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역사의 증인 윤한봉
2006년 2월 5.18기념재단 이사장 박석무는 “5.18의 기억과 역사2”라는 제목의 책에 6명의 증언을 실었다. 여기에서 수록된 4명의 증언은 5.18규명에 별 도움이 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관심을 가져야 할 증언자는 윤한봉과 정동년 뿐이었다. 윤한봉은 5.18 역사의 주인공이자 실질적인 리더로 통하는 전설적(?)인 인물이고, 정동년은 내란의 수괴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으로 그 이후 6월 항쟁, 1986년 5.3인천폭동에까지 참여했다가 옥살이까지 한 반체제 전문 시위꾼이다.
윤한봉 편
윤한봉은 1947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니 2007년 6월 27일, 59세로 사망했다. 5.18의 핵심 주역 중 한 사람으로 수배를 받다가 1981년 4월 화물선에 숨어 35일에 걸쳐 미국으로 밀항했다. 미국에서는 민족학교와 재미한국청년연합 등을 결성해 운동권 일각을 형성하여 활동하다가 1993년 김영삼의 선처(?)로 수배가 해제되자 귀국했다. 귀국 후 5.18기념재단 설립을 주도했고, 민족미래연구소와 들불야학기념사업회를 창설했다.
<윤한봉의 증언내용>
빈둥대며 부모 속 썩였다
광주1고, 학교생활을 땡땡이 치고 엉망으로 했다. 대학진학 안 하고 1년간 절간에서 살았다. 산에나 오르내리고 물가에 누워 낮잠이나 자면서 한가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병참학교에서 교육받고 12사단 최전방 부대인 52연대 군수과로 배치됐다. 성격이 꼬장꼬장해 군대에서도 많이 싸우고 다퉜다. 군대에서 대학 나온 놈들, 대학에 적을 둔 놈들이 나를 고교출신이라고 멸시했다. 그래서 대학가기로 결심하고 전남대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농촌에서 목가적으로 살고 싶어서 축산과를 택했다. 자취생활을 하다가 하숙생활을 하면서 모범생으로 공부했다, 부모 속 썩인 것, 땡땡이 친 것 반성했다. 만학이라 동료들에 비헤 나이가 많은데도 동료들에 반말 안하고 좋은 말 썼다.
나이 어린 운동권 학생들이 꼬득여, 소영웅심으로 학생운동 시작
매너가 좋고 학업에만 열중하다보니 학생들이 따랐다. 전남대 학생운동의 맥은 1971년에야 형성되기 시작했다. 광주1고 출신들이 금서인 “리슨 양키”(Listen Yankee! 양키들아 들어라)를 구독하면서 미국을 제국주의로 인식, 반미감정을 갖게 됐다. 사상이 붉으스름하게 변하게 됐다. 광주일고 9회 선배들이 반공법 등으로 잡혀갔고, 10회가 통혁당 막둥이로 고생했고, 나는 광주일고 11회다. 3년 후배(일고14회) 중에는 정상용(5.18항쟁지도부 외무부장)과 이양현(5.18항쟁지도부 기획위원) 등이 주축이 돼서 전남대에 ‘민족사회연구회’를 만들었다. 그후 일고 후배 김정길, 박형선, 문덕희 등 민청학련 출신들도 이에 가담했다.
1971년에는 교련반대시위가 유행했고, 정부는 이 시위자들에 대해 강제입영을 단행했다. 정상용, 이양현, 김진 등이 강제입영 당했다. 이때부터 사상 처음으로 전남대 영내에 경찰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나를 꼬득인 사람은 박형선, 문덕희 등이었다. 나는 이들에 동조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멀리 한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경찰의 최루탄 공세를 받았다. "원자탄이 날아와도 우리는 이 자리를 지키겠다" 호언했던 학생들이 먼저 도망을 갔고, 나는 나중에 도망치다가 경찰과 교수들로부터 “비겁하다, 떼어 버려랴”등 야유를 받았다.
그 후 나는 “할라믄 하고 말라믄 말지 어정쩡하니 뒤 따라 다니다가 이런 수모를 당했다” 고 생각했다. 운동에 앞장서기로 마음먹고 머리를 밀어부렀다. ‘민족문제연구회’는 정학 등을 당해 소멸되고 그 대신 이름을 바꾸어 ‘교양독서회’라 했다. 이 이름도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까지만 존속했다.
“유신 쿠데타” 소식에 인생 바꿔
2학년(1972) 10월 17일 밤, 하숙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나’를 자꾸 나오라 해서 나갔더니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저질렀다고 했다. 휴교령, 국회폐쇄, 헌법 폐지 등.. 화를 주체하지 못해 나는 들어가 내가 보던 책을 볼펜으로 찍어버렸다. 이 새끼들이 국민 알기를 벌레로 아는가 해서였다.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 싸운다." 결심을 했다.
다음 날 의기에 차서 학교에 나갔더니 교수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들어가니까 “무등산에 단풍이 서서히 들어가네” 하는 식의 딴소리만 했고, 어린 아이들은 유신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고 행진도 했디. 내 친구놈들도 "헌법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나는 이런 새끼들에 화가 치밀었다. 친구들과 삿대질하고 욕설하며 마구 싸웠다.
그후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궁리를 했지만 답이 없었다. 박정희를 죽일 방법도 없고. . 생각해 낸 것이 학생운동 밖에 없었다. 전남대 전체를 학생운동으로 하자니 전남대는 내가 안기에는 너무 컸다. ‘농대’로 범위를 축소하니 좀 감이 잡혔다. 농대라 해도 아직 내 말에 따라 줄 사람은 없었다. 곧 3학년이 되니 선거를 통해 학생회장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답이었다.
50만원이 넘게 든다는 학생회장 선거에서 7백원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다. 7백원으로 선거를 치르겠다는 동키호테 같은 소리가 온 학내에 퍼졌다. 처음에는 미친 놈들이라 외면하더니 나중에는 신선한 학생운동이라는 소문이 났다. 내가 갑자기 유명해 졌다. 그 다음 나는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을 벌었다. 이러는 사이 정보사찰기관은 나를 요주의 인물로 선정했다. 학교는 나를 문제아로 찍었지만 나는 내가 노렸던 바대로 학내 영향력을 굉장해 키우게 됐다.
73년 2월,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유신에 반대하는 기념비적인 시위를 벌였지만, 실은 그보다 더 빨리 나와 박형선이 유신반대 시위를 기획했다가 학교당국에 발각돼 3일간 절에 연금당했다, 73년 한 해에 서울에서 간헐적으로 유신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박정희는 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발동했다. 5년 이하의 징역이라기에 나는 5년간 살려고 작정했다. 73년의 유신반대 시위가 왜 실패했는지 분석해보았다,
“전국적으로 아무리 학생들이 떠들어도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아니면 효과가 없다. 전국적 연결을 갖고 동시다발적으로 동일한 목표와 구호를 외치며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서울 학생들이 내려왔다. 영남권, 호남권, 서울권을 하나로 연결하여 정보를 교환해가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유명한 운동권의 스타였던, 김정길, 이강, 김남주를 만나 의논했다. 이들은 나를 호남권의 대표자로 추천했다. 김정길이 내게 와서 ‘서울사람들’을 만나게 다리를 놓았고, 내가 만난 서울사람은 이철과 황인성이었다. (주: 인혁당재건위로 사형된 여정남은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서울대의 이철, 유인태, 황인성을 통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
전북대 학생들은 술만 마셔쌓고 뜨뜨미지근하고 자수하고 그랬다. 여튼 동시다발로 시위를 기획했는데 저쪽 안테나에 다 걸려 일망타진 됐다. 교수들은 내게 잘해줬다. 출석을 못했는데도 출석한 것으로 해주고, 장학금도 타게 해주었지만 여전이 돈이 모자랐다. 서울 갈 용돈이 없어 화투 잘 치는 박형선과 문덕희를 시켜 삼봉치기를 하라고 내가 밑봉을 대주었다. 새벽차를 타고 서울로 가야 하는데 화투꾼이 오지 않아 욕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눈이 퀭해 가지고 뛰어왔다. 딴 돈을 내놓고 그 자리에서 푹 쓰러져 자브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 언도
민청학련사건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긴급조치 1,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예비내란 음모 등의 혐의였다. 하지만 75년 2월 16일 대전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그리고 4월 9일,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사형을 당하셨다. 그 뉴스를 듣고 나는 아 한목숨 다 바쳐 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후배들을 의식화시키는데 열중했고, 운동원 인사들에 대한 옥바라지에 나섰으며 김지하의 옥바라지도 했다.
그해(75) 8월에 장준하 선생님이 의문사를 당하셨는데 그 때만 해도 우리는 암살로 봤다. 그때 나는 책판매 관계로 다른 곳에 있었는데, 서울서 학교 다니다 감방에 갔다 온 친구 일부와 광주 친구들이 자취방에 모여 사상계 구절을 읽어가면서 장준하 추도식을 하다가 잡혀가 매를 맞았다. 누가 주동했느냐, 뭣 땜에 했느냐, 베트남 멸망을 핑계로 다 깨브렀다. 장준하 추모식 하다가 두둘겨 맞은 학생들이 억울하다며 홍남순 변호사를 찾아가 소송제기 해 달라 하소연했지만 홍변호사는 ‘글쎄’만 연발했다. 그들은 배신감 느껴갖고 나와 부렀다.
여기저기 홍변호사님을 욕하고 다니는데 새로운 사실 발견했다. 홍남순 변호사는 ‘민주회복 국민회의’ 전남지부를 책임지셨는데 중정에 끌려가 해체 각서를 강요받았다. 못하겠다 하니가, 자식뻘도 안되는 것들이 60이 넘은 홍변호사님 고추를 잡고 ‘30센치 자’로 두들겨 팼다 하더라. 이런 수모를 받고 나온 분이라 ‘글세 글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였다. 민주니 자유니 외치던 모든 조직이 다 깨졌다. 밥 사준다던 사람들이 나만 보면 옆 골목으로 피했다. 교수들도 나를 피했다. 어울려 주는 사람 없고 집에선 애물단지 됐다. 버스 탈 돈도 없었다. 월부 책장사 하고 포장마차를 했다. 참으로 비참한 시기였다.
교도소에서 얻은 피부병이 병원가도 소용 었다. 누군가가 해수욕하고 모래찜질하면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교도소 갔던 친구들이 닭 한 마리 사들고 냄비 사들고 버스타러 갔다가 붙잡혀 동부경찰서로 연행돼 갔다. 이모임 주모자 누구냐, 3시갖 취조 받고 허탈하여 자취방 벽에 서로 고개들 푹 숙이고 앉아있었다. 서로 쳐다보다가도 또 곡개 푹 숙였다. 겨우 이것 갖고 목숨걸고 싸운다 한 것이 한심해부렀다. 신문에도 안 나고.
내가 긴급조치4호를 비판하는 유인물 2천매를 잘못 관리한 죄로 감옥에 갔고, 그 유인물에 손을 댄 친구 용운이도 생똥을 싸부렀다. 형사들이 들이닥쳐 어느 다리가 아프냐 물어가지고는 그 아픈 다리만 마구 차부렀고, ‘너 윤한봉이 간첩인지 정말 몰랐느냐’ 다그쳤다. 그리고 현금 150만원을 뺏어가 브렀다. 그 친구 엄마다 돈으로 해결한 거다.
나는 화가 무지 났다. 동아일보에 제보하러 가기로 작정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탄압에 의해 광고가 안 들어와 백지광고까지 냈다(주: 거물간첩 김용규의 ‘소리 없는 전쟁’에 의하면 이 백지광고는 간첩이 저지른 모략전이었다). 이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를 반국가 빨갱이들이라 몰아놓고 겨우 유인물 감춰준 친구한데 돈 받고 빼줄 수 있는 것인가. 이러면 정부가 엄청나게 당하지, 이런 새끼들 내가 내일 서울 가 갖고 박살 내부러야겠다” 흥분해 떠들었다. 그런데 바로 이걸 형사가 듣고 있었다. 서울 가기 위해 광주에 올라와 후배 집에 갔더니 3명의 형사가 ‘아이고 한봉이, 우리 살았네 우리 살았네’ 하면서 주저앉을라 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후배 집에서 나를 잡을라고 3시간을 기다렸다는 거다. 아무 일 없을 것이니 정보과장을 만나라 가자 했다. 좋소 갑시다.
내 친구 용운이를 발로 차고 돈 뽈아간 놈이 물팍 꿇고 앉아 있었다. 정보과장까지 다 당하게 생긴 일이었다. 고놈은 나도 애기들 있으니 살려 달라 빌었고, 정보과장은 내가 그런 일 시켰겠느냐 하며 싹싹 빌더라. 가져 간 돈 다 갚으라 하고 봐줬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참으로 잘못했다. 그걸 동아일보에 제보했으면 큰 사건이 됐을텐데. 안보 팔아 돈 갈취했다고. .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되자 3월 1일, 함석헌, 김대중 등이 구국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언론들은 이를 기사화하지 못했다. 나는 성결교회에 초대받아 몰래 획득한 구국선언문을 읽어주었다. 그후 김영종이 학교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다가 잡혀 갔고, 그가 내 이름을 댔다. 나는 두 번째 구속되어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때까지 감옥에서 지낸 총 시간은 20개월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수감됐던 대구교도소에는 긴급조치 위반 정치범들이 총 집결돼 있었다. 최열이도 거기 있었다.
공소시효 지났으니 박정희 암살계획 밝힌다!
1975년 4월 9일, 전남대 도서관 잔디밭에 앉았다가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악을 썼다. 유인물이나 뿌리고 집회나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박정희를 암살하기로 맘 먹었다. 5명을 여기에 끌어들였다. 4명의 이름은 밝힐 수 있는데 1명은 발표 않겠다. 4명은 나 윤한봉, 정상용, 박형선, 조계선(농민운동 하다가 남민전에 가담)이었다. 총은 구할 수 없고 수류탄이나 다이너마이트로 특공자살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다이너마이트 4상자 구했다. 소리 없이 이 계획을 추진하다가 구국선언 관계로 감옥에 가면서 암살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출소해서 황석영과 농민운동 같이 했고, 광대극단 운동 같이 했다. 부부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해 여성을 상대로 강연을 했다. 그것이 송백회라는 여성 단체로 발전했다. 나에 대한 신뢰들이 상승했다. 여성들을 이용해 교도소에 덧신 보내기 운동을 했다. 양심수들을 상대로 한 옥바라지 운동도 했다.
78년 5월, 서울 백낙청 교수가 내려와 전남데ㅐ 송기숙 교수, 조선대 문병란 교수와 함께 유신헌법을 비판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성명서는 5월 27일 발표됐다. 기득권자인 교수사회가 움직였다는 것은 학생운동과는 차원이 달랐다. 송기숙 교수가 정보부로 연행돼 갔고, 우리는 송기숙 선생 댁에 대책본부를 세웠다, 백낙청 교수가 내려와 교내시위를 하고 이어 시가지행진까지 했다. 그런데 송기숙 선생 부인이 우리 대책위를 싫어하는 눈치를 보여 쫓겨나 부렀다. 정보부 광주지부장이 나와 황석영을 보잔다 하여 갔다. 송기숙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80년 1월 극단 ‘광대’가 출범했다. 양희은, 김민기가 내려와 공연을 하여 성공적으로 출범했다. 79년 10월 부마항쟁이 터졌다.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시위가 어떻게 부산과 마산에서 그렇게 대규모로 커질 수 있는가에 대해 궁금했다. 10월 23일, 내가 만든 ‘현대문화연구소’에 형사들이 들이닥쳐 무조건 나를 끌어갔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기 전에 불쏘시개 역할을 할 놈들을 미리 잡아간거다. 물고문을 당한 후 또 감옥에 들어갔다가 12월 9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는 바람에 출소했다.
광주 5.18을 예견하고 이를 막아보려 고민했다.
부마사태의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부산으로 가 많은 서민들과 이야기를 나웠다. “내가 앞장 서면 따라오겠지, 따라오지 않는 민중은 고생을 해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등등의 내 생각이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부마사태의 동력이 바로 민중의 힘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이제 곧 광주가 터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80년 3월 말이었다. 70년 내내 민주화를 열망해온 각계각층의 열망이 곧 불타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어나면 무조건 지고 피가 바다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비극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운동권도 나도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조직화되지 못한 봉기는 필패다. 광주가 피바다에 잠긴다. 나는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골돌히 생각하면서 4월을 맞았다.
전국각지에서 가두시위들이 발생했는데 전남만은 조용했다. 4월 10일이었다. 서울에서 여러 사람들 와 가지고 왜 전남은 움직이지 않느냐 추궁을 했다. 4.19를 맞아 가두로 진출하자는 소리들이 나왔다. 나는 내 소신에 따라 피를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광주만 일어서면 광주에만 피가 흐르니 전국각지에서 동시다발로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4월 중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러던 5월 5일, 50명 정도가 ‘민주가족야유회’를 갔다. 진달래 피고 기분들이 좋았다. 그럴수록 나는 답답하고 조급하기만 했다. 따라주는 사람이 없자 나는 나 혼자 해야 할 일을 준비했다.
당시는 1만5천분의 1 지도를 구하려면 신분이 확실해야 했다. 단파 라디오 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1만5천분의 1로 축소된 광주지도를 구했다. 당시 내 이론은 이러했다.
“광주는 꼭 깨진다. 부산 마산에서처럼 일어난다. 일어났다가 곧바로 꺼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 성공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청을 장악해야 한다. 최후까지 싸우다 깨져야 한다. 저들은 반드시 무기를 사용할텐데 우리라고 맨손으로 싸울 수는 없다.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다이너마이트가 어디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대국민용 그리고 대 국제사회용 성명서 초안에 대해서도 구상을 했다. 피해를 줄일 수는 없지만 피해로부터 반드시 정치적 성공을 얻어내야 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나 혼자 준비하고 있었다. 5월 15일, 전홍준 선배의 아기가 돌인지 100일인지 잔치를 했고, 거기에 8명이 갔다. 이를 8인모임이라 한다. 윤한봉, 정상용, 정용화, 이강현, 윤강옥, 김영철, 박용준, 윤상원이다. 이들 대부분은 80년 5월 26일부터 형성된 “항쟁지도부”(자칭)의 핵심간부들이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또 꺼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랬더니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5월 20일, 계엄령 해제 결의안을 제출하기 위해 국회소집이 예고돼 있었다. 신군부는 반드시 21일-25일 사이에 전면적인 쿠데타를 일으킨다. 완전한 군사독재가 실시된다. 광주가 터지고, 터지면 박살난다. 어차피 치를 피라면 그로부터 정치적 이익을 얻어내야 한다. 이렇게 말했더니 이들은 감이 좀 잡힌다고 했다.
이들이 신났다.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우리 다시 만나자. 지금부터 집에 들어가지 마라. 그리고 혜어졌다. 나는 다 준비해 놓고 있었다. 목욕도 하고 문건과 사진도 치워 버렸다. 그리고 2일 후인 5월 17일, 기습을 당했다. 일이 이렇게 터질 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5.18군사재판에서 주동자로 선고된 광주인들, 계엄군 철수 때까지 도망가 있었다!
5월 17일, 전남지역 농민들이 5월 19일의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기 위해 광주 카톨릭센터에 집결해 시위준비물들을 만들고 있었다. 서울역 회군 이후 전국 총학생회 회장들이 이화여대에 모여 회의하는 것을 신군부가 급습을 했고, 이때 박관현(전남대총학생회장)은 용케도 도피했다는 소식이 왔다.
돈이 없어 여관에서 잘 수는 없고, 잘 사는 문병란 선생님 집에 농민회 간부 몇 명을 데리고 갔다. TV자막에 계엄령 전국확대, 의회해산, 휴교령 이런 글자가 나왔다. 자막이 나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당시 광주에서 전화를 놓고 사는 집은 황석영, 송기숙 교수, 문병란, 오직 이 세 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흑백 TV 있는 집도 몇 집 밖에 없었다.
박형선이도 잡혀갔다 하고, 김상윤도 잡혀 갔다 하고, 나를 찾느라 눈에 불을 쓰고 있다 했다. 이런 기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전남대, 조선대 다 접수되어 버렸고, 모두 들 잡혀가고, 도망가고, 박살나브렀다. 아무런 준비 없이 당한 나, 이처럼 후회스러울 수 없었다. 왜내면 나는 21-25일로 봤지. 17일이 될 것이라곤 생각 못해브렀다. 나는 19일 새벽에 튀어 부렀다. 튀고 보니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전화기가 없던 시대였응께.
무조건 서울로 향하다 중간에 생각이 바뀌어 대전으로 갔다. 기차에서 내리니까 검표하는 군인이 명단을 들고 있었다. 일부 수상한 청년들 다 붙잡아 놓고 있었다. 이 상태로 서울 가다가는 잡힐 것이 틀림 없었다. 다시 내려가는 기차를 탔다. 내려가는데 낯이 익은 사람과 서로 눈이 마주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본 사람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대방도 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그는 목포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잡으러 다녔던 형사였다. 그 형사 그룹이 나를 놓고 이리 저리 시위를 했다. 나는 기차가 서기 전에 뛰어내렸다. 내리고 보니 장성역, 내 똥가방은 그대로 버리고 내린 것이었다.
아줌마가 아기 업고 광주 가는 차를 잡고 있었다. 나는 같이 가자했다. 타고 보니 기사가 ‘광주 난리 났다’ 했다. 나는 그래도 가자 했다. 친구 집에 간 후 나는 밤새내 돌아다녔다. 날이 새면 얼굴이 팔려 못 돌아 다닐테니까. MBC가 불 탈 때 마구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때 내게는 시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내 동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찾아 가는 데마다 사람이 없고 마지막으로 문병린 선생 집에 가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의대 앞에 있는 내 동생 경자 집에 갔다. 난리였다. 오늘 경찰이 두 번이나 찾아왔다. 개죽음 하려고 왔느냐 야단을 쳤다. 벽장에 나를 넣어놓고 나가더라. 작은 형님이 오시더라고. “야, 한봉아 지금 너 잡히면 개죽음 당한다. 빨리 빠져나가라”. 형님이 준 양복을 입고 조카를 업은 여동생과 부부행세하고 백운동-남평-나주로 갔다. 21일에는 나주에 있었다. 차량 시위대가 나주 경찰서에서 무기 탈취를 하더라. 그거 보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광주 가는 버스를 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손을 덥석 잡아 몹시 놀랬다. 전남민주청년연합회 지부장인 김남표였다. 그는 차는 위험하니 걸어서 가자했다.
남평까지 걸었다. 가서 후배들을 만나고 사정을 알아보니 도저히 광주로는 갈 수 없었다. 월 27일, 광주가 함락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갈곳이라고는 서울 밖에 없었다.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책을 썼던 철용이 형이 사는 성북구 삼양동 빈민촌으로 갔다. 거기에서는 내가 피난 올 곳은 거기 밖에 없다며 여러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해외 도피를 할 때까지 1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박정희 암살팀에 속했던 정상용과 또 한 친구는 ‘항쟁지도부’(5.26일 아침 형성)로 가부렀고, 박형선이는 예비검속에 걸려 잡혀 가 부렀다. 내가 전흥준 선배 집에서 했던 이갸기 즉 무장투쟁을 해야 하고 전남도청을 장악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후배들이 “자유노트”에 기록해 놓았다. 그 자유노트를 한 놈이 자수하면서 갖다 바쳤다. 하지만 송선태라는 친구가 그건 자기가 작성한 것인데 상상력으로 작성했다 이렇게 둘러대 무사했다. 광주 출신 검사들이 우리에게 정보를 알려줬다. 검사가 내 동생을 통해 ‘당신 형이 잡히면 사형 당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한봉이 잡히면 곧장 죽는다, 잡히지 말라’는 정보를 주었다.
사건수사 결과를 보니 정동년이 내란 수괴가 돼 있더라. 김대중 방문하고 방명록을 쓴 것이 화근이 되었더라. 이렇게 사건이 끝났다, 그런데 내가 잡혀 불면, 사건이 복잡하게 다시 시작된다. 그러면 다시 조사가 시작돼 광주에 남아 있던 그 나마의 운동 역량이 모두 작살난다고 했다. 그래서 해외 도피를 한 것이다.
윤한봉의 증언을 읽고.
윤한봉과 정동년의 증언은 그들의 세상이었던 호 시절에 이루어졌다, 다음 회에 연재하겠지만 정동년의 증언을 보면 정동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윤한봉의 내공에 미치지 못한다. 윤한봉과 5.18의 관계가 1촌이라면 정동년과 5.18은 2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5.18기념재단이 주도한 증언록 “5.18의 기억과 역사 2”에 실린 인터뷰 내용을 전제로 한 판단이다.
윤한봉은 광주1고 11기다. 강진에서 유학 온 처지에 부모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 고교 때 문제아가 되었고, 절에 가서 젊은 세월을 낭비했다. 그리고 잠시 학업에 열중하다가 그만 소영웅심에 사로 잡혀 전문 운동꾼이 되었다. 일단 운동꾼이 되면 그들의 쇠사슬에 얽매어 빠져 나갈 수 없게 된다. 이때 윤한봉은 어차피 빠져나갈 수 없을 바에야 선두주자가 되고자 결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5.18의 기획자요 연출자로 알려진 그가 5.18기간 내내 도피생활을 했고, 그를 따랐던 광주 운동권 주도자들 모두가 5.18을 주도하지 않고 도망했다는 사실이다. 겨우 윤상원, 정상용 등 윤한봉의 추종자들이 광주사태의 종점(5월 25일 밤)에 나타나 “끝까지 싸우자”는 헛 폼을 잡고 영웅 노릇을 했다. 윤상원, 정상용, 골재채취운전기사 박남선, 김종배와 같은 아이들이 5월 25일 밤부터 느닷없이 나타나 영웅노릇을 한 것이다.
앞으로 자칭 5.18의 영웅이라는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겠지만, 결론적으로 ‘5.18 기념재단’이 띄운 5.18영웅들 중에는 5.18 폭동을 지도-지휘한 자가 전혀 없다. 5.18 폭동작전의 꽃은 5월 18,19,20,21일의 폭동이었다. 광주의 영웅들 중에서 이 기간 중에 활동한 영웅은 없다. 이 중요한 기간에 모두 다 초라하고 비겁하게 도망을 했다. 5.18 최고의 영웅이라는 윤한봉도 그랬다.
나는 집요하게 ‘5.18기념재단’이 야심차게 마련한 광주영웅들의 인터뷰 내용을 차분하게 읽었다. 그런데 ‘5.18기념재단’이 초청한 인물들 중에는 5.18의 영웅이 전혀 없었다. 이들은 5.18혁명(?) 기간 내내 도망다녔다. 그리고 5월 25일부터 나타나 영웅이 되려 했다. 매우 치사하고 간교한 소영웅주의자들이었다.
앞으로 이런 치사한 5.18영웅, 자칭 못 배운 영웅들의 인터뷰 내용들을 더 소개할 것이다. 이 모두를 읽은 나는 5.18의 알짜 프로필, 5월 18일부터 5월 21일 사이에 발생했던 눈부신 5.18의 프로필은 이런 쓰레기 같은 광주인간들에 의해 기획-연출 될 수 없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윤한봉을 5.18의 귀재 정도로 숭상한다. 그러나 윤한봉은 대학생 정도의 사고방식에 포로 돼 있었고, 졸병 성향의 소영웅주의에 사로 잡혀 사회를 교란시킨 문제아에 불과했다.
5.18에 한국 측 영웅은 없다. 영웅은 북한에서 왔다. 20사단 지휘부가 광주 톨게이트를 아침 8시에 통과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존재는 5.18영웅들 중에 없다. 300명 정예 공격부대를 형성하여 20사단 사단 본부를 공격한 사람도 5.18영웅들 중에 없었다. 600명이 아시아 자동차에 모여 차량들을 탈취해 가지고, 4시간 동안 18개 시군에 산재한 44개 무기고를 턴 지휘자도 5.18영웅들 중에 없었다. 6회에 걸친 교도소 공격을 지휘한 영웅도 '5.18기념재단‘이 내세운 영웅 중에는 없었다.
내가 허접한 인생을 살고 간 윤한봉을 이처럼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당시 5.18로 영웅이 되고자 하는 광주청년들은 있었어도, 5.18을 진짜로 주도한 인간들이 남한에 없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1) 박형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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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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