버스가 정차해 있는 곳으로 오면서 보니 아르노강에서 조정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남자 수인은 테이블주위에 모여 무슨 놀이인가에 열중이고 또 여성 한 분은 하천변에서 일광욕을 하는 등 시민들의 일상을 엿볼수 있어 좋았다.
16시 피렌체 Good bye! ‘물의 도시’ 베네치아 Stop there!
베네치아에서 잠을 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파도바라는 곳에 있는 호텔에서 묵었다. 만약 베네치아였다면 밤에 몰래 나가 배를 타고 도시 야경을 구경하려고 했는데 힘들게 되었다고 투덜거렸더니 누구인가 룸에서 배를 타라고 한다. ^^
6.16(일) 날씨 매우 좋음
오전에 베네치아 관광, 점심, 오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로 이동(325Km, 5시간 소요)
베네치아는 5세기경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의 침입을 피해 롬바르디아 피난민들이 아드리아해의 해안가 척박한 갯벌에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해서 점차 도시를 이루게 되었다. 약 7세기에 이르자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그들의 지도자를 뽑아 자치를 시작했다가 8세기부터 1797년까지 약 1,000년 동안 독자적인 공화정 정부 형태를 갖추고 독립 도시국가로 존재하면서 한때 지중해의 해양 강국으로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였다.
초기 정착민들은 석호(潟湖, 갯벌 호수)에 거대한 나무기둥을 깊게 박아 땅을 다지고 그 위에 건축물들을 세웠는데 흩어져 있는 120여개의 섬들을 400여개의 다리로 연결하여 바다위의 떠 있는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만은 세계 각지 도시들과 달리 자동차는 볼 수가 없고 섬과 섬의 이동은 해상교통 수단인 배를 이동하여야만 가능하다.
베네치아 본섬행 배를 타기 위해서 선착장으로 가니 멀리 호화유람선들이 정박해 있었는데 현지 가이드 말이 이곳은 크루즈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열을 올리고 있는데 이곳은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원주민들은 조용한 외곽지역으로 이주를 하여 시내에는 빈 건물도 많다고 한다.
본격적인 시내구경을 하기 전에 우물이 있는 자그마한 광장에 모여 설명을 듣고 있는데 성당 종소리가 귀청이 떠나 갈듯 울렸다. 아마 주일이라 성도들에게 예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일터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큰 소리라 무척 놀랐다. 베네치아 곳곳에는 볼 수 있는 우물은 염분 때문에 식수가 부족했던 과거에 빗물을 받아 두었다가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파 놓았다고 한다.
작은 운하들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위에서 사진도 찍고 발아래에 지나가는 곤돌라 배들도 볼 수 있었다. 산 마리노 광장앞을 지나는데 레스토랑에서 아리랑 가락이 들려와 보았더니 음악인 몇몇이 모여 직접 연주를 하고 있었다. 주변 상점구경도 갔었는데 이 지역 특산품인 유리공예품들이 진열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주인을 찾고 있었다.
이어서 곤돌라를 타러 갔다. 여행계획상으로는 이곳에서 곤돌라 대신 수상택시를 타는 것으로 되어 있어 희망자에 한해서 자기부담으로 곤돌라를 타는 것으로 했는데 대부분의 커플이 승선을 하였던 것 같다. 노래하는 가수와 동승을 하여야 제 맛이 난다고 했는데 우리는 삼페인 한 병을 휴대하고 2~3커플씩 조를 지어 승선했다.
대략 30분정도 걸린 것 같았는데 곤돌라를 타고 건물들 사이의 미로 같은 골목 깊숙한 곳을 들어가 보는 것은 좋았지만 기대가 너무 커서인지 그리 감동적이지는 못했다. 듣던 바 데로 곤돌라 노를 젓는 사공들은 하나 같이 영화속 주인공처럼 멋지게 생겼는데 수입이 좋아서 꽤나 인기 있는 직업이라고 한다.
버스가 정차해 있는 밖으로 나올 때는 수상택시를 탔는데 속도감이 있어 바닷바람을 맞으면서도 모두들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즐거운 표정들이다. 해안가에 줄지어 서있는 유서깊은 건물들을 바라보며 그 옛날 도시를 건설하는 베네치아인들을 그려보는데 안타깝게도 도시전체가 조금씩 바다밑으로 가라앉고 있다고 하니 왠지 마음이 울적했다.
피렌체는 도시의 富를 사람에 투자하였고, 베네치아는 그 富 를 인프라에 투자하여 바다위 도시를 세웠다고 하는데 어느 도시가 투자를 잘 하였는지 역사적으로 판별하기가 어렵다. 우리도 인천과 부산이, 대구와 광주가 서로 서로 지역특성을 살리면서 도시발전을 위해 경쟁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이렇게 해서 4박 5일간 이태리 관광이 끝났다.
가이드가 이런 말을 했었다. “런던을 보고나서 파리를 봐야 두 도시를 조금이나마 기억하고, 로마는 가장 마지막에 가야 세 도시를 기억 할 것이다”라고. 그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제야 그 의미를 조금은 알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