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戰士)의 귀환(歸還)
이순형
오랜만에 찾아뵙고 싶다는 그의 전화를 받고 옛 생각에 잠겨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제치며 눈을 감았다. 큰 키에 여드름 자국투성이인 얼굴에 올백으로 넘긴 곱슬머리의 청년, 25년 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경영하던 회사의 직원이 추천하여 입사했는데, 소개한 사람 말로는 우범지대에서 싸움꾼이었지만 개과천선하여 기능공으로 쓰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혹시 사무실에서 행패나 부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성실하게 살도록 지도하겠다는 직원의 말에 면접을 보았다.
사무실로 찾아온 단정한 모습의 그를 보는 순간 싸움꾼과는 거리가 먼, 밝은 성격의 청년이라서 좋았지만 군대 다녀온 경력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첫 출근하던 날에는 신사복 정장 차림이 기능공답지 않았지만 소개한 직원 말로는 회사다운 회사에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 것이 꿈이었다니 그렇게 이해하자고 마음먹었다. 2년 여를 함께 근무하면서 첫인상처럼 워낙 성실하고 열심히 일해서 모두들 좋아했고 그가 맡은 공사현장은 마무리가 늘 깔끔했다.
그렇게 얌전하던 그가 싸움 실력을 보인 일은 딱 한번 있었다. 젊은 기능공이 많던 우리 공장에서 회식자리의 소주가 여러 순배 돌아갔을 때였다. 젊은 수탉들이 혈기를 참지 못하고 싸움판이 벌어졌다. 덩치와 나이가 비슷한 다른 직원이 고향동네 패거리들을 믿고 시비를 걸었다. 순식간에 주점 마당은 싸움터가 되었는데, 그의 주먹은 전광석화처럼 이리 번쩍 저리 번쩍하며 다섯 명이나 되는 한 무리를 거침없이 두들겨댔다. 분명 혀가 꼬부라질 정도로 마셔댔는데도 어찌 그렇게 정확하게 급소를 가격하는지 말릴 사이도 없이 싸움은 끝나고 말았다. 사장이었던 내가 파출소장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크게 사건화 되지는 않았지만 유치장에서 술이 깬 다음에 그는 필름이 끊어졌었다고 하면서 싸운 사실조차 기억을 못하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후 나의 사업체가 도산하여 그는 다른 회사의 기능공으로 갔고 나도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세상살이에 바빠 가끔 연락이나 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남매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았는데, 지난해인가 그동안 배운 기술로 보일러 수리업을 시작했다는 연락이 왔다.
지난 일요일 저녁, 그가 가족들을 데리고 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그는 내가 따라주는 소주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고기를 구워 아이들 접시에 날라주기 바빴다. 아내에게도 존댓말을 하고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명령조의 잔소리가 아니라 의견을 물어보는 투의 말을 하는 모습에 요즈음 아빠들은 다 저런가 하고 의아해 하면서도 보기 좋았다.
한참 먹어대던 아이들이 배가 부른지 홀을 누비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을 때 그는 하기 어려운 고백을 내게 하였다.
“사장님, 사실 저는 폭력전과 3범이었어요. 그런 사람을 처음 채용해주신 덕분에 오늘의 제가…”
그는 마시지도 않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그의 고백에 나는 비로소 그날 밤의 패싸움 장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최고의 싸움꾼으로 김태촌이 인생의 우상이었다고 한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선후배들이 모두 깡패들이니 ‘죄의식’이라는 뜻은 처음부터 몰랐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가 발바닥이 닳도록 교장실을 들락거리신 덕분이라고 한다. 따로 운동을 배워 무술의 유단자가 된 것은 아니고 전부 실전을 통해 익힌 실력이 천부적 운동신경과 조합하여 거리의 전사로서 명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교도소에 가게 되었는데, 폭력배들에게는 교도소 가는 것이 영예였다고 했다.
별이 세 개짜리 장군이 되어 안양교도소에 들어앉았는데 운동시간에 그렇게 존경하던 마음의 영웅, 김태촌을 만났다. 깜짝 놀랐다. 우상이 이런 곳에 들어오다니. 저렇게 초라한 죄수의 옷은 분명 주먹으로 조직폭력배들 사회를 통일한 장수의 갑옷이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모든 꿈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뭔가 길을 잘못 가고 있다는 회한이 일고, 변호사를 사주지 않는다고 아버지를 원망했던 자기가 얼마나 한심스러운지 며칠을 심각하게 고민했다면서 눈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게 아니라는 생각에 교도관과 상의하여 전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교도소 문을 나설 때는 기능사자격증이 손에 쥐어졌다. 친구들은 다시 돌아오라고 유혹했지만 그에게 악담처럼 들렸다고 하니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돌아온 귀환이었다.
내 인생에서도 작지만 그런 사건이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곧바로 들어간 태권도부. 실력이 붙을 때쯤 동급생들과 어울려 어깨를 흔들며 골목길을 헤매던 불량청소년의 길. 추운 겨울날 친구들 따라 나서 깡패가 다 된 듯 골목길에서 건들거리며 여학생을 희롱하고 있을 때 대입학원에서 돌아오던 동급생을 만났다. 공부에 지친 그의 얼굴을 보면서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것이지? 대학에 안 갈래?’ 누군가 내게 말을 거는 듯이 느껴져 멍한 기분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이러다가 인생이 어떻게 될지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불현듯 친구들에게 인사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실력보다는 행운으로 들어간 대학시절에는 학생회장을 했던 선배가 그렇게 닮고 싶었다. 우리지역 국회의원 뒤를 따라다니며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는 곧 정계의 거물이 될 듯 보였고 확신에 찬 그의 얼굴에는 카리스마가 있어 좋았다. 그 선배처럼 정치인의 길이야말로 내가 나아가야 할 미래라고 생각하며 연단에 선 나를 상상했다. 당연히 마당발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 모임 저 단체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그가 모시던 국회의원은 정계개편에 휘말려 낙마했고 그도 고등실업자가 되었다. 선거가 끝난 후, 선배를 찾아갔을 때는 골방에서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를 비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며칠 동안 소주와 친구하고 있었다. 취한 그의 입에서는 그가 주군으로 모셨던 전직 의원이 자기 뒤를 봐주지도 않는다며 상스러운 욕을 해댔다. 나는 정치건달들의 구역질나는 민낯을 보는 듯하였다. 내가 사회에서 중견직원이 되었을 즈음 그는 사기죄로 큰집에 있었다.
생각이 모자라고 경험이 부족했던 청소년 시절의 강물은 깊고 산은 높았다. 아니 방향도 알 수 없는 사막여행이었다고나 할까. 아무리 천방지축의 청소년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생각이 모자랄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는 추억이 꼬리를 문다. 중년이 다 되어서도 얼굴 붉어지는 짓을 많이 한 듯하다. 이제 뭔가 알만한 나이가 되니 어느새 백발이다. 사람이 두 번 살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첫 번째 삶은 대충 살아보았으니 두 번째 삶은 실수나 방황하지 않고 알차게 살아낼 수 있을 텐데.
“사장님, 어느새 저도 40대 중반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한눈을 팔던 내 눈에는 사춘기의 사막에서 돌아온 거리의 싸움꾼이 귀염둥이 딸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계간 『시에』 2013년 여름호
이순형
경기도 수원 출생. 2010년 『계간수필』로 등단. 여행에세이 『서방견문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