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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기다리며
태조는 왕비 강씨에 못지 않게 어느 때나 강씨 소생 두 왕자 중 제8왕자인
방석을 몹시 사랑했다.
어느날 태조는 강씨의 내전으로 왔다가 이날 밤을 거기서 보내게 되었다.
태조는 이때
"나의 뜻을 받아 내 뒤를 이음직한 왕자가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
도 방석밖엔 없는 것 같다."
하고 천장을 바로 보고 있었다.
왕비 강씨는 이 말을 듣고
(왕위의 계승자가 방석으로 낙착될 것도 같다는 말씀을 저렇게 하시니.)
은근히 혼자서 기뻐하였다.
때는 마침 강씨 소생 경순공주(慶順公主)가 개국공신 흥안군(興安君) 이제
(李濟)에게로 시집가려 하는 때였다. 이때 태조는 대신 배극렴(裵克廉)
및 조준(趙浚) 등을 내전으로 불러 놓고
"오늘은 두 대신을 보고도 싶고 또 의논도 하고 싶어서 청한 것이요. 하
물하지 마오."
배, 조 양대신을 둘러 보았다.
"황공하고 또 황공할 따름이옵나이다."
"배정승, 의논하고 싶다는 것은 딴 것이 아니요. 이제는 과인의 뒤를 이
을 세자를 책봉하여야 하겠는데 좀 아는 바를 들려주오."
태조가 이와같은 말로 대답을 구하자 배극렴은
"때가 태평무사하면 적자를 세워 세자를 삼고 때가 어지러우면 유공한 왕
자를 먼저 세워 세자를 삼는 게 현명한 처사인 줄 아옵나이다."
하고 쾌히 아뢰었다.
이때 한데 붙어 있는 전각에 혼자 있었던 강씨는 배극렴의 입에서 이런 대
답이 나오는 것을 듣고 실망한 나머지 부지중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 울
음소리는 바깥 내전안 할 것 없이 들렸다.
이때 배, 조 양대신은 말할 것도 없고 태조까지도 그 울음소리를 강씨의
울음소리로 인정했다.
내전을 물러나려던 두 대신을 좀 더 머무르게 하고 태조는,
"배정승의 세자책봉에 대한 의견을 잘 기억하고 있소. 며칠 후 또 청해서
물을 테니..."
하며 배, 조 양대신을 돌려보냈다.
배극렴과 조준이 가자 왕비 강씨는 다시 내전으로 돌아왔다.
태조는 강씨가 돌아와 자리를 잡자 강씨의 얼굴을 유난히 두루 살피면서
"곤전(坤殿), 배정승과 조정승을 상대로 얘기하는 동안 어디 있었소?"
물었다.
"상감마마 황공하오. 이웃 전각에 있었나이다."
"그런데 눈이 분 것 같으니 웬일이요?"
"눈이 왜 부어요?"
"글쎄요. 왜 그랬을까요?"
"곤전이 모르는 것을 과인이 어찌 알겠소? 바른대로 말을 해보오."
".............."
"곤전! 울었지?"
"뭣 때문에 울겠어요?"
"분명히 운 것을 과인도 아오."
"무엇으로 운 것을 아시었나요?"
"곤전의 목소리를 듣고서 알았소. 울게 된 이유를 감춤없이 말해 보오."
태조가 이와같이 줄기차게 묻자 강씨도 더 이상 감출 길이 없어
"상감마마께서 세자책봉에 대하여 방석왕자를 들어 말씀하신 것을 들은 법
하온데 배정승이 평시에는 적자를, 난시에는 유공한 왕자를 세우는 법이라
고 아뢰는 것을 듣고 그만 실망한 끝에 울음이 터진 것입니다. 상감마마
이를 굽어 살피시와 용서하여 주심을 바라고 또 비옵나이다."
태조는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한참 동안 침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과인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겠다는 말을 곤전에게 말한 일은 없
지 않소?"
"그렇습니다. 신첩에게 직접 언명하신 일은 없었나이다."
"그런데 어떻게......."
"상감마마께서 내전으로 듭시와 '나의 뒤를 이을 자는 방석밖엔 없을 것이
다.' 하시고 말씀한 일이 있어서인가 합니다."
하고 대답해 아뢰었다.
태조는 이때부터 강씨가 자기 소생의 왕자에게 세자로서의 자리가 돌려지
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강씨의 소원이라면 일각 지체
없이 시행해 온 태조는 세자책봉에 있어서도 강씨의 소원을 무시할 수 없
어 배극렴, 조준을 더 한 번 불러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하였다.
이틀쯤 지나서 태조는 또 배극렴, 조준의 참내(參內)를 명하였다. 배, 조
두 대신은 태조의 소명(召命)이 세자책봉 문제 때문에 환반된 것으로 믿고
조준은 먼저 배극렴의 집으로 갔다.
"대감, 태조의 소명이 세자책봉 문제 때문에 내려진 것이 아닐까요?"
조준이 이와 같은 말로 묻자
"그런 것 같소. 그런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걱정이 되오."
"글쎄올시다. 우리가 제일차로 아뢰고 돌아오려 할 때에 무슨 소리를 듣게
되지 않았소?"
"그 소리가 왕비 강씨의 울음소리였음을 아시겠소?"
"알고 있소. 왜 소리를 내어 울었을까?"
"그것은 자기 소생의 왕자는 세자책봉에 참가도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섭
섭한 생각이 나서 운 것 같소이다."
"나도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참내해선 또 무엇이라고 아뢰어야 할까요?"
"별 말 있겠습니까? 제일차에 아뢰었던 것을 더 한 번 아뢸 수밖엔..."
"그러나 그 말이 통해질 것 같이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그와
같이 말하면 왕비 강씨는 이번엔 대성통곡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글쎄 그럴 것도 같애! 어찌하면 좋을까?"
"강씨가 비록 자기 소생 왕자의 책봉문제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실상은 상감의 마음을 사고자 은근히 전심을 기울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상감의 심중, 강씨의 심중을 잘 살펴가면서 어느 정도 타
협으로 나가야 할 것 같소이다."
"타협적으로 나가자고? 어떻게 타협적으로 나가오?"
"실상은 타협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강씨에게로 기
울어지는 것을 말함이요."
이 말에 배극렴은 한참 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가
"어떻게 강씨에게로 기울어진단 말씀이요?"
하고 반문하였다.
"대감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강씨 소생 두 아드님 중에 큰아드님 방번(芳
番)님은 난폭하고 다음 아드님 방석(芳碩)님은 태조를 닮아서 영특한데가
있소이다. 배대감, 이 방석 왕자를 추천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내하여 상감의 뜻을 받들기로 합시다. 그리하는 수밖엔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조준이 이렇게 말하자 배극렴도 이에 동감하고 조준과 함께 참내하여
"왕비마마의 소생 왕자중 방석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시는 게 좋을 줄로 아
뢰오."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는 이를 반가이 받아들였다. 강씨의 마음이 흐뭇해졌을 것은 말할 필
요도 없다. 강씨는 기쁨에 넘쳐 새삼스레 태조 앞으로 나아가 큰 절을 하
면서
"상감마마! 황감하오이다. 신첩은 상감마마의 하해 같으신 은혜로 말미암
아 모든 소원이 성취되었나이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이 감
격은 죽는 순간까지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머금었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모든 것이 다 곤전의 분복에서 생겨진 것이요. 과인에게 그렇게 감사할
것은 없소. 과인도 방석이 세자로 추천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하며 한동안 왕비 강씨를 주시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
"요즘 곤전의 얼굴은 좀 여위어진 것같이 보이니 웬 까닭이요? 세자책봉
문제로 걱정이 되어 그렇소? 이젠 문제가 낙착되었으니 마음을 편안히 갖
고 계시오."
강씨는 이 말에 더욱 감격해서
"상감마마의 거룩하신 뜻을 받들어 마음을 편안히 갖겠나이다. 일개 서민
의 딸로서 장상(將相)의 총희(寵姬)가 되었다가 이제 와서는 임금의 왕비
가 되고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세자의 모비(母妃)가 되게 되었삽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마음이 불편하겠나이까? 이젠 기뻐서 매일 춤이라도 추
고 싶나이다."
정말 춤을 출 듯한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이 소문은 한씨 부인 소생의
네 왕자(여섯 왕자 중 두 왕자가 일찍 죽었음.)의 귀에 들어갔다. 이 때
문에 네 왕자의 마음엔 불평이 자리를 잡게 되어 태조에 대한 태도, 왕비
강씨에 대한 태도가 순평하지 못하였다. 특히 한씨 소생의 제5왕자 방원
의 심사는 말할 수 없이 뒤틀렸다.
태조 2년 8월이었다. 강씨 소생의 왕자인 제 8왕자 방석의 세자 책봉식
(世子冊封式)이 거행 되었다.
이 세자 책봉식은 고 정실부인(故 正室夫人) 한씨 소생의 네 왕자도 참가
하였는데 그들을 들어 말하면 영안대군(永安大君) 방과(芳果), 익안대군
(益安大君) 방의(芳毅),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 정안대군(靖安大
君) 방원(芳遠) 등 넷이었다.
이 네 왕자는 의식이 끝난 후 모두 다 정안대군 저(邸)에 모여 한방에 자
리를 잡았다. 네 왕자 중 정안대군 방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됨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지 않소. 그러나 부왕
(父王)께서 그리하신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대로 인종(忍從)하고 만
것이올시다. 그런데 여러 형님들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네 왕자 중 가장 나이 많은 영안대군은 정안대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
다가
"그렇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됨에 대해선 불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고 나서는 것은 부왕께 대하여 순종하지 않는 불효자가 될 것이므로
나도 역시 순종하고 만 것이다.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을 아시면 우리들을
의심하실 것이다. 이를 생각하고 말 한 마디라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겠
다."
여기에 익안대군 방의가 입을 열었다.
"부왕은 무슨 일이나 엄정하게 처리하시는 어른이신데 어째서 이런 엄정치
못한 처사가 있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알고 싶은데..."
익안대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안대군은 다시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부왕께서 우리의 존재를 무시하신 처사를 하시게 된 것은 강씨 때문이 아
닐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글쎄다. 그러나 부왕께서 그렇게 현명치 못하신 어른이 아니신데... 우리
의 사람됨이 방석 왕자만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겨진 것으로 나는 생각한
다."
영안대군은 이와 같이 대꾸를 하면서 정안대군에게 자중과 자애를 권하였
다.
"점잖은 말씀이올시다. 자중하고 자애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왕께서 강씨의
요염과 교태에 이성을 상실하심에서 오늘의 일이 생겨진 것으로밖에는 생
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어찌 입밖에 낸단 말이냐? 우리가 차라리 못난 사람되는
게 옳지 않을까. 잘못하면 부왕의 위신을 땅에 떨어지게 한다. 그래서
자중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알겠니?"
영안대군의 말은 역시 점잖았다. 괄괄한 정안대군이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잠시 후 안으로부터 술상이 나왔다. 네 왕자는 모두 술상 앞에 마주 앉았
다. 주인인 정안대군은 맨 먼저 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가지고
"큰 형님 먼저 한잔..."
영안대군에게 권하였다.
이와 같이 술잔이 차례차례로 한번 두번 세번이나 돈 후 제각기 자작도 하
고 권하기도 하면서 마실 만큼 마셨다. 비로소 실내는 술바람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어질고도 착해 보인던 영안대군의 말씨도 힘차게 들렸고
또 패기(覇氣)와 담력(膽力)이 사람을 억누르던 정안대군의 힘도 좀 더 굳
세게 보였다. 시간이 흘러 갈수록 실내는 영안대군과 정안대군의 천지가
되고 말았다.
영안대군은 정안대군을 자기 앞에 앉힌 후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가지고
이를 권하면서 말했다.
"우리 전주 이씨가 왕업을 성취케 된 것은 원래 부왕(父王)의 위덕(威德)
에서 생겨진 일이지만 부왕을 도와 이를 대성한 사람은 정안대군으로 생각
한다. 정안대군의 절대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왕업이 성취되지 못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씨조선의 정말 건국공신은 정안대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데 대해서는 나도 불만을 품고 있
다. 그러나 방석도 역시 부왕의 아드님인데 어찌하나? 정안대군이 부왕을
도와 왕업을 대성케 함과 같이 오늘의 방석을 도와 나라를 빛나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정안대군은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형님의 말씀은 정말 현인 군자의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이 방원은 형님
과는 다릅니다. 저는 기회가 오면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그래
야만 국법이 바로 잡혀질 것입니다."
힘차게 대답하였다.
이 말에 익안대군도 회안대군도 찬동하는 뜻을 표하였다.
정안대군은 이와 같이 대답한 후 다시
"형님(영안대군), 또 좀 들어 주십시오. 형님께서는 정도전, 남은 도배를
어떠한 인물로 보십니까?"
"글쎄.......?"
"글쎄가 뭣이오니까? 정도전과 남은은 왕비의 사람이며 동시에 방석의 사
람입니다. 왕비는 이자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자들
은 매일과 같이 참내하여 첩자(諜者)노릇도 하고 또는 고문 노릇도 합니
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됨에 있어 정도전 도배와 왕비 사이에 알쏭달쏭한
얘기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이 자들도 감시하겠습니
다. 형님, 이런 것은 부왕의 존재를 무시 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 저의 욕
심을 채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알겠다. 그러나 자중해야 한다."
영안대군은 이렇게 대답하고 대취하여 눕고 말았다.
그러나 술에 강한 왕자들은 여전히 정안대군을 상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
었다. 그런데 정안대군의 부인 민씨는 친정 오라버니들이 왔으므로 사람
을 시켜 정안대군의 입래(入來)를 청하였다. 정안대군은 입래하라는 말을
듣고
"세분 대군이 계신 동안은 들어가지 못하겟다. 두 장군에게 크게 바쁜 일
이 없거든 좀 기다리게 하여라."
하고 돌려 보냈다.
영안대군이 취면(醉眠)에서 일어나자 두 왕자도 정신을 차리고 귀저준비
(歸邸準備)를 하였다. 그리하여 정안대군은 세 형님 대군을 문 밖까지 나
가 공손히 전송한 후 그 길로 내실에 들어갔다. 내실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부인의 오라버니인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였다. 다시 말하
면 정안대군의 처남들이었다.
"어떻게 이렇게들 왔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이!"
"저희 때문에 세 분 대군이 속히 돌아 가시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것이 아니야. 돌아가실 때도 됐어."
"그러면 안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모이셨던가요?"
"무슨 일은 무슨 일이야!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어서 그 일로 한 번 모였
지."
"무슨 좋은 대책이 세워졌습니까?"
"대책은 무슨 대책이야. 그저 앞날을 정관하기로 했지."
"알겠습니다. 그리하는 수 밖엔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민무구 형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안대군은 다시 말을 이었다.
"두 처남은 방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쎄요, 태조께서 그리 결정하신 것을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끼리 말하는 것일세. 무슨 상관있나? 어디 말해 보게!"
이 말에 장군 민무구는
"방석 왕자를 세자로 봉한 것은 정도에서 벗어난 일로 생각합니다."
쾌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 게 좋을까?"
"그저 되어 가는 것을 정관하십시오그렇지 않으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
겨질 것도 같습디다. 부왕의 감정을 격화시켜서는 안됩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찌하란 말이요?"
"그저 때를 기다리고 계시란 말씀이지요."
"알겠소. 그러면 때만 기다리고 있지."
곁에서 설왕설래하는 것을 듣고 있던 정안대군의 부인 민씨는
"저하(低下)께서 혼자만이 나서시다간 크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아무리
오늘날 부왕 어른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좀 가만히 계시는 것이
득책일 것입니다."
정안대군의 심사를 가라앉히고자 애를 썼다. 정안대군은 부인의 말을 듣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그런데 두 장군은 오늘의 왕비를 어떻게 보오?"
또 물었다.
큰처남인 민무구 장군은
"그 분은 미인 왕비, 유덕한 왕비, 현숙한 왕비라고 칭송을 받고 지냈지
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장군도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겠군!"
"글쎄요? 왕비 그 어른에게서 무슨 특별한 단점(短點)을 발견하지 못한 이
상 무던하신 어른으로 볼 수밖엔 없지요."
"알겠소. 그런데 이번의 세자책봉은 누구의 잘못에서 생겨진 것으로 생각
하오? 부왕(父王)의 잘못에서 생겨진 일로 보오? 그렇지 않으면 왕비의
간청에서 생겨진 일로 보오?"
무구 장군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는 그 잘못이 부왕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대의 영걸이신 태조를
위하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러면 전 책임을 부왕께 돌리는 말이구료."
"그렇게 생각하셔도 할 수 없지요. 남정북벌 싸움에서 그토록 영명하시던
태조께서 그렇게 마음이 약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 어른의 유약하신 마
음이 오늘의 일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태조와 같은 천
하의 대영걸도 여자의 요염, 여자의 색향, 여자의 교태 앞에서는 별 도리
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글쎄? 이젠 부왕과 왕비에 대한 얘기는 그만 두기로 합시다. 그러나 나는
때가 오면 방관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은즉 이를 살피고 좀 도와주기를 바라
오."
정안대군이 이와 같이 말하자 민무구, 민무질은 정안대군과 그의 부인 민
씨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