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69
8월1일[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17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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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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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fx4B3cDsJw
(박상호 요한마리아비안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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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스라엘의 역사가 곧 나 자신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행진 중 하느님과 모세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참으로 은혜롭고도 흥미롭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절친에게 말씀하시듯 모세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모세 역시 주님을 아버지나 스승처럼 대하며 수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모세가 느꼈을 감정이 얼마나 황홀하고 감사했을까요?
두 분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를 통해 우리 인간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분,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신 분, 천대에 이르도록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거듭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토록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충실성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의 호응은 영 시원찮았습니다. 틈만 나면 불평불만하고 투덜거렸습니다. 수시로 주님께 반기를 들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배은망덕, 배신과 반역을 거듭했습니다.
아무리 주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총애받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그런 모습 앞에 주님께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채찍을 손에 드셨습니다. 쓰라린 당신 가슴을 부여안고 이스라엘을 벌하십니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트리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노에 더디신 분! 통곡하며 울부짖는 이스라엘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벌하시는 마음을 거두시고, 다시 한번 그들을 회복시켜주시며,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간택과 총애-배신과 반역-진노와 징벌-용서와 회복의 반복이었으며, 이는 또한 오늘 우리 신앙인 각자 안에 반복되어온 역사입니다.
지난 제 신앙 여정을 돌아보면서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곧 나 자신의 역사로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자비의 주님, 분노에 더디시고, 빠른 용서의 전문가이신 주님께서는 결핍 투성이요 고통 덩어리인 가련한 나를 가련히 보시어, 징벌을 내리시다가도, 즉시 마음을 바꾸시어 자비를 베푸십니다.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며 기다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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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I1XlMjSz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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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반드시 누군가를 낳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해설하십니다. 밀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뿌린 씨이고 가라지는 사탄이 뿌린 씨입니다. 밀은 하느님 자녀들이며 가라지는 악마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모방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하느님을 모방하거나 악마를 모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사람은 세 부류입니다. 두 부류 중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가리옷 유다처럼 완전히 악마의 자녀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 있고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선택한 이들이 존재합니다.
내가 어느 쪽에 속한지는 나 자신만을 보아서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이들도 다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고 여겼습니다. 더 쉽게 알아볼 방법은 타인에게 어떻게 가르치느냐입니다. 자녀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부모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뱀의 자녀가 되고 나서 한 행동이 무엇일까요? 자기 행동을 아담도 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지를 보면 내가 누구의 자녀인지 명확히 드러납니다.
히틀러는 집착하는 부모에게서 자랐습니다. 특별히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을 좋아했고, 권위적이었으면 난폭했습니다. 히틀러의 어머니는 그 집 가정부였으나 결국 알로이스의 세 번째 부인이 됩니다. 아버지는 성적 때문에 허리띠로 히틀러를 때렸고 히틀러는 오기로 그 맞는 숫자를 세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아버지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억압 때문인지 나중에도 미대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엔 독재자가 되어 그림 수집에 몰두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미술품 수집을 위한 특수부대까지 창설하여 가장 먼저 그림을 약탈하였습니다. 유럽 1,000여 곳에서 약탈한 미술품 중 발견된 것만도 500만여 점이 되었고 그것을 본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데도 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아이를 만들고 있는지를 살폈어야 합니다.
현재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에서 전설이 되어가는 선수가 있습니다. 오타니 쇼헤이입니다. 키 193cm, 잘생긴 외모, 투수와 타자에서 모두 메이저리그에서 정상을 찍고 있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며, 검소하고, 거기다 인성까지 뛰어납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벌써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고 치켜올리고 있습니다.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이라고 불리는데, 사실 만화에서도 저렇게 완벽한 주인공이 있으면 욕을 먹을 정도입니다.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습니다.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이치로처럼 한국을 도발하기보다는 겸손하게 좋은 선수들이 많은 팀이니
방심하면 안 되겠다고 상대도 배려할 줄 아는 인성을 지녔습니다. 싸인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진 물건을 다 내려놓고 사인을 해주고 경기장에 담배꽁초나 휴지가 있다면 남이 버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다 줍습니다. 심지어 1루로 나가다가 쓰레기가 있자 그것을 주워 자기 주머니에 넣고 출루하기도 하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부모가 어떤 인성을 지녔는지 궁금해집니다. 오타니는 현재 일 년에 800억을 번다고 하는데 어머니에게 매달 100만 원씩 타서 쓰고 그것도 쓰지 않아 매달 저축한다고 합니다. 혹시 우리나라 어떤 연예인들의 부모처럼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을까요?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파트타임 알바를 하고 아버지는 공장 근로자입니다. 오래된 시골집을 고쳐드리거나 새로 지어드린다고 해도 마다하고 부모는 자신들이 번 돈으로 살아갑니다. 자녀에게 손을 벌리기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일을 하실 거냐고 어머니에게 물었을 때 어머니는 “너한테 업어달라고 할 수는 없지!”라고 대답했고 아버지도 “아들이 성공했다고 해서, 아들에게 밥 먹여달라고 할 수는 없지!”라고 했습니다.
오타니의 형제들도 오타니의 돈을 전혀 건들지 않고 월세방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벌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일 자체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는 부모님에게서 야구 자체를 사랑하는 오타니라는 열매가 맺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낳아서 세상에 파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파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과 명예와 쾌락이 행복이라고 가르치고 파견하겠고 어떤 사람은 검소함과 겸손과 절제가 행복이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입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도 모범으로 가르칠 것입니다.
저도 길에 떨어진 쓰레기가 남이 버린 행운이라 생각하고 줍는 버릇을 키워보려고 합니다. 성당 안에 떨어진 것들도 줍지 않았던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주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탄생시키는 우리가 됩니다. 내가 어떤지 보면 주관적일 수 있으나 내가 낳는 사람들을 보면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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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36-43: 추수 때에 가라지를 추려내어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세상이라는 밀밭에는 선인과 악인이 현재는 서로 섞여 살아가지만, 밀밭도 추수 때는 밀과 가라지가 따로 추려지듯이 밀과 같은 선인이나 가라지 같은 악인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준비하라고 말씀을 하신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여기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소관은 아니다. 그것을 가리는 작업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야 한다.
밀과 가라지가 싹 트고 자랄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엄밀히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는 좋은 밀일 수도 있기에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전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쉽게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웃을 이러한 모습으로 판단하고, 쉽게 뽑아버릴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내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순간 나 역시 가라지가 된다. 쉽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심판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다.
우리가 모두 가라지가 없는 집안,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각자가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매일 우리의 마음의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고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판단보다도 지금, 이 순간 충실한 삶으로 언제나 좋은 밀알로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 또한 내가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한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나, 다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즉 좋은 밀알로 변화될 수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노력하는 삶을 원하신다. 항상 깨어있는 삶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완전한 자는 없으며 완전을 향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는 자들이다. 항상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통하여 좋은 밀알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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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직업(職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을 보면 “생계를 위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계속 종사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직(職)은 벼슬을 뜻합니다. 벼슬은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직(天職)이라고 말합니다. 옛 어른들은 위에서 벼슬을 거두기 전에는 함부로 직을 바꿀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업(業)은 내가 선택하는 일을 뜻합니다. 급여가 좋거나, 처우가 좋으면 더 좋은 업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일하다가 귀농하여 농촌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골프장에서 일하다가 식당에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업은 필요에 따라서 바꿀 수 있고,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평생 같은 일을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지만 요즘은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얼마든지 일을 바꿀 수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같은 업종의 일로 바꾸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새로운 업종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업을 바꾸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개발과 경험이 중요합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도 있습니다.
최근에 ‘직’을 걸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직’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삭탈관직(削奪官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던 일”이라는 뜻으로 대단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직을 걸겠다고 했지만 직을 거는 경우도 거의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직이란 본인이 도박하듯이 걸고 말고 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을 함부로 하면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보기에도 어색합니다. 예전에 집안의 어르신들이 ‘사제직(司祭職)’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제의 직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에 함부로 그만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의 기도와 정성이 함께 했기 때문에 함부로 그만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사제의 직분을 내려놓는다면 이 생에서는 어렵게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을 그만둔 것에 대한 ‘보속’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사제의 직분이 거룩하고 소중하다는 의미였습니다.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듯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예수님께서 부르신 12명의 제자는 배반은 했었을지라도, 두려움에 숨었을지언정 ‘직(職)’을 버리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유다도 뉘우쳤지만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전승은 다른 제자들은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였고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성모님을 모셨던 요한 사도를 제외하면 다른 사도들은 모두 순교로서 주어진 직분을 다하였습니다. 역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책 「교회사」에서 12사도의 순교 내용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교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는 그리스에 가서 전교하다가 아카이아의 파트라이에서 X형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12사도 중에 가장 먼저 순교한 것으로(사도12, 1~2) 기록되어 있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칼로 목이 베여 순교했다고 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팔레스티나와 이집트, 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군중들로부터 곤봉과 방망이로 매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필립보는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의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가서 전교하다가 참수를 당해 순교했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고대 이란에서 전교하였고, 인도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창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마태오는 유대아를 순회하다가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교 중에 참수 당했다고 합니다.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유다 타대오는 페르시아에 가서 전교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 대신 12사도에 들어온 마티아는 카스피아 연안에서 박해를 받고 콜키스에서 돌에 맞고, 참수 당했다고 합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복음을 전하다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복음을 전하다가 길에서 선종하였습니다. 사도들에게, 사제들에게 그 직은 그만큼 거룩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받은 세례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심으신 ‘밀’이 될 것입니다. 행여 두려움 때문에, 욕심 때문에 주님을 배반했을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우리는 가라지가 아니라 밀로 거듭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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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7-43)
‘가라지의 비유’는, 밀밭의 가라지처럼 살다가는 심판 때에 멸망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하고, ‘좋은 씨’로 살아서 구원을 받으라는 권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심판 때에 누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면 어떤 결과가 될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결국 구원과 멸망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씨,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면서,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라지, 악한 자의 자녀들’은 41절에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생활을 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죄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는 말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요한 8,44)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욕망대로 사는 것은 스스로 악마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을 떠나서 악마의 자식이 되는 것 자체가 큰 죄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마태 23,33) ‘독사의 자식들’은 ‘악마의 자식들’이고, ‘가라지들’입니다. “어떻게 피하려느냐?”는, “피할 길이 없다.”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위선자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라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7-9)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은,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 말을 적용하면,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훈계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구원하시던 분이 완전히 변해서 죄인들을 처벌하신다는 것은 아니고, 구원하는 일을 하실 때의 자비와 사랑은 심판 때에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심판은 처벌하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심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 전에 회개와 정화를 위한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지금은 그 나라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이고, 그 나라는 마지막 그날에 완성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종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그날이 되면 완성됩니다. 심판도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그날이 되면 최종 선고가 내려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와 정화를 위한 시간’은 바로 ‘지금’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씀들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말씀들이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말씀들입니다. 정화는 예수님께서 하시지만, 회개는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동안 가라지처럼 살았더라도 회개하면 밀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밀과 같은 사람으로 충실하게 살고 있다면, 끝까지 그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도 회개입니다. 만일에 자만심에 빠지고 교만해지면, 가라지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잘 새겨듣고 실천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에는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이고 자비이고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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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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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의인들은 해처럼 빛날 것이다.”
모세와 함께 움직이는 지파들은 진영을 만들어 마치 군대와 같은 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 하느님을 만나는 대신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만남의 천막을 칩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만날 일이 있으면 그 만남의 친막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면 온 이스라엘 백성은 각자의 천막 어귀에서 모세가 천막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곤 했습니다.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가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 천막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 모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며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 ‘야훼’를 선포하십니다.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끓고 하느님을 경배합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사십일 주야를 지내면서 빵도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에 빠졌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트립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아라. 그러면 네가 깨뜨려 버린 그 처음 돌 판에 새겨져 있던 말을 내가 새 돌 판에 다시 써 주겠다.” (탈출기 34장 1절)
모세는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돌 판 두 개를 깎아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두 개의 돌판에 기록합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 하느님과 친구처럼 가까웠던 인물은 없었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야의 한 산에서 삶을 마감했을 때 신명기 저자는 이러한 말씀을 남깁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기 34장 10절)
주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또 ‘가라지 비유’를 들어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잘 자라나는데, 생각지도 않게 원수가 가라지를 흩뿌리고 갑니다. 좋은 땅에서 밀과 함께 가라지가 자라는 것입니다.
집주인은 종들에게 수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좋은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우겠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오시자 제자들은 가라지의 비유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께서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라고 설명하십니다.
수확 때에는 세상 종말을 말하고 일꾼들은 하느님의 천사를 말하는 것이라고 또한 주님께서 설명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세상 종말에 주님의 천사들이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울 것이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불구덩에 던져질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오 복음 13장 43절)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둠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창세 1,3-4)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이 있었듯이 좋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가라지를 단으로 묶어 불에 태우심으로 악인을 지옥불로 던지시는 것입니다. 빛으로 싸여 있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고는 세상에는 선한 사람과 더불어 악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악인들이 있는 세상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 말을 나누던 모세의 얼굴이 하얗게 변화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좋은 땅에 좋은 밀에서 성취됩니다.
우리는 때로 현실이 힘겹고 악으로 기울어지는 듯한 현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디에서든 자신의 중심을 잡고 빛의 세계,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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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자애와 심판>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기 33장 11절)
모세와 주님의 관계는 매우 각별했습니다. 광야에서 아론과 미르암이 모세를 시기했을 때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와 말하고 ~~ 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민수기 12장 7절-8절) 하고 말씀하실 정도였지요.
모세는 충직함과 겸손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도 그에게 당신 마음과 계획을 열어보이십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하고 노래하듯, 경외심은 하느님의 자애를 부릅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이처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모세는 우리에게 큰 희망이 됩니다.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기 34장 8절)
주님께서 모세에게 자비와 자애라는 당신 얼굴을 드러내시자 모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땅에 엎드려 간청합니다. 금송아지 사건 후 하느님께서 실망과 분노로 백성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이렇게 반복해서 빌고 또 빌며 함께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
사실 백성이 우상 숭배에 떨어졌을 때 모세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요. 이런 경우에는 대개 죄지은 이들과 자신을 분리해 스스로는 결백하다고 주장하기 일쑤인데 모세는 달랐습니다.
"저들의 죄악과 저들의 잘못"이 아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이라는 표현에서는 죄를 지은 백성과 자신을 동일화하면서 그 죄를 자신이 함께 떠안고 가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립니다.
무죄하신 분께서 세상의 죄를 대신 지시고 스스로 가장 비천한 죄수의 신분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그분의 희생 제사는 죄인들과 하나로 취급당하기를 꺼리지 않으시고 성부 앞에서 "저희"의 범주 안에 모든 죄인을 끌어안으신 겸손과 자애의 결과입니다.
복음은 '밀과 가라지 비유'의 해설 부분입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13장 40절-42절)
예수님 입에서 무시무시한 심판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끝까지 기다려 주시고, 죄에 떨어지게 만드는 약함을 이해해 주시며,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서고, 언제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모세가 죄를 지은 백성을 위해 주님께 그토록 간절히 애원하였듯, 성부 하느님 앞에서 인류를 떠안고 당신을 죽음에 넘기신 예수님이시지만, 다가올 심판의 때를 유야무야 건너뛰지는 않으시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모호하고 미지근하게 선과 악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는 우리를 위협하고 겁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너무 늦지 말기를" 바라시는 염려의 뜻으로 들립니다.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오 복음 13장 43절) 이어지는 내일 미사의 제1독서를 미리 보면,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주님과 그토록 친밀한 시간을 보낸 뒤 빛나는 얼굴로 산을 내려옵니다.(탈출기 34장 29절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의 빛나는 얼굴'이지요.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분을 마주하는 이들이 그 빛을 반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와 악의 유혹을 벗어버리고 고통과 시련의 도가니를 거친 영혼이 하느님 자애로 맑고 순수하게 변모되어 갑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영혼은 찬란한 빛 안을 거닐며 빛이신 분과 함께 빛이 되어 갑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뿌리신 좋은 씨앗들이지요. 이 본성 안에서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영글어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날이 맑은 빛을 더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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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의 끝에 서면>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 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인생의 끝에 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지나 봅니다.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아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이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 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그 열매를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알아들은 만큼 삶의 모습도 맑고 밝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에 좋은 씨앗인 하늘나라의 자녀 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는 악한 자의 자녀로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지혜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지혜4,8-9)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먼 훗날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알곡을 만드는 것은 오늘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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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0년 그룹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이 청소년을 위한 텔레비전 공익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여러분처럼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습니다. 버스 기사도 되고 싶었고, 매표소 직원도 되어 보고 싶었어요. 한때는 경찰관과 군인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하버드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절망하지 않았지요. 대신 꿈을 바꾸었죠. 심할 때는 일 년에 일곱, 여덟 번 꿈을 수정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꿈이 지닌 힘을 믿고 그것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도전하는 거예요.”
큰 공감을 가져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윈의 말처럼, 꿈을 간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도중에 꿈이 변경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꿈을 아예 갖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해도 안 돼. 이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편하고 쉬운 일만 할래. 다 귀찮아. 왜 내게는 갑부 부모님이 안 계실까?’ 등은 꿈이 꺾여 있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에는 ‘새로움’으로 나갈 동력이 전혀 없지요. 심지어 새로운 것을 보고도 전혀 새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관심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매번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느끼려면 우리 역시 새로움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은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맞습니다. 나의 꿈에서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복음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죠. 그래서 우리 중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구원의 길에 들어서길 바라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원수인 악마가 뿌리는 가라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악마의 유혹에 빠져서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이 있게 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갔다고 주님께서 “너는 유혹에 넘어갔으니 이제 가라지다. 지금 당장 뽑아버리겠다.”라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종말이라는 수확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고 하십니다.
세상 종말이 언제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빨리 회개해서 좋은 밀의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새롭게 변화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새로움을 자기의 꿈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꿈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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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마태오 13,36-43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마음껏 사랑하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한없이 착하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더없이 아름다우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끝까지 의로우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더욱더 부드러우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나날이 나아지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아낌없이 나누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정성껏 보듬으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목숨 바쳐 살리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니
한결같이 참사람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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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벌도 사랑이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
하느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분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분이 없을 겁니다. 열심한 신자라면 더더욱 하느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심은 용서하심으로 드러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한 신자라도 하느님은 용서도 하시지만 벌도 내리시는 분임을 믿지 않을 수 있고, 특히 벌은 하느님의 자비와 너그러우심과 반대되는 거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탈출기의 주님은 용서하시는 분이 당신이시고, 벌을 내리시는 분도 당신이시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자비하시기에 벌을 내리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 사람은 어찌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벌도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미움 때문에 벌 받았거나 내린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경험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서도 반대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정말 사랑하는 부모의 경우 사랑하기에 벌을 주지 않습니까?
참사랑의 부모는 죄와 잘못을 계속 놔두면 자기 자식이 잘못될 것을 알기에 벌을 줘서라도 그것을 고치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죄와 잘못을 계속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고 망치는 것일 겁니다.
요즘 잘못된 자식 사랑 때문에 교사들이 학생을 벌하지 못하게 하고, 벌주는 것을 사랑이 아니라거나 편애라고 공격하여 문제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우리 어른들은 비록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매를 대고 벌을 줘서라도 자기 자식을 잘 가르쳐달라고 선생님께 청했는데 요즘의 일부 부모들이 그 반대의 행위를 하는 것은 대단히 미성숙함입니다.
그것이 다 자비와 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물론 미움과 분노 때문에 체벌을 가하거나 편애해서는 안 되고 그런 면에서 학생 인권 조례도 필요하지만, 스승이 자기 자식을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교육해주기를 원한다면 사랑과 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꾸고 스승의 사랑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탈출기의 가르침은 용서도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지만 벌도 하느님의 자비라고 가르치는데,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면, 벌주시는 하느님에게서 더 큰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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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전쟁>
- 주님의 전사, 영적승리의 삶 -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7,14)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러하듯 제 매일 강론이 성장하는 겨자씨이자 성숙시키는 누룩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8월 첫날입니다. 7월의 달력을 넘기는 순간 8월 달력의 첫날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텅빈 한달이 하루하루 채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 8월 첫날처럼 신선한 감격으로 매일 선물같은 하루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1989년 7월 11일, 사제서품 후 시작된 매일 미사에, 매일강론을 죽는 그날까지 하는 것이 유일한 바람입니다. 광야와 같은 미국의 뉴튼 수도원에서 한동안 지낼 때 살아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은 공동전례시간과 공동식사시간 둘 이었습니다. 살아 있음을 서로 확인하며 위로와 평화를 얻는 시간이었고 여기서의 계속되는 수도생활에서도 똑같습니다. 여기에 하나가 추가되어 저는 날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강론을 쓰면서 살아 있음을 확인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위로 향하는, 편해지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어제 저녁식사시 원장 부재인줄 알아 그 자리에 앉아있던 부원장 수사가 원장이 오면서 불야불야 아래로 연쇄적으로 자리를 옮기던 두 형제의 모습과 제가 오지 않는 줄 알았는지 제자리에 앉으려다 아래로 내려 앉는 형제의 모습을 순간 포착하면서 느낀 생각은 윗자리를 향하는 것이 대부분 본능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전 맞은 편에 앉아있던 바오로 수사가 선종한 이후 그 자리는 저절로 다음 순서의 형제가 자리를 채우니 세상을 떠나면 깨끗이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의식적으로, 자발적으로, 즐거이 위의 높은 자리보다는 아래의 낮은 자리를, 편함 보다는 불편함을 선택해야 함을 배웁니다.
삶과 죽음은 함께 갑니다. 예전 산티아고 순례시 마을 한복판 성당 주변의 공동묘지가 삶과 죽음의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하는 듯 싶어 편안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세상을 떠난 그 많은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매달 생미사와 더불어 연미사를 봉헌하는 어느 자매의 지극 정성의 노력에 늘 감동합니다. 그분에게는 산 분들이나 죽은 분들이나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분들을 자주 기억하며 하루를 경건히, 최선을 다해 살아감이 죽은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죽은 분들에 대해 너무 무례하고 소홀한 현대인들입니다. 며칠 전 받은 병고로 고생중인 수녀님의 편지글 일부입니다.
“비와 더운 날씨에 골목마다 길옆마다 쌓여 있는 냄새나는 쓰레기 치우시는, 환경 미화원님들의 가족과 생존을 위해서 수고하시는 모습에서 그분들의 고된 삶을 느낍니다. 그분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신부님, 저는 요즈음 나이듦의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약해지는 변화, 저하되는 면역력...안과, 치과, 이비인후과, 관절, 통증등으로 병원 출입이 일상화되었고 약이 한보따리입니다.
-예수의 작은 자매 올림.”
매일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믿는 이들은 주님의 평생 전사입니다. 결코 전의를, 투지를 잃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젊어서는 공부와의 전쟁, 중년에는 일과의 전쟁, 노년에는 병마와의 전쟁입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그 빛나는 모범이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 탈출기의 모세입니다. 두 분을 통해서도 평생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배웁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를 펼치는 순간, 끊임없이 영적전투중인 모세의 삶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했고, 성서와 교회의 모든 성인성녀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치열한 영적전투에 영적승리를 성취했던 분들입니다. 죽어야 휴식이고 살아 있는 동안 휴식은 없었고 죽는 그날까지 계속된 병고등 온통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고통과 시련에 압도되지 않았으며 내적 위로와 평화, 희망과 기쁨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17세기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윤리신학의 대가 알폰소의 생애가 참으로 치열한 영적전쟁이었고 91세까지 장수하셨으나 마지막 20년동안은 심한 류머티즘으로 극심한 병고를 겪으셨지만 영적승리로 끝난 생애였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의 설립자이자 고해사제들과 윤리신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고해시 항상 부드러운 태도로 신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성인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악습에 깊이 빠져들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가가야 한다. 고해신부는 죄가 남긴 수많은 상처를 돌보아야 한다. 그는 풍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중에 영적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만남과 인내와 심판입니다. 날마다 수시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거룩한 영적 휴식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하루 시작전 일찍 일어나 2-3시간 걸쳐 강론 쓰는 고요의 시간이 주님과 만남의 휴식시간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안식, 바로 예수님과 모세의 생존 비결이었습니다. 날마다 저녁에는 외딴곳에 홀로 물러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의 관상시간을 확보했던 예수님이요, 오늘 모세와 그 백성들에게는 그 영적 쉼터가 바로 만남의 천막이었습니다.
다음 묘사가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가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 천막 어귀에 머무르고,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 구름 기둥이 천막 어귀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 섰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모세처럼 우리도 주님의 친구가 되어 다정히 대화를 나누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모세 앞을 지나시며 당신을 선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이런 자비하신 주님을 만난 모세는 만남의 천막에서 주님과 함께 밤낮으로 사십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했다 합니다. 모세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인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 복음의 가라지 비유에 대한 설명은 예수님이 아닌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정말 평생 치열한 영적전쟁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죽어야 끝나는 밀들의 가라지들과의 전쟁은 하늘 나라의 자녀들과 악한 자의 자녀들과의 전쟁을 상징합니다. 분명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밀과 가라지, 빛과 어둠,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밀이고 가라지인가는 판단은 일단 보류하고 악한 이들에 대한 영적 승리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종말 심판은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아버지께 맡기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최후 심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최후 심판이자 구원을 상징하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늘 깨어 삼가고 인내하며 하루하루 본질적 삶의 깊이를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 분발하여 심판을 두려워하고 구원을 희망하며 지극한 인내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의 심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의인들의 구원입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참으로 깊이 경청하여 분명히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에게 좋은 휴식을 주시고 영적전의를 새롭게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창공의 빛처럼 빛나고 백성들에게 의를 가르치는 이는 영원무궁토록 별과 같이 빛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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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13,40)
<내버려 두어라!>
오늘 복음(마태13,36-43)은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들을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13,37-40.43)
예수님께서 왜, 가라지를 뽑지 말고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고 말씀하셨을까? 왜 선(선인)과 악(악인)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 되도록 내버려 두실까? 제자들의 생각대로, 지금 당장 뽑아내야 되지 않을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이 말씀을 두 측면에서 바라봅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마음에서 바라본 측면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마음에서 바라본 측면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탈출34,6) 라고 선포되고 있듯이, 악인이 돌아와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마음이요,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회개의 기회이지 않을까?
또 하나의 측면은 악을 통해 선을 바라보고, 선으로 나아가는 측면입니다. 고통 앞에서 나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듯이, 고통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듯이, 악과 함께 공존하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고, 때문에 악이 우리를 선으로 이끄는 도구가 아닐까?
이 두 측면에서 가라지의 비유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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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7aqq_FmkR_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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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 43)
뜨거운 8월
익어가는
믿음의 팔월
첫날입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을
찾아 나서는
알폰소 성인의
새로워진
삶입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으며
사랑의
길을 틉니다.
넘어서야 할
편견과 모순을
끊어냅니다.
복음의
기쁨으로
다닌 길에서
만나게되는
사랑의 또 다른
기쁨입니다.
하느님 사랑에는
이와 같이
한계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이며
공동체가
됩니다.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복음에 비추어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안이하고
편협한
해석의 함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맑고 깨끗한
믿음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은
알폰소 성인의
삶처럼
찾아가는 과정
이 모두가
복음입니다.
너를 찾아가는
길이 곧 나를
찾는 길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시련은 인내를
저항은 극복을
두려움은
투신으로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낯설고
두려운 세계가
실은 우리를
부르시는
복음의
가장 뜨거운
초대입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중요합니다.
알폰소 성인의
삶처럼
인내가 필요하고
열정을 쏟아내는
소명이 필요합니다.
꿈꾸는 가슴이
또 다른
가슴을
울립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살피듯
사람을 살피는
안목이 열리길
기도드립니다.
알폰소 성인의
수많은
저술들을
통하여
이 시대에
살아있는
언어들을
새롭게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길
바랍니다.
인격이 복음이고
복음은 나눔과
배려로 깊어지는
생활의 실천입니다.
생활의 실천가이신
예수님을 따릅니다.
실천이
함께하는 곳이
가슴의 말씀을
듣는 거룩한
소명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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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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