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숨은 명산 / 선석산] 세종 열여덟 아들들의 태를 묻은 산
월간산 2023. 9. 6
인촌저수지에서 바라본 선석산.
며칠째 30℃ 넘는 불볕더위에 이파리마다 축 늘어졌다. 들판의 축사, 비닐하우스에도 마치 역병이 휩쓸고 간 듯 기척이 없다. 올라오던 길 인촌저수지에서 보이던 것이 오늘 산행 목적지. 오전 9시 30분 도착한 입구 태실 안내소 주차장에는 달랑 차 두 대, 우리가 타고 온 것과 직원 차 한 대뿐이다.
태실 올라가는 돌계단마다 이끼 서려 고색창연한 분위기다. 맞은편 선석산은 물안개 서려 선계에 든 듯, 좌청룡 우백호 뚜렷하고 바람과 물을 감춘 이름난 땅임을 느껴본다. 주봉에서 내려온 한줄기 내룡來龍이 쭉 뻗어 이곳에서 멈췄다. 여기서 정상까지 2.5km 거리. 여름 해는 자글자글 타오르지만 숲속으로 들어가니 땡볕을 가릴 수 있어 좋다. 후텁지근한 날씨 여름풀이 내뿜는 냄새에 이끌려 산으로 오른다.
선석산(742m)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칠곡군 약목·북삼에 걸쳐 있고 북쪽으로 영암산, 남동으로 비룡산과 이어진다. 산 아래 서남쪽 성주군 월항면에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이 있다.
태실 오르는 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선석산은 주 북쪽 28리, 세조의 태를 봉안하였다"고 씌었다. 원래 서진棲鎭·西鎭 산이었는데 선석사禪石寺의 사찰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선석사는 신라 말 의상대사가 세운 것으로 큰 바위가 나와 절 이름이 됐다. 칠곡 북삼 쪽에서 많이 오르지만 이곳 태실에서 되돌아오는 데 5km 정도 3시간가량 걸린다. 호젓한 고샅길, 절집, 태실과 아울러 인근의 한개마을까지 둘러볼 수 있어 좋다.
더운 날 물 한 병 있는지 묻는 친절한 안내원을 뒤로하고 아침 10시경 고샅길 걸어 오른다. 초파리 떼 몰려와 눈앞에 어른거리며 길을 방해한다. 모자를 벗어 흔들어 대도 웽웽거리며 떼거리로 위협한다. 습격이다. 잠시 아스팔트길 지나 소나무, 상수리나무 숲길 인색한 등산 안내판에서 왼쪽으로 들어선다. 세조 때 파괴한 몇몇 태실을 생각하니 지금이나 옛날이나 역사는 이긴 자의 몫이라는 것을 느끼며 걷는다.
세종대왕자 태실.
어렴풋한 산길, 도토리거위벌레
외딴 산길, 그 많던 산행 리본 한 개도 보이지 않고 길도 어설프다. 한때 칠곡 신유 장군 유적지(두만지)에서 비룡·시묘산을 거쳐 정상으로 올랐는데 벌써 10여 년 넘게 훌쩍 지났다. 산에 미쳐 다니던 일을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체력과 용기만 앞세워 얼마나 파란만장했던가?
초파리 떼는 여전히 앞길을 가로막는데 에어 파스를 뿌려대도 잠시뿐이다. 때죽나무 앙증맞은 열매는 저마다 바람에 떨어져 뒹굴지만 우리는 길이 없어 헤맨다. 확실히 숨어 있는 산이다. 대충 어림짐작해 오르는데 무덤이 많다. 죽어서도 후손들에게 세상을 밝히라고 했는지 이 일대 묘지마다 장명등을 세워놨다.
오전 10시 반 어렴풋한 능선길을 살펴보다 계곡 물소리 따라 미끄러지며 내려간다. 이 방향이 아닌 듯하다. 신갈·상수리·서어·작살·때죽·노간주·피나무 숲속으로 흘러내리는 계곡물 받아 마시며 타는 목을 축인다. 길은 없지만 시간은 걸리더라도 올라가면 능선이 나올 수 있으니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문득 안수정등岸樹井藤을 생각한다. 우물에 빠져 목숨이 위태롭지만 쾌락을 좇는 한갓 인간 세상임이랴? 오늘은 길을 잃고도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시고 있으니 포기인가, 초월인가? 스틱으로 거미줄 걷으며 낙엽 덮인 진흙에 푹푹 빠지면서 이쪽인지 저쪽인지 가늠해 본다.
40분가량 밀림지대 헤매다 능선을 찾아 오른다. 앞에 보이는 묘지가 얼마나 반가운지 드디어 이정표(태실입구 0.9·정상 1.6·불광교 3.4km)를 찾았다. 11시경 신갈나무 가지들은 벌써 바닥에 떨어졌는데 도토리거위벌레 짓이다.
태풍이 할퀴고 간 흔적처럼 많이도 떨어뜨렸다. 가지마다 톱질처럼 예리하게 잘린 자국들. 참나무류 가운데 특히 신갈나무 도토리에 어미는 알을 낳고 가지를 갉아 땅에 떨어뜨린다. 일주일쯤 뒤에 알에서 깨어나 싸고 있는 풋도토리를 먹고 자란다. 도토리 한 개 다 먹을 때쯤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 나고 이듬해 번데기·성충이 된다. 이들의 생활사를 보면 섬뜩한 자연생태계에 절로 고개 숙이게 된다.
나무마다 서로 어울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저마다 공간을 차지하며 숲을 이루어 하늘 꼭대기 다 덮었다. 15분가량 지나 들목재 삼거리(영암산 갈림길 2.3·태실입구 1.5·정상 1·불광교 2.8km) 능선길에 닿으니 소나무가 상층목, 왼쪽 아래 칠곡군 일대 농공단지가 눈앞에 들어온다.
바위와 숲이 어우러진 능선길.
국내 참외 80% 생산하는 기름진 땅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땀을 식혀주고 신갈나무 능선길은 차광이 잘되어 온통 그늘숲이다. 시원한 바람과 그늘진 숲은 여름 산행의 또 다른 즐거움 아닌가? 땀을 뻘뻘 흘리며 걸은 후에 찾아오는 산행 쾌감, 그래서 여름 산행은 땀을 흠뻑 흘려야 제맛이다.
까치박달·생강·당단풍·쇠물푸레·노린재·신갈·대팻집·산오리·소나무. 두 팔 벌려 나무들 안아보다 잠시 후 해발 742m 선석산 정상(태실입구 2.5·불광교 1.8·시묘산 3.7·비룡산 2.5·영암산2.8km)에 닿는다. 과거에 없었던 표지석이 새롭게 세워졌고 바위에 새겨진 글자가 멋스럽다.
내친김에 영암산(792m)까지 오르면 좋으련만 한개마을까지 둘러봐야 하니 여의찮다. 성주·칠곡의 경계, 영암산까지 걷는다면 바위와 숲이 좋고 비탈이 가파르지 않아 산책하는 맛도 즐길 수 있다. 멀리 가야산, 코앞에 금오산까지 볼 수 있다.
신갈나무 그늘에 앉아 쉬는데 사방은 숲에 둘러싸여 답답하지만 원추리 꽃이 하늘거리고 나무 사이로 산 아래 저수지가 시원하다. 모자며 옷이며 땀에 절어 모두 젖었는데 쉬는 동안 금세 다 말랐다. 정오 무렵 용바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화가 절품이다. 인촌저수지, 봉긋한 태실, 반듯한 절터 선석사, 그 너머 비닐로 만들어진 육지 속의 바다 같은 강 성주 참외비닐하우스 단지. 이 지역은 일조량이 많고 땅이 기름져서 참외 농사로 연간 수천억 원의 소득, 우리나라 참외 80%를 생산하고 있다.
선석산 정상.
먼데 가야산이 흐릿한 데 골골이 물안개 흘러 다녀선지 시야가 좋지 못하다. 올해 6~7월 오랜 장마로 기습폭우가 쏟아져 전국적으로 쉰여 명이 안타깝게 희생되었으니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기후재앙이 되풀이되고 있다. 뒤돌아보면 칠곡 방향으로 낙동강, 왜관 공장건물, 나뭇가지들이 강줄기를 자꾸 흔들어 댄다.
태실과 태교, 열 달 뱃속이 아버지 하루 낳음만 못하다
10분 지나 소나무 가지 아래 겨우 보이는 태봉 바위. 이곳에 서서 연화부수蓮花浮水의 태실 자리를 살폈으리라. 정식 명칭은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星州 世宗大王子 胎室', 사적 제444호. 세종의 열여덟 왕자와 세손 단종 총 열아홉 개의 태실이 있다. 원래 '다정가多情歌'로 알려진 이조년의 부친 성주이씨 이장경의 묘소였으나 이장시키고 태실을 만들었다. 풍수적으로 호랑이 자궁 위치라는 것. 남서쪽으로 가야산, 북쪽으로 금오산에 둘러싸인 분지 형국이다.
옛날에 백성들은 아이를 낳고 태는 왕겨에 묻혀 마당에서 태웠다. 남은 재는 강물에 흘려보냈다. 그러나 왕가에서는 태는 씻어 항아리에 넣고 기름종이, 명주 등으로 밀봉, 다시 큰 항아리에 담아 명당에 안치했는데 태봉胎封·胎峰, 태실胎室, 태장胎藏으로 불렸다. 주변은 금표로 접근을 제한했다. 세세연년 왕업의 계승을 염원했을 것이다.
태실이 안치된 고을은 조세를 감면해 주거나 군현으로 승격시켜 백성들은 긍지로 여겼다. 태봉이 만들어질 때까지 태실도감胎室都監을 두기도 했다. "스승 십 년 가르치는 것이 어머니 열 달 뱃속에서 기르는 것만 못하고, 어머니 열 달 기르는 것이 아버지 하루 낳음만 못하다."
용바위에서 바라본 풍경, 선석사, 태봉, 인촌지, 바다 같은 강 비닐하우스.
조상들은 신혼 잠자리를 대단히 중요시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때와 장소가 있겠지만 벼락·노기·취중을 경계하고 사당·암괴·묘지·하천 등은 피하게 했다. 이를 무시하고 아무 데나 잠자리 갖는 것을 야합野合이라 했다. 그만큼 마음과 몸가짐을 반듯하게 해야 후손이 번성한다는 것. 전국적으로 인재를 배출한 많은 길지吉地가 있다. 신혼부부 태교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어느덧 불광교 갈림길(불광교 1.2·비룡산 1.8·태실입구 3.1·선석산 정상 0.6km), 앞서가던 일행은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내 골똘한 생각의 영역을 침범했으니 거미줄 걷으며 앞서가라고 한다. 왼쪽이 칠곡, 우리는 오른쪽으로 바로 내려간다.
쪽동백·생강·소나무와 군데군데 바위길 따라 걷는 길, 익살스러운 참외 캐릭터가 붙은 벤치를 지나 바위 지대 12시 30분. 며칠 동안 얼마나 많은 비를 퍼부었는지 계곡의 물소리가 폭포처럼 요란하다. 15분쯤 내려가니 불광교(정상 1.8·영암산 5.1·태실입구 4.3km) 아래, 바위로 쏟아지는 계곡물 소리는 산을 흔들어 놓는다. 땀에 홀딱 젖은 옷, 물이 뚝뚝 흘러내려 계곡물 뒤집어쓰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초파리 떼 웽웽거리며 또 마중을 나왔다.
오후 1시15분 태실 수호사찰이라는 선석사 절집의 한글 주련柱聯에 눈을 떼지 못하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뭉게구름이 드높고 오늘따라 하늘은 쪽빛. 느티나무 고샅길 걷는데 인적은 드물고 풀벌레 소리만 요란하다. 초록 벌레들은 이파리에 매달려 꼼지락꼼지락 흔들고 있다.
선석사.
산행길잡이
세종대왕자 태실 주차장 ~ 갈림길(왼쪽) ~ 묘지(길 불분명) ~ 영암산 갈림길 ~ 선석산 정상 ~ 용바위 ~ 태봉바위 ~ 불광교 갈림길 ~ 계곡 ~ 불광교 ~ 주차장(원점회귀)
※ 왕복 5km·3시간 정도, 주차장 주차료 없음.
교통
경부고속도로 왜관IC(왜관 방면 진행) → 매원사거리 좌회전(김천·구미·성주 방면) → 죽전교차로(성주방면) → 경북과학대 방면 → 인촌 저수지 → 세종대왕자 태실 주차장
※ 내비게이션 → 세종대왕자 태실(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 대중교통 불편
숙식
성주군 성주읍·월항면, 칠곡군 왜관읍에 모텔과 다양한 식당 많음.
주변 볼거리
성밖 숲, 회연서원, 한개마을, 독용산성, 포천계곡, 가야산, 참외 하우스 들녘 등.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