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보리에 시원한 방귀
어린 시절 고향에서는 칠석 무렵 유난히 해가 길었다.
논에 벼는 세벌매기가 끝나서 키가 무릎을
넘고 동네 앞 모정 곁에 기대선 늙은 백일홍 나무는
봉숭아보다 더 붉은 꽃을 피우고 있을 즈음이
다.
햅쌀밥을 먹으려면 아직도 백일홍이 한두 차례 더 피어야 하고 그러자니 두어 달은 족히 기다
려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봄에 거둔 보리와 하지 때 캐 놓은 감자 말고는 먹을 것이 그리 흔한 편은 아니었다
이런 때 풋내가 아직 덜 가신 햇보리쌀에 물을 넉넉히 부어서 강낭콩이나 껍질 벗긴 감자를 얹어서
지어 낸
잘 퍼진 보리밥 한 그릇이면 꿀맛이 따로 없던 시절이다.
어정칠월 한더위에 땀은 흐르고 텃밭에 푸성귀는 넘쳐 나는데 밥상에는 밥그릇 두 개를 마주 덮어
놓은 듯
고봉으로 올라온 보리밥 한 그릇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보리밥은 쌀밥에 비해서 덜 차
지고 미끄럽기 때문에 비빔밥으로 먹는 게 제격이다.
쌀밥은 덩어리로 뭉쳐 다니기 때문에 골고루 비비는 데 힘이 들지만 보리를 적당히 섞은 밥은 밥
알이 각자
달음박질하기 때문에 절반만 노력해도 잘 비벼진다.
보리밥에는 아무래도 청국장이나
된장을 쪄서 비비는 것이 제격이다.
된장에 쌀뜨물을 약간 부어서 매콤한 풋고추 잘게 썰어 넣고
마늘 두어 쪽 다져 넣고 좀 빡빡하게 끓였다
우리 어렸을 적에는 연탄불이 있나 가스 불이 있나 뚝배기에 된장을 담아 솥뚜껑 열고 끓는 밥 위
에 올려 두면
적당하게 농도 조절이 되어서 제격이었다.
강릉 지방에서는 이것을 빡쩍장이라고도
하고 뽁딱장이라고도 한다는데 빡빡하기 때문에 붙여진 재미있는
이름일 것이다.
묽게 끓이지 않고 빡빡하게 끓이다 보니 너무 짤수 있기 때문에 여기다 두부 한 덩이 손으로
조몰
락조몰락해서 넣으면 고소하기도 하고 짜지도 않아서 좋다.
더 싱겁게 하려면 양파를 갈아 넣거나
애호박, 표고버섯, 다시마 그리고 멸치 몇 마리 넣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맛과 영양 만점, 여름 보양식0000 텃밭에 물 주어 가며 연하게 기른 열무를 손으로 부숴 넣고 가
지나물이나 호박나물, 무생채 등 거칠거칠한 나물
두세 가지 넣으면 비빔밥 재료로는 충분하다.
고소하게 먹고 싶으면 참기름이나 들기름 반 숟갈 넣으면 최상이다.
여기다 호박잎을 밥 위에 쪄서 비빔밥을 싸 먹으면 그 맛을 무엇에 비하랴.
동녘에 별이 뜨는 하늘
을 보며 마당에 평상 내놓고 앉아서 매캐한 모깃불 쏘이며 먹을 수 있는 집이라면 무슨
고대광실
이 부러울 것인가?
보리밥은 커다란 뚝배기에 듬뿍담아 둥근 밥상 한가운데 놓는다
숟가락 하나 꽂아 올려놓고 식구대로 둘러앉아 너무 짜면
밥 한술 더 퍼다 넣고, 싱거우면 된장
한술 더 떠 넣으며 땀 뻘뻘 흘리며 먹는 모습을 생각만 해도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인다. 요새 한창인
들깨 국물 곱게 갈아 끓인 머위 국이 있다면 여름 보양식으로도 이만한 게 없을 것이다.
밥이 너무맵다 싶으면 생오이나 맵지 않은 풋고추 굵은 것으로 된장에 찍어서 한 번씩 베어 무는
맛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보리밥 곱삶이는 보리를 두 번 삶아서 밥을 짓는다는 뜻에서 나온말이
다.
보리는 섬유질이 많고 물에 쉽게 불지 않기 때문에 두 번을 솥에 삶아야 부드럽고 차진 밥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타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햇보리는 살이 더욱 단단해서 자칫 어설프게 밥을 했다가는 볼퉁
이 안에서 겉돌기
때문에 그것을 먹고 소화시키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보리쌀에 물
을 넉넉히 붓고 한 번 삶아서 대바구니에 건져 놓았다가 쌀과 함께 다시 끓여서 밥을 해야 제맛이
난다.
요새는 이런 불편을 덜기 위해서 반 조각으로 자른 할맥(割麥)이나 납작하게 누른 압맥(壓麥)도
있지만 누가 대신 깨물어 놓은 것 같아서 꼭꼭 씹는 재미가 올바른 모양을 갖춘 그대로 하는 것만
은 못하다.
보리는 식량 작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성경에서도 멀리 아브라함이 그의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나이 많은 종을 고향 하란에 보냈을 때,
기도의 응답으로 마중 나온 처녀가 낙타에게 먹일 보리가 충분히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보리는 사료나 양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4천 몇백 년
전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보리에 관한 첫 기록은 <삼국유사>에 주몽이 부여의 박해를 피해 남하하였을 때 부
여에 남은 그의 생모 유화가 비둘기 목에 보리 씨를 담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삼국 시
대 이전에 이미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리는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는 겉보리와 껍질이 쉽게 벗겨지는 쌀보리가 있으며 아열대와 온대
지역 어느 곳에서나 허물없이 자라는 것으로 지구상에 가장 광범위하게 재배되는 곡식 중 하나이
다.
보리밥과 방귀
보리밥을 자주 먹으면 방귀가 잦아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경상도지역에서는 무슨 일 좀 벌이려는
데 여의치 않을 때 “방귀 좀 낄라 카니 보리 떨어진다.”는 말을 쓴다.
호남이나 충청도에 비해 논
이 적었던 경상도에서는 밭에 보리를 많이 재배했고 그래서 보리 문디니 보리 깜디니 하는 보리가
들어가는 말이 생겨났던 모양이다.
다른 탈이 없다면 방귀는 장의 운동을 활발하게 해서 변비를 없애는 데 그만이다. 이것은 백미에
비해 식이섬유가 열 배 이상 많기 때문이다. 통보리에는 식이섬유가 21퍼센트, 보리쌀에 11퍼센
트가 있는 반면에 백미는 불과 1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스라엘에서는 아예 보
리가 변비약 대용으로 쓰인다고 한다.
보릿가루로 비스킷, 케이크 등을 만들어 변비 환자에게 먹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다 보
면 보리 음식이 유달리 많다. 거칠게 갈아서 짭짤하게 찐 보리떡이 우리네 가게의 삼립빵 만큼이
나 흔하다. 보리에는 다른 곡식에 비해 식이섬유와 단백질 분해 효소가 많이 들어 있어서 장염,
치질, 대장암 발생률을 저하시킨다.
보리밥은 잘 씹어지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씹다 보면 식사 시간이 길어지고 포만감을 얻을 수 있
다. 쌀과 열량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열량을 과다하게 섭취하는 것을 방지해 준다. 그래서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추천되고 있다. 보리는 스태미나 식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
대 로마의 검투사들이 체력을 위해서 보리를 먹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시골에 농사를 지을 때 한
창 일에 지친 소에게 여물에 보리를 듬뿍 넣어 죽을 쑤어 먹인다. 쌀만 먹인 쥐와 쌀과 보리를 혼
식하게 한 쥐를 회전하는 벨트 위에서 달리게 했더니 쌀만 먹인 쥐는 54분간 680미터를 달린 반
면, 보리와 쌀을 혼식한 쥐는 66분 동안 825미터를 달렸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
보리는 미네랄 덩어리
보리에는 식이섬유의 일종인 베타글루칸이 쌀의 50배, 밀의 7배나 들어 있어서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현저히 떨어뜨린다는 보고도 있다. 미국 몬태나 주립대 로즈마리 뉴먼 교수가 보릿가루로
만든 머핀, 빵, 케이크를 사람에게 매일 3회씩 6주간 먹였더니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평균 15퍼
센트 떨어졌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보리에는 쌀보다 비타민, 미네랄이 훨씬 많이 들어 있다. 칼슘, 아연 등 미네랄함량은 쌀의 각각 1
9배, 5배다. 비타민 B1은 쌀의 10배, 비타민 2는 4배, 비타민 B6는 5배, 나이아신과 엽산은 10배
에 이른다고 한다. 쌀과는 비교가 안 되는 비타민과 미네랄 덩어리다. 보리는 너무 낱알이 잘지 않
고 손으로 만져 보아 부드럽게 느껴지고, 담황색으로 광택이 있는 것이 제대로 여문 것이다.
이런 것일수록 알이 고르고 둥그스름하며 통통할 수밖에 없다. 또 껍질을 너무 깎아 내지 않고 보
리 향이 배어 있는 것일수록 상품이다.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곡식을 만드실 때 보리를 넣은 것은
사람들에게 결코 작은 복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대의 선민(選民)으로 알려진 이스라엘 사람들에
게 가장 중요한 양식이 보리였다.
성경에서는 밀보다 보리가 훨씬 더 자주 등장한다. 가루를 만들어 요리를 하기도 했고 통째로 볶
아서도 먹었다. 다윗왕의 증조할머니인 모압 여인 룻이 남편과 사별하고 홀시어머니를 따라 베들
레헴에 와서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서 나섰던 것이 바로 이 보리 이삭 줍기였다.
보리 이삭을 주우러 갔다가 좋은 남자를 만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고 다윗왕의 할아버지인 오
벳을 낳은 것이 바로 이 보리밭에 얽힌 로맨스였다(룻기 1~4장).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설교
하실 때 하루 종일 설교를 듣느라고 지친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 않으시고 기적을 베풀어 허기를
채우게 했던 것도 이 보리떡이다.
한번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린아이들과 여자들 외에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의 부스러기가 남았으며, 또 한번은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부스러기가 일곱 광주리였다. 기왕에 기적을 행할 바에는 떡 벌어진 잔칫상을 못
차릴 것도 없었겠지만 보리떡을 먹이신 것은 그만큼 보리떡이 허물없는 음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적이 예수 당시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지 우
리 논밭에서는 한 알의 보리를 심으면 그것이 새끼를 치고 여러 개의 줄기가 되어 이삭을 맺을 때
는 몇 백배의 수확을 내는 기적이 매해 봄마다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오천 명이 아니라 지구 상의
수백, 수천만 명이 먹고 살아간다.
요새는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너무 맛이나 색깔만 찾다가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많은데 평소에 골
고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것이 무엇보다 좋은 보약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싶다. 오늘처럼
찌뿌듯한 날 저녁에는 아무래도 보리밥 먹고 방귀라도 속 시원히 뀌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만큼
속 시원한 일이 어디 따로 있던가! 오래오래 씹으며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반딧불이의 추억도 더
듬어 볼 겸해서 말이다.
글/ 전정권/한라산하르방 건강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