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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묵상글 (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휴식이 아니라 안식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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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휴식이 아니라 안식을
대림 2주 수요일- 2012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여러분은 어디서 안식을 누리고 싶습니까?
어머니의 품?
연인의 무릎?
아니면 누구?
주님은 어떠십니까?
주님께서 안식을 누리러 오라 하시는데 가시겠습니까?
영원한 안식은 물론 주님 안에서 누려야겠지만
지금 누리고픈 안식도 주님인지 묻는 것입니다.
저에 대해서 말씀드린다면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천주교 수도자가 이런 얘기를 하다니 깜짝 놀라시겠지요?
그러나 놀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누리고 있기 때문에 누리고프지 않은 것입니다.
안식을 못 누리기에 누리고픈 것도 아니고,
주님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안식을 누리기에
이제는 주님 안에서 누리고픈 것도 아니라는 얘깁니다.
언제부턴가 성체 앞에서 누리는 안식이 좋았는데
대전에 와서는 더 그렇습니다.
오전 11시경 경당의 햇빛이 드는 창가에 가부좌 틀고 앉으면
최고의 안식이 제게 깃듭니다.
이 안식安息은 휴식休息과 확실히 다릅니다.
휴식은 무엇을, 힘든 일을 잠시 멈추고,
몸과 마음이 잠시 쉬는 정도입니다.
안식은 힘든 것을 멈추는 정도가 아니고,
몸과 마음이 쉬는 정도도 아니고
배가 항구에 닻을 내리듯
주님께 안주하는 것이고,
사랑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피곤을 푸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늘 피곤하고 휴식을 필요로 했던 젊은 날보다
사랑에 잠기고 사랑을 관조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좋습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이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영원한 안식에 마침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만 있다면
저는 그리고 여러분은 성공한 인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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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오늘 <말씀 전례>에서 도드라진 표현은 “주겠다.” 라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이사 40,29)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고 선언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이 벅찬 초대는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곧 ‘참된 안식’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시는 분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분이 선사하는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안식”에로 초대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를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저희와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도와줍니다. 오히려 우리를 북돋아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모범을 보여주는 스승만이 아니라, 함께 걸으시고 동행하시면서, 몸소 우리를 지고 인도하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단지 “길”을 제시하는 인도하는 스승이 아니라, “길” 자체이신 참 스승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 됨”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어 걸으며,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양순하고 겸손하신 마음”(마태 11,29)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필립 2,5).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우리는 그 ‘참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입니다.
주님! 오늘도 짐으로 하여 길을 가오니, 제게는 짐이 은총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가야할 길을 짊어지고 가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주님!
나그네가 배낭을 짊어지듯, 당신은 저를 지고 나르고
저는 당신의 사랑을 지고 나릅니다.
짓누르는 것은 짐이 아니라 제 자신일 뿐,
짐을 지고 가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일 뿐,
당신이 함께 걸으며 저를 짊어지고 갈 뿐,
사랑의 짐을 지고서야, 짐이 되어 업히고서야,
비로소 당신에게로 건너갑니다.
당신의 사랑,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그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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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더군다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더없이 복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가난의 생활이 짐이 되고 힘이 들었으며,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키엘 20,13)을 율법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유다교에는 613개의 계명이 있었는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개 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계명은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1요한5,3). 사랑의 법을 제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스스로 모든 이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주어진 짐이요, 멍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기에 편한 멍에요, 가벼운 짐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은 결코 넉넉한 삶의 편안함에서 오는 무사태평함이나 악과 공존하기 위해 놓여 진 안일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여정도 고달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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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도나에 갔을 때입니다. 형제님 한분이 친절하게 안내 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600번 넘게 세도나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세도나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벨락(Bell Rock)’이라는 산에 갔을 때입니다. 형제님은 가파른 바위를 편안하게 올라갔습니다. 제게는 발을 놓을 자리를 알려 주었습니다. 형제님이 안내 해 주는 대로 발을 놓으니 가파른 바위를 가뿐하게 오를 수 있었습니다. 열 개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숲길을 갈 때였습니다. 형제님은 제게 나무 지팡이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나무 지팡이로 균형을 잡으니 물가에서도 균형을 잡고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멋진 그림이 나오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이 자리를 잡은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모두가 하나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는데도 형제님의 도움으로 꼭 봐야하는 곳을 보면서 알찬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친절한 형제님은 세도나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모두 보내 주었고, 사진을 보면서 세도나에서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70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열혈청년처럼 세도나의 이곳저곳을 다니시는 형제님이 있어서 즐거운 여행이 되었습니다.
저는 8년간 보좌신부를 하면서 4분의 본당 신부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은 제게 사제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은 무척 자유로웠습니다. 제게 스키도 가르쳐 주었고, 매일 동네 산보를 같이 다녔습니다. 엄격함과 질서보다는 자유와 넉넉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자유와 넉넉함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부님은 사제 생활의 중심은 사제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매일 기도에 충실하였던 신부님은 자유를 즐길 줄 아셨습니다. 두 번째 본당 신부님은 합리적이었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수도자와 사목회장과 충분히 협의를 하였습니다. 제게도 자율권을 주었고, 충분히 저의 의견을 들어 주었습니다. 합리적인 신부님의 결정은 겸손함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부님은 겸손함으로 사제생활의 길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세 번째 본당 신부님은 조직적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적재적소’에 신자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안배하였습니다. 성전신축을 위해서 사목회와 성전신축위원회를 분리하였습니다. 본당사목과 성전신축이라는 두 업무를 빈틈없이 추진하였습니다. 전 신자가 함께하는 ‘가족캠프’를 기획하였습니다. 기획분과, 총무, 청소년분과에게 적절한 임무를 주었고, 제게는 가족캠프의 총괄책임을 맡겨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본당과 캠프장을 다니면서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를 보면 하나를 알기도 벅찬데 신부님은 하나를 보면 열은 아는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조직력은 다양한 독서에서 나왔습니다. 네 번째 본당 신부님은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는 말처럼 영성은 깊고, 지식은 넓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셨던 신부님은 성서는 물론 문학, 예술, 건축, 경제에도 전문가 못지않은 깊이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감히 제가 넘을 수 없는 큰 산과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영적인 깊이와 지식의 넓이는 ‘정중동(正中動)’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쉽게 변하는 시대에 큰 바위 얼굴과 같았던 신부님의 영성이 새삼 그립습니다.
본당신부로 8년을 지내면서 보좌신부님들과 지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과연 나는 제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본당 신부님들처럼 보좌신부님들을 대했는지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저는 기도에서 나오는 자유를 보여주지 못했고, 겸손에서 나오는 합리적 결정을 보여주지 못했고, 다양한 독서에서 나오는 조직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정중동에서 나오는 영적인 깊이와 지식의 넓이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했던 신부님들이 모두 사목의 현장에서 잘 지내고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할 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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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태연히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실까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님 삶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 삶의 모습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빌어먹기 일쑤였고, 잠자리 또한 밤하늘의 별을 이불 삼아 잠들기를 반복했습니다. 정해진 거처도 없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스승님이라고 불릴 때도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던지는 돌을 맞으며 경멸과 멸시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한 제자들이 도망가는 모습도 봐야 했습니다. 양손과 발이 못에 의해 뚫리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그런 자신을 하염없는 눈물로 바라보는 어머니를 보셔야 했습니다.
이 삶이 편한 삶이었습니까? 이 삶이 가벼운 삶이었습니까?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편하고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잠시 앉아서 다시 복음 말씀을 바라봅니다. 그러고는 그 말씀 안에서 주님의 환한 미소가 번져 나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미소 말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삶의 멍에가 편하고 가벼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온유와 겸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는 부활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온유와 겸손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은 안식, 즉 평화를 선물합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느님을 믿는 마음은 평화를 선물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삶을 편하고 가볍게 만들어 준다는 뜻입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짐을 편하고 가볍게 만들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님처럼 말입니다.
조금씩이라도
다음 날의 강론을 위해 복음을 만납니다.
매일 아침 직원분들과 아침기도를 하며
성경을 만납니다.
성무일도를 통해 성경을 만나고
이런저런 특강을 위해 성경을 만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을 만납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합니다.
마음에서 멀어지면 몸에서도 멀어진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친해지려면, 가까워지려면 자주 만나야 합니다.
조금씩이라도 자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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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민속학자가 남아메리카 한 마을의 부족 아이들을 불러 모은 뒤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나무 옆에 탐스러운 과일과 맛있는 과자 바구니를 두었으니 먼저 뛰어간 아이에게 그 바구니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모두 출발점에 섰고, 민속학자는 출발 신호를 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누구하나 빨리 달리지 않고 서로 손을 잡고 함께 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구니 앞에 도착하자 모두 둘러 앉아 나누어 먹었습니다.
민속학자는 “누구든지 먼저 간 사람에게 바구니를 다 주려고 했는데, 왜 손을 잡고 달려갔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너도나도 “우분투”라는 단어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 뜻을 몰라서 당황하는데, 한 아이가 “다른 사람이 모두 슬픈데, 어떻게 혼자만 행복해질 수 있나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분투’라는 아메리카 말은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I am because you are)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남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윤리 의식이었습니다. 이 ‘우분투’가 지금에도 울려 퍼져야 하지 않을까요? 혼자 살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있고, 무관심 속에서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결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도 ‘우분투’ 정신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우분투’ 정신이 가득하면 편안할까요? 편안하지 않을까요? 이 정신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히 편안해질 것입니다. 또한 삶이 어렵고 힘들다면서 너무 무겁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기쁘고 행복하다면 가벼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주님께 오라고 하셨을까요?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행복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아마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렵고 힘든 것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편함과 가벼움을 줄 수 있는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우분투’ 정신으로 보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라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은 절대로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하나 되는 진정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밤중에 시골길을 전조등도 켜지 않고 달리면서 뒷 창문으로 밖을 보려는 것이나 다름없다(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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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
루멘 체치스!(Lumen Caecis;눈 먼이에게 빛을!)
-개안開眼의 여정, 사랑의 여정-
“루멘 체치스!(Lumen Caecis;눈 먼이에게 빛을!)”
오늘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을 맞이하여 순간 떠오른 우리 연합회의 모토입니다. “루멘체치스” 라틴어 발음도 명쾌하고 “눈먼이에게 빛을!”이란 뜻도 기막히게 좋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정도의 차이일뿐 우리 사람들은 누구나 무지에 눈 먼 맹인들입니다. “눈먼이에게 빛을!” 말마디에 연이어 떠오른 말마디들입니다. “길을 잃은 이에게 길을!”, “희망을 잃은 이에게 희망을!”, “꿈을 잃은 이에게 꿈을!”바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절박한 소망이자 우리의 선교소명이기도 합니다.
무지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빛을 잃고,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꿈을 잃고 병들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잃고 병들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 모두를 일거에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주님과 만남의 은총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근원적 처방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 하나뿐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의 신바람 나는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대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치유와 구원의 은총을,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언젠가의 “그때”가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이때” 일어나는 치유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루멘체치스, 눈먼이에게 빛을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런 은총의 빛과 더불어 날로 맑고 밝아지는 심안이요 영안이요 그대로 우리 삶의 여정은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 됩니다.
오늘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에서는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을 지냅니다. 루멘체치스; 눈먼이에게 빛을! 이라는 선교소명을 뜻하는 연합회의 모토도 오딜리아 성녀로부터 유래합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성녀는 673년 레겐스부르크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기적적으로 눈이 열려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수녀원의 원장으로 소임을 다하다가 720년경 선종합니다. 이미 16세기 이전부터 성녀 오딜리아는 알자스 지방과 맹인들, 그리고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침내 교황 비오 7세는 공식적으로 오딜리아 성녀를 알자스 지방과 시각장애인 및 눈병으로 고통받은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오늘은 성녀 오딜리아와 더불어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빛을 뜻하는 “룩스Lux”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지닌 성녀 루치아는 313년경 수교합니다. 모진 고문으로 눈알이 뽑히는 형벌까지 받았으나 천사의 도움으로 뽑힌 눈알을 돌려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루시아 동정순교자는 어둠을 밝히는 성녀로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들과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으니 성녀 오딜리아와 너무 흡사합니다.
말그대로 두분 성녀 다 주님의 빛을 발하는 빛의 성녀들입니다. 빛의 성녀인 오딜리아와 루치아 두분의 전구로 우리 역시 희망과 기쁨의 빛이 넘치는, 날로 마음의 눈이 밝아져가는 개안의 여정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개안의 여정에 주님의 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전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몸이 온통 환해질 것이다.”
주님의 등불이, 주님 은총의 빛이 우리 마음을 비출 때 마음과 더불어 온몸도 환해질 것이고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참으로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 세상의 빛으로서 살 수 있게 되니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요! 눈먼 무지의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빛을 선사하시는 주님이요 우리는 날로 맑고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을 살게 됩니다. 우리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동정 성녀들이 주님께 바쳤던 그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순수, 사랑의 초연함, 사랑의 정주 끝이 없습니다.
첫째, 사랑의 기쁨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만날 때 꽃처럼 피어나는 기쁨에, 사랑의 빛에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바로 우리가 대림시기 살아야 할 이런 사랑의 기쁨, 개안의 여정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을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너희는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끝없는 즐거움이 너희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너희와 함께 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둘째, 사랑의 순수입니다.
순수한 사랑으로 빛나는 동정 성녀들이 그 모범입니다. 사랑할수록 순수해지는 마음에, 날로 밝아지는 심안이요 영안이요 지혜의 눈 혜안입니다. 동정녀 축일 때 마다 부르는 저녁기도 후렴의 아름다움에, 은혜로움에 늘 감동합니다. 노래로 부르면 더욱 감동적인 첫째, 둘째 후렴입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순결을 보존하여 찬란히 빛나는 등불을 들고 신랑인 당신을 마중나가나이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오리다.”
주님을 기다리는, 개안의 여정중인 대림시기에 잘 어울리는 기쁨 가득 선사하는 사랑의 고백같은 가사입니다. 그대로 성녀 오딜리아, 성녀 루치아의 주님 향한 순수한 사랑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개안의 여정은 바로 사랑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사랑의 초연함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집착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이런 초연한 사랑, 깨끗한 사랑, 품위있는 사랑입니다. 덧없이 흐르는 세상이 아닌 영원하신 하느님께 사랑의 닻을 내린 동정 성녀들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 공감합니다.
“형제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러해도 안 그런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위선이 아니라 사랑의 지혜, 삶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에 항구할수록 이런 초연한 사랑입니다.
넷째, 사랑의 정주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의 정주는 내적여정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역동적인 정주는 산속의 강같은 삶입니다. 제 좋아하는 산과 강이라는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산속의 강”
동정녀 축일 저녁기도 세 번째 후렴이 바로 사랑의 정주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예전 수도원을 자주 찾았던 떼제 마르코 수사님이 참으로 좋아하며 극찬했던 곡입니다.
“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자리 잡았도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정주의 뿌리를, 믿음의 뿌리를 내릴 때 날로 초연한 사랑의 여정이, 날로 마음의 눈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먼이에게 빛을, 길잃은 이에게 길을, 희망과 꿈일 잃은 이에게 희망과 꿈을 끊임없이, 한결같이 선물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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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무 좋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11,30)
가짐의 멍에를 풀어버리고
베풂의 멍에를 메니
참 편하네요
너무 좋습니다
밀침의 멍에를 풀어버리고
품음의 멍에를 메니
참 편하네요
너무 좋습니다
가름의 멍에를 풀어버리고
이음의 멍에를 메니
참 편하네요
너무 좋습니다
불신의 짐을 내려놓고
믿음의 짐을 지니
참 가볍네요
너무 좋습니다
절망의 짐을 내려놓고
희망의 짐을 지니
참 가볍네요
너무 좋습니다
미움의 짐을 내려놓고
사랑의 짐을 지니
참 가볍네요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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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간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언자는 죄인들의 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노여움으로 제 살은 성한 데 없고 저의 죄로 제 뼈는 온전한 데 없습니다”(시편 38,4).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오, 짐 진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참으로 기분 좋은 무게여! 세상 주인들의 짐은 종들의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줍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기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영성에 영향을 준 신학들
5. 아우구스티누스를 경유한 신플라톤주의:
엑카르트의 영성에서 드러나는 주요 신학적 주제들
2. 복:
액카르트는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의 복이며, 거룩한 “존재”가 만물에 스며들어, 만물을 존재의 수준에서 동등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을 새롭게 뜻매김한다: 인간은 창조성과 자비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베풀도록 운명지어진 복덩어리다. 다른 피조물들도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복을 베푼다. 히브리 성서 야훼계 저자가 그렇듯이, 엑카르트에게도 “삶이 복이고, 복이 삶이다." 삶의 목적은 대지에서 달아나거나 기쁨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복을 다른 피조물과 다른 세대의 인간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3. 만유내재신론: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저기 바깥에” 있는 위격으로 생각하거나 하느님을 “저기 바깥에” 있는 전적 타자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엑카르트의 하느님 담화, 엑카르트의 하느님 의식을 구성하는 안의 신학. 만유내재신론의 신학이다. 이러한 신학은 어디에나 있는 하느님, 맑게 비치는 하느님을 강조한다.(77)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1절: 클뤼니와 수도원의 개혁운동
중세의 가장 중요한 수도원 개혁운동은 클뤼니에서 시작되었다.
아퀴타니아의 공작 빌헬름은 908/910년에 부르고뉴에 클뤼니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9세기에 교회 쇠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수도원의 무방비함과 부자유함 내지는 수도원이 세속과 교회의 권세가들에게 예속됨이었다는 올바른 인식에서 빌헬름 공작은 자기가 창설한 수도원에 대하여 대내외적인 고유한 일에서 자유를 확약하였다. 또 자유로운 수도원장의 선거, 그리고 교구 주교의 재치권으로부터의 면속도 설립 통지서와 교황의 특별한 보호 특권에 의하여 보증되었다. 베네딕토 규칙서의 엄격한 준수, 수도원장에 대한 순명 의무를 첫째로 하는 엄격한 금욕과 전례예식의 특별한 장려는 이 수도원의 정신을 특징지었다. 그것은 다음의 위대한 수도원장들 밑에서 교회 내의 가장 강력한 종교적 힘이 되었다. 그들은 베르노(909∼927), 오도(927∼942), 아이마르 - 942년이나 9488년부터, 954년에 눈이 멀자 그는 마졸로를 보좌로 채용하였다 -, 마졸로(954∼994), 오딜로(994∼1048), 위고(1049∼1109), 베드로 존자尊者(1122∼1156) 등이었다.
후기 카롤링거 시대의 세속화 과정에서, 그러나 오토 시대에도 매우 무관심했던 이 세상과 문화 향락주의에 대한 대형물로서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거리를 제시하고, 세속화 위험에 저항할 과제가 수도생활에 주어졌다. 수도생활은 모든 시대에 자체의 종교적 활동력을 통해 교회의 개혁을 내부로부터 촉진하고, 본질적인 종교적 사명을 위해 필요한 내면성과 영적 자유를 교회에 보증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서구의 수도생활은 신비적 경향을 지닌 동방의 수도생활과는 달리, 전 그리스도교계에 대한 공동책임을 더욱 강하게 지향하였다. 그러므로 클뤼니의 운동도 순수하게 수도생활상의 현상에 머물지 않고, 곧 서구의 역사를 함께 결정적으로 형성하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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