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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의거 100년 순국99년을 기린다. -----------김평일
- 내가 대한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노숙하다,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산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안의사께서 만주 여순 감옥에서 처형되시기 하루 전인 1910년 3월25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안의사의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언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안중근 의사는 32세의 일기로 어머니가 손수 지어 보내주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뤼순(여순) 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셨다.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 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두 동생에게 남기신 사적(私的)유언이다. 그러나 5개월 뒤 1910년 8월29일 대한은 끝내 국치(國恥)를 당한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현재 뤼순(여순) 감옥 동남방 야산에 매장되었다고 하나, 감옥의 여러 죄수와 섞여 유해 발굴이 거의 불가능 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세 살 연하이신 안의사를 황해도에서 잠시나마 만나, 함께 나라를 걱정 하시던 백범 김구 선생의 뜻대로, 용산의 효창공원 백범 묘역에 가묘(假墓 빈무덤)만 모셔 지고 있다고 하니, 100년이 되도록 안의사의 유해를 의사의 뜻대로, 독립 대한의 강토에 모시지 못함이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옥중에서 쓰신<동양 평화론>이 미완성이나 후학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을사보호조약 이후 안의사의 민족교육열풍은 눈물겹도록 열성적이어서 교육학 전공 후학들의 연구 테마로 빈번히 회자 되고 있음이 인터넷으로 확인된다. 안의사의 유언 - 학문에 힘쓰고, 산업을 진흥하여,-에서 보듯 교육과 산업을 국기(國基:나라 기반)의 바탕이라 믿으신 듯하다.
의사께서는 1879년 9월 2일 해주에서 순흥 안씨 집안에 태어나셨다. "해동공자"라는 이름을 얻이신 고려조 거유 문성공 안향의 26대손으로, 3남1녀 중 장남이셨다. 몸에 북두칠성을 닮은 7개의 점이 있어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하셨다. 어려서는 한학을 하시다, 아버지를 따라 16세에 천주교 입교,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불어와 신학문 교육을 받으셨다. 이후, 석탄상에 종사하시며, 국체보상운동을 하시다, 을사보호 조약체결에 충격을 받으시고 1906년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1907년에 진남포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설립, 교육에 마음을 두신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가 강제로 정미칠조약을 맺어 황제를 폐하고 대한 군대를 해산시키자,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시고 교단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그 이듬해 최초의 독립군,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으로 총을 잡으시고 누차 실전을 결행하시더니, 독립전쟁의 실현의 일환으로 1909년 10월26일 우덕순, 주도선, 유동하선생의 도움을 받아 동양 침략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총살 하신다.
재판에서 판사는 “살인이 십계명 중에서 대죄”라는 천주교 교리에 위배된 피고의 죄를 교리상으로 추궁하자 -나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적의 괴수 이토를 전쟁으로 총살한 것이다'라고 당당히 밝히고, 오히려 침략자 이토의 15개 죄상을 증언한바 이중 3개항이 대한 동포 교육방해죄(敎育妨害罪)로 교육입국정신(敎育立國精神)을 드러내시니, “교육자 안의사”의 모습이다. -- 동포와 후학을 위해. 예견된 사형 집행을 남기고 안의사께서는 자서전 “안응칠역사”와 미완인 채 끝난 “동양평화론”을 옥중저서로 남기셨다. 옥중유묵도 다수 남기셨으나 주로 담당 간수들의 부탁을 들어준 것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소장하고 있다. 10월 26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안중근 의사 유묵전에 오사카의 료코쿠 대학은 유묵 3점을 대여해주기로 했다하니 안의사 숭모가 국경을 넘는다. 나라에서는 뒤늦게나마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올려 드렸다.
------------------"열린 뜻"지 09년 10월 게제 김평일 시론 終----
안중근의사 의거일지---------네이버 지식 in 인용------
1909년 10월 21일
오전 8시 50분 블라디보스토크 역, 그동안 함께 활동했던 우덕순과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짧지만 긴 여행을 시작한다.
오후 3시 6분 우슬리스크에 도착한 이들은 포그라니치누이 행 열차의 이등차표를 구입, 오후 9시 25분 포그라니치누이 역에 도착하여 독립활동을 지원해 주던 한의사 유경건의 집을 찾아가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의 아들 유동하를 만나 함께 하얼빈으로 향한다.
1909년 10월 22일
오후 9시 15분 하얼빈 도착, 마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김성백의 집을 찾았다. 그는 재 하얼빈 한인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유동하와는 사돈지간. 그의 집에서 의거 때까지 머물며 거사 계획을 짜기로 한다.
1909년 10월 23일
안중근과 일행은 오전에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깎고 사진관에 들러 기념사진을 찍는다. 거사를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다. 오후엔 동흥소학을 찾아 교사이며 블라디보스토크의 신문 대동공보의 하얼빈 지국장을 맡고 있는 김형재를 만난다. 근처 김성옥의 집에 머물고 있는 동지 조도선과도 만남을 갖는다. 안중근은 김성백의 집으로 돌아와 '장부가'를 읊으며 거사의 의지를 다진다.
1909년 10월 24일
아침 일찍 안중근과 우덕순은 걸어서 2~3분 거리인 하얼빈공원에서 산책을 한다. 공원 안을 산보하면서 거사 계획을 세밀히 검토한 후 차이자거우로 가기로 하고 유동하를 제외한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오전 9시에 하얼빈을 출발, 낮 12시쯤 차이거자우에 도착한다. 그 곳에서 역 승무원을 통해 모레 오전 6시에 이토의 특별열차가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1909년 10월 25일
안중근 일행은 오전에 다시 한번 거사계획을 점검한다. 이토가 도착하는 오전 6시라는 시간여건상 날이 어두워 거사의 성공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 우덕순과 조도선이 차이자거우에 남아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안중근 홀로 낮 12시 열차로 하얼빈에 되돌아 간 후 김성백의 집에서 거사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1909년 10월 26일(사건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난 안중근은 새옷을 벗어놓고 수수한 양복으로 갈아입는다. 오전 7시, 그는 권총을 지니고 곧장 역으로 나간다. 이토가 도착할 때까지 안중근은 역 근처 찻집에서 초조하고 긴장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 2~3잔의 차를 마셨다. 오전 9시, 이토 일행의 특별열차는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이토의 도착과 동시에 러시아 군악대 소리와 러시아 군대의 경례소리를 듣고 그는 곧바로 역으로 향한다.
안중근은 이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뒤쫓았다. 이토는 기차에서 내려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영사단이 있는 쪽으로 가고 있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스스로 생각하는 그가 확실히 이토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토로 생각되는 자를 뒤쫓으면서 영사단 2~3명과 악수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러시아 군인들 사이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이토는 오른쪽 가슴부분과 복부 등 세곳에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으며 침착한 어투로 "당했다."고 말했다. 또한 저격을 한 후에도 혹시 잘못 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른 일본인을 더 총으로 쏘아 가와카미 총영사와 다나카 이사, 모리 타이지로가 부상을 입었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고, 몸에 지닌 십자가를 붙잡고 목적을 달성한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렸다.
1909년 10월 27일
오후 4시가 지나 김성백이 집에 정대호와 사촌 그리고 안중근 가족일행이 도착하는 순간 러시아 헌병이 들이닥치고 그들의 신원을 확인한다. 정대호는 순간적으로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를 '누나'라고 했다. 러시아 관헌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김성백, 정대호, 그의 사촌동생 정서우를 연행한다. 안중근을 비롯한 공범으로 총 15명의 한국인이 일본총영사관으로 인도됐다.
1909년 10월 28일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의 검찰관으로 에조부치 다카오가 이 사건의 담당검사로 여순에서 하얼빈에 도착했다. 1905년 11월 17일 체결한 '한일보호조약'에 의거하여 한국인의 보호는 일본 관헌이 행하는 것으로 되어있어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안중근 등을 인계받는다.
1909년 10월 30일
검찰관 에조부치 다카오는 하얼빈 총영사관에서 처음으로 안중근을 취조했다. 통역은 서울의 한국통감부에서 파견된 소노키 스에키가 10월 30일부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으로 촉탁되었다. 취조실에서의 안중근은 전혀 주눅들지 않았으며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편한 표정으로 잡담에 응했다. 에조부치 다카오는 시간을 들여 꼼꼼히 자백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그리고 안중근이 일본 황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 주목했다.
1909년 10월 26일
검찰관 에조부치 다카오는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세명을 취조했다. 그들은 안중근과 암살사건에 대해 전면 부인했고 체포당한 이후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1909년 11월 1일
에조부치 다카오는 안중근 등 9명에게 구류장을 붙이고 오전 9시에 관독도독부의 헌병대에게 신병을 인도하여 여순감옥으로 호송시키기로 하였다. 하얼빈에 남은 김성화, 정서우 등 6명에 대해서는 모두 석방절차를 밟았다.
오전 11시 안중근 등 9명은 헌병대위 니티에이 겐지 등 12명에게 호송되어 하얼빈 역을 출발했다. 열차가 하얼빈 교외로 접어들었을 때 약간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헌병이 안중근에게 말을 걸었다. "너의 아내도 틀림없이 탄식하고 있겠지?"그러자 안중근은 "내겐 아내도 아이도 없다."고 말했다.
한편 하얼빈에 남은 검찰관 에도부치 다카오는 총영사관 취조실에서 참고인 진술을 받고 있었다. '정대호의 누나'라고 칭하는 31세의 여인, 안중근의 아내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몸매에 엄한 추궁에도 시종일관 강인한 모습으로 조금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1910년 3월 26일(순국)
새벽녘부터 하늘이 흐렸고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사형 집행일이다. 동경에서 전해지는 소문으로는 이토 히로부미의 기일이 26일 이므로 반년후인 3월 26일에 집행한다는 것이다.
오전 9시가 지나 두 동생과의 마지막 면회가 있어 동생에게 마지막 유언을 전했다. 이때 안중근은 어머니가 넣어주신 흰 비단바탕의 저고리 상의와 검은 바지와 조선화를 신고 있었다. 안중근은 이윽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교수대가 바라보이는 검시실에 에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서장, 소노키 통역생, 기시다 서기, 오리타 의사, 미즈노?가마타 두 변호사 등이 들어갔다. 마지막 남길 말을 묻고는 두 장의 붓글씨용 종이를 접어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천을 감아 눈을 가렸다. 세 명의 간수에게 안내되어 교수대 위로 오른 안중근은 조용히 3분 정도 기도를 했다.
오전 10시 4분, 목이 밧줄에 걸렸다. 간수가 판때기의 한쪽 끝을 밟자 안중근의 몸은 떨어져 매달리게 되었고 오리타 의사는 10시 15분에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다.
오후가 되어 찬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운구는 마차로 운반되어 여순감옥 동남쪽 야산에 매장되었다.
의거 동지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일생---------네이버 지식 in 인용-----------
진사 안태훈(18세)은 과거에 올라 진사가 되고 조(趙)씨와 혼인하다.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서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1884(6세)
박영효 등의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킨 후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고자 추진한 해외 유학생에 부친 안태훈이선발됐으나, 개화파 정권이 삼 일 만에 무너짐으로써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안태훈도 숨어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신천군 청계동 산중으로 이사하다.한문학교에 들어가 팔구 년간 보통학문을 익히다.
1888(10세)
어려서부터 줄곧 사냥을 즐기며, 학문으로 보다는 장부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뜻을 품다.
1892(14세)
조부 안인수가 사망하자, 생전의 정을 잊을 수 없어 애통해 한 나머지 육 개월간 병을 얻어 심하게 앓다.어느 날 산에서 발을 헛디뎌 절벽으로 굴렀으나, 나뭇가지를 잡고 살아나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기다.
1894(16세)
김아려(金亞儷)와 혼인하여, 이후 아들 둘, 딸 하나를 낳다.사이비 동학당(東學黨, 훗날 일제의 앞잡이인 ‘一進會’의 前身)에 맞서 부친 안태훈이 의병을 일으킬 때,부친을 따라 출전하여 선봉 겸 정탐독립대가 되어 승리하는데 공을 세우다. 그 후 큰 병에 걸렸으나, 두서너 달 만에 소생하여 두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기다.안태훈, 어윤중과 민영준의 모함으로, 수개월간 프랑스인의 천주교당으로 피하다. 이후 성서를 접하고 천주교에 입교한 후, 선교활동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다.
1895(17세)
바른말 을 잘한다 하여 번개입(電口)이라는 별호를 얻다.노루사냥을 하던 중 총기 오발로 총알이 오른손을 관통하는 사고를 겪다.프랑스 선교사 홍요셉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다.
1899(21세)
홍 신부와 함께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고, 수개월간 프랑스어를 배우며 서구문명에 눈을 뜨다. 서울의 민 주교에게 대학 설립에 대한 의견을 말했으나, 묵살당하다. 이 일로 인해 천주교는 믿되 외국인은 믿지 않기로 하고, 프랑스어 공부도 그만두다.
옹진 군민이 경성(京城)의 전(前) 참판(參判) 김중환에게 돈 오천 냥을 빼앗기는 억울한 일을 당해, 안중근이 대표로 그를 찾아가 담판을 짓고 해결해주다.
해주부 지방 대병영(隊兵營) 위관(尉官)인 한원교에게 아내와 재산을 빼앗기는 억울한 일을 당한 친구 이경주를 도와주려 했으나, 도리어 이경주가 옥살이를 하게 되다. 이에 부패한 정부에 환멸을 느껴 개혁과 문명, 그리고 민권자유의 필요성을 절감하다.
황해도에 교인을 사칭한 폭도들이 들끓어 천주교가 박해를 받게 되자, 부친 안태훈은 몸을 피했느데, 그때 심화병을 얻어 수개월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다.
1905(27세)
러일전쟁이 가속화하면서 날마다 신문, 잡지, 각국의 역사를 상고하며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다.
부친과 국내 상황에 대해 상의한 후, 산둥으로 건너가 두루 살펴보고, 상하이의 민영익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려 했으나 만나지 못하다.
상하이에서 만나 프랑스인 관 신부의 ‘이천만 동포와 함께 본국에서 활동하라’는 권고로 진남포로 돌아오다.
12월,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청계동으로 돌아가 수일간 상례를 치르다.
한국이 독립할 때까지 술을 끊기로 맹세하다.
진남포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문명개화와 국권회복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다.
1906(28세)
3월, 청계동에서 진남포로 이사한 후, 재산을 털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무를 맡아 보며 교육사업을 하다.
1907(29세)
재정마련을 위해 평양에서 석탄상을 했으나, 일본인의 방해로 큰 손해를 보다.
국채보상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강제로 정미칠조약을 맺어 황제를 폐하고 군대를 해산시키자,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북간도로 건너가 서너달 동안 인근 지방을 시찰한 후,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하여 청년회의 임시사찰로 활동하며 의거를 준비하다.
엄인섭, 김기룡과 의형제를 맺고 의거를 도모하면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본의 침략에 의한 조선의 참상과 무장투쟁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하다.
한국 최초의 해외 독립군 부대인 ‘대한의군’이 창설되어 김두성, 이범윤이 각각 총독과 대장으로 임명되고, 안중근이 참모중장으로 선출되어, 두만강지역에서 전쟁을 준비하다.
1908(30세)
6월, 두만강을 건너가 함경북도 회령, 종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의병 전쟁을 하다.
전쟁 중 생포한 일본군 포로를 설득하고, 만국공법의 정신에 의해 풀어 주다.
일본군의 습격으로 의병군이 흩어지면서, 산 속에서 동지 서너 명과 함께 약 십이일동안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가까스로 살아나다. 이후 엔치야 지역에 머물다가, 하바로프스크 방명으로 나아가 기선을 타고 흑룡강 상류 수천여 리를 시찰하다.
수찬 등지에서 교육.조직활동을 하며 각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등에 동포들을 대상으로 독립심을 고취하느 글을 투고하다.
1909(31세)
엔치야에서 열두 명과 이후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을 ‘단지동맹’으로써 결의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동공보서를 거점으로 활동을 모색하던 중,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시찰소식을 듣고, ‘이토 살해’를 자원하고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향하다.
10월26일 아침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이후 뤼순감옥에 수감되다.
국내, 러시아령(연해주 일대), 하와이 등지에서 수많은 동포들이 안중근의 변호 비용을 마련하다.
12월,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하다.(이듬해 3월 탈고)
1910(32세)
2월 7일부터 12일까지 관동도독부 뤼순 법원에서 열린 여섯 차례의 공판에서 이토의 죄악과 거사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진술하다.
2월 12일,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나, 항소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하다.
홍 신부의 면회로 옥중 고해성사를 하고, 성제대례 및 성체성사를 거행하다.
3월26일, 뤼순 감옥에서 서른두 해외 치열했던 생을 마감하다.
5월, 만주일일신문사에서 『안중근사건 공판속기로』을 발행하다.
순국 삼 개월 만에 국내외에서 ‘안중근 전기’가 비밀리에 발행되어 읽히다.
첫댓글 우리나라는 훌륭한 인물들과 능력있는 국민들은 많은데, 믿음직한 국가적 리더를 쉽게 만나지못하는 민족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